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8 회: 뜻밖의 복수 -- >
모텔에서의 아찔했던 추억을 뒤로하고 혜린이를 태우고 가는데 뜬금없이 옛 직장동료였던 김 과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직장에서 찔린 후 처음 받는 전화라 좀 얼떨떨했다.
“자네가 웬 일이야? 거긴 잘 다니고 있지?”
“잘 다니긴....... 회사가 부도나게 생겼는데.”
“그게 무슨 말이야?”
“이틀 안으로 3억짜리 어음을 막아야 하는데 그 돈이 어디 있겠어?”
나는 순간 사장과 사장 부인의 얼굴을 떠올렸다. 천년만년 회사가 잘될 것처럼 유세를 떨며 직원들에게 횡포를 부리던 두 사람의 안색이 지금 어떨까 생각해보니 다소 통쾌한 기분이 들었다.
“김 과장이 큰일이네. 직장을 빨리 구해야지, 그런데 솔직히 자네한텐 미안하지만 그 사장 놈하고 마누라가 그 꼴 이 났다니깐 내 속이다 시원하네.”
“자네 입에서 그 소리가 나올 줄 알았네. 그렇잖아도 회사직원들도 다 한마디씩 하곤 했어.”
“아무튼 근간에 한번 보세!”
전화를 끊고 나니 새록새록 그 옛날이 떠올랐다. 어떻게 보면 우유부단한 사장보다 그 앙큼하게 생긴 마누라가 더 나쁜 년이었다. 쪽팔린 고백이지만 그녀는 우리 회사의 경리출신이었고 바로 내 직속 부하였다.
그녀는 사장과의 나이차이가 무려 16살이나 났는데 하루아침에 돈 많은 사장에게 꼬리를 쳐 성공을 한 전형적인 꽃뱀스타일이었다.
그녀는 직원들 사이에서 평판이 너무 안 좋았다. 돈 많은 사장을 물었음 집에서 편하게 살림이나 하고 있지, 괜히 회사에 나와 부장이라는 명함을 달고는 이런저런 간섭을 하면서부터 직원들의 원성을 사게 되었다. 특히 나와는 철천지원수처럼 사이가 좋질 않았다.
그녀는 지난날 내게 쌓인 감정을 폭발이라도 시키듯 사사건건 내 피를 말리게 했는데 결국 사표까지 쓰게 만들었던 것이다.
물론 사장이 말로는 참고 일해보라고 했지만 나의 사표를 은근히 반긴 것 같았다. 분명 그년이 뒤에서 조종을 했을 것이다. 마누라 말이라면 죽는 시늉을 하는 사장이라고는 하지만 정말 사장도 한심한 놈이었다.
생각해보면 정말 어이가 없었다. 그년이 경리시절, 실수가 잦아서 우리 회사가 큰일 날 뻔 한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럴 때마다 내가 화를 조금씩 내곤 했는데 그걸 끝까지 앙심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확 개 같은 년을 진짜!”
열이 받아서 멋모르고 욕을 했는데 혜린이가 날 말렸다.
“아빠 화내지 마세요!”
화를 겨우 다스리고 모텔 촌을 빠져나오는데 조그만 트럭에서 성인용품을 팔고 있었다.
나는 차를 세워두고 트럭 앞으로 갔다. 차에 있던 남자가 뭘 살 건지를 묻기에 나는 에그형 진동기가 있냐고 물었다. 당장은 완희엄마에게 쓰고 싶었다. 그 달걀을 그녀의 항문에 하나 박아 넣고 그 여편네의 남편이 보는데서 그녀를 박아버리고 싶었다. 남자는 아가씨용과 아줌마용이 있다고 했다.
나는 아가씨용 두 개와 아줌마용 두 개를 달라고 했다. 아가씨용은 가늘었고 아줌마용은 좀 두꺼웠다.
물건을 산 뒤 나는 혜린이부터 집에 데려다주었다. 내 예쁜 딸 혜린이를 바래다주고 우리 집으로 들어가려던 찰나였다.
사장과 마누라가 다시 꾸역꾸역 떠올랐다. 생각할수록 빡 돌았다. 나는 홧김에 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자, 자네가 웬일인가?”
무척 떨떠름한 표정으로 전화를 받는 사장의 모습이 아련하게 떠올랐다. 내 속에서 뜨거운 게 부글부글 끓었지만 화를 가라앉히고는 말했다.
“요즘 돈 때문에 마음고생이 심 하시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실은 저한테 뜻하지 않게 큰돈이 생겨서.......”
그는 내 말을 급하게 막았다.
“그게 사실인가? 큰 거 세장인데 좀 빌려줄 수 있나?”
“빌려드리는거야 뭐 어렵지는 않은데 그렇다고 그냥 빌려드릴수는 없고....... 댁으로 지금 찾아가겠습니다. 사모님은 잘 계시죠?”
“집사람? 아, 잘 있지 뭐!”
사장은 그녀와 나의 관계를 잘 알고 있기에 뭔가 불편한 기색을 보였다. 그럼에도 내가 돈을 가지고 있다는 데에는 추호도 의심을 하지 않았다. 그 오랫동안 회사생활을 하면서도 나는 한 번도 거짓말을 하지 않았는데 사장은 그런 나의 인품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주소를 물어보고는 당장 차를 몰았다.
머릿속에서 그녀의 얼굴이 다시 떠올랐다. 생긴 것도 정말 여우처럼 얄쌍하게 생겼는데 처음부터 나는 남자 열 명 정도는 홀딱 잡아먹게 생길정도로 깜찍하게 생긴 그녀의 스타일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 여자들일수록 머릿속에는 딴생각이 들어있어서 일 실수가 잦게 되는 법이었다.
차로 사십분 정도 달렸을까? 드디어 사장의 아파트에 도착했다.
“딩동!”
초인종을 누르니 사장이 문을 열어주었다. 나는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안보였다. 나는 떨떠름한 투로 말했다.
“사모님은 어디 가셨어요?”
“친정집에 급한 일이 있어서.......”
아마도 내 전화를 받고 급하게 도망을 간 모양이었다. 나는 벽면에 걸려있는 사장과 사장마누라의 결혼사진을 보았다. 나이차가 많게 보이니 꼭 원조교제를 하는 커플로 보였다. 사장이 내 팔을 슬쩍 잡으며 물었다.
“정말 자네한테 그런 큰돈이 있긴 있는가?”
나는 호주머니에 있는 통장을 꺼내 바닥에 툭 던졌다. 사장이 펼쳐보더니 입을 떡 벌렸다.
“헉, 자, 자네.......”
사장은 길을 걷다가 금덩어리를 발견한 사람처럼 주먹을 불끈 쥐고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통장엔 10억이 찍혀있었다. 나는 사장의 손에 들려있는 통장을 싹 뺏어버렸다.
사장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더듬거렸다.
“이, 이봐!”
“아니 사장님, 여기 있는 돈을 다 쓰시려구요? 3억이면 된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 그렇지! 3억!”
“내일 제가 오전 중으로 세장을 찾아서 회사로 직접 갖다드리겠습니다. 그런데 그냥은 안 되고 대신에 조건이 있습니다.”
“무슨 조건? 담보 같은 거 말인가?”
“사장님한테 담보가 변변하게 있겠습니까? 있었으면 진즉 은행에 잡혀먹었겠죠!”
“미안하네. 자네 말이 맞긴 맞아!”
“돈 문제야 공증을 서면 될 것이고, 이자 같은 것도 필요 없습니다.”
“이자도 필요 없다면, 그럼 뭐가 필요한가?”
“딱 하루만 사모님을 빌려주십시오.”
사장의 얼굴이 파래졌다.
“비, 빌려달라니 자네 혹시!”
“제가 사모님에게 쌓인 원한이 많은 건 잘 알고 계시죠? 나는 오늘밤 안으로 사모님에게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겁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하고 싶은 짓도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너무 큰 걱정은 하지 마십시오. 나도 사모님만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구치긴 하지만 가능한 때리는 것만큼은 참겠습니다. 그 증거로 제가 사장님이 계시는 이 집에서 사모님에게 할 말을 다 할 겁니다. 밖으로 나가면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르니까요.”
“정말, 때리거나 하진 않을 건가?”
“못 믿겠다면 할 수 없죠 뭐, 없던 일로 합시다.”
내가 나가려고 하자 사장이 내 허릴 꽉 붙잡고 다시 애원했다.
“아 이 사람아! 내가 뭐라고 했는가?”
사장은 정말 마누라 하나 잘못만난 죄로 완전히 비굴한 인간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나는 그녀를 당장 불러오라고 했다.
사장은 쩔쩔 매는 표정으로 전화를 들고는 베란다로 나갔다.
사장의 전화는 길었다. 처음엔 애를 먹는 표정이었지만 결국 사장은 밝은 표정으로 다시 거실로 왔다.
“이봐, 최 과장! 아무리 화가 나도 때리는 건 정말 하지 말게, 그리고 이제 와서 하는 말이네만 자네한텐 항상 미안하게 생각하고 살아왔어.”
나는 거짓말이나 다름없는 그의 말을 무시했다.
“때리는 것 말고는 뭘 해도 다 괜찮죠?”
내말에 사장은 한동안 날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어금니를 질끈 깨물었다. 뭔가를 각오한 것 같았는데 눈물까지 훔쳤다. 그의 눈물 때문에 나는 잠시 마음의 동요를 일으키고 말았다.
하지만 얼마 후 그년이 집으로 들어 왔을 때 나는 가슴깊이 묵혀놨던 울분이 목구멍을 뚫고 다시 올라오고 있음을 느꼈다. 가뜩이나 그녀는 날 본체만체 하더니 곧장 안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보면 볼수록 가랑이에 말뚝을 박아, 죽여 버리고 싶은 년이었다.
사장이 내 눈치를 보더니 안절부절 안방으로 들어가 그녀에게 통사정을 했다. 나는 거실에서 차분하게 기다렸다. 시간은 벌써 새벽으로 넘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