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0 2. 뒷구멍으로 호박씨 까기 =========================================================================
김현세는 현숙이 건네주는 생수를 거침없이 마시고 나서 돌려주었다. 그러다 현숙이 빨갛게 상기된 얼굴로 생수병을 받은 순간 다시 달려들어 키스를 했다.
“약속을 지켜야 합니다.”
김현세가 옷을 입고 포옹을 하며 입술을 내밀었다.
“지금 했잫아요.”
현숙은 조금 전과 다르게 김현세의 입술이 얼음을 머금었던 것처럼 차갑다는 느낌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거절을 했다.
밖에는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다. 현숙은 이상하도록 가슴이 편해지고 있는 것을 느꼈다. 마치 기다리고 있던 매를 맞아 버린 후에 가슴이 편해지는 그런 기분이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김현세를 두려워했던 것은 가정이 깨질 것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그를 향한 목마름이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여하튼 그를 만나고 나서부터는 기분이 한결 낳아졌다.
비가 내리기 시작한 지는 한참 되었는지 보도불럭이 물에 젖어 번들거리고 있는 것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잔뜩 움추린체 골목을 빠져나갔다.
영이네 는 때묻은 목장갑을 낀 손으로 사과를 한알, 한알 닦아 내고 있었다. 박스 안에 들어 있던 사과가 그녀의 장갑 낀 손을 한번씩 스쳐 지나갈 때마다 윤이 나도록 반짝 거렸다.
“갑자기 왠 비 래요.”
현숙은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를 들었음에도 짐짓 모르고 있었던 표정으로 우산을 접으며 웃음으로 인사를 했다.
“글세 말여. 이왕 내릴 비면 장대비처럼 쏟아져 내릴 일이지, 과부 기분 심숭생숭 해 지게 왠 가랑비가 내리는지 모르겠네.”
현숙은 영이네 가 닦아 놓는 사과 중에서 알이 굵고 큰 것으로 몇 알 고르기로 하고 그녀 옆으로 갔다.
“사람이나 과일이나 때깔이 좋아야 실속이 있능겨. 이 사과 맛이 그만잉께. 이왕이면 많이 사가 덤으로 하나 더 줄팅게 말여.”
영이네는 현숙이야 사과를 고르던 말던 하던 일을 계속 했다.
“사과 값이 비싸서 많이 살수가 있어야죠. 천 원에 얼마씩 한데요?”
“세 개에 천원만 줘. 모래내 시장 가도 여기 보다는 비쌀 겨. 그라고 말여, 계, 는 들 거지? 이 번으로 줄텡께 꼭 들으라고. 들어서 손해 볼거 없어. 이 번이면 공짜나 마찬가지 아녀.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저 밑에 공터 옹기장수 알지. 그 여편네가 이 번 달라고 사정사정 했쌓는 걸. 승혜 엄마 생각해서 삼번 으로 미뤘잖어. 그라니까 내 체면을 생각해서라두 계는 꼭 들어야 햐. 알았지?”
“ 그 분한테 이 번을 주시지 왜 저한테 이 번을 주시려고 그러는 거예요. 저는 아직 결정도 안 내렸는데.”
현숙은 이 번을 준다는 말에 구미가 당기긴 하나 결정을 내리지 않은 체 웃으면서 반문했다.
“그 여편네야 서울 슈퍼 단골 아님감. 그라고 승혜 엄마는 우리 집 단골잉께 당연히 이 번을 줘야지 안 그려? 그라고 결정을 내리고 안 내릴 것도 없어. 막말로 은행에 가 봐. 적금 한달치 불입했다고 원금을 내 줄거 가텨. 어림 반푼 어치도 없지. 그것 뿐인 줄 알아. 인감 증명서 떼와라. 보징인 안쳐라, 귀찮은 서류가 좀 많아. 그랑께 우리 같이 없는 사람들은 뭐니뭐니 해도 몫돈 만드는 데는 계만큼 좋응게 없어. 하긴 승혜 내야 남편 직장 확실하겠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월급날 만 되면 돈이 착착 나오니까 해당 사항 없는 말인지도 모르지만 말여.”
영이네가 현숙을 계원으로 끌어 드리는 이유는 마지막 말에 있었다. 재벌 회사는 아니지만 이름만 대면 쉽게 떠오르는 중소 기업체에 다니는 남편을 둔 현숙이 계원이 된다면, 다른 사람이 보기에 제법 믿을 만한 사람만 계원으로 가입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아줌마 말대로 이 번을 든다면 그만큼 불입액도 많아지잖아요?”
현숙은 계를 들어보고 싶은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지는 것을 느끼며 구체적으로 물었다.
“불입액이 많은 거야 당연한 거 아녀. 그란데 아무리 불입액이 많다 해도. 삼 백 만원에 대한 이자 보다는 작응께. 그런 걱정일 랑 하지도 말아.”
계의 구조가 선 순위로 갈수록 불입액이 많아지고 후순위로 갈수록 불입액이 적어지게 마련이다. 바꾸어 말한다면 계금을 미리 타면, 늦게 타는 사람들의 이자를 보충해 주게 되고, 늦게 타는 사람은 불입액 총액이 원금 보다 적게 된다. 영이네는 계 오야를 하는 틈틈이 사채놀이를 하여 쏠쏠한 재미를 보는 여자답게 당연하지 않느냐는 얼굴로 잘라 말했다.
“하긴 그런 맛에 계를 든다고 하는 말은 들었어요.”
현숙은 사과를 비닐 봉지에 담아 놓고, 냉장고로 가서 피티병에 든 콜라를 꺼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내 말이 바로 그말여. 그라고 곗돈을 타면 내가 믿을 만 한데다 놔줄게. 한 달에 육만 원씩 착착 나오는 구멍에다 말여. 그람 말번 보다 원금이 훨씬 적게 들어 갈껴. 그랑께 두 말 하지 않게 계 드는 걸로 생각햐. 알았어?”
영이네 는 현숙의 돈을 다른 사람한테 빌려주고 적어도 이부 오리는 받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되면 가만히 앉아서 한 달에 만 오천원 씩 굴러 들어오는 셈이 된다.
“알았어요. 하지만 꼭 든다는 말은 아니고, 승혜 아빠하고 상의를 해 봐야 하니까 지금 확답을 지을 수 없군요.”
“그랴. 아직 시간은 많으니께 천천히 생각해도 상관없지 뭐.”
영이네는 현숙이 가입하는 쪽으로 확신을 둔체 가능한 부담을 갖지 않도록 쉽게 대답했다.
현숙이 종점 슈퍼를 나와 집으로 가기 위해 밖으로 나왔을 때는 제법 빗줄기가 굵어 졌을 때였다. 우산을 쓰지 않은 오십대 여자가 머리카락과 어깨가 늘어지도록 비를 맞고 지나가는 것을 보고 걸음을 빨리 했다. 우산을 가지고 학교 앞에 가서 승혜를 기다리기 위해서 였다.
슈퍼에서 사 온 물건들을 식탁 위에 올려놓고 곧 바로 밖으로 나갔다. 문을 잠그기 위해 문 앞에 돌아섰을 때 안에서 전화벨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김현세 일꺼라는 생각이 번쩍 들어서 얼른 전화기 앞으로 갔다.
아냐, 오늘은 승혜 생일 이잖어. 내가 왜 그걸 몰랐지……
현숙은 다시 절망하기 시작했다. 다른 날도 아닌 딸의 생일날 김현세와 거실에서 뜨겁게 흐느꼈던 일이 뼈가 저리는 후회로 내려앉았다.
이러면 안돼!
현숙은 수화기를 들지 않았다. 전화벨 소리는 여전히 귀청을 때렸다. 코드를 빼 놓을까 하다가, 혹시 남편한테 전화가 걸려 오면 어쩌나 하는 생각으로 밖으로 나왔다. 빗줄기가 점점 굵어지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승혜가 비를 맞고 오기 전에 빨리 가야겠다며 서둘러 계단을 내려갔다.
앞으로는 절대 만나지 않겠어.
다른 날도 아니고 딸의 생일 날 불륜을 저질렀다는 생각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입술을 꼭 다물고 총총 걸음으로 골목을 빠져 나오면서 부터는 또 생각이 바뀌었다. 만나지는 않더라고 전화를 하지 말라고 말하고 나올 걸 그랬나, 하고 후회를 하면서 버스 정류장이 있는 푸른 약국 앞으로 나왔다. 학교는 신호등을 건너서 언덕 위에 있었다. 건너편으로 우산을 손에 든 여자들이 색색의 우산을 쓰고 언덕을 올라가는 게 보였다.
승혜야 엄마가 잘못했어!
현숙은 불륜에 눈이 먼 엄마를 둔 덕분에 혼자 외롭게 서 있을 승혜를 생각하니 눈물이 쏟아 졌다. 우산으로 앞을 가리고 얼른 눈물을 닦아 내며 부지런히 걸었다.
승혜야!
학교 정문 앞에는 우산을 들고 온 학부형들이 무리를 이루고 서성거리고 있었다. 다행이었다. 승혜네 반은 물론이고 모든 학급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 쉬었다.
그때부터는 오직 승혜만 생각하며 십여 분 기다리고 있으니까 아이들이 한 명 두명씩 나오기 시작했다. 기다리던 학부형들은 반가운 얼굴로 아이들을 맞이하여 우산을 쓰고 언덕 밑으로 내려갔다.
혹시!
기다리고 있으면 당연히 승혜가 깡충깡충 나올 것이 분명하면서도 불안했다. 자신의 불륜을 욕하며 학교 뒷문을 통해 도시 어느 곳으론가 가 버리고 말았을 것 같은 불안감이었다.
정말 그런 건가?
현숙은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언제부턴지 손바닥에 땀이 진득하게 고여 오는 가 하면, 혀가 꺼칠한 느낌이 들 정도로 입안이 바짝바짝 타고 있었다.
휴!
승혜 였다. 승혜는 한 무리의 아이들이 빠져나간 다음에 뒤늦게 나타났다. 그 뒤에 보람이가 빗줄기가 내려꽂히는 운동장을 쳐다보며 천천히 뒤 따라왔다.
“왜 이제 나오는 거니? 엄마가 한참이나 기다렸는데.”
현숙은 해맑게 웃는 승혜를 꼭 껴 않고 마구 뽀뽀를 해댔다. 기쁨의 눈물이 글썽거리도록 뽀뽀를 하다가 쓸쓸한 모습으로 서 있는 보람이를 의식하고 허리를 폈다.
“응. 보람이네 반이 늦게 끝났잖아. 그래서 복도에서 기다리느라고 늦었어.
“저런 우리 승혜 착하기도 해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