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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31 2. 뒷구멍으로 호박씨 까기 (31/109)

00031  2. 뒷구멍으로 호박씨 까기  =========================================================================

                                    

 2. 뒷구멍으로 호박씨 까기 18화 

 현숙은 다신 한번 승혜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후에 보람이 앞으로 갔다. 밖에 이렇게 비가 내리는데 받지 않는 전화를 걸고 있을 김현세의 얼굴이 떠올랐다.

 “자. 우리 보람이도 이 우산을 써.”  

 보람이에게 우산을 건내주려니까. 그 동안 잊고 있었던 그 무엇이 떠올랐다. 바로 보람이 였다. 단순히 보람이가 김현세의 딸이라는 것만 생각하고 있었지, 자신이 김현세에게 이끌려 갈수록 엄마가 없는 보람이가 얼마나 외롭고 힘들어 할까 를 생각하니 그 어떤 유혹이 있더라도 김현세와 정리를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엄마! 나 내 친구들 우리 집에 오라고 했어. 내 생일이라고 말야.”

 승혜가 우산을 뒤로 젖히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잘했구나. 그런데 생일이란 말은 하지 말지 그랬니. 애 들이 부담스러워 하지 않을까?”

 “괜찮을 꺼야. 나도 친구들 생일날 선물 사 가지고 갔잖아.”

 “그래. 잘했다. 보람이는 아빠가 마중 안 나와서 섭섭하겠구나.”

 현숙은 승혜와 보폭을 맞추며 걷고 있는 보람이에게 죄책감에서 비롯되는 미소를 보냈다.

 “아빠는 지금 주무실꺼에요. 어제 저녁에 밤을 꼬박 새웠거든요. 그리고 저는 비 맞는 게 좋아서 아빠가 마중 안 나와도 괜찮아요. 아줌마.”

 현숙은 보람이의 말을 듣고 저윽이 놀랐다. 승혜와 같은 나이 이면서, 너무 어른스러워 보였기 때문이다. 늘 텁수룩한 턱수염에 잠을 덜 잔 듯한 얼굴로 세상을 권태스럽게 살아가는 듯한 김현세의 새로운 면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다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더 이상은 그에게 털끝만 한 관심도 가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서 였다.

 “보람아, 우리 아빠가 내 생일 선물로 오늘 저녁에 게임기 사 온단다.”

 횡단보도 앞에 멈추었을 때 승혜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언제부턴지 소나기는 부드러운 안개비로 변해 있었다.

 “정말?”

 보람이가 우산 밖으로 손을 내밀어 손바닥으로 비를 느끼고 있다가 반문했다.

 “그래. 엄마 내 말 맞지?”

 “보람이는 벌써 아빠가 게임기 사줬는걸?”

 현숙은 우울한 얼굴로 대답하고 차도로 내려서는 승혜의 손을 잡아 인도로 올라오게 했다.

 “하지만, 아빠가 사 오는 게임기는 보람이 것 보다 더 좋을 꺼야. 엄마 내 말 맞지?”

 우산을 보람이에게 건네준 승혜는 현숙의 손을 뿌리치고 차도 와, 인도 사이를 강아지처럼 깡충거리며 콧노래를 불렀다. 

 “승혜야 보람이처럼 가만 서 있어. 위험하잖아.”

                         

 현숙은 제과 회사의 로고가 찍혀 있는 트럭 한 대가 눈길을 미끄러 지듯이 스쳐 가는 것을 보고 승혜의 손을 잡아 당겼다.

 “어. 푸른 신호등이다!”

 승혜는 현숙에게 잡힌 손을 풀으며 단 걸음에 횡단보도로 로 들어섰다. 그때 였다. 빨간 색 프라이드가 천천히 미끄러져 들어오더니 앞 범퍼가 승혜의 허리에 닿으려는 직전에 끼익 멈추었다.

  “엄마!”

 승혜는 빨간 색의 차가 제 앞으로 덮쳐 오는 것을 느끼는 순간 제 풀에 놀라서 미끄러졌다.

 “승혜야!”

 현숙은 우산을 집어던지고 승혜에게 달려들었다.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듯한 놀라움 때문에 눈앞이 캄캄한 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승혜의 새빨간 피가 빗물에 얼룩져 있을 것 같은 환상 속에 승혜를 쳐다보았다.

 “승혜야!”

 현숙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승혜의 상체를 일으켰다.

 “엄마. 나 안 다쳤어.”

 승혜는 현숙이 이끄는 대로 일어서서 엉덩이와 어깨에 묻은 빗물을 툭툭 털어 냈다.

 “다치지 않았니?”

 현숙 못지 않게 놀란 운전사가 승혜의 눈을 털어 주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체 물었다.

 “괜찮아요. 아저씨. 미끄러졌을 뿐이에요.”

 승혜는 멋쩍은 얼굴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어깨 뒤로 끌어올리며 씨익 웃었다.

 “정말 괜찮은 거니. 병원에 안 가 봐도 돼?”

 현숙은 안심할 수 없었다. 승혜의 다리며, 팔 허리 어깨를 매 만지며 다급한 음성으로 물었다.

 “걱정이 되시면 병원에 가 보시죠. 제가 느끼기에 차에 부딪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삼십대 의 운전사도 그게 좋다는 얼굴로 현숙에게 말했다.

 “엄마, 나 병원에 안 가도 돼. 여기 닿지 않고 그냥 미끄러졌을 뿐야.”

 “정말 안 아퍼. 다친 데도 없구?”

 보람이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응. 하나도 안 아파.”

 현숙은 신호등이 바뀌는 것을 보고 일단 승혜를 푸른 약국 앞 인도로 데리고 나왔다.

 “괜찮을 꺼예요. 저도 약방 안에서 봤는데 차에 부딪친 것 같지는 않더라구요.”

 푸른 약국 문이 열리면서, 약사 가운을 입은 주인 여자가 현숙에게 아는 체 하며 거들었다.

 “휴! 다행이다. 엄마 말 안 들으니까, 이런 꼴을 당하잖아. 정말 병원에 안 가 봐도 되겠니?”    

 “정 걱정이 되시면 일단 하룻밤 자 보고 내일이라도 연락을 주시죠.”

 프라이드를 인도에 붙여서 주차해 놓고 횡단보도를 건너 온 운전사가, 약사의 말에 힘입어 명함과 주민등록증을 내 보였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아이들이라 혹 모르니까. 연락처를 적어 두기로 하죠.”

 현숙은 약국 안으로 들어가 팬을 빌려서 명함 뒷면에 운전사의 주민등록증 전화 번호를 적었다. 그리고 놀랐을 지도 모르는 승혜를 위해 청심환을 한 알 산 다음에 밖으로 나왔다.

 “엄마, 영진이도 불러도 돼?”

 승혜는 언제 교통사고를 당할 뻔했느냐는 얼굴로 보람이와 재잘거리고 있다가 약국을 나오는 현숙에게다가 왔다.

 “영진이가 누구니?”

 현숙이 굳은 얼굴로 되물었다. 승혜가 괜찮다는 생각이 들어서 였는지 비로소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만약 집을 나오기 전에 김현세와 약속을 하고 나왔더라면 분명히 사랑하는 딸 승혜는 죽어 버렸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승혜를 앞세우고 집에 도착한 현숙은 문을 열기 위해 손 지갑을 열었다. 집안에서 문을 잠글 때처럼 다시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김현세가 분명했다. 빨리 전화를 받아서 이 순간부터는 관계를 끊어야겠다고 서둘러 열쇠를 돌렸으나, 문고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엄마 빨리 문 열어 봐. 전화 왔어.”

 “지금 열고 있잖어.”

 현숙은 열쇠 구멍에서 열쇠를 빼서 다시 한번 집어넣고 돌렸다. 쇠의 둔탁한 마찰음 속에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서둘러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까지 정신없이 울어 되던 전화벨 소리가 안방으로 들어가는 순간 뚝 멎어 버렸다.

 “여보세요.”

 현숙은 전화가 끊어졌다는 것을 알면서도 수화기를 들어보았다. 생각했던 것처럼 전화는 이미 끊어진 상태 였다. 보람이가 집으로 들어가는 순간 김현세가 수화기를 내려놓았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 어디서 걸려 온 전화야?”

 승혜가 뒤 따라와서 물었다.

 “응. 우리가 전화를 안 받는 줄 알고 끊었나 봐.”

 현숙은 전화벨 소리를 피했던 때 와 다르게 어서 전화가 오길 기다렸다. 팔짱을 끼고 전화기 옆에 서 있는데 방안에서 승혜가 제 생일을 스스로 축하하는 노래 소리가 흘러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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