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54 회: 약 먹고 배운 테크닉 -- >
한가한 틈을 타 혜정이 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 전화를 받는 그녀의 목소리가 어린아이처럼 들떠있었다. 전화목소리는 또 왜 이렇게 고운건지.
“오빠, 우리 점심 먹어요. 제가 사드릴게요.”
“오케이.”
전화를 끊고 그녀를 아는 주위사람들이 그녀와 나의 만나는 장면을 어떠한 시각으로 볼 것인가 나는 생각해보았다. 별로 무리는 없을 것 같았다. 그녀가 만약 집안이 부유하지 못했다면 기획사 사장인 날 만나는 걸 탐탁지 않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아쉬울 것이 없는 대 재벌의 장녀다. 뭔가 다른 용건으로 날 만나고 있을 거란 생각을 하겠지.
점심시간이 되었다. 혜정 이와 만나기로 한 장소는 회사와 가까운 곳이었다. 고급 한정식 집이었는데 예약해놓은 방문을 열어보니 혜정이가 미리 와있었다. 그녀의 옆엔 혜정이와 많이 닮은 여자애가 있었다. 완희 또래였는데 혜정이의 동생이란다. 혜정이가 인사를 시켰다.
“혼자 나오려구 했는데 기획사 사장님을 만난다니깐 애가 따라오잖아요. 둘째 동생 주희예요. 죄송해요!”
“죄송하긴 뭘!”
나는 당황스러웠다. 만약에 혜정이가 날 좋아하는 마음을 동생이 눈치를 차리게 되면 어쩌나 하는 근심 때문이었다. 그 사실이 그 쪽 집안으로 흘러들어가게 되면 나만 피곤해진다. 그렇잖아도 주희는 눈을 힐끔거리며 혜정이와 나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훑고 있었다.
주희는 고등학생이지만 짬짬이 인터넷으로 방송을 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기획사의 업무를 알고 싶어 했다. 나는 주희에게 관심을 보냈다.
“주희는 어떤 계획이 있어?”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본격적으로 인터넷 방송을 시작하려구요. 지금은 시험단계라구요.”
“주로 어떤 걸 다루고 싶어?”
“뭐, 여러 가지요. 청소년들을 억누르고 착취하고 있는 어른들을 고발 한다던가 교복 같은 알뜰시장도 열 것이고.......”
주희는 특별할 것도 없는 것들을 기찬 아이디어처럼 자랑스럽게 늘어놓았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방송이란 건 기찬 아이디어가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추진력이다. 지금껏 청소년들을 착취한 것들은 여기저기서 많이도 고발해봤지만 무엇하나 개선된 것은 없었다.
최회장이 밀어준다고 해서 다 되는 것 또한 아니다. 중요한 건 주희의 역량이다. 주희가 인터넷방송에서 성공을 거두게 되면 케이블방송까지는 자연스럽게 이어질 것이다. 최회장은 그때 나서도 늦지 않을 것이다. 또 하나 생각해야 할 것은 시청자들의 눈을 현혹시킬만한 양질의 프로그램과 그걸 제작할 수 있는 돈이 있어야 한다. 그러고 보면 주희는 정말 좋은 토양을 가지고 있다. 좋은 집안에 좋은 형제들. 큰언니 혜정인 라디오디제이, 둘째언니 준희는 공중파 기상캐스터다.
음식들이 줄줄이 나오고 있었다. 여고 3학년 주희는 음식을 가리지 않고 잘 먹었다. 복스럽게 먹는 모습이 참 예뻤다. 안 원장에게 영원히 씻지 못할 언어적 테러를 가했던 아이라는 게 믿어지지가 않았다.
“오빠, 아! 하세요!”
혜정이가 별안간 내 입에 음식을 넣어주었다. 주희는 뜨악, 하는 표정으로 우릴 봤다.
“내 참 살다보니 별 일 다보겠네? 언니가 웬일이야? 남자 입에 먹을 걸 넣어주고!”
주희는 몹시 불쾌한 표정으로 나와 혜정일 번갈아 보았다. 혜정인 신경이 쓰인 건지 주희에게 주먹을 확 쥐었다. 까불지 마 함부로 말하고 다니 지마. 라는 우격다짐의 제스처였지만 나는 불안했다. 그 불안의 불씨가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주희는 힐끔거리며 틈만 나면 내게 이것저것 질문을 했다. 곤란한 질문 일색이었다. 의심 많고 호기심 많은 주희의 성격 때문이었다.
주희가 잠깐 화장실에 간 사이에 나는 기어이 그 불안증을 없애기 위해 약을 절반 내놓았다.
“혜정이, 이걸 주희에게 먹여. 제발 먹여 알았지?”
나는 약에 침을 묻혔다. 혜정이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오빠말대로 할게요. 그런데 이 약이 어제 안원장이 준.......”
혜정이는 대략 눈치를 챘다.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이건 사랑의 약이야. 앞으로 단둘이 있게 되면 몰라도 다른 사람들이 있을 땐 절대로 애정표현을 해선 안 돼. 간혹 사람들이 많을 때, 표현을 해도 될 때가 있어. 그땐 괜찮아. 혜정인 똑똑하니깐 무슨 말인지 알겠지?”
“네 오빠!”
혜정이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잠시 후 주희가 돌아왔다. 머리가 짧고 눈매가 조금 더 날카로운 것만 빼면 영락없는 혜정이었다. 물론 옷은 다 벗겨보지 않아서 속살은 어떤지 잘 모르겠다. 혜정이가 다짜고짜 약을 권했다.
“이거 먹어. 최고급 초콜릿이야.”
“안 먹어. 질렸다구! 애들한테 선물 온 것도 다 쓰레기통에 처박는단 말야.”
심장이 쿵 내려앉는 그 소리. 하지만 혜정이는 뜻밖의 소리로 주희에게 먹지 않을 수가 없게 만들었다.
“니 부탁 들어줄게. 며칠 전에 한 니 부탁.”
“하하하 진짜야? 그럼 먹지 뭐!”
주희는 꿀꺽 삼켰다. 심장이 벌렁거렸다. 나는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그리곤 전화를 걸었다. 혜정이의 목소리가 곧 들렸다.
“주희를 바꿔줘!”
잠시 후 예쁘장한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주희, 내 말 잘 들어.”
“.......”
“앞으로 내 말이라면 어떤 것이라도 다 들어야 해. 만약 내가 주희와 인터넷으로 섹스방송을 하자고 하면 같이 하는 거야 알았지?”
“네? 섹스 방송이라구요?....... 알았어요.”
가슴속에서 뭔가 뻥하고 터졌다. 사실 어제는 내가 혜정이의 방송을 사고 나지 않게 신경 써야 했다. 그거야 어쩔 수 없는 경우였지만 앞으로는 최 회장의 약점이 될 만한 무언가는 반드시 만들어야 할 것이다. 어쩌면 주희와 나의 섹스방송이 최 회장으로부터 날 지키는 유일한 무기가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물론 주희와 나의 얼굴은 대충 가려야겠지.
“흐흠!”
헛기침을 한번 하고 들어가자 주희가 약간 얼빠진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이 방에서 당장 시식이라도 해보고 싶었지만 언제 종업원들이 들어올지 모르는 식당이다.
“자, 이제부터 내게 삼촌이라고 불러라. 하지만 나는 널 내 딸로 생각하마.”
아빠라고 못 부르게 한 것은 만일에 사태에 대비함이었다. 주희는 뭔가에 흔들리나 싶었지만 곧 감동에 젖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예 삼촌!”
나는 주희를 가까이 오게 하여 안아주었다. 여름옷이라 물컹물컹한 느낌이 생생했다. 여자를 한두 번 안아본 것도 아닌데 심장이 이상하리만치 뛰었다. 혜정이는 질투가 섞인 묘한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