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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21 2. 뒷구멍으로 호박씨 까기 (21/109)

00021  2. 뒷구멍으로 호박씨 까기  =========================================================================

                                    

 2. 뒷구멍으로 호박씨 까기 8화 

 현숙은 다듬은 파를 들고 도마 앞으로 가면서 한숨을 길게 내 쉬었다. 문득 남편 모르게 다른 남자들과 정을 통하는 여자들이 부러운 생각이 드는 순간 깜짝 놀랐다. 다른 여자들은 몰라도 자신은 절대로 그래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어떤 유혹이 있더라도 절대로 그런 일에 휩쓸려 가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모처럼 집에서 쉬려고 했는데 그것도 틀렸나 보군.      

 현숙이 떡볶이를 하려고 후라이팬을 가스렌지 위에 올려놓고 있을 때 기철이 밖으로 나오면서 투덜거렸다.

  

 “왜? 회사에 나가 봐야 하는 거예요?”

“회사 일 때문이 아냐. 승수 한태 전화가 왔는데 중학교 선생 하는 기호 어머님이 조금 전에 돌아가셨다는 거야. 지금 병원이래.”

 “어머, 그 분 지난해 겨울에 뵈었을 때만 해도 정정하시더니……어쩜!”

 승수나, 기호 모두 남편의 고등학교 동창으로 형제처럼 지내고 있는 친구들이었다. 현숙은 깜짝 놀랐다는 표정을 지으며 기철 앞으로 갔다.

 “원래 위암을 앓으셨나 봐. 그러다 갑자기 재발이 되서 병원에 입원했더니 이 주일 만에 돌아가셨대.”

 “그럼 자기도 병원부터 들렸다 가 봐요. 지기도 몸이 안 좋잖아.”

 현숙은 남편 걱정이 앞섰다. 그렇지 않아도 몸이 안 좋아 조퇴한 남편이 영안실에 가서 찬바람이라도 맞게 되면 더 안 좋아 질 것 같아서 였다.

 “알았어. 병원에 들렸다가 집에 안 들리고 곧장 그쪽으로 갈게.”

 “몇 시쯤 올 건데?”

 “오늘은 못 들어 올 꺼야. 다른 사람도 아니고 기호 어머님인데 밤샘 해줘야지. 새벽에 옷 갈아 입으로나 들어올게.”

 “안돼요. 그러다 자기부터 병원에 입원하겠다. 그러니까. 대충 눈치 봐서 일찍 들어와요. 네?”

 현숙은 걱정스럽게 말하고 나서 안방으로 들어갔다. 장롱  에서 두툼한 오리털 파카에다 속 내외를 내 놓으며 남편을 바라보았다. 조퇴를 하고 집에 들어 올 때보다는 혈색이 많이 좋아지긴 했지만 아무래도 정상은 아닌 것 같아서 다시 부탁을 했다.

 “이번만은 내 말대로 오늘 저녁에 들어와. 알았지?”

현숙은 문득 오늘 기철이 들어오지 않으면 왠지 김현세를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몸을 떨면서 부탁을 했다.

 “나 혼자만 쏙 빠지면 나중에 친구들한테 욕먹는다고. 하지만 될 수 있으면 일찍 들어올게. 근데 보람이 데리러 간 승혜는 왜 안 오는 거야.”

 기철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영안실에 가면 내일 새벽에나 빠져 나올 수밖에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면서 아내의 생각을 다른 곳으로 바꾸기 의해 승혜를 찾았다. 

 “만화책보고 있겠지 뭐. 김선생 집에 가면 만화책이 널려 있잖아. 승혜 걱정은 하지 말고. 오늘 일찍 들어오는 거다. 자 약속 해.”

 현숙은 목이 탔다. 마른 침을 삼키면서 옷을 갈아입고 있는 기철의 손을 잡아 당겨서 억지로 손가락을 걸었다.

 “알았어. 노력 해 볼게.”

 “고집 피울 때나 피우라고. 몸이 안 좋아서 회사에서 조퇴까지 했으면서 도대체 왜 그래?”

 현숙은 자신이 이기적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슬며시 화가 났다. 아내가 바람 앞에 촛불처럼 흔들리고 있는데도 친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저의를 알 수가 없어서 야속하기만 했다.

 “내 몸 내가 관리해. 자긴 떡볶이 늘어붙는 거나 관리하라고. 내 코로는 떡볶이가 후라이팬에 늘어붙는 게 아니고 타는 것 같은데.”

 “어머머, 내 정신 좀 봐. 떡볶이 올려놨는데.” 

 현숙은 화들짝 놀라며 밖으로 나왔다. 가스렌지 위에 올려놓았던 후라이펜에 있는 떡볶이는 막 늘어 붙기 일보 직전이었다. 얼른 물을 부어서 떡볶이를 뒤집고 있는 대 기철이 밖으로 나왔다.

 “같다 올게.”

 “점심은 먹고 가야지. 거기 가면 끼니도 제대로 못 챙길텐데.”

 기철은 벌써 신발을 신고 있었다. 현숙은 그런 기철을 바라보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어차피 모두 점심 안 먹고 모일텐데. 나 만 점심 먹고 왔다고 할 수 없잖아.”

 기철은 그 말을 남겨 놓고 밖으로 나갔다. 현숙은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체념을 하자 또 다른 생각이 들었다. 모처럼 평일날 집에 있는 남편에게 점심도 제대로 챙겨 주지 못한 자신의 무관심을 탓하며 닫힌 문을 한참 동안이나 쳐다봤다. 가슴이 아스라하게 젖어 오는 것을 느끼며 이러면 안된다는 생각 끝에 창문 앞으로 갔다.

 “스……승혜……”

 현숙은 창문을 열고 막 일층 현관문을 빠져 나오는 남편을 부르다가 말꼬리를 흐리고 말았다. 김현세가 종점 슈퍼에서 무엇인가를 사 가지고 오다가 기철이 있는 쪽으로 슬슬 걸어오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나서 였다.

 “안녕 하십니까?”

 어머머! 뻔뻔하기도 하지. 감히 누구 앞에 인사를 해? 김현세가 허리를 구부정하게 숙이고 남편에게 인사를 하는 게 보였다. 이어서 남편이 골목 밖을 손짓하며 무언가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슬그머니 창문을 닫았다. 

그들의 대화 내용을 들어보지 않아도, 김현세는 낮에 웬일이냐고 물었을 것이고, 남편은 몸이 안 좋아 일찍 들어왔다가 갑자기 초상을 당한  친구가 있어 가는 길이라고 말했을 것이 틀림없었다.

 왜 하필이면……거기서……

 현숙은 그 동안 남편의 건강 때문에 잠시 잊고 있었던 김현세의 얼굴이 다시 떠오르기 시작해서 손놀림이 한없이 더디기만 했다. 그러면…… 안돼, 나는 승혜와 남편이 있잖어. 그 사람은 다혜가 있고……지우려고 해도 김현세의 감촉이 자꾸 떠올라서 스스로를 꾸짖으며 가스렌지의 불을 껐다.

 내일 새벽에나 옷 갈아 입으로 올게.

 김현세 생각에 속이 답답한 것 같아서 냉장고에 있는 생수를 먹으려 할 때 였다. 갑자기 남편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순간 가슴이 두근거리면서 얼굴이 빨개지는 것을 느꼈다. 김현세 얼굴을 머릿속에서 지워 버리려고 노력하는 도중에 남편이 말이 생각난 것은 의식과 반대로 본능은 자꾸 그를 원하고 있었기 때문일 꺼라는 생각이 들어서 였다.

 현숙은 혼란스러움 속에서도 승혜와 보람이에게 정성껏 떡볶이와 짜파케티를 맛있게 만들어 주었다. 설거지를 하고 나서 집에 가만히 있으려니 도 김현세의 얼굴이 떠올랐다.

 안돼……

 그녀는 일부러 아래층의 다솔이네 집에 갔다. 거기서 커피를 마시면서 부러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땅거미가 지기 시작할 때쯤에서야 집으로 왔다.

                       

 “승혜야!”

 집에 있어야 할 승혜가 보이지 않았다. 순간 짜증이 났다. 보나마나 숙제를 한답시고 보람이네 집에서 만화책을 보고 있거나, 오락을 하고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어서 였다.

 혼내 주어야 겠어!

 다솔이네 집에 가면서 다른 곳에 가지 말고 보람이와 집에서 동화책을 보면서 놀고 있으라고 했던 말이 떠오르면서 속이 상했다. 하필이면 오늘 같은 날 보람이네 집에 가서 저녁 먹을 때가 됐는데도 돌아오지 않느냐 하는 점이 짜증스럽기도 했다.

 아냐……승혜가 무슨 잘못이 있어.

 팔짱을 끼고 거실을 맴돌며 승혜가 돌아오길 기다렸다. 그러다 어느 한 순간 모든 책임은 자신에게 있지 어린 승혜야 잘못이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 가슴이 아파 왔다. 이래서 죄를 짓고는 못산다는 말이 있나 봐. 혼자 중얼거리면서 식탁 앞에 앉았다. 

벽시계를 봤다. 오늘 따라 시간이 토끼처럼 깡충깡충 뛰어 가고 있는 것 같았다. 벌써 일곱 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창문밖에는 어느 틈에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안되겠어.

 현숙은 김현세의 얼굴 보기가 민망스러워서 마냥 앉아서 기다리고 있을 수 만 없다고 생각했다. 이럴 때 전화번호라도 알고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라고 생각하며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아래층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승혜만 대리고 나오면 되지. 뭐!

 지하층까지는 내려오긴 했지만 막상 벨을 누르려니까 김현세의 얼굴이 또 떠올랐다. 붉게 충혈 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던 눈빛이 선명하게 살아 오르는 것 같아서 슬며시 손을 내렸다. 그러다 승혜가 있는데 설마 이상한 생각이야 하려고 하는 생각이 들어 용기 있게 벨을 눌렀다.

 “어, 현숙씨!”

 문을 열어 준 사람은 예상했던 대로 김현세 였다. 그는 집안이라 그런지 헐렁한 추리닝 바지에 소매가 짧은 티셔츠 차림이었다. 

 “우리, 승혜……”

 현숙은 자신이 잘못한 건 없으니까 기죽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목소리가 떨려 나오는 걸 느끼며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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