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구관이 색관
시연은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꺼내려다 등 뒤로 기분 나쁜 기운을 느꼈다.
동전을 넣고 음료수 캔이 떨어지는 동안, 분명 누군가 지나가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는데 시연이 허리를 숙이려하자 발자국 소리가 멈춘 것이다.
강한 스킨 냄새가 뒤에 서있는 사람이 남자란 걸 알려주고 있었다.
음료수를 뽑으려 기다리는 걸 오해하는 걸지도 모르지만 엉덩이 뒤에 남자가 서 있다는 게 왠지 기분나빴다.
시연은 선 채로 허리를 숙이는 대신 쪼그려 앉는 걸 선택했다.
음료수를 얼른 빼내 돌아가려는데 뒤에 있던 남자가 말을 걸었다.
“잠깐, 내 것도 하나 뽑아주지 않겠나?”
시연이 돌아보자 처음보는 남자가 서 있었다.
남자는 척 봐도 비싸 보이는 고급 정장을 입고 있었고 시연보다 키가 작았지만 운동을 많이 했는지 어깨가 넓고 다부진 체격이었다.
네모난 얼굴에 머리는 기름을 발라 뒤로 완전히 넘긴데다 양쪽 볼이 두꺼비처럼 축 쳐져있어서 불독을 연상케 하는 외모였다.
크고 부리부리한 눈은 웃고 있는데도 무섭게 느껴져 괜한 공포감을 줬고 시연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내리깔았다.
밖에서 였다면 그냥 무시하고 가거나 직접 뽑으라고 말했을텐데 사내인데다 그의 행색을 보니 사내 임원이거나 중요한 손님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얼른 뽑아주고 가기로 했다.
시연은 애써 웃으며 손바닥을 내밀었고 그는 지갑을 열어 만원짜리 지폐를 올려 놓았다.
“몸매만 예쁜 줄 알았는데 얼굴도 참 예쁘군. 웃으니까 더 예뻐.”
“감사합니다. 뭘로 뽑아드릴까요?”
“아가씨랑 같은 걸로 하지. 왜 직접 뽑아먹지 않는지 궁금하지? 난 말이야. 절대 어디에서건 허리를 굽히지 않아. 그렇다고 허리가 안 좋은 건 아니고. 삶의 신조라고나 할까?”
“아. 네.”
“그리고 이번에 뽑을 땐 아까처럼 쪼그려 앉지 마. 여자들, 그렇게 높은 힐 신고 쪼그려 앉으면 관절에 엄청난 무리가 가거든. 몸을 꼿꼿이 세우고 허리만 숙여서 뽑으란 말이야. 그게 보기에도 좋고 건강에도 좋다고.”
시연은 빨리 뽑아주고 가고 싶었지만 말하는데 등을 보이면 예의에 어긋날 거 같아 말이 끝날 때 까지 경청했다.
“네. 그렇게 할 게요.”
음료수가 나오자 시연은 그의 말이 신경 쓰여 이번엔 허리만 숙인 채 캔을 집었다.
하지만 그를 의식해 엉덩이는 측면을 향하게 했다.
“라인이 참 예쁘군.”
시연은 못 들은 척 하며 그에게 캔을 건내고 다시 허리를 숙여 동전과 지폐를 꺼냈다.
그런데 허리를 펴고 보니 그가 어느새 엉덩이 쪽에 옮겨 서 있었다.
시연은 소름이 돋아 빨리 그 자리를 뜨기 위해 잔돈을 건내고 돌아섰다.
그런데 쨍그랑 소리와 함께 시연이 건낸 동전들이 바닥을 구르기 시작했다.
“아이쿠. 놓쳐버렸네. 미안한데. 동전 좀 주워주겠나?”
시연은 그가 일부러 그런 것 같아 짜증 났지만 인내심을 발휘해 동전을 주웠다.
허리를 숙일 때 마다 그의 눈알이 엉덩이에 박히는 기분이었고 불쾌감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번엔 그의 손에 동전을 놓은 뒤 흘리지 않게 손가락까지 오므려주었다.
“저는 그만 가보겠습니다.”
시연이 돌아 서서 가는데 그가 뒤따라오며 귀찮게 했다.
“아가씨 이름이 뭐지?”
“이름은 왜 물으시는데요?”
시연은 계속 걸으며 짜증스럽게 되물었다.
“기억해 두려고 그러지.”
“기억 안 해주셔도 돼요.”
“내가 이름을 알아두면 아가씨한테 도움이 될 텐데.”
시연은 무시한 채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하지만 그 역시 빠른 걸음으로 뒤를 바짝 쫓았고 끝내 인사과 문 앞까지 따라왔다.
그는 시연을 쫓아 사무실 안까지 따라올 기세였다.
“왜 자꾸 쫓아오시는거죠?”
“남자들이 쫓아다닐 정도로 아가씨가 예쁜건 인정해. 그런데 방향이 같을 걸 어떻하나?”
“알겠어요. 전 여기로 들어갈 거니까 더 이상 따라 오지 마세요.”
“여기 인사과에서 근무하나?”
“그게 그 쪽이랑 무슨 상관인데요.”
“글쎄, 무슨 상관일까?”
그가 시연을 지나쳐 문을 열고 들어갔고 시연은 황당해서 따라 들어갔다.
그런데 태수가 벌떡 일어나 그를 보고 아는채 했다.
“황부장님, 어쩐 일이세요?”
“어쩐 일은? 월급쟁이가 회사에 뭐하러 왔겠어. 자네 나랑 밖에서 얘기 좀 할까?”
“정말 어쩐 일이세요?”
“일하러 왔다니까. 나 무혐의 처분 받은 거 모르는구나. 죄도 없는데 회사 못 나올 일이 뭐 있어.”
“그럼 새로 오신다는 부장님이…”
“새로 오긴 개뿔, 원래 자리 찾아가는 거지. 박부장 그 새끼는 나 쉬는 동안 땜방만 한 거고. 인사부장 자리는 나만 할 수 있는거라고.”
“조과장님은요?”
“그 자식은 2년 받긴 했는데 그 쪽 부모랑 합의만 잘 되면 집행유예도 가능할 거 같아. 그 자식이 오버해서 나까지 피해보긴 했지만 그 동안 나한테 한 것도 있고 해서 집유 받고 나오면 지방 쪽에 자리 하나 만들어 주려고. 박대리도 알다시피 내가 내 사람 하나는 잘 챙기잖아. 조과장이 없으니까 이젠 박대리가 날 보필해야지. 열심히 해 봐. 내가 시키는 것만 잘 하면 이번 승진 심사 때 과장 달게 해줄게.”
“그렇게 해주시면 저야 좋죠.”
태수는 그렇게 말 하긴 했지만 머리가 복잡해졌다.
황부장이 어떤 인간인지 잘 알기 때문이다.
그는 치료 불가능한 섹스 중독자였고 조과장을 앞세워 수 많은 여직원들을 농락해왔다.
그 수법이 치밀하고 교활해 여지껏 별 탈 없이 지내왔는데 이번에는 여직원이 자살하는 바람에 덜미를 잡히게 되었다.
유서의 내용이 공개되진 않았지만 그들이 하는 짓을 짐작해 볼 때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치욕과 수치심을 준 게 분명했다.
이제는 조과장이 하던 일을 태수가 해야 할 상황이었고 어떤 일을 시킬지 벌써부터 곤혹스러웠다.
더구나 그의 첫번째 타겟은 시연이 될 게 뻔했다.
태수가 요즘 네토라레에 빠져있긴 하지만 황부장 같은 인간에게 시연을 내줄 수는 없었다.
시연을 그에게 보내는 건 지옥에 보내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나저나. 자네. 내 말 잘 따르고 있더군.”
“네?”
“내가 그랬잖아. 인턴들 뽑을 때 제일 먹음직스러운 년을 우리과로 넣으라고 말이야. 아까 나랑 같이 들어온 년, 우리과 인턴 맞지? 어디서 그런 걸 구했어? 그냥 보고만 있는데도 온 몸이 찌릿한거 있지. 근데 자네, 얼굴 표정이 왜 그래? 갑자기 창백해졌어.”
“제...제가요?”
“어라? 말 까지 더듬고. 아까 그년. 혹시 자네가 먼저 따먹은거 아니야?”
“아니요. 제가 어떻게 감히. 그런 일은 생각도 안 해 봤습니다.”
“하긴. 내가 박대리 성격을 아는데, 그럴 위인이 못 되지. 먹고 싶긴 해도 선뜻 나서진 못했을 거야. 내가 찬찬히 전수해줄테니까 나만 믿고 따라와. 찬물도 위아래가 있으니 내가 먼저 맛 본 후에 자네한테도 기회를 줄게. 어때? 생각만 해도 좋지 않아?”
“네? 네.”
“고년, 쌀쌀맞게 튕기는 게 아주 마음에 들어. 그래야 길들이는 재미가 있거든. 말 나온김에 그 년 신상에 대해 자세히 얘기해 봐.”
태수는 눈 앞이 캄캄해졌다.
시연은 태수와 황부장이란 자가 나간 뒤 안절부절하며 조금 더 참지 못한 자신을 질책했다.
그러면서 제발 그가 새로 올 인사부장이 아니기만을 기도했다.
그를 오해하고 쌀쌀맞게 대한 것도 문제였지만 황부장 같은 사람과 같은 사무실에서 근무해야 한다는 사실이 부담스러웠다.
어느 것 하나 마음에 드는 게 없는 사람이었고 괜히 불편하고 두렵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신은 시연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았다.
“자, 다들 인사하세요. 여기 계신 분은 황치수 부장님. 원래부터 인사부장님이시고 전에 계시던 박부장님이 황부장님 안계시는 동안 임시로 계셨던겁니다.”
태수가 소개하자 황부장은 남자 인턴부터 한 사람씩 끌어안으며 인사했다.
“난 말이지. 악수 같은 건 거리감이 느껴져 싫어해. 거리감을 없애는덴 포옹만한게 없지.”
그는 포옹 뿐 아니라 엉덩이를 토닥이기까지 했다.
“이건 잘 해보자는 격려의 의미야.”
그의 거리감 없애기와 격려는 여자 인턴들에게도 예외가 없었다. 조금 차이가 있다면 좀 더 오래 그리고 더 힘차게 격려했다는 것 뿐.
퇴근 후 황부장이 자신의 복귀 기념으로 부서 회식을 제안했다.
1차는 회사 근처에 있는 일식집에서 했고 이 때는 모두가 참석을 했다.
시연은 황부장이 부담스러워 최대한 멀리 떨어져 앉았고 시선을 안 마주치려 노력했다.
하지만 한 사람씩 일어서서 자기 소개를 할 때는 부득이 그와 눈이 마주쳐야 했다.
그에게 자신을 소개하는 자리였으니까. 잡아 먹을 듯 쳐다보는 그의 눈이 무서웠고, 위아래로 더듬는 눈동자가 불쾌해서 시연은 대충 자신을 소개한 뒤 앉으려 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 소개 땐 가만히 듣기만 하던 황부장이 대뜸 질문을 했다.
“우리 시연씨는 얼굴도 예쁘지만 특히 몸매가 예술이야. 특별히 관리하는 법이라도 있나?”
시연은 앉으려다 주춤 일어서며 짧게 대답했다.
“그런 건 없는데요.”
“에이~ 거짓말. 이력서 특기사항을 봤더니 요가 경력이 꽤 되던걸? 요가를 하면 시연씨 몸매처럼 될 수 있는거야?”
시연은 그 사이 자신의 이력까지 파악한 그가 놀라웠고 아니라고 하면 또 다른 질문이 이어질 것 같아 대충 얼버무렸다.
“오랜동안 요가를 한 게 도움이 된 거 같긴 해요. 이제 앉아도 될까요?”
“잠깐. 시범을 좀 보여줄 수 있나?”
“네?”
“조금만 보여줘. 이력서에 특기란이 있는건 이럴 때 보여주라고 있는 거야.”
“근데 제가 지금 치마를 입어서.”
“에이~ 다리 막 벌리고 그런 어려운거 말고 기본적인 거 있잖아. 아 맞다. 고양이 자세. 그 거 한 번 해 줘봐. 그건 치마 입고도 가능하지?”
시연이 난감해하며 머뭇거리자 김성주가 끼어들었다.
“시연씨~ 부장님이 보시고 싶다잖아. 그 쪽 자리에선 잘 안 보이니까 여기 부장님 옆으로 와서 해봐.”
시연은 마지못해 황부장 옆의 빈 공간으로 갔고 황부장을 바라보며 고양이 자세 중 엎드리는 자세를 취했다.
고개는 바닥을 향한 채였다.
“이야~ 대단한 걸. 엉덩이를 높이 들고도 상체를 바닥에 붙일 수 있네. 그 상태에서 상체를 드는 것도 있지? 최대한 높이 들어봐 줄래?”
황부장이 고양이 자세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거 같았고 시연은 하는 수 없이 상체를 들어야만 했다.
시연은 고개를 드는 순간 두 번의 부담을 느꼈다. 황부장의 무서운 눈과 마주쳤을 때가 처음이었고, 그 눈이 벌어진 블라우스 틈으로 향할 때가 두번째였다.
시연이 빨리 끝내야겠다 생각하는 순간 그가 기습해 들어왔다.
“이건 일종의 스트레칭이니까 서두르면 안 되고 천천히 반복해야 하는거지?”
“네. 맞아요. 잘 아시네요. 천천히 해야 허리에 무리가 안 가요.”
“그럼 원래 시연씨가 하는 속도대로 천천히 5번만 반복해 줘.”
시연은 그의 속셈을 알지만 피할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정석대로 천천히 시범을 보였다.
동작을 하는 동안 시간이 정말 천천히 흐르는 것 같았고 마지막 5번째를 끝낼 때에는 땀까지 흐르고 있었다.
방안이 덥기도 했지만 많이 긴장했다는 증거였다. 시연은 자리로 빨리 돌아가고 싶었지만 황부장은 그걸 원치 않았다.
“잘 했어. 이번엔 옆 모습을 보여 줘봐. 원래 방송에서도 여러 각도로 보여주잖아. 안 그래? 이번에도 5번 정도 해주면 좋겠는데.”
시연은 ‘그래 빨리 보여주고 자리로 가자' 라며 스스로를 노면한 뒤 옆으로 몸을 돌려 동작을 반복했다.
그런데 치마가 올라가는 게 문제였다.
전 동작에서는 뒤에 아무도 없어서 신경 안 썼는데 옆 모습일 땐 사정이 달랐다.
횟수가 늘어갈수록 점점 올라가더니 급기야는 치마가 상체 쪽으로 미끄러져 엉덩이가 그대로 드러나 버렸다.
시연은 너무 놀라 얼른 일어나며 치마를 끌어 내렸다.
태수는 난처해하는 시연이 안쓰러우면서도 묘한 흥분감을 느끼고 있었다.
황억만을 제외한 모두가 시연을 지켜보고 있었고 김성주는 아예 일어서서 보고 있었다.
치마가 조금씩 올라갈 때 다른 이들의 시선이 엉덩이로 간 반면 태수는 시연의 엉덩이 뿐 아니라 황부장과 김성주의 표정까지 번갈아 읽고 있었다.
그들의 초조한 눈 빛, 상기된 표정, 그리고 당황하는 시연의 얼굴, 그런 모든 것들이 태수를 흥분시켰다.
태수는 시연의 엉덩이가 드러나는 순간 그곳을 보는 대신 두 남자의 표정을 관찰했다.
황부장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고, 김성주는 입을 벌리며 탄성을 내뱉었다.
뒤에서 봤다면 스타킹 속으로 비친 팬티까지 볼 수 있는 상황이었다.
박부장의 다음 요구가 태수의 심장을 요동치게 했다.
“자, 이제 뒷 모습을 볼 차례인가? 이번에도 5번만 해줘.”
“부...부장님. 그만하면 안 될까요? 보셨겠지만 치마가 올라가서요.”
“그건 걱정하지마. 내가 붙어있다가 올라가면 얼른 내려줄게. 기왕 시범 보인거 끝까지 해야지. 어서.”
“그래도 뒷 모습은 좀 민망해서…”
“민망하긴 뭐가 민망해. 요가할 때 뒤에는 사람 없나? 시연씨가 그렇게 말하니까 괜히 내가 이상한 사람 같잖아. 방송에서 보니까 뒷모습도 클로즈업해서 잘만 보여주던걸. 난 그저 자세를 보려는 거 뿐이야. 박대리~ 자네도 뒤에서 보이는 동작이 궁금하지 않아?”
시연이 도와달라는 듯 눈빛을 보냈지만 태수는 이렇게 대답할 수 밖에 없었다.
“시연씨~ 그냥 빨리 하고 들어 와.”
시연은 엉덩이를 보이고 엎드린 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황부장이 다가오는 소리 때문이었다.
뒤를 볼 수 없지만 살김이 통할 만큼 가깝게 느껴졌다.
태수는 어느새 김성주처럼 일어서 있었다.
황부장에 가려져 안 보이기도 했고 다른 남자의 눈 앞에 엉덩이를 들고 있는 아내의 자극적인 모습이 태수를 그렇게 만들었다.
엉덩이가 치마를 터뜨릴 듯 부풀어 있었고, 팬티 라인이 뚜렷하게 그려져 있었다.
상체를 들었다 숙일 때마다 치마가 올라갔고 황부장은 팬티 밑 부분이 보일 때 까지도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그 때가 세 번째 반복 중이었다.
시연은 그 상태에서 한참을 멈춰있었다.
이번에 상체를 숙이면 치마가 상체 쪽으로 완전히 흘러내릴 거 같아서였다.
“부장님, 치마 좀 내려주실래요?”
시연이 부탁했고 황부장은 치마를 내리기 위해 엉덩이에 손을 댔다.
끝단이 엉덩이 중간에 붙어 있어서 손바닥 전체의 마찰을 이용했는데 미끄러지기만 할 뿐 내려가질 않았다.
결국 그는 틈 사이로 엄지를 넣고 손바닥으로 엉덩이를 움켜쥐고서야 잡아당길 수 있었고 덕분에 엉덩이의 감촉을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시연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것도 남편인 태수가 보는 가운데 황부장에게 엉덩이가 잡히는 수모를 당했지만 치마가 당겨진 뒤 다시 동작을 취했다.
오로지 빨리 끝내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이번에는 엉덩이 윤곽이 더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황부장이 치마 끝을 바짝 당기고 있어서였다.
“시연씨는 부모님에게 감사해야 해. 정말 축복받은 몸매야. 기가 약한 남자들은 보기만 해도 지리겠어.”
시연은 엄연한 성추행이고 언어폭력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냥 생각만 했다.
복잡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고 태수를 난처하게 하기도 싫었다.
시연이 화를 냈다면 태수가 도와줬을까?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만 태수가 곤란해질 것만은 확실했다.
태수에게 선택의 짐을 지우고 싶지 않았다.
시연은 지금의 불쾌감을 드러내지 않고 유머로 받아쳤다.
난처해하기 보다 당당한 척이라도 하고 싶었다.
“제가 원래 한 몸매 하죠. 남자라면 모두 반할정도로. 그래도 유부남은 사절인 거 아시죠? 물론 사내 연애도 관심없고요. 이제 치마 좀 놔주실래요?”
시연은 그렇게 말한 뒤 당당하고 도도하게 자리로 돌아갔다.
가슴이 콩닥거렸지만 왠지 통쾌하고 후련했다.
시연은 황부장을 자신을 쫒아다니던 남자들처럼 생각하기로 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가 하찮아 보였고 자신감이 생겼다.
귀찮게 하면 언제든 면박을 주면 되는 거였다.
시연은 원래 태수를 제외한 모든 남자들에게 당당하고 도도한 여자였다.
식사를 마치고 밖에 모였는데 억만은 보이지 않았다.
늘 그랬듯 말도 없이 사라진 게 분명했다.
사실 황부장보다 더 신경 쓰인 건 억만이었기에 시연은 속으로 안도했다.
그가 무리한 요구를 할까봐 걱정했는데 조용히 밥만 먹고 사라져준 게 고마웠다.
황부장이 2차로 노래주점에 가자고 하자 시연은 내키지 않았다.
간단히 호프 한잔은 괜찮지만 그곳은 솔작히 부담스러웠다.
“부장님, 저는 집에 일이 있어서 먼저 가 볼게요.”
시연은 어정쩡하게 끌려가기 전에 먼저 선수를 쳤다.
“무슨 소리야. 섭섭하게. 집에 숨겨둔 애인이라도 있어? 뜨거운 밤 보내려고 기다리는거야?”
그 말을 듣는 순간 시연은 경비 박씨 아저씨가 생각났다.
몸이 달아 시연을 기다릴거라 생각하니 걱정이 됐다.
어쩌면 억만 역시 시연의 집 근처에서 못된 수작을 준비중일지 몰랐다.
태수와 함께라면 모르지만 시연 혼자 집에 가는 건 좋은 생각 같지 않았다.
차라리 태수 옆에 붙어있다가 황부장이 치근거리면 그 때 나와도 될 거 같았다.
억만도 없고, 태수만 옆에 있으면 괜찮을 거 같았다.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럼 잠깐만 앉았다 갈게요.”
태수와 황부장이 앞장서 걸었고 인턴들을 조금 뒤쳐져서 따라 왔다.
황부장은 인턴들과의 거리를 확인하더니 태수에게 은밀히 뭔가를 내밀었다.
“이게 뭔가요?”
태수가 묻자 황부장이 어깨동무를 하며 속삭였다.
“이따가 내가 신호하면 한시연 술잔에 몰래 넣으라고. 무조건 마시게 해야 되는 거 알지? 오늘 시키는대로만 잘 하면 자넨 박대리가 아니라 박과장이 되는거야. 나랑 어울리려면 대리보다는 과장이 낫지 않겠어?”
태수는 벌써부터 죄를 지은 양 가슴이 콩닥거렸다. 황부장은 오늘 밤 시연을 가지려는 거 였고 태수에겐 커다란 중압감이 느껴졌다.
솔직히 황부장이 아니라 박부장이었다면 이렇게 갈등하지 않았을거다.
아내가 다른 남자에 의해 범해지는 걸 태수도 보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황부장은 예외였고 태수나 시연이 감당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선택의 순간이 올 건 예상했지만 이렇게 빨리 올 줄이야.
방을 배정 받은 뒤 시연은 일부러 화장실에 다녀왔다.
황부장이 옆에 앉을 거 같아 꾀를 부린 것이다.
모두가 자리를 잡으면 황부장과 가장 떨어진 곳에 앉으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방에 들어 섰을 때 자신의 꾀가 소용 없음을 알았다.
방에는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쇼파 두 개가 마주 보고 있었는데 그중 한 쪽에 성주, 영주, 태수 순으로 앉아 있고 반대쪽은 황부장 혼자 앉아 있었다.
그가 지능적으로 3인용 쇼파의 정 중앙에 앉아 있어서 시연은 어쩔 수 없이 그의 옆에 앉아야만 했다.
테이블 위에는 벌써 술과 안주가 세팅되어 있었고 황부장이 병을 들어 한 잔씩 따라주었다.
황부장이 잔을 들어 시연에게 흔들자 시연도 두손으로 병을 들어 그의 잔을 채웠다.
황부장 옆에 다소곳이 앉아 술시중을 드는 아내, 그 모습을 보는 태수의 기분이 묘했다.
뭔가 새롭고 신선한 자극이었다.
둘의 모습은 정상적인 관계라기 보다 마치 돈 많은 손님과 접대부를 연상시켰다.
황부장이 아내의 블라우스에 손을 넣거나 엉덩이를 주무르는 상상을 하니 목구멍이 타들어가고 뒷통수 밑으로 감전된 듯 찌릿거렸다.
황부장의 지시에 따라 잔이 모두 비워진 뒤 영주가 먼저 무대로 나갔다.
그녀는 여대생의 풋풋함 뒤에 숨겨져있던 끼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유명 걸그룹들의 노래를 선택한 뒤 섹시댄스를 추며 노래를 한 것이다.
시연의 요가 시범이 마음에 걸렸는지 황부장에게 엉덩이를 흔들며 적극적이고 과감하게 어필했다.
황부장의 허벅지 위로 엉덩이를 쓰러내릴 땐 모두가 탄성을 내질렀다.
시연은 넋을 잃고 쳐다보는 태수를 보자 괜히 얄밉고 꼬집어주고 싶었다.
옆자리였다면 분명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런 시연을 놀리기라도 하는 듯 영주가 태수 쪽으로 이동했다.
그녀는 태수 무릎에 아예 주저 앉아 와이셔츠 위로 가슴을 어루만지더니 태수의 손을 자신의 골반에 얹고 엉덩이를 돌리기 시작했다.
태수는 시연이 노려보는 걸 알았지만 자신도 모르게 터지는 탄성을 주체할 수 없었다.
한 마디로 표정관리가 되지 않았다.
결국 영주의 노래는 태수의 무릎 위에서 끝이 났고 음악이 끝난 뒤에도 영주는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거, 뭐야~ 송영주씨. 박대리한테 관심있는 거야? 말 해봐. 둘이 어디까지 간 거야?”
황부장의 말을 태수는 시연의 눈치를 보며 걷어냈다.
“아니에요. 그런 거. 저 결혼한 거 잊으셨어요?”
“요즘, 그런게 어딨어? 둘이 좋으면 엔조이하는거지. 걱정 마. 우리끼리 비밀로 해줄테니까. 그리고 난 송영주씨한테 질문했는데.”
난처해하는 태수와 달리 영주는 대범했다.
1차 때부터 술을 많이 마시더니 작정을 한 모양이었다.
“맞아요. 부장님. 저 박대리님 좋아해요. 진도는 오늘부터 나가보려구요.”
“그래? 송영주씨 마음에 든다. 지금부터 박대리는 송영주 니 해라. 내가 책임질 테니까 마음대로 해.”
영주가 태수의 입술에 키스했다.
모두가 놀랐지만 더 놀란 사람은 시연이었다.
태수가 아무런 거부없이 입술을 받은 것이다.
더구나 영주의 엉덩이를 쓰다듬고 있었다.
시연이 보는데도 저런데 만약 먼저 갔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시연은 울화가 치밀었다.
황부장이 시연에게 빈 술잔을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뭘 그렇게 봐. 부러워할 거 없어. 원래 송영주 같은 나이에는 박대리 같이 키크고 인물 잘난 놈을 좋아하게 되 있어. 근데 저거 다 헛거야. 진짜 제대로 된 남자는 나 같은 남자란 말이지. 백번 말하면 뭐 하겠어. 겪어보기 전엔 몰라. 어때? 한시연씨. 나 한번 겪어 보지 않겠어?”
시연은 묵묵히 황부장의 잔을 채우며, 그러고 보니 자신이 태수를 처음 만나 사랑한게 딱 영주의 나이였단 생각을 했다.
시연만을 사랑해 줄 것 같은 순수함에 끌리기도 했지만 태수의 외모에 끌린 것도 사실이었다.
불같은 사랑을 했고, 사랑의 결과물이 생겼고, 멋진 커리어 우먼이 되겠다는 꿈을 버리고 결혼을 했고, 졸업을 했고,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것 같은 아이가 태어났고, 그 아이가 희귀병을 앓았고, 오랜 병원 생활로 빚이 늘었지만 아이는 결국 시연의 곁을 떠났고, 우울증에 시달렸고, 빚 때문에 돈을 벌어야 했고, 그러다 조건이 좋은 태수의 회사에 인턴으로 들어왔고, 태수에게만 몸을 열겠다는 다짐을 못 지켜 여러 남자에게 몸을 줘야 했고, 지금은 3년전 자신 나이의 여자와 키스하고 있는 남편을 지켜보면서 황부장의 잔에 술을 따르고 있었다.
그게 시연의 현재 모습이었다.
시연은 갑자기 우울해졌고, 취하지 않겠다던 다짐을 잊은 채 황부장에게 자신의 빈 잔을 내밀었다.
잔이 채워졌고, 단숨에 들이켰고, 무대로 나갔다.
이런 곳에 와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나지만 노래도 춤도 자신있었다.
남자들을 미치게 만드는 동작도 잘 알고 있었다.
태수가 보는 앞에서 성주나 황부장을 유혹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시연은 그러지 않기로 했다.
그러는 대신 잠시 이성을 잃은 태수에게 처음 함께 노래방에 갔던 때를 떠올리게 해주고 싶었다.
시연은 박지윤의 ‘난 사랑에 빠졌죠'를 선곡 했고 전주가 흘러나오자 태수를 바라보며 노래했다.
태수는 스피커를 통해 시연의 음성이 흘러나오자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핑계일지 모르지만, 술에 기분좋게 취한데다 영주의 자극적인 춤과 노골적인 스킨쉽이 더해지자 남자로서의 본성을 억제할 수 없었다.
영주가 흔드는 엉덩이를 만지고 싶었고 만질 수 있게 되었고, 만졌다.
흥분된 상태에서 맛보는 풋풋한 여대생의 키스는 달콤하고 짜릿했다.
시연이 보고 있다는 사실도 잊게 할 만큼.
어쩌면 황부장과 시연 사이에서 고민하던 자신을 잠시 잊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잠시라도 쾌감 속에 이성적 고뇌를 숨기고 싶었다.
그런데 시연의 노래를, 그것도 시연이 자신에게 고백할 때 부르던 그 노래를 듣는 순간, 태수는 뭔가에 세게 얻어맞은 듯 통증을 느꼈다.
자신이 아내 앞에서 무슨 짓을 한 것인가.
황부장으로부터 지켜내야할 아내를 두고 다른 여자와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태수는 영주를 옆으로 밀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원망스런 눈빛으로 노래하고 있는 시연을 향해 비록 입모양이었지만 미안하다 말했다.
그리고 밖으로 나갔다.
시연은 노래의 대상이 나가자 계속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고 때마침 성주가 무대로 나와 마이크를 들었다. 태수의 옆에 있던 그는 시연이 자신을 향해 노래한다 착각한 듯 보였다. 그는 어깨동무를 하더니 시연을 그윽하게 바라보며 노래했다. 난 사랑에 빠졌죠를 나도 사랑에 빠졌죠로 바꿔부르며. 시연은 어의가 없어 노래하는 그를 멍하니 바라봤고 그는 멍하니를 애뜻하게로 착각하며 목청껏 열창했다. 그러는 사이 영주마저 밖으로 나갔고 그것이 시연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눈 앞에 보이지 않는, 두 사람이 만들어내는 온갖 이미지들이 시연을 힘들게 했다. 음악이 끝났고, 주위가 조용해졌고, 얼큰하게 취한 성주가 황부장에게 말했다.
“부장님~ 저도 시연씨랑 사랑해도 될까요?”
돌아온 것은 개소리 말고 어서 떨어지라는 황부장의 무서운 눈총이었다. 얼마나 이글거리는지 옆에 있던 시연도 두려울 정도였다. 성주는 그제야 상황파악이 되는지 얼른 말을 바꿨다.
“...는 농담이고요. 부장님~ 부르스 어떠세요? 시연씨랑 한 곡 땡기시죠.”
그는 얼른 부르스 메들리를 선곡한 뒤 황부장을 끌어 내 시연의 팔을 쥐어주었다.
“두 분, 즐거운 시간 보내십쇼~”
성주는 그 말을 남기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황부장은 처음부터 몸을 바짝 붙였다.
“부장님, 너무 붙으신 거 같아요. ”
“이제 한 식구고 매일 볼 텐데 거리 둘 필요 뭐 있어. 이 정도 친밀감은 유지 해야지.”
시연은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
황부장과 단 둘이 남은것도 불편했지만 그보다 밖의 상황이 궁금해 머릿속이 복잡했다.
황부장에게 안겨 그에게 이끌려 리듬을 타면서도 시연의 마음은 밖으로 향해있었다.
어서 곡이 끝나 바깥에 나가보고 싶었다.
하지만 밖에 있던 마음이 제자리를 찾는데는 오래걸리지 않았다.
허리에 있던 손이 은근슬쩍 엉덩이로 갔을 때는 그러려니 했다.
황부장도 남잔데 술까지 마셨으니 그럴 수 있다 생각했다.
상대가 무안하지 않게 적당히 받아주는 것도 매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양 손으로 엉덩이를 움켜 쥐는 건 정도가 지나쳤다.
“부장님, 많이 취하셨나봐요. 이러시면 곤란해요.”
“나 하나도 안 취했어. 멀쩡해. 니 엉덩이 말이야. 아주 마음에 들어.”
“누가 보면 어쩌시려구요. 어서 놔 주세요.”
“아무도 없는데 뭐 어때. 박대리랑 송영주는 따로 재미보고 있을 거고, 김성주 그 자식은 눈치껏 안 들어올거야.”
“재미를 보다뇨?”
황부장의 손이 치마를 당겨 올리고 있었지만 지금 시연에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다 알면서 왜 이래. 순진한 척 하는거야? 아님 정말 모르는 거야? 여지껏 왜 안 들어오겠어? 아마 빈방 찾아 들어가 그짓하고 있을 거라고.”
“말도 안 돼. 박대리님 유부남인거 잊으셨어요? 박대리님도, 영주씨도 모두 후회할거라고요. 가서 말려야 겠어요.”
“너도 박대리 좋아하지?”
그 말이 뿌리치고 나가려던 시연을 멈추게했다.
“아니에요. 그런거. 전 그냥…”
“꾸며봐야 소용없어. 내가 그 정도 눈치도 없는 줄 알아? 송영주한테 박대리 뺏길까봐 이러는거잖아.”
“아니에요. 정말. 전 박대리님 같은 스타일 안 좋아해요.”
“뭐. 그렇다고 해두지. 지금 그런 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 박대리 일은 박대리가 알아서 하게 두고 우리 얘기나 해보자고. 난 처음부터 니가 마음에 들었어. 나랑 즐기는 거 어떻게 생각해?”
“농담이 지나치시네요. 못 들은 걸로 할 게요. 어머~ 치마는 왜 자꾸 올리세요?”
“가만 있어 봐. 내가 스타킹 감촉을 좋아하거든. 말 잘 들으면 송영주 짤라버리고 너 정직원 시켜줄게. 어때? 송영주 꼴보기 싫지? 나 그럴 능력 있다고.”
“그러실 필요 없어요. 그러니까 제발 좀 놔 주세요.”
“싫다면?”
황부장의 입술이 시연을 덮쳤다.
시연은 너무 놀라 그를 밀어냈고 따귀를 때렸다.
무서운 그의 눈이 시연을 노려보자 시연은 가방을 챙겨 밖으로 뛰쳐나갔고 문 밖에 서 있던 태수를 보자 울음이 쏟아졌다.
시연은 태수까지 밀쳐내고 주점 밖으로 도망쳤다.
시연은 모든 게 다 싫어졌다.
커리어우먼으로 성공하는 것도, 지위를 이용해 추근대는 인간들도. 무엇보다도 태수에 대한 믿음이 깨진 게 가장 큰 충격이었다.
시연은 정신없이 거리를 떠돌아 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