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73 회: 약에 중독된 향이와 드러난 비밀 -- >
등 뒤에서 들려오는 난데없는 울음소리에 나는 그대로 몸이 굳었다. 주선이와 보연이도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언가 엄청난 느낌이 들었다. 나는 서서히 자지를 빼낸 다음 뒤를 돌아보았다.
“햐, 향이야!”
향이였다. 내 딸 향이였다. 향이는 문 앞에 그대로 주저앉고는 통곡을 쏟아내고 있었다. 이 일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나는 미친 듯이 옷을 챙겨 입곤 향이를 달랬다. 오주선과 보연이도 옷을 입었다.
“향이야. 내 말 좀 들어봐!”
하지만 향이는 여전히, 끈질기게 통곡했다. 향이에겐 더 이상 충격일 수가 없을 것이다. 자기 엄마와 자기 친구가 쓰리썸을 벌였다. 그리고 자기 친구에겐 친구의 이름대신 향이라는 자기 이름을 부르면서 섹스를 했다. 나는 보연이와 오주선을 밖으로 나가게 했다. 방안에 단둘이 남게 되자 나는 비장한 표정으로 무릎을 꿇었다. 이제 어떡해야 하나. 어떻게 해야 모든 걸 제자리로 돌릴 수가 있을까.
한동안 훌쩍이던 향이는 이윽고 날 강하게 노려보더니 벌떡 일어섰다.
“안 어울리게 저한테 무릎을 꿇을 필요 없어요. 뭐라고 변명하실 필요도 없어요. 원래 기획사 사장님들이야 그런 분들이니까요. 사장님이 우리 학교로 와서 그러셨죠? 엄마는 불쌍한 분이라고! 근데 사장님은 방금....... 으아아앙!”
나는 향이를 감싸 안았다. 하지만 향이가 강하게 뿌리쳤다.
“치워요 더러운 손!”
아아. 더러운 손이라니. 더러운 손이라니.
향이는 방을 나섰다. 뭘 어떻게 해야 좋을까 멍하니 서있는데 거실 쪽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다.
“놔, 지금 이 순간부터 나는 향이가 아냐. 네가 향이야.”
가보니 보연이와 향이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향이는 가방을 들고 있었는데 이 새벽에 여길 나가려는 모양이었다. 상황이 상황이었던지라 모두 잠을 깨고 거실에 나와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아무도 향이를 말리지 못했고 결국 향이는 밖으로 나갔다. 내가 향이를 쫓았다.
“향이야! 내 말 좀 들어봐. 네가 모르는 사실이 있어!”
향이는 들은 체 만 체 택시를 타려고 걸음을 재촉했다. 택시는 콘도 입구에 몇 대 있었다. 나는 향이에게 달려갔고 향이는 내게 소리쳤다.
“가까이 오면 경찰에 신고하겠어요.”
처참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내 딸에게 나는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놈 취급을 받고 있다. 나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향이가 택시 문을 열었을 때 나는 향이에게 마침내 소리쳤다.
“넌 내 딸이야. 내가 낳은 친딸이야. 그 증거도 있어. 제발! 제발 내 이야기 좀 들어!”
그 소리에 향이의 표정이 하얗게 변했다. 향이는 그대로 굳은 체 택시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고 내가 대신 달려가 택시 문을 잠가주었다. 나는 향이에게 겨우 변명을 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게 된 셈이었다. 우린 근처 벤치에 앉았다. 향이는 뭔가 수수께끼를 풀고 있는 것 같은 표정이었지만 여전히 노여운 표정 또한 감추지 못했다.
“우선 방금 네가 본 그거 하나만 가지고 아빠를 평가하면 안 돼. 실은 네가 내 딸인걸 알고 서서히 그 사실을 알리고 싶었어. 그러다가 네 엄마와 보연이와 가까워진 거지!”
변명치곤 정말 어쭙잖았지만 급조된 변명이라 어쩔 수가 없었다. 향이는 벌떡 일어났다.
“당신이, 설사 날 낳아준 사람이라고 해도 난 절대로 당신을 받아들이고 싶지가 않아요. 어떻게 울 엄마와 내 친구와 동시에 그 짓을 벌일 수가 있어요? 아무리 기획사 사장들이 그 짓을 좋아한다고 쳐도, 그건 정말 이해를 할 수가 없어요. 그리고....... 그리고, 왜 보연이에게 추한 짓을 저지르면서 제 이름을 부르신 거죠? 그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지금 여기에 앉아 있는 거라구요. 날 낳아준 분이 맞는다면 어떻게 제 이름을! 어어엉!”
향이는 다시 주저앉아 눈물을 흘렸다. 대체 이걸 어떻게 변명해야 하나. 나는 정말 딱 죽고 싶었다.
나는 하늘을 보았다. 죽은 마누라가 여길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여보! 제발 날 용서해주시오.
하지만 마누라는 절대 날 용서해줄 것 같지가 않았다. 만일에 향이가 내 딸이 아니라면, 나는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약을 당장 먹여 버렸을 것이다. 나는 다시 향이 앞에 쪼그려 앉았다.
“향이야. 내가 사정이 있었어. 외롭고....... 그래서 어떻게 하다 보니 섹스에 중독이 되었어. 그리고 보연이에게 네 이름을 부르게 한건. 나중에, 나중에 꼭 해명을 할게. 내가 아무리 섹스 중독증에 걸려있었어도 내 친딸에게 성욕을 느끼진 않았어.”
거짓말을 뱉고 나니, 말도 못하게 양심이 찔렸다. 향이는 날 노려보았다. 나는 향이를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향이가 울음을 참고 말했다.
“맨 첨, 내가 당신을 보고 얼마나 가슴이 뛰었는지 알아요?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 가장 편안한 느낌을 주는 사람이었어요! 내게 추악한 무언가를 바라지 않으면서도 내게 전폭적인 지지를 아끼지 않았던 당신이었어요! 그렇게 영향력이 있으면서도 당신은 항상 겸손했어요. 아마도 오늘 같은 일이 없었다면, 아니 그 이전에 울 엄마의 이상한 태도나 당신을 쳐다보는 보연이의 이상한 눈빛이 없었더라면 나는 당신이 아빠라는 걸 이미 눈치 챘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그런데! 그런데!”
향이는 다시 오열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한동안 꺼이꺼이 울던 향이가 다시 얼굴을 들곤 악을 썼다. 그 예쁜 얼굴이 삽시간에 퉁퉁 부어있었다.
“당신 같은 색마는 절대로 내 아빠가 아냐.”
향이는 다시 가방을 들고 택시가 있는 곳으로 달렸다. 이제 향이를 잡지 못하면 나는 영원히 끝이다. 잡아야 한다. 내 모든 걸 다 공개하고 용서를 구하는 길밖에 없다. 죽은 내 마누라의 성격을 그대로 빼닮은 내 딸 향이.
마누라는 내가 진실로 솔직하고 진실로 용서를 빌었을 때 용서를 해주었다. 이제 방법은 그것밖에 없었다. 나는 달려가 향이의 손목을 잡았다.
“향이야 솔직히 말할게. 처음부터 다 말할게.”
향이는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마지막으로 한 시간만 기회를 달라고 했다. 그리고 그 말을 다 들어주기만 하면 모든 걸 향이의 뜻대로 한다고 했다.
“네가 절에 들어가라고 하면 머리 깎고 낼 당장이라도 들어갈게.”
“좋아요. 한 시간 동안 실컷 지껄여 보시죠.”
향이는 정말로 날 절에 보내버릴 것처럼 비장한 각오로 벤치에 앉았다.
“잘나가던 회사에서 실직을 당했었다.......”
나는 악마의 약을 얻게 될 때부터 지금까지의 일을 말했다. 물론 적나라한 섹스이야기는 몽땅 빼버렸다. 그래서 이야기에 소비되었던 시간은 생각보다 짧았다. 향이가 간단하게 평을 했다.
“그러니까 돈 많고 시간이 많고 그러다보니 외로웠고 그래서 약으로 여자들을 가지고 논 거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향이는 조소를 날리며 말했다.
“지금부터 제 말 잘 들으세요. 아저씨는 정신병원에 당장 입원을 하세요. 최하 이년이상은 거기에서 산 다음에 절로 가세요. 알았죠? 저 갑니다.”
“향이야!”
나는 향이 앞을 막았다. 향이는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호주머니에서 얼른 약을 꺼냈다.
“이, 이게 바로 그 약이다.”
향이는 콧방귀를 꼈다.
“정말 제정신이 아니군요. 장난치시나요, 지금?”
“이건 정말 악마의 약이야. 이걸 먹으면 여자가 발정이 나고, 전화를 건 남자의 말을 무조건 듣게 되어있어.”
“사장님, 해독제 있다고 그러셨죠?”
향이가 약을 집어 들고 말하는데 왠지 불안했다.
“그래 해독제가 있어.”
“그럼 이거 제가 먹을게요. 만약에 이상 없음, 사장님은 진짜 정신병원에 입원해야 하는 거예요. 약속해요.”
“안 돼, 넌 그걸 먹으면 안 돼!”
“왜 안 돼요? 이 약이 여자를 변하게 하는 거라면서요! 왜, 내가 확인하려니까 두려우신 거죠?”
“안 돼. 넌 먹으면 안 돼!”
향이는 약을 바닥에 툭 던졌다.
“사기꾼! 이따위 초콜릿으로 누굴?”
“향이야 서울 가서 먹자. 해독제는 우리 집에 있어. 지금 먹게 되면 피서 끝날 때까지 넌 힘들 거야.”
“이봐요!”
향이는 고집불통처럼 내게 소릴 질렀다. 살기가 넘쳐흘렀다. 잠시 침묵이 흘렀고 나는 다시 호주머니에서 절반의 약을 꺼냈다. 나는 어쩔 수없이 그걸 입에 넣었다.
“자! 잘 보거라 나는 분명히 이걸 머금고 있다. 하지만 절대로 녹지 않아. 그런데 여자의 입속에 들어가면 단번에 녹아버려. 그러니 악마의 약이라는 거야. 이래도 못 믿겠니?”
나는 약을 꺼냈다. 침으로 번들거리는 그걸 향이는 냉큼 입에 넣었다.
“사기꾼! 내 입에 넣어도 안 녹잖!”
아뿔싸! 이 무슨 변고란 말인가? 나는 향이의 양쪽 볼을 두 손으로 잡곤 소리쳤다.
“뱉어! 뱉어!”
하지만!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