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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머리
“어......?”
아까 안나에게 엘레인 만나러 왔다고 말한것을, 다른 생각에 빠져 듣고 있지 않았는지.
엘레인은 내가 왜 자신한테 다가오는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뒷걸음질 치며 도망쳤다.
성큼성큼 걸어가 엘레인의 코앞까지 가자. 그녀가 뒤돌아 달려서 도망가려 했다. 난 그런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러자 엘레인이 놀라 눈을 크게 뜨곤, 내가 붙잡은 손을 바라보았다.
“오오오?”
“뭐야, 저거. 뭐 하는 거야?”
“아니, 잠시만. 학생분들 진정하세요. 저기, 아서조교? 이게 무슨 일입니까? 학생의 손을 잡다뇨.”
내 행동에 주위의 사람들이 소란을 떨었다. 어찌나 거세게 학생들이 소리를 지르며 난리가 되었는지. 보다 못한 교수와 조교가 학생들을 진정시켰다.
처음 보는 교수가 나서서 내게 어떻게 된 건지 물어보았다.
“아, 잠시만요. 엘레인 학생에게 전할 말이 있어서 온 겁니다.”
그렇게 교수님한테 말하고는 엘레인의 귀에다 속삭였다.
“너가 전에 말했던 일 이야기. 하고싶지 않아?”
“......!”
엘레인이 놀란 표정으로 날 바라보더니, 이내 알겠다는 듯. 교수님한테 말을 했다.
“괜찮습니다. 교수님.”
“그런가요? 그래도 아서조교. 아무리 급하다고 해도 학생들 앞에서 이런 소란은 피우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게다가 안나 학생과...... 크흠. 하여튼. 학생들과 풍기에 주의해 주세요.”
그렇게 말하고는 뒤돌아 갈 길을 갔다. 교수를 따라 내 옆을 스쳐 지나가는 조교 둘의 눈빛이 심상치 않다. 좋은 가십을 발견했다는 것마냥.
“저기..... 손 좀 놓아주지?”
기어들어갈 듯한 목소리로 엘레인이 말했다. 날 바라보고 않고 옆으로 돌린 얼굴이 살짝 상기되어있었다.
내가 손을 놓자, 그녀가 자신의 손목을 잠시 쓰다듬으며 생각에 빠진 것 같더니. 갑자기, 흠칫 놀라며 손을 떼었다.
“누가 마음대로 만지라고 했지?”
“급하게 어딜 가시는 것 같아서요. 그보다, 싫지 않았잖아요.”
“하아...... 됐어. 말을 말자고. 따라와.”
그렇게 말하며 엘레인이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그녀의 병풍들도 얼떨떨해하며, 엘레인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난 그녀들과 거리를 두고 뒤따르기 시작했다.
“대체, 무슨 상황인 거야 이게. 야, 너 저 돼지랑 왜 친한척하는 건데?”
아무리 봐도 이해가 안된다는 듯, 아트리샤가 안나에게 물어봤다.
내가 엘레인의 손을 잡았을 때부터 가자미눈을 하며, 입술이 툭 튀어나왔던 안나가. 아트리샤의 말에 표정을 바꾸고는 대답했다.
“친한척이라녀. 흐응~. 그게 아니라 정말 친한거임”
“......뭐?”
아트리샤가 뭔 개소리를 하냐는 얼굴로 안나를 쳐다봤다. 안나가 자신의 붉은 머리를 비비 꼬며 쐐기를 날렸다.
“저 돼지랑 사귀는데여?”
“뭐어어어어어어?!”
아트리샤가 경악하며 소리를 지르자. 복도에 있는 주위 학생들이 다 쳐다보았다. 안나의 말에 앞에 걸어가던 엘레인도 갑자기 가만히 멈춰 섰다.
아트리샤는 자신이 소리 지른 것에 깜짝놀라 손으로 입을 막으면서, 미간을 찡그리곤. 날 흘깃흘깃 보더니, 안나의 어깨를 때렸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 말고.”
“정말인 데에~.”
그렇게 말하더니 안나가 뒤돌아서, 날 바라보고는 윙크를 날렸다. 그 모습에 아트리샤의 얼굴이 알류미늄 호일처럼 구겨졌다.
“우엑-. 아, 진짜. 장난하지 마. 웃기지도 않고 정색밖에 되지 않는데, 왜 이렇게 막던지는 거야. 샤브리나. 넌 얘가 왜 이러는지 알겠어?”
“...... 몰라.”
“넌 또 왜 그래? 어? 엘레인은 또 왜 가다가 멈췄어?”
그 말에 엘레인이 다시 정신을 차렸는지, 걸어가기 시작했다.
“뭐야. 너희 나 따돌려?”
아트리샤가 울상이 되어 말을 하는데도, 아무도 대답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 그 덕에 아트리샤가 난리를 피워, 도착하기 전까지 소란이 끊이지 않았다.
정말 혼란 그 자체구만.
****
아주 익숙한 곳으로 왔다.
몇 걸음만 걸어가서 문을 열면, 내가 채찍질 당한 장소가 나오는 곳. 바로 고위 귀족들을 위한 특별 장소였다.
전과 같이. 응접실에는 엘레인과 나. 단둘만 앉아 이야기했다.
“그래서, 뭘 이야기하러 찾아온 거야?”
난 엘레인의 말에 바로 대답 안 하고, 손에 쥔 찻잔을 홀짝였다. 히포그리프 젖으로 만든 밀크티는 진한데도 역하지 않고 풍미가 아주 좋았다.
“아까 말 그대로야. 네가 일하자고 했던 게 기억나서, 뭔지 듣고 싶더라고.”
“갑자기 왜?”
엘레인의 말에 경계심이 담겨있었다. 일하겠다 이야기하면, 마냥 좋아할 줄 알았는데 말이지. 모든 일을 자신이 통제해야 안심하는 그런 스타일인가.
“글쎄...... 뭐라고 해야 하나?”
내가 필요한 내용을 말할까 싶었는데. 갑자기 장난기가 발동해서 그녀를 건드려 보기로 했다.
“네가 갑자기 꿈에 나와서 생각났달까?”
“......!”
툭-.
그 말에 엘레인이 들고 있던 찻잔을 놓쳐 바닥에 떨어트렸다. 찻잔은 깨지지 않았지만, 안에 있던 희멀건 한 젖이 쏟아진 탓에 카펫이 더럽혀졌다.
엘레인은 당황해서 어찌할 줄 모르다. 이내 지팡이를 들어 떨어진 찻잔을 정리했다.
“에고, 비싸다고 들었는데 아깝게......”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눈에 띄게 동요하며, 엘레인이 소리쳤다. 난 자리에서 일어나 쇼파에 앉아있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그녀의 동공에 지진이 난 것마냥 마구 떨리며 상체를 내 반대쪽으로 젖혀 피했다.
난 그녀의 쇼파 손잡이에 걸터앉았다.
뿌지직-.
그러자 가죽 아래 있는 틀이, 내 몸무게를 못 이기기고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낭만 없이.
하지만, 엘레인에겐 그 소리가 들리지 않는지,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나만 바라보며 굳어있었다.
난 그녀의 윤기 나는 금발을 손가락으로 훑으며 말했다.
“요새도 내 꿈을 꿔?”
“...... 뭐, 뭐?”
엘레인이 말까지 떨며 어찌할 줄 모르더니. 입을 옴짝달싹 못 했다. 그렇겠지. 이틀 전 꿈에서는 이 응접실에서 나와 했고. 어제는 그녀의 침실에서 했으니.
한참 동요하던 그녀가 이내 표정을 다잡고 표독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
“그딴 거 안 꾸거든?”
그렇게 말하면서도 상기된 얼굴이 그녀가 애쓰고 있다는 걸 보여줬다. 난 그 모습이 나름 귀엽게 느껴졌다.
그 생각에 무심코 그녀의 머리를 우악스럽게 쓰다듬어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어......?”
내 손길에 엘레인이 고장 난 것처럼 멈췄다. 조금 거칠게 쓰다듬었는데도 눈 한번 안 감고 내 얼굴만 빤히 쳐다보았다.
손을 떼었는데도 흐트러진 앞머리 사이로 보이는 그녀의 눈이 단 한 번의 깜빡임 없이 날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던 그녀가 아주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머리가 산발이 된 채로 비틀거리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장난이 좀 심했나.’
난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가 찻잔을 홀짝이며, 엘레인이 다시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한참 동안 그녀가 들어간 방의 문에 미동도 없더니.
이내 문이 열리면서 엘레인이 오늘 처음 만났던 모습처럼, 머리를 정리하고 나왔다.
비틀거리며 방 안으로 들어갔던 것과 달리, 성큼성큼 걸어와 자신의 쇼파에 앉아 다리를 꼬고 새로운 찻잔을 잡더니 듣기 좋은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그래서 용건이?”
순간 웃음이 터질 뻔 했다. 아까는 없는 일로 하자는 건가. 아니면, 그냥 지기 싫다는 건가.
어찌 된 것이든. 역시 기세가 쉽게 꺾이지 않은 여자란 말이지.
“네가 하자는 일. 해줄게.”
“아직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듣지도 않았잖아.”
“뻔하지. 어디 가서 혈통 마법의 진명을 알아봐 달라는 거 아냐?”
“...... 그래, 맞아. 그래서, 그걸 해주겠다고?”
엘레인이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 물론, 내 능력이 노출되지 않는 조건으로.”
“좋아 알겠어. 또 다른 건?”
“또 네가 무슨 목적으로 사용할 것인지 내게 모두 다 털어 놨으면 좋겠어.”
“그럴 필요가 있나? 고용되었으면, 그냥 시키는 일만 하면 될 거 아냐.”
“고용이라. 말은 똑바로 해야지. 내가 아까 한 말 못 들었어? 일하겠다고 한 게 아니라 해줄게라고 했잖아.”
“...... 하아. 그것도 알겠어. 그리고?”
“일단은 그거면 되었어. 나머지 이야기는 나중에 더하도록 하고, 일단 대가부터 이야기할까?”
그 말에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을 이었다.
“어떤 걸 원하는데?”
“그레스덴에서 일곱 가문에만 납품하는, 주위 상황을 녹화가 가능한 영상구가 있다고 들었어.”
혹시나 해서 그런 게 있는지 아서에게 물어봤더니. 상위 가문들에게만 납품하는 상품이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마력으로 돌아가는 만큼, 오랜 시간 녹화가 가능하지 않고. 사용하는 방법도 까다롭다고 했다.
“[로노스의 거울] 말하는 거야? 그걸 달라고?”
“일단은.”
“그럴 수 없어. 가격도 가격이지만, 애초에 네가 가질수 있는 물건이 아니야. 네가 가지게 되면 분명 경위를 파악해서 나한테도 불이익이 올 거란 말이야.”
“줄 필요는 없어. 며칠만 빌려주기만 하면 돼.”
그 정도면 충분했다. 일단 내가 생각하는 일이 그 안에 끝날 것이고.
게다가 기본적으로 유리에다가 인챈트를 하는 물품인 만큼. 혈통 마법이 아니라 내 인챈트 스킬로도 복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빌려줘? 그것만으로 이 일을 하겠다고?”
“일단은. 이라고 말했잖아. 그것뿐만 아니라 조건이 더 있지.”
“하아. 뭔데.”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한숨을 쉬더니, 물어왔다.
“내 뒷배가 되어줘야겠어.”
“뒷배?”
“요즈음 몇 가지 일이 생겼거든. 일이 커질지 안 커질지 모르겠지만, 확실히 매듭짓고 싶은 일이 있어서 말이야. 그러려면 너와 네 가문이 필요해-.”
“좋아.”
엘레인이 내 말에 잠시의 뜸도 안 들이고 대답을 했다. 무슨 일인지 정확히 듣기라도 할 줄 알았는데 말이지. 어떤 일이든 감당할 수 있다는 자신감인가?
“그런 거라면 해줄게. 또 없지?”
“그 정도로 사실 밑지는 느낌이라 나중에 내 부탁을 하나 들어줘.”
“내가 들어줄 수 있는 선에서 할게.”
“좋아, 그렇다면. [로노스의 거울]은 언제 가져와 줄 수 있지?”
“지금 내 방에 있으니까 언제라도 괜찮아.”
“네 방에? 그게 왜?”
가문에서 가져오면 하루라도 걸릴 줄 알았더니.
“그건 너 때문에-.”
말을 하던 엘레인이 순간 흠칫하더니. 아차 싶었는지 입을 가리고 날 바라보았다. 방에서 머리를 다듬고 나온 뒤로 처음 있는 표정의 변화였다.
“흥. 그런 건 중요하지 않잖아? 하여튼, 그건 오늘이라도 보내줄게. 그보다 내 뒷배가 필요하단 일이 어떤 일이야?”
난 그 말에 일이 끝났다고 생각되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건, 내가 상세하게 적어 전서구로 보낼게. 일단, 난 바쁜 일이 있어서 이만 일어나 보지.”
“알겠어.”
그렇게 문을 걸어가는데.
“...... 너, 안나랑은 어떻게 된 거야?”
엘레인이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난 그 말에 이유를 알 수 없게 웃음이 나왔다.
“들은 그대로야.”
“사귀고 있다고? 말도 안 돼. 너랑?”
엘레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야’라고 중얼거렸다. 난 그런 그녀에게 능글맞게 대답했다.
“질투하지 말라고. 난 너랑도 사귀고 싶으니까.”
“뭐, 뭐?”
내 말에 또다시 동요하며 말을 더듬었다.
"미친. 내,내가 너 따위랑? 헛소리 하지마!"
"하하. 다음에 보자고.”
얼굴이 잔뜩 상기된체 소리치는 그녀에게 잇몸이 보이도록 웃어줘 보이고는 응접실 밖으로 나갔다.
****
골든 그리폰 클럽 안.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파비앙 교수는 진정을 못 하는 것 같았다. 그가 성을 내며 소리를 지르는 게 열려진 클럽실 문틈으로 흘러나와, 학교 후문 복도에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진정하라고? 지금 내가 된통 깨지게 생겼는데 무슨 진정이야!”
“교수님. 계속 이러시면 진짜 제가 교수님 데려가야 합니다.”
아직 경비팀장도 같이 있는지 목소리가 들려왔다. 열린 틈새로 안을 들여다보니, 파비앙 교수가 저 난리를 피우는 탓인지, 학생들이 하나도 없었다.
그것을 확인한 난 클럽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파비앙과 루트 경비팀장이 깜짝 놀라 날 바라보았다.
“너, 너!”
“파비앙 교수님. 잠시 시간 되시면, 저랑 같이 클럽 우리에 가시죠.”
“네가 나보고 어딜 오라 가라야!”
어디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를 하는 것이냐는 말투로 내게 소리를 쳤다.
“너 때문에 안톤 교감한테 지금 무슨 소리를 듣고 왔는지 알아-.”
“실버 그리폰을 길들였던 마법.”
“지랄도 유분-. 뭐......?”
그가 가장 관심있어 하는 주제로 말을 끊자. 소리 지르는 것도 멈추고 내 말에 귀 기울였다.
“그게 어떤 것인지 궁금해 하셨지 않습니까. 지금 제가 보여드리죠.”
============================ 작품 후기 ============================
선추코 감사합니다.
01.
김장교님 또 후원 쿠폰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후덜덜.
말하는님도 쿠폰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02.
드디어 토요일이 왔네요.
주말 즐겁게 보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