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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론즈
‘역시 원하는 내용은 없었나.’
고대종 자체에 관해 서술하는 내용은 많았지만,
고대종의 마력에 대한 내용, 그리고 그 마력이 사람에게 끼치는 영향력애 관한 내용 같은 건 없었다.
‘그렇다 쳐도 내용 자체는 재미있네.’
[몰락한 신화]라는 책을 덮으며 생각했다.
여러 고대종들의 계약자들은 기상천외한 능력자들이 많았다.
다른 사람의 모습으로 변신하는 사람. 또 흔히 네크로멘서로 알려진, 시체를 조종하는 능력도 있었다.
딱히 도움이 되지 않은 내용이라고 해도 확실히 흥미 있게 읽을만한 내용이었다.
대부분 책에 서술된 마법사들은 악명이 자자한 악당들이었다.
하지만, 단 한 명.
성자 이반.
고대종들의 시대를 종결시킨 영웅.
현 교회의 성기사이자, 초대 교황이었던 그 사람만은 호의적으로 서술되어있었다.
‘모페로스는 언급도 안 되어있군.’
가장 먼저 잊혀진 신이라고 아서가 말한것처럼, 책에 언급조차 되어있지 않았다. 혹시 다른 책에도 그러려나?
난 다른 책에 손을 가져가다, 시간이 꽤 지난 것을 인지했다.
그러고 보니, 책을 읽는데 몰입하느라 시간 가는지 몰랐구나.
심지어, 두 권의 책을 다 읽을 때까지 눈을 떼지 않았다. 이해가 잘 되어서 그런가, 책이 술술 읽었다.
‘기분 좋은데?’
어찌 되었던 책을 두 권 읽었다는 것에 성취감이 느껴졌다.
독서에 맛을 들여본 적 없는 나로서는 이런 기분이 처음이라 더 오랫동안 도서관에 있고 싶었다.
하지만, 오늘 일과를 진행해야 했다.
오늘은 마력등급을 C등급으로 승급해야 했으니까.
난 입맛을 다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눈에 들어오는 게 있었다.
예전에 수업 준비할 때 마리조교가 자재 옮길 때 쓰던 움직이는 책상과 비슷한 물건이었다.
탁자형태의 손수레가 도서관 곳곳을 저절로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다른 사람들이 그 탁자 위에 책을 올려놓고 갔다.
저기에다가 다 본 책을 올려 두면 되나?
“혹시 저 손수레에 책을 올려놓고 가면 되나요?”
내 생각이 맞는 것 같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아까 나한테 친절했던 사서에게 물어봤다.
“...... 쳇-.”
그런데 이번에는 아까와 달리 인상을 팍 찌푸리고는.
날 한번 흘겨보며 대답 없이 다른 곳으로 가는 게 아닌가.
‘대체 뭐야?’
갑작스러운 태세전환에 기분 나쁠 겨를도 없었다.
난 멍청하게 그의 뒷모습만 보다가, 그냥 책을 손수레 위에 올려놓고 도서관을 나갔다.
****
「 2배 부스트가 끝났습니다. ( 8번 중첩, 숙련도 256 배) 」
「 마력 회복 5배 부스트가 끝났습니다. 」
「남은 포인트는 2610 포인트입니다.」
「[마력] C 랭크 (1%)」
‘드디어 이제부터 시작인가?’
요구 숙련치가 확 높아지는 C 랭크로 도달했다.
일주일도 안 되는 시간에 하급 마법사의 마력 수준에서 중급마법사의 마력으로 올라간 것이었다.
이제 포인트도 더욱 많이 수급하겠다, 이대로라면 순조롭게 고급마법사가 될 것 같았다.
만약 학교에서 분기마다 한 번씩 있는 졸업생 승급심사를 신청한다면, 하급 마법사 딱지도 떼어지리라.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없지.’
힘을 숨긴다.
뭐, 그런 생각은 쥐뿔만큼도 없었다.
나중에 힘을 과시해야 할 때가 온다면, 보여줄 만큼 다 보여주고 인정받는 게 오히려 나에게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현재는 내가 하급 마법사라는 딱지를 유용하게 쓰고 있는 중이었다. 물론 협박을 할 때 쓴 거였긴 하지만 말이다.
또 다른 마법사와 달리, 인정받는데 조급해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어차피, 난 한계 없이,
그리고 누구보다 빠르게 성장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으니까.
그러니, 어중간하게 마법사 사회에 데뷔할 바에는 하급마법사라는 딱지를 굳이 버릴 필요가 느껴지지 않았다.
데뷔라는 것은 단 한 번만 있는 기회다.
그러니, 아주 강렬한 인상을 남겨주리라.
팟-.
「 체력 회복 5배 부스트가 끝났습니다. 」
「남은 포인트는 2310 포인트입니다.」
‘끝났군.’
떠오르는 창을 보고, 난 달리는 걸 멈췄다. 이제는 아주 여유롭게 딴생각을 하면서 세시간을 달릴 정도로 체력이 가뿐했다.
난 깔아둔 돗자리로 향해 걸어갔다.
“흐응~. 끝났어여?”
익숙한 목소리가 날 반겼다.
안나가 읽고있던 책을 내리고, 나에게 물어왔다. 아니 아직도 있었던 건가?
난 그녀에게 팔찌를 건네며 말을 했다.
“어라? 아직도 안 돌아갔어?”
“뭐임? 돌아가길 바란 거임?”
안나가 입을 삐쭉 내밀고 삐진 듯 말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네가 돌아간다며.
내가 당황스러워하자, 안나가 푸훗-. 거리며 웃고는 장난스러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
“한동안 바빠서 이렇게 같이 못 있겠다고 했잖아여. 게다가 아까 물어보지 않은 게 생각나서여.”
“응? 어떤 거?”
살 어떻게 이 정도로 뺐나. 뭐, 그런 거 물어보려나?
약간 기대가 되었다.
그러지 않아도 오늘 안나가 내 살이 빠진 것에 대해 의아해하지도, 또 언급도 하지 않아서 조금 아쉬웠으니까.
“혹시, 어제 샤브리나랑 만나서 뭐했음?”
아, 그거 물으려 한 건가.
어제 뭐 했긴.
강제로 눕히고, 치마 속에 손을 집어넣고.
......
샤브리나가 그걸 안나에게 말했나?
뭐, 그래도 별로 상관없다만.
“별거 없었는데? 왜?”
“흐응-.”
말을 돌리자, 안나가 가자미눈을 뜨고 날 바라봤다. 삐친 것마냥 입술도 붕어처럼 내밀었다.
너무 뜬금없는 표정이라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흐으응-.”
“뭐, 뭐야?”
“흐으으으으응-.”
안나의 입술이 불다 못해 터질 것처럼 내밀어졌다.
난 무심코 검지와 중지로 그녀의 입술을 잡아당겼다. 보드랍고 촉촉한 입술의 감촉이 야릇하게 손가락에 닿았다.
“웁-. 웁-.”
“왜 그러는 거야. 대체.”
“웁웁!”
안나가 입술을 잡은 내 손을 가리켰다.
놓으라는 것 같은데, 놓고 싶지 않았다.
이거 너무 쫀득쫀득하니 중독성 있다. 이 여자가 턱살에 집착하는 것도 이해가 되겠는데?
“놓으면 말해줄 거야?”
“웁!”
“알겠어.”
“퉤-. 퉤-. 너무 짜. 지지-. 지지 손.”
“......”
손을 놓자, 안나가 인상을 팍 쓰고는 내 손을 가리키며 말해왔다. 그녀가 자신의 입술을 두 손으로 탁탁 치면서 말을 이었다.
“오늘 샤브리나가 수업을 다 빠지고 방안에만 있었거든여.”
“아......”
“그래서 뭔일 있었나 싶었져.”
충격이 너무 심했나?
어제 꿈에서 심하게 다뤘긴 했는데 말이지.
“어제 좀 싸우긴 했어. 너 때문에.”
“히히. 그래여-?”
내 말에 안나가 배시시 웃으며, 애교부리듯 콧소리를 냈다.
그와 함께 내 팔뚝을 살짝 때렸다. 찰싹 소리와 함께 내 마음도 흐물흐물 녹아났다.
역시 이런 스킨쉽에 약하단 말이지.
하지만, 안나가 표정을 금방 바꾸며 말을 이었다.
“흐응-. 아닌데. 싸운 것 때문은.”
“응? 그게 무슨 말이야?”
“제가 샤브리나를 잘 알아서 하는 말인데. 화났다기보다. 부끄러워 하는 것 같더라고여.”
“부끄러워해?”
화를 내지 않고?
오호라. 꿈에서 행동이 불쾌함보다는 부끄러움이 컸단 말인가.
그 말을 듣자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그러자, 내 음흉한 표정을 읽은 안나의 미간이 팍 찌푸려졌다.
“대체 뭐임? 이 돼지! 아주 기냥, 이 쫀득쫀득한 걸로 얼마나 많은 여자를 꼬시고 댕기는 거 얏-!”
그리고는 내 턱을 사정없이 털어댔다.
“아니야. 바보야. 세상 사람이 다 너 같은 줄 아나. 뭔, 턱살로 꼬셔. 진짜 싸웠다니까.”
내가 변명하자,
턱살을 양손으로 쭉 잡아당기며, 고개를 젖힌 뒤 두 눈을 부릅떠선 날 내려보고 말했다.
“내가 그런 말 믿을 줄 아라-?”
앵두 같은 입술에서 처음 들어본 걸걸한 목소리.
이제까지 그녀의 모습과 다른 광기에 찬 모습이었다.
“푸핫-.”
그 모습에 너무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터졌다.
그러자 안나도 실실 웃어대며 손을 땠다. 그리고는 자신의 손을 탁탁 털며 말을 했다.
“뭐, 꼬셨다 해도 상관없지만 여~.”
“응?”
“히히. 상관 없다 하니 서운함?”
“아니.”
서운했다.
분하게도.
아까 샤브리나가 있었던 일을 안나에게 다 말해서 날 떠나가도 딱히 아쉽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서운함이 들다니.
뭔가 패배한 기분이었다.
그런 날 안나가 실실 웃으며, 뭔가 말하려 입을 열려는 순간.
팟-.
갑자기 허공에서 전서구가 나타났다. 엘레인이 일 때문에 보냈나 싶어, 전서구를 잡아 내용을 보았다.
그리고 단숨에 얼굴이 굳어졌다.
“여자임?”
“아니, 남자.”
그것도, 아주 짜증 나는 남자.
****
‘역시나, 일을 키우는군.’
전서구의 내용은 별것 없었다.
지금 당장 자기의 사무실로 오라는 것.
하지만, 그것을 보낸 사람을 보고 확신했다. 파비앙 교수가 결국 자기의 목을 옭아맬 선택을 했다는걸.
전서구를 보낸 상대를 만나기 위해 교수들의 연구실이 있는 탑 쪽으로 향했다.
[룬]을 이용하여, 윗 층으로 올라간 난 사무실 문 앞에서 잠시 멈춰섰다.
들어가길 망설인 게 아니다.
사무실 문이 뜬금없을 정도로 호화스러웠기 때문이다.
‘이 손잡이 금인 거야?’
학교의 정점인 교장의 사무실마저,
문뿐만 아니라 사무실 안쪽도 평범하기 그지없었는데, 여기는 무슨 왕이라도 있는 것처럼 문에서부터 부티가 흘렀다.
문짝에 양각되어있는 조각물을 보아하니, 이 문 자체만으로 가격이 꽤 되리라.
난데없는 사치에 고개를 절래 흔들고는, 문을 열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안녕하십니까.”
“그러니까. 이걸 어떻게-.”
내 인사에 익숙한 세 인영이 대화하다 말고 날 바라봤다.
바로 레온, 파비앙 교수, 그리고 내게 전서구를 보낸 안톤 교감이었다.
‘레온도 있다고? 왜?’
난 놀라서 레온을 바라보았다.
파비앙 교수야, 전부터 안톤 교감 라인이었다고 티를 팍팍 낸 탓에 당연히 있을 거라 예상했다만, 레온까지 여기 있을 줄 몰랐다.
그들 역시 놀란 얼굴로 날 보고 있었다.
특히, 며칠 만에 본 레온과 안톤 교감은 고개를 갸웃거리기까지 했다.
그렇겠지.
살이 순식간에 빠졌으니.
교감실에 입을 떼기 힘든 미묘한 정적이 흘렀다. 그들의 반응에 알 수 없는 희열이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한참 흐르던 침묵 끝에 레온이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서?”
“레온, 오랜만이야.”
“맙소사, 역시 아서 맞지? 며칠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내 응수에 레온이 환하게 미소 지으며, 놀라워했다. 정말로 감탄하는 듯한 반응에 나 역시도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여기서 답할 것은 아니었다.
교감이 호의적인 용무로 부른 게 아닌 만큼, 앞에서 사적인 대화를 했다간, 괜히 시비만 잡히리라.
“레온, 그건 나중에-.”
“어허! 조용히 하게. 자네들 노닥거리라고, 안톤 교감님께서 부르신 줄 알아?”
파비앙 교수가 소리를 지르며, 내가 하려던 말을 뺐었다.
날이 선 반응에 내 한쪽 눈썹도 덩달아 올라갔다.
시원하게 소리를 내지른 파비앙 교수는 기분이 좋은지 이빨이 보이도록 웃으며 안톤 교감에게 고개숙여 말했다.
“안톤 교감님, 이제 말씀하시죠.”
“흠. 알겠네. 자네...... 그러니까...... 그래, 맞아. 아서 조교.”
안톤 교감은 아직도 내 모습에 얼떨떨한지, 고개를 계속 갸웃거렸다.
그러다 잠시 헛기침을 하더니, 진지한 얼굴로 날 노려보고 말을 했다.
“자네, 사고를 쳤더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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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추코 갑사합니다.
01.
무념무상님, RoseAria님, elekdl66님, 걍놈님 쿠폰 정말 감사합니다
02.
작가는 다음편을 쓰러 급하게 가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