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7 / 0060 ----------------------------------------------
붉은 머리
“뭐?”
이게 무슨 귀여운 개 짓거리지.
그가 내 어깨를 짓누르는 바람에, 불쾌감을 숨길 수가 없었다.
하지만, 까치머리. 아니, 고일은.
내가 미간을 찌푸리는 이유를 다르게 착각했는지, 흡족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흐흐. 아서, 그렇게 걱정하지 말라고. 이, 내가 도와준다고 한 거잖아.”
그가 자신이 뭐라도 되는 것처럼 말해왔다.
“네가 도와준다고? 어떻게?”
“허허. 사람이 왜 이렇게 성질이 급해? 그러니, 밥 먹을 때도 허겁지겁 먹어서 살이 이렇게 찌는 거 아냐.”
그렇게 말하더니, 내 뱃살을 손등으로 툭 쳤다.
이 새끼 봐라?
“하여튼, 이렇게 복도에서 할 이야기는 아니야. 나도 함부로 떠들고 다닐 처지가 아니거든. 아, 저기 개인 마법 연습실에 들어가서 이야기하면 되겠네.”
고일은 이미 상황이 자신의 통제 안에 들어왔다고 생각하는지, 내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개인 마법 연습실로 들어갔다.
따라줄까 말까, 잠시 고민이 되었지만. 일단, 이야기는 들어보기로 했다.
“좋아. 대체 어떻게 도와준다는 거야? 실버 그리폰 값이라도 대주려고?”
“아니, 그게 아냐. 사실 어제 봤거든.”
“뭘?”
“실버 그리폰을 누가 데려갔는지.”
순간, 어처구니가 없어서 고일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렇게 나올 줄 몰랐기에 당황을 숨길 수가 없었던 거다.
이런 말까지 하다니. 애초에 실버 그리폰을 훔치려고 했던 게 아니란 말인가? 내 멍청한 표정을 보고, 그가 실실 웃더니 말을 이었다.
“너도 지금 누가 훔쳤는지 궁금해하고 있을거아냐? 우리가 열려 도망친 게 아니라는 건, 실버 그리폰을 길들인 네가 가장 잘 알고 있을 사실일 테니.”
“길들인 적 없다니까?”
“흐흐. 우리 사이에 왜 이럴까?”
우리?
너 따위 것하고, 우리로 묶이는 것 자체가 불쾌한데. 뒤에 사이까지 붙이다니.
며칠간 참 초연하게 지내와서 이제 이렇게 감정이 흔들릴 줄 몰랐는데, 정말 오랜만에 앞에 있는 사람을 붙잡고 실컷 패주고 싶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처음에 이야기 들었을 땐, 믿지 못했어. [조련 인장]을 새기지 않고, 길들일 수 있는 마법이라니. 게다가 아서 네가? 파비앙이 얼마나 성과에 목말랐으면, 그런 헛소리를 믿었을까 싶었지.”
역시나 파비앙 교수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은지. 그의 이름을 언급할 때 강한 적의가 느껴졌다. 덩달아 나도 함께 무시당해 기분이 상당히 불쾌했다.
“...... 그런데?”
“어제 봤거든. 네가 실버 그리폰을 타고 달리는 모습을.”
“아아.”
“이야, 인상적이더라. 그러지 않아도 네가 오기 전에 파비앙하고 싸웠거든. 갑자기 축젯날에 널 실버 그리폰에 태우겠다고 헛소리를 해서 말이야. 그런데, 네가 실버 그리폰을 탄 걸 보니 인정 할 수밖에 없겠더라고. 그렇게 격렬하게 방향을 전환하는 건, 그리폰 라이더 마스터 클래스도 쉽게 못 할 기교였어.”
언뜻 듣기로는 칭찬 같았지만, 능글맞은 억양과 말투 때문에 기분 좋게 들리지 않았다. 평범할 수도 있는 이야기를 기분 나쁘게 하는데 도가 튼 녀석이었다.
“그 정도로 능숙하게 다루는 걸 보니, 파비앙이 틀린 말을 하는 건 아닐 것 같더라. [조련 인장] 없이 실버 그리폰을 길들일 수 있는 마법. 그게 정말 있는 거지?”
“...... 그렇다면?”
끝까지 아니라고 할 수 있었지만.
이 녀석의 귀여운 재롱이 어디까지 가는지 한번 지켜보고 싶었다.
내가 대답을 하자, 고일은 듣고 싶은 말을 드디어 들었다 싶었는지, 이빨이 다 보이도록 환하게 웃어댔다.
“하핫. 그래, 역시. 그럴 줄 알았어.”
“그보다. 대체 누가 실버 그리폰을 가져갔다는 거야? 그걸 봤다고?”
“아, 봤지. 어제 널 지켜보고 우리로 갔는데, 누가 우리에서 실버 그리폰을 타고 나가더라고.”
“[룬]에 담긴 잔재 마력은 없었잖아.”
“하하. 네가 잘 몰라서 그렇지만, 잔재 마력 같은 경우 지울 수 있는 방법이 충분히 있어. 그런 방법을 알고 있을 정도로 주도면밀하고 똑똑한 사람이 타고 나간 거지.”
지금 자신을 똑똑하고 주도면밀하다며 띄운 건가? 계속 말을 나눌수록 어처구니가 하나씩 도망쳐 나가는 기분이었다.
그보다 이렇게 으스대면서 말을 하는 걸 보니까. 그리폰의 변을 이용하여 잔재마력을 지우는게 흔하게 알려진 게 아닌 거였나보다. 아니면, 앞으로는 상식이 되지만, 지금은 알려지지 않았던가.
“그게 누군데?”
“그건 말이지.”
고일이 중요한 말이라는 걸 티 내기 위해, 뜸을 들이더니 내 귀에 바짝 붙어 속삭였다.
“바로 파비앙이야.”
“.......”
이렇게 나오겠다?
“뭐? 술 마시러 먼저 자리 비운 사람이? 넌 그걸 어떻게 보고 있었는데?”
“너도 알다시피 파비앙한테 한마디 듣고 난 뒤라, 내가 우리에 있다는걸 보일까 봐 바로 돌아가지 못 하고 있었거든. 하여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네가 가자마자 돌아간 척했던 파비앙이 우리 안으로 들어가 실버 그리폰을 태우고 밖으로 나가더라고.”
생각보다 변명을 짜임새 있게 준비해놨는지, 묻자마자 즉각 대답했다.
“어디에 갔는지 알아? 아니, 그보다 교수가 탄 걸 왜 아무도 못 봤지?”
“어디 갔는지는 몰라. 하지만, 못 본 이유는 알지. 교수가 축제용으로 준비해놨던 코스튬을 둘러싸고 나갔더라고. 자기 몸까지 말이야. 그래서 학교에 헛소리 도는 거 못 들었어? 무슨 유령이니 뭐니.”
아. 그게 그런 이야기였나.
그러고 보니, 실버 그리폰의 시야로 봤을 때, 고일이 들고 있는 흰 천에 무슨 그림이 그려져 있었긴 했었다.
“이제 내 도움이 필요다고 생각이 들어?”
“어떻게 도움을 준다는 거야?”
“파비앙 교수를 내가 고발해 줄게. 아,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실버 그리폰을 어디로 데려갔는지 모르고. 증거도 없으므로 네가 이기기는 힘들 거야. 하지만, 네 명예를 위해 내가 힘껏 나서주지. 그리고 실버 그리폰 대금과 뒤처리까지 까짓것 해주겠어.”
“날 위해 그렇게까지 해주겠다고? 왜?”
“하하.”
내가 놀란 척 하며 되묻자. 고일이 기분 좋은 듯 다시 내 한쪽 어깨에 손을 탁! 소리 나게 올리며 말을 했다.
“다행히도 네겐 내가 있다고 말했잖아. 하지만, 내가 네 명예를 위해 이길 수 없는 고발을 나서는 만큼. 나도 네게 요구할 게 있어.”
“그게 뭔데?”
“실버 그리폰을 길들였던 마법. 그걸 내게 알려줘.”
이야기를 들으면서 설마설마했지만. 역시나 이것을 위해 수작을 부린 것이었나.
난 대답 없이 고일의 얼굴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물론, 나도 그냥 맨입으로 알려달라는 거 아냐. 그것만 알려주면. 조교 그만두더라도 우리 가문의 가신으로 일하게 해줄게. 오히려 조교 월급보다는 더 받을 수 있을걸? 우리가 한배를 타는 거라고.”
“......”
정말 멍청하게도 내가 말없이 가만히 있자, 망설이는 것으로 착각했는지 그가 날 설득하려고 말을 덧붙였다.
마치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하는 것마냥 의기양양 해대면서 말이다.
사실은 그가 자신의 입으로 날 노리고, 이 모든 것을 했다고 자백한 것이나 다름없는 말을 했다는 것을 그는 상상도 못 하겠지.
그가 말한 것을 한번 곱씹어 봤다.
처음에는 이 난리를 왜 피었나 싶었지만, 생각보다 영리한 방법이라고 생각되었다.
실버 그리폰을 정말 훔치려고 한 게 아니라. 교수 연구실에 놓아놓고 잠시 일을 크게 벌린 것뿐이었으니. 학교에 근속하는 데 문제가 생길 뿐이지. 그의 신상에 크게 피해가 갈 일은 없어 보였다.
그는 예전의 아서처럼 조교직으로 생계를 유지해가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파비앙과의 갈등을 생각해보면 오랫동안 일 하며 남아 있을 생각도 아니었겠지.
게다가 그리폰의 변으로 잔재마력을 지운 것을 생각해보면, 분명 실버 그리폰을 훔친 범인이 고일이 맞을 것이었다.
그것에 비하면, 이 해프닝은 생각보다 리스크가 작은 일이었다.
아니, 애초에 리스크가 없던 것일 수도 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가 잃을 게 없어 보이는 불공정한 도박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난 어떤가.
고유능력이 없었다면, 꼼짝없이 구석에 몰렸을 거다. 아무리 금방 들킬 촌극이었다 해도.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기 전 난 과도하게 압박당했을 것이고, 어쩌면 그의 의도처럼 나만의 기술을 그가 제안하는 대로 호구처럼 넘기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가 하는 거짓말로 얼룩진 제안을 믿으며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열이 끓어 오르기 시작했다. 한동안 잔잔했던 마음에 파도가 차올랐다.
“저기? 아서? 내 말 듣고 있어?”
“일단, 생각 좀 해볼게.”
“뭐? 아서. 어이! 어디 가는 거야?”
난 그렇게 소리를 지르는 고일을 뒤로하고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가 나를 계속 불러대었지만, 난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원래는 도둑이 일을 벌이면 중간에서 도움을 줘서 이득이나 얻고, 해결하는데 크게 나설 생각 없었는데.
이렇게 대놓고 날 노리고 온다면 말이 달랐다.
말이 안 되지. 일을 이딴 식으로 벌려놓고, 자신만 잃을게 없다는 건.
한번, 이 작은 눈덩이를 커지도록 굴려볼까.
그가 뼈아플 정도로.
****
[여기는 왜 온 거야?]
“일을 크게 만들기 전에 보험을 들어놓으려고. 아, 이제 나오겠네.”
수업이 끝난 학생들이 강의실 밖으로 뛰쳐나왔다. 기분 좋게 달려 나오던 학생들이 강의실 문 옆에서 기대어있는 날 보고 깜짝 놀라 얼굴을 찌푸렸다.
그런 반응을 즐기며, 한참 기다리다 보니. 내가 기다렸던 사람들이 밖으로 나왔다.
“힉......”
“쟤가 여기 왜 있는 거야?”
“앗~. 돼지!”
바로 엘레인과 그 패거리였다.
나와 눈을 마주친 엘레인이 당황하며 시선을 급하게 돌려 피했다. 그리고 그 뒤에 있던 샤브리나는 날 알아보더니, 얕은 신음을 내며 창백하게 질렸다.
그 모습을 옆에서 캐서린이 놓치지 않고 눈으로 훑어 관찰했고, 아트리샤만 내가 왜 여기 있는지 의문을 표했다.
그리고 안나가 달려와 팔짱을 꼈다.
몰캉-.
부드러운 쾌감이 내 팔뚝을 타고 느껴졌다. 역시나 오늘도 안나는 안에 입어야 할 것을 입지 않았었다.
얇은 천을 넘어 느껴지는 감촉이, 날 것 그대로 보다 더 기분 좋았다.
“뭐......?”
“아니 저게 미쳤나?”
안나의 돌발행동에 다들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트리샤는 욕까지 내뱉으며 대체 뭐하는 짓인가 의문을 표했다.
엘레인은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는 표정으로, 안나가 팔짱을 끼고 있는 팔을 넋 나간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 있냐고 전서구 보내길래 놀랐는데, 나 기다렸던 거임?”
“아아. 그게 아니라.”
“오잉? 아님?”
“엘레인한테 볼일이 있어서-.”
“내가 아니고?! 이 돼지가!”
내 말에 안나가 으레 그래왔듯 소리를 지르며 내 턱살을 손가락으로 찔러왔다.
그 모습에 엘레인과 아트리샤는 지금 벌어지는 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모르겠는 듯. 멍청한 표정으로 입을 벌리고 우릴 쳐다보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강의가 끝나고 나온 학생들과 교수, 조교들도 이게 무슨 상황인지 구경하고 있었다.
“잠만, 야야 그만.”
“나한테도 용건 있어여? 없어여?”
“있어. 있으니까 그만 좀 찔러봐. 휴우-.”
“흐응. 뭐 그렇다면야아~.”
내 말에 안나가 귀여운 애를 바라보는 표정을 짓더니. 내 어깨를 손가락으로 한번 부드럽게 쓸어내리고선 떨어졌다.
“이게 대체......”
아트리샤가 이해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안나와 나 사이에 있는 일뿐만 아니라. 그걸 바라보는 친구들의 반응도 이해가 안 된다고 생각했는지, 나와 친구들을 번갈아 바라보며, 연실 이마를 긁어댔다.
난 안나에게서 시선을 떼어 엘레인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날 바라보고 있느라 시선이 마주친 그녀가 어색하게 고개를 획 돌렸다. 난 그 모습에 웃음이 나와, 입꼬리를 올리며 그녀에게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