0036 / 0060 ----------------------------------------------
붉은 머리
“네가 나랑 달리기를?”
그 말에 듣고 있던 학생들도 술렁거렸다. 안나도 내게 귀를 대고 속삭였다.
“꽃돼지, 샤브리나 학교 달리기 선수얌. 괜찮겠음?”
“나도 빠르거든. 그보다 사람들이 보는데 떨어져 봐.”
그렇게 응수하자, 안나가 안 그래도 두툼한 입술을 삐죽 내밀더니. 날 안은 손을 풀며 뒤로 물러났다.
가슴의 영압이 사라져갔다.
다행이다.
난 코웃음 치는 샤브리나를 바라보았다.
“하시겠어요?”
“어이가 없어서. 좋아. 무슨 자신감인지 모르겠지만, 그래 줄게. 그리고 지면, 앞으로 안나랑 만나지도 말고, 여기 공터에도 나오지 마. 내가 운동하는데 거슬리니까.”
“좋습니다. 저도 조건이-.”
“그리고, 하나 더. 네 아가리를 한 대 힘껏 때리게 해줘.”
“네?”
샤브리나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오늘 널 때리지 않고서는 못 베기겠거든. 물론 네가 이겼을 때도 날 때리게 해줄게. 이기면 말이지만.”
난 대답 없이 샤브리나를 바라봤다.
이렇게 나오시겠다.
“여자를 때리기에는 그렇고. 이기면 제 부탁 하나 들어주시죠.”
‘여자를 때리기에 그렇다’는 건 거짓말이다.
솔직히 그딴 거 신경도 안 썼다. 당장에라도 달려들어 떡갈비로 만들어버리고 싶었다.
단지, 주위 군중들에게 내가 이 무례한 여자를 얼마나 인격적으로 대하고 있는지 어필하고 있던 거다.
그리고 굳이 때리지 않더라도, 샤브리나의 기세를 꺾어버릴 방법은 많으니까.
“풋. 꼴에 남자라 이거야? 맘대로 해. 안나. 넌 이거 받고 앉아있어.”
샤브리나가 지팡이를 바지에서 꺼내 안나에게 던졌다.
“알겠어여~.”
“너도 지팡이를 안나에게 줘. 그리고, 그 장갑. 마법 장갑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그것도 벗어.”
“알겠습니다.”
순순히 벗어서 안나에게 넘겼다. 그런데, 안나가 지팡이와 장갑을 잡는 게 아니라, 내 손을 포개 잡았다.
뭐 하는 건가 싶어 안나의 얼굴을 봤는데, 씨익 웃더니 윙크했다.
......
이 아가씨 진짜.
“아, 돼지! 빨리 안 해?”
그 모습을 본 샤브리나가 화를 내며 소리쳤다. 돼지라니. 지금 사람들이 보고 있는데 아주 막 나가는구만.
안나랑 대체 어떤 사이기에, 이렇게 흥분하는 거지.
내가 손을 빼니, 그제야 샤브리나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군중들에게 소리쳤다.
“혹시, [감지]마법 가능하신 분?”
“샤브리나~. 나도 가능한데에?”
“네가 뭔 짓 할지 어떻게 믿고. 저리 빠져봐.”
“쳇.”
안나가 짐짓 삐졌다는 듯 고개를 획 돌리더니, 돗자리로 가서 털썩 앉았다.
샤브리나는 무시하며, 주위 군중들을 돌아보았다.
“저 가능해요.”
“이번 대결 심판 좀 부탁드릴게요.”
“저야 좋죠.”
재미난 구경거리에 잘 끼었다는 듯. 여학생이 들어와 나와 샤브리나의 마력을 감지했다.
둘 다 이상이 없는 걸 확인한 뒤.
샤브리나와 옆에 자리를 섰다.
“저기 학생들 옆에 나무 있지? 여기서 뛰어가지고, 저 나무에 먼저 손을 찍는 사람이 이기는 거야.”
대략 거리는 150M? 200M 정도 되는 건가.
난 알겠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재빨리 상태창을 켰다.
「육체 능력 5배 부스트를 사용 하겠습니까? (300 포인트 사용. 3분 적용.)」
( Y / N )
창을 열어놓고, 신호를 기다렸다.
묘하군. 갑자기 판이 깔려 사람들의 이목이 쏠리자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지는걸 걱정한 건 아니다.
애초에 B+로 운동 재능이 높기도 하고, 며칠 새에 하지 근력이 많이 늘어났다. 거기에다가 5배 부스트. 그걸 쓴다면 분명, 내가 놀랄 만큼 폭발적인 속력을 낼 것이다.
그보다 무대 경험이 없는 나로서는 이목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앞으로는 이럴 기회가 많을 테니 흔해지겠지.
옆을 바라보니, 샤브리나는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며 아직도 나를 비웃고 있었다.
저 웃음.
단번에 없애주리라.
“시작 할게요.”
그 말과 함께 심판의 지팡이 끝에서 빛나는 나비가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난 재빨리 손을 움직여 부스트를 적용했다.
「육체 능력 5배 부스트를 적용되었습니다. ( 적용 중 0:02;59 )」
「남은 포인트는 2220 포인트입니다.」
온몸에 힘이 돌았다. 근육에 탄력이 붙었다. 양팔을 크게 벌리고, 당장에라도 튀어나갈 것마냥 하지에 힘을 줘, 총알처럼 장전했다.
펑-.
하늘에서 나비가 터지는 순간.
샤브리나가 선수답게 타이밍에 맞춰 먼저 튀어나갔다.
그녀의 등이 보였다.
늦을세라 나도 다리 근육을 폭발시켜, 앞으로 튀어나갔다.
그 순간.
다리가 땅에 닿지 않은 느낌이 들더니.
앞서 뛰어가던 샤브리나가
뒤로 훅 밀려났다.
경악한 표정을 지으며 말이다.
나도 놀랐다.
대포알처럼 튀어나가 진 거다.
어찌나 빠르게 튀어나갔는지, 바람을 가르느라 얼굴 살이 파르르 떨렸다.
“꽃돼지가...... 나라써......?”
“뭐야 저거!”
“깜짝이야.”
쾅-.
‘이럴 줄이야.’
난 땅에 다리가 닿자마자, 속도를 줄이며 선선히 뛰어갔다.
너무 압도적으로 이겨버리면, 성가신 소문이 돌 것 같아서였다. 샤브리나도 승복 안 할 것 같고.
난 뒤를 살짝 돌아봤다.
내가 천천히 뛰자, 당혹으로 물들었던 표정이 진정되더니.
따라잡을 수 있겠다 생각한 것인지,
기를 쓰고 달려왔다.
난 속도 조절을 하며 그녀를 바로 뒤쪽까지 붙게 하였다.
“으-. 으으으-.”
샤브리나가 이상한 신음까지 내며, 온몸에 힘을 다해 달렸다.
옆을 바라보니, 새빨개진 얼굴로 눈까지 감은 채 필사적이었다.
난 그녀가 살짝 앞서가게 하여줬다.
“오오오오~.”
“역시, 이렇게 되는 건가.”
“딱 봐도 육상하는애잖아.”
역전극에 주위 학생들이 신난다고 소리 질렀다.
“꽃돼지 힘 내여~!”
나무가 눈앞까지 왔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난 다시 속력을 내어 달려갔다.
바람에 또다시 얼굴이 파르르 떨리며, 시야가 번졌다.
샤브리나의 등이 가까워지더니,
이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으읏......! 후우-. 으으으으!”
그러자 샤브리나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바라보며, 가쁜 숨을 뿜었다.
난 더욱 빠르게 달려 그녀와 거리를 확 벌리고.
나무를 쳤다.
“와아아아!”
“맙소사, 저 몸으로 저렇게 날렵해?”
“어떻게 역전한 거야?”
주위 학생들이 소리를 지르고 난리가 났다. 샤브리나를 바라보니 무릎에 손을 얹고, 믿을 수 없다는 듯 땅만 바라보며 숨을 고르고 있었다.
“후우-. 후우-.”
나 역시도 숨이 차올랐지만, 아까 아티팩트 실험할 때 했던 체력회복 5배 부스트 덕에 금세 진정할 수 있었다.
그렇게 고개를 들고 샤브리나를 내려다보는데. 갑자기 뭔가가 날아와서, 내 등에 찰싹 달라붙었다.
몰캉-.
“꺅! 돼지!”
안나가 붙었던 거다.
가슴과 함께.
“자, 잠시만.”
“멋있어쪄!”
“잠시 떨어져 봐.”
샤브리나가 그 모습을 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달리기에 진 것이 충격이 큰지 시선을 다시 내리고 땅만 바라보며, 숨만 골랐다.
“야, 쟤 학교 육상선수라는데?”
“진짜 그런데도 졌어?”
“아니, 저 조교가 무척 빠른 거였지.”
“그래도 선수인데 진거잖아.”
학생들이 소곤거리는 게 들려왔다. 그러자 샤브리나의 안색이 더욱더 안 좋아졌다.
나야 좋기야 한데.
충분히 즐겼으니 상황을 소화시켜야 했다.
“여러분, 간단한 시합을 지켜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샤브리나가 육상선수인 것처럼, 저도 예전에 육상을 한 적 있었습니다. 그걸 안 샤브리나 학생이 한번 같이 달려보자고 한겁니다.”
“아, 그런 거였어?”
“하긴 조교 채용 조건이 높잖아. 소문처럼 하급 마법사이기만 했을 리가 없지.”
“에이, 시시하네. 난 또 뭐라고.”
학생들은 이제 흥미가 가셨다는 듯 자리를 비우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자리 비웠다 생각해서 난 샤브리나에게 다가가 말을 했다.
“샤브리나님은, 저랑 같이 가시죠.”
“뭐?”
“아까 약속했지 않습니까. 제 부탁 하나 들어주시기로.”
“...... 뭐할 건데.”
“그건 가서 말하겠습니다.’
“이상한 짓 하기만 해봐.”
“그런 거 안 합니다.”
“꽃돼지. 난 이상한 거 해도 괜찮은 데에~.”
“넌 여기 있어. 둘이서 일 좀 보고 올 테니까.”
“으응. 시져~.”
그러더니 안나가 얼굴을 등에 바싹대고 비벼댔다.
이젠 대놓고 끼 부리네.
문제는 역시, 나한테 통하고 있다는 거다.
“그만 좀 떨어져 봐.”
몸을 마구 좌우로 흔들어 대자. 안나가 등에서 떨어졌다.
“우우-.”
삐졌다는 듯 입술을 삐죽 내밀고선, 내게 야유했다. 엄지를 밑으로 내린 채 손을 마구 흔들며 말이다.
뭐 이런......
“풋. 농담이에여. 꽃돼지. 나중에 봥~.”
내가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고 있자, 피식 웃더니 손을 살랑거리며 말했다.
[정상인이 안 꼬이는구만.]
그건 아서, 너도 마찬가지야.
어쩔 수 없지.
이게 내 운명인 것 같으니.
“일단, 장갑하고 지팡이 맡겼던 거 줘야지.”
“아~ 참. 여기여~.”
난 장갑을 끼고 지팡이를 로브 품 안에다 집어넣었다. 그러고 있는데, 안나가 또다시 내 귓가에 바싹 붙어 속삭였다.
“팔찌 필요하면, 일 보고 여기로 나와여. 나 여기 있을 테니까.”
그 말과 함께 다시 윙크했다.
갑작스러운 숨결에 얼굴이 헤벌레하게 풀릴 뻔했다.
난 표정을 겨우 숨기고,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다.
안나라는 여자애가 마음에 들고 아니고를 떠나, 팔찌를 빌려줄 의사가 있으니 나오기로 한 거다.
“이제 가지?”
“그러죠.”
난 샤브리나를 데리고 학교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육상복 위에 로브를 입은채로 내 뒤를 따라오며 투덜대었다.
“어디 갈 건데?”
“따라와 보면 압니다.”
갈 곳은 하나였다. 자율 실습실.
샤브리나와 엘레인을 처음 만난 그곳이었다.
난 도착하자마자 그녀를 안에 집어넣고 문을 잠갔다.
“왜 문을 잠가?”
“널 보호해주려는 거니 걱정하지 마.”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그보다 말이 짧다?”
“말 길이 같은 거 신경 쓸 때야? 내 부탁이나 어서 들어줘. 자, 무릎 꿇어.”
“뭐?”
“무릎 꿇고 사과해. 이제까지 있었던 일 다. 손도 싹싹 빌고.”
“내게 뭘 꿇으라고?”
어이가 없다는 듯 미간을 찡그리는 샤브리나를 보며, 그간 쌓였던 화가 폭발해 소리를 질렀다.
“무릎 꿇으라고 이 썅년아! 아무 데나 침을 찍찍 쳐 뱉고 다니는 더러운 년이 무릎은 쉽게 못 꿇겠나 보지?”
“이 새끼가 뭐? 보자 보자 하니까. 내가 네말을 듣고 가만히 있을 줄 알았어?”
그러면서 자신의 로브에 있는 지팡이를 잡고 내게 겨누려 들어 올리고 있었다.
[티타우라노의 권능]
난 재빨리 영창해. 샤브리나가 지팡이를 들어 올리다 놓친 것마냥 바닥에 떨어트렸다.
“앗?”
샤브리나가 당황해서 떨어진 걸 잡으려 몸을 숙였다.
난 그것을 보며 한쪽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가만히 있을 줄 알았냐고?
안 그럴 줄 알았어.
또 이러길 바랬고.
“꺅!”
난 샤브리나의 머리채를 움켜잡고, 고개를 젖힌 뒤.
“캬악- 퉤!”
얼굴에 침을 뱉었다.
============================ 작품 후기 ============================
선추코 감사합니다.
01.
'마력' 재능은 재능 강화가 되지 않는 항목입니다.
19화 내용과 27화 후기에 관련 설명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