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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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머리

                                                      

 난 다시 운동하러 공터로 왔다.

 그러자, 익숙한 인영이 날 알아보고 다가왔다.

 “돼지~!”

 안나가 뛰어와 찹쌀떡처럼 달라붙었다. 샤브리나가 없는데도 이럴 줄이야. 얘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설마, 아까 일로 호감이라도 생긴 건가. 

 그건 말이 안 되는데.

 “좋아. 팔찌 빌려준다고 했지?”

 “으응~ 쫀득쫀득~. 쫀득쫀득~.”

 “야야.”

 목적은 내 몸뿐이냐.

 난 몸을 좌우로 털어, 턱살을 만지는 안나를 떨어트렸다.

 “꺅!”

 “잠시, 떨어져 있어 봐.”

 “흐응~ 싫은데에~.”

 “......”

 안나가 입술을 혀로 핥으며, 요염하게 다가왔다. 단숨에 나와 그녀 사이의 공기가 야릇해졌다.

 샤브리나가 안나보고 문란하다고 했나. 

 지금까지 행동거지를 보면 확실히 그래 보이기는 하다만.

 그렇다 해도 유혹하는 대상에 나까지 포함되어있다고?

 “네가 붙으면, 대화가 안 되니까 그러지 말아봐.”

 “왜? 돼지. 나 의식하는 고야?”

 안나가 손을 맞잡고 스트레칭하듯 쭉 아래로 뻗자, 그녀의 가슴이 터질 듯이 모여졌다.

 아아, 의식돼.

 겁나 돼.

 “그보다. 팔찌 빌려주겠다고?”

 “흐응.”

 내가 말을 틀자, 불만인 듯 입을 비죽이며 말이 없더니. 잠시 후 입꼬리를 올리며 말을 이었다.

 “조아~. 빌려줄겡. 그 대신 날마다 ‘나한테’ 와서 받고, 다 쓰고 나서도 ‘나한테’ 직접 반납해야 함.”

 ‘나한테’에 힘을 주어 강조했다. 얼굴을 보자 이건가?

 정말 나한테 왜 이러는 거지. 이해가 안 되었다.

 목적이 뭐야.

 “그 정도로 성가시게 하면서까지 필요한 물건은 아닌데.”

 “나 보는 게 성가시다구?! 이, 돼지! 돼지! 돼지! 돼지!”

 손가락으로 내 턱살을 마구 찔러왔다. 아니, 그런 말이 아니었는데. 이제 진짜 성가셔졌어.

 “애초에 네가 어디에 있는 줄 알고 만나러 다니라는 거야.”

 “전서구를 넣으면, 되잖아~. 에잇!”

 내가 알면서도 그러는 줄 알았는지, 안나가 턱살을 찔러오는 손길이 더욱 거세졌다.

 [학교 안은 마력으로 이어져 있어서, 우편함에 전서구를 넣으면 상대방에게 보낼 수 있어. [이동마법]처럼 말이야.]

 “아...... 그래?”

 연락할 방도가 있었구나.

 하긴 그런 게 없을 리가 없지.

 애초에 사건 터지자마자 교장에게 엘레인 아버지에게 연락 온 적도 있었고 말이야.

 아서의 인간관계가 무척이나 협소한 탓에 그런 사회적인 도구가 있는지도 몰랐었다.

 “혹시, 한 번도 안 사용해봤던 거 임?”

 “......”

 내가 멍청한 표정으로 있자, 턱살을 만지던 손을 멈추고 의아한 얼굴로 물어보았다.

 대답을 안 하자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였는지, 입꼬리를 올리며 환하게 웃더니. 

 “그럼, 나랑 첫 경험이네?”

 끈적한 눈빛과 함께 말을 이었다.

 뭐, 이런......

 “그렇다 해도, 매번 너한테 받아가고 그러기에는-”

 “그런 건 걱정 하지 마셈. 연락만 주면 내가 여기 나올 테니.”

 “뭐?”

 “주물주물-.”

 “네가 왜?”

 난 턱살을 만지는 안나의 손을 저지하며 물었다. 그러자 그녀가 한쪽 입을 보조개가 보일 정도로 웃으며, 당연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애인 만나러 오는데, 이 정도가 뭔 수고임?”

 “누가 애인-.”

 “누구랑 사귀든, 내 마음이라면서여~. 꺅! 부끄.”

 “아니, 그 이야기는 이런 이야기가 아니-.”

 “뭐임? 내 가슴에 정신을 못 차리더니, 안 닿고 있으니까 이러기야? 이 변태! 변태! 변태! 변태!”

 “야야. 내 말 좀. 아, 그만 만지고. 말 좀 끝까지 들어.”

 계속 턱살을 만지는 안나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러자 안나가 움직임을 멈추고, 굳은 것마냥 내 얼굴을 바라봤다. 그녀를 바라보며, 잠시 생각했다.

 날 따라서 여기까지 나온다는 수고를 한 다라.

 정말인 것인지, 또 나온다 해도 얼마 동안 그럴 것인지 모르겠다만. 단순하게 생각하면 확실히 호감의 표시는 맞을 거다.

 하지만, 며칠간 이 세계에 살면서 별일이 다 있다 보니 그 ‘단순하게’가 안되었다.

 이전 세계에서 실수했을 경우 틀어지거나. 헤어지거나. 따돌림당하며, 욕 좀 먹었던 수준이었다면. 이 세계는 까딱하면 목숨까지 위협당하니까.

 사람과 사람 간의 사이가 눈앞에 보이는 게 다라면 얼마나 좋을까. 

 솔직히 이렇게 이쁘고 성적인 매력이 풍만한 애가 모를 수 없을 정도로 좋다며 달라붙는데, 나도 날 좋아한다고 단순하게 믿고 싶었다.

 이 여자애는 목적이 뭘까.

 아니, 목적이 없더라도 나뿐만 아니라, 다른 남자한테도 꼬리 치며 다니는 것일 수도 있다. 이 애인 운운하는 것도 나와 같은 거대한 물고기를 자신의 넓고 넓은 어장에 담아가려는 것 일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나쁠 게 없어.’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싸한 리스크가 없었다.

 체력 회복 능력을 150%향상시켜주는 아티팩트도 대여해주고, 색기 있는 애인도 생기는데 피해 볼게 없는 조건이라니.

 게다가 내가 연애를 한다는 것을 엘레인과 타티아나가 알게 되면, 나와 연인이라는 사회적 관계를 상상해보는 좋은 계기가 될 수 있었다.

 그들이 아무리 꿈에서 성적인 대상으로 내가 자리 잡았다 해도, 나와 사회적으로 연인이 된다라는건 상상도 못 해봤을 테니까.

 유일한 리스크라면, 그래.

 이 안나라는 아가씨에게 반해서 허덕이다 농락당하고 마음에 상처를 입는것일텐데, 이상하게도 내 마음이 너무 초연하니 그럴 일은 없을것 같았다.

 상대방이 가볍게 생각하면, 가볍게 대해주는 거고. 만약 떠난다면, 만나는 게 쉬웠던 만큼 아쉽게 생각할 것 같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이 아가씨. 눈빛을 보면, 쉽게 떠날 거 같지 않단 말이지.

 “뽀오-.”

 “그런 신호 아니었어.”

 눈을 감고 입술을 내민 채, 내 얼굴을 향해 다가오는 안나의 손을 놓아줬다. 

 “우우우~.”

 그러자, 그녀가 삐졌다는 것마냥 입술을 툭 내밀고, 도끼 눈을 떠선, 엄지를 아래로 내린 채 손을 흔들었다.

 “그래, 알겠어. 그 팔찌 너한테 받고 반납하며 쓸게.”

 “헛 진짜~? 돼지이~!”

 안나가 다시 달라붙으려 하자. 난 그녀의 이마를 밀어내며 못 붙게 했다.

 키가 169 정도 될까? 

 안나의 키가 작은 편은 아니었지만, 나와 차이가 있기 때문에 저지하기 쉬웠다. 그녀가 작은 손으로 앙증맞게 허공을 만지작거렸다.

 “너 아무리 봐도 내 턱살이 좋아서 그러는 것 같은데. 나, 이거 금방 뺄 것 같은데? 괜찮겠어?”

 “흐응~. 난 근육이 더 좋거든~.”

 그 말과 함께 이마를 잡으려 뻗었던 내 팔뚝을 자그마한 손으로 만지작만지작 거렸다.

 “......”

 진짜, 이해가 안 되는데?

 이 아가씨, 맥락이 전혀 안 맞는 말을 계속하네.

 “오, 안나!”

 낯선 목소리가 들려 옆을 돌려보니, 훤칠한 남자가 손을 흔들며 있었다.

 한참 찾아다녔다는 듯, 반가운 기색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인적이 드문 곳에 안나가 있다는 것이 의외라는 듯 놀라다가, 옆에 있는 나를 경계하듯 한번 훑어보고는 안나에게 말을 걸었다.

 “계속 찾았잖아. 그런데 바쁜 일이라도 있는 거야? 우리 애들이 저쪽에 있는데, 같이 카드하며 놀-.”

 “좋아여~.”

 아니, 이렇게 빨리?

 난 놀라서 안나를 바라보았다.

 수락하는 속도가 번개 같잖아.

 적어도 애인 타령했으면 내 눈치를 5초 정도는 보라고.

 “-래? 오~. 하핫. 그럼 이쪽으로 와.”

 남자가 비릿한 웃음으로 실실거리며, 날 흘겨보았다. 이런 기분 안 들 줄 알았는데, 순식간에 버려진 개 같은 기분이 들었다.

 뭐야 이게, 라고 생각하는 순간. 팔뚝에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것이 닿았다.

 “내 애인도 함께 갈 거에여~.”

 “켁. 뭐? 애인?”

 “네에~.”

 “흠. 응? 으응? 애인?”

 이번엔 당황한 눈으로 나와 안나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헛소리를 들었나 싶은지 미간을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고는 다시 물어왔다.

 나도 의외의 말에 놀라, 안나를 내려봤다.

 “네에~.”

 그러면서 가슴을 내 팔뚝에 비벼대었다. 그걸 보는 남자의 미간이 찌푸려지더니.

 “킁. 그냥 다음에 놀자.”

 ‘싫으면, 싫다고 말을 하던가.’ 라고 투덜대며 사라졌다.

 뭐지, 이거. 왜 이게 기분 좋지?

 별일 있던 것도 아닌데, 묘한 고조 감이 가슴을 채웠다. 그 덕에 얼굴에 숨길 수 없는 웃음이 나왔다.

 내가 웃는걸 안나가 보더니, 그녀의 입가에도 호선이 그려졌다.

 순간, 그것을 보는데 이질적인 느낌이 들었다.

 안나가 웃는 타이밍 때문인가.

 그녀 안에 있는 여우 한 마리를 본 기분인데.

 뭐, 일단 그게 중요한 게 아녔다.

 지금 팔뚝을 문지르는 부드럽고, 풍만한 것 때문에 성기가 부풀어 오르기 일보 직전이었으니까.

 “이제 떨어져 줘. 이러다 운동 못 할 것 같거든.”

 “돼지. 잠시만~. 그전에 내가 점 한번 봐줄겡~.”

 “점?”

 “응, 나 점이 특기얏~.”

 그런 것이 있었단 말이야?

 내 대답도 듣지 않은 채, 돗자리로 가서는 털썩 앉았다. 그리고는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팡팡 때리며 “돼지 이리 온.”하며, 날 아기 부르듯 불렀다.

 점이라니. 뭔 수작 부리는 게 아니겠지.

 내가 미심쩍은 눈빛으로 아서를 바라보자, 뭘 생각하는지 읽었는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괜찮아. 점은 어차피 마법도 아니고, 요행이거든. 게다가 저 여자가 네게 뭘 하려 해도, 모페로스의 마력까지 막아주는 네 고유능력이 있잖아. 걱정할 필요 없어.]

 점이란 건 여기서도 미신 같은 건가.

 뭐, 그렇다면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돼지. 빨리 이리 온! 이리 온!”

 가만히 보고만 있자, 더욱 방정맞게 엉덩이를 들썩이며 옆자리를 팡팡때려왔다.

 “알겠어.”

 내가 안나 옆에 앉자. 

 “아야!”

 그녀가 말도 없이, 내 머리털 하나를 뽑았다.

 그러더니 돗자리 위에 있던 바구니에서 카드를 하나 꺼내 그 위에 떨어트렸다. 그리고는 그 위로 금색 가루를 떨어트리며, 카드를 흔들더니. 카드 주위에 알록달록한 빛이 어리며 상당히 그럴싸해 보였다.

 “오.”

 [저런 점은 나도 처음 보는데.]

 내가 진심으로 감탄하자, 안나가 보조개를 지으며 웃더니. 카드를 들어 유심히 보았다.

 “흐응~.”

 “뭐가 나왔는데?”

 “이번 주 행운의 색상이 빨강이라는뎅~?”

 “뭐?”

 “내 머리카락색이 빨간색인 거 보니...... 헉! 이거 운명 아님?”

 “허허.”

 어이가 없어서, 너털웃음이 나왔다.

 뭐 하나 싶었더니. 

 이거 나 놀리려 그러는 거구나.

 “장난이 귀여워서 봐줄게.”

 난 안나의 머리를 막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러자 그녀가 억울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흐응~. 꽃돼지. 장난처럼 보였어?”

 “이제 팔찌 줘.”

 “나, 장난 아닌 데에~.”

 “알겠어. 알겠으니. 나 이제 운동하러 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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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찌를 받고, 손에 착용한 뒤. 스트레칭하여 운동할 준비를 마쳤다. 

 그런데, 이 아가씨 왜 계속 지켜볼 것처럼 여기 있는 거지.

 “나 이제 운동하면, 너 지루할 텐데, 여기 계속 있을 거야?”

 “흐응~. 그건 걱정하지 마여~.”

 그러더니, 자신의 바구니에서 책을 하나 꺼내더니 보기 시작했다. 진짜 여기 있으려는 건가?

 내가 안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자, 그녀가 손을 흔들며 ‘어서 운동해염.’ 이라고 말했다.

 “거참......”

 이제는 뭐가, 뭔지 모르겠다.

 꿈에서 나한테 환상을 보는 여자들이 이런 기분이었을까.

 말도 안 되지만.

 기분 좋아서 사실이든 아니든 상관없는.

 그런 것 말이다.

 그녀에게 홀리는 기분이었다.

 난 창을 열어, 부스트가 얼마나 남았는지 확인했다. 아직 한 시간 정도 남아있었다.

 그래, 생각이 많아 봤자 뭐하나.

 일단, 눈앞에 있는 확실한 일부터 하나하나 처리하고 생각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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