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91 14.변태 아내 =========================================================================
14.변태 아내(6)
김현미는 아무리 생각 해 보아도 그가 무얼 생각하고 있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이상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섹스 후에 단 한마디 말도 없이 누워 있는 그가 처음에는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숨소리 도 크게 내지 않고 누워 있는 그를 보고 있노라니 신비스러워 지기 시작했다. 그의 품에 안겨 잠이 들고 싶은 생각이 드는가 하면, 그를 위해 노래를 불러주고 싶기도 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는 상체를 일으켰다. 아직 땀이 식지 않은 몸을 김현미의 몸 위에 찰싹 붙였다. 이어서 어깨 뒤로 양손을 돌려 꼭 껴않으며 입술을 더듬었다. 김현미는 그의 입안에 뜨거운 입김을 불러 넣으며 부르르 떨었다.
그 뿐이었다. 그는 이내 품안에 있던 김현미를 풀어놓고 일어섰다. 의자에 차곡차곡 개어 놓았던 그녀의 옷을 말없이 가져왔다.
김현미가 천천히 옷을 입는 동안 그는 옷을 벗을 때 보다 더 빠르게 옷을 껴입었다. 김현미가 옷을 잘 입을 수 있도록 방의 불을 켜 주고 나서 밖으로 나 갔다.
김현미는 옷을 다 입은 다음에 벽에 붙어 있는 거울 앞으로 갔다. 옷매무새를 고치면서 거울을 봤다. 거울 안에 열아홉의 소녀가 사과 빛으로 물든 얼굴로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원인을 알 수 없이 가슴이 울렁거리는 것을 느끼며 밖으로 나 갔다.
그는 개집 앞에 앉아 있었다. 얼룩 강아지가 꼬리를 흔들면서 그의 손가락을 핥아먹고 있었다. 그런 모습이 들판에서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 온 농부가 개 집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평화스럽게 앉아 있는 모습을 보여서, 김현미는 혼란스러웠다. 보일 듯 말듯 한 미소를 머금고 앉아 있는 그의 모습 어느 구석에서도 조금 전에 땀을 흘리며 섹스를 했던 사람이라는 것을 찾아 볼 수 없어서였다.
“가실까요?”
김현미가 문 앞에 서 있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린 그가 일어서며 말했다.
“어디로?”
“지나가는 택시를 탈 수 있는 도로까지 바래다 드리겠습니다.”
“차를 가져 왔어요.”
“그럼 잘 됐군요.”
사내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오솔길로 접어들었다. 김현미는 죄를 지은 여자처럼 고개를 숙이고 사내의 옆에서 걸었다. 첫 번째 그에게 강제로 당했던 굴참나무 가 보였다.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굴참나무를 바라보았다.
“아까는 당신이 날 유혹했습니다.”
“그럼 방갈로에서는?”
“그때는 내 영혼이 당신을 유혹했습니다. 그리고 난 당신이 유부녀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게 무슨 문제라도?”
김현미는 갑자기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어쩌면 이 남자가 날 두 번 다시 만나 주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사내를 사랑하지 않는 이상 두 번 다시 만나야 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가 후회를 하고 있다면 더 이상 자신을 만나 주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뻔 한 일이기 때문이다.
“후회하지 않으십니까?”
김현미의 예상을 깨고 그가 부드럽게 물었다.
“후회하지 않아요. 당신은 후회하고 있군요.
오솔길은 굴참나무가 하늘이 안 보일 정도로 우거져 있어서 어두컴컴했다. 가끔 가다 빛이 새어 들어오는 곳에서 푸른 하늘이 보였다.
김현미는 손님을 만나고 있는 남편 보다 먼저 밖으로 나갔다. 나가서 택시를 탔다. 퍼시픽 호텔로 가 달라고 말을 하려는 순간, 폐허가 된 휴게소의 남자가 생각이 났다. 그는 이 밤을 어떻게 보내고 있을 까 하는 생각에 그쪽으로 가 달라고 했다.
낡은 휴게소 간판이 있는 곳에서 내린 김현미는 무서웠다. 불빛 한 점 없이 유령처럼 서 있는 건물을 조심스럽게 돌아서 사내가 있는 방갈로로 들어가는 오솔길로 접어들었다.
“컹! 컹! 컹!”
개 짓는 소리에 깜짝 놀라서 뒷걸음을 치고 있는 사이에 숲 속에서 불빛 한 점이 살아났다. 직선으로 뻗은 손전등 불빛은 타원형의 오솔길을 직선으로 파고들어서 얼굴에 와 닿았다.
“난 길을 잃은 등산객 인줄 알았습니다.”
사내의 목소리는 첫날 들었을 때와 다름없이 감정이 개입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빠르게 걸어오고 있는 발자국 소리를 보아서는 그도 반가워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안심이 됐다.
“날 따라 오세요.”
사내는 김현미 앞에 우뚝 멈췄다. 무언가 말을 하려고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이내 고개를 돌리고 방갈로 쪽으로 손전등을 비췄다.
“밤중에 찾아와서 실례가 안 될지 모르겠군요.”
김현미는 스스로가 생각해도 어색한 말을 하면서, 사내가 이끄는 대로 방갈로로 들어갔다.
사내는 방갈로의 문을 닫았다. 손전등으로 침대 머리맡에 있는 탁자를 비추었다. 나무껍질을 벗기지 않은 통나무로 만든 탁자 위에는 촛대가 있었다. 초에서 흘러내린 촛농이 수북하게 쌓여 있는 촛대에 불을 밝히자, 아스라한 불빛이 살아났다.
“난 당신이 여길 다시 올 줄 알았습니다.”
사내는 침대 위에 조심스럽게 담요를 폈다. 이어서 나무토막으로 만든 목침의 딱딱한 느낌이 사라지도록 자신의 옷으로 둘둘 말아서 베개를 만들었다. 그 베개를 촛대가 있는 쪽으로 놓고 나서 김현미를 조용히 응시했다.
“왜 그런 생각이 하게 된 거죠?”
김현미는 솔직히 이 방갈로를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시 오겠다고 마음을 먹어 본 적도 없었다. 그러나 사내의 목소리가 너무 단정적이어서 반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느낌입니다. 산에 혼자 살다가 보면 여러 가지 느낌이 예언처럼 맞아 떨어 질 때가 맞죠. 이를테면 풀벌레가 유난히 소리 내어 울면 비가 오겠구나. 같은 느낌 같은 거죠.”
사내는 김현미가 누울 수 있도록 침대를 정리하고 나서 의자에 앉았다. 주머니를 뒤적거려서 담배를 피우며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랬었군요…….”
김현미는 말꼬리를 흐리며 촛불이 얼굴에서 일렁거리고 있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의 모습이 신비롭다는 생각이 들면서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왜 여기를 오면 갑자기 수동적인 여자가 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별로 없는 것 같군요.”
“그……그렇지는 않아요.”
사내가 일어서는 것을 본 김현미는 떨리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사내는 피우던 담배를 천천히 재떨이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김현미 앞으로 가서 가만히 어깨를 껴안았다. 김현미는 기다렸다는 듯이 한숨을 포옥 내쉬며 김현미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팔 안에 안겼다.
그의 오른 손이 블라우스 위로 젖가슴을 어루만졌다. 그리고 천천히 밑으로 내려와서 넓적다리 부분까지 어루만진 후에야 양손으로 껴 않으며 키스를 청했다.
김현미는 그의 손이 자신의 육체에 닿을 때마다 훅 숨을 들어 마셨다. 그리고는 이내 죽은 듯이 그에게 몸을 의지한 채 가볍게 떨었다. 그가 천천히 스커트의 후크를 따고 있는 것을 느꼈다. 투박한 그의 손가락이 맨살을 스쳐 가는 느낌은 짜릿한 전율을 던져 주었다. 이어서 스커트가 벗겨 나가면서 하체 부분이 한결 자유스러워졌다.
“누우세요.”
그는 첫날처럼 블라우스를 벗기지 않았다. 팬티만 벗기고 나서 곧장 김현미를 담요 위에 눕혔다. 블라우스 자락이 아랫배를 살짝 덮은 밑으로는 우윳빛 피부가 뽀얗게 드러난 모습이다.
그가 블라우스의 단추를 따기 위해 등으로 상체를 앞으로 움직였다. 그러자 램프 불빛에 그녀의 꽃잎 위로 떨어지면서 검고 윤기가 나는 음모가 모습을 드러냈다.
김현미는 자신도 모르게 손바닥을 포개서 꽃잎을 가리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비가 오는지 빗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비는 오지 않았다. 바람이 쉴 사이 없이 지붕을 스쳐 가는 소리였다. 어느 순간 바람이 멎는 것을 느꼈다. 그 사이에 블라우스와. 란제리. 브래지어가 한꺼번에 목 위로 치켜 올라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당신은 너무 아름답소.”
사내는 목이 쉰 목소리로 속삭이면서 섬세한가 하면 따뜻한 온기를 품은 손으로 그녀의 엉덩이를 쓰다듬었다. 갈라진 부분까지 손가락으로 애무를 하며, 그녀의 배와 넓적다리에 얼굴을 같다 대고 뺨을 문질렀다.
어서 해 줘요!
김현미는 그렇게 소리치고 싶었다. 그러나 사내 앞에서는 이유를 알 수 없이 벙어리가 되어 버렸다. 그런 점이 그녀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만약 남편이 이처럼 흥분을 시켰다면. 지금쯤은 남편의 위로 올라가서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앞에서는 이상하리만큼 몸과 입이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사내는 옷을 다 벗지 않았다. 바지와 팬티만 벗은 채 김현미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었다. 입은 그녀의 딱딱한 젖꼭지를 포도 알처럼 머금은 체 한참 동안 정지해 있었다.
김현미는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는 그의 손가락을 끌어당기고 싶은 욕구에 사로 잡혔다. 그래서, 그의 손가락을 입안에 넣고 싶었다. 언제부턴지 감당할 수 없이 밀려오는 갈증을 해소하는 길은 아이가 우유 꼭지를 빨 듯. 그의 손가락을 빠는 길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건 말 그대로 생각일 뿐 이번에도 손이 움직여 주지 않았다.
사내는 고개를 들었다. 잠시 김현미를 내려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길고 아름다운 속눈썹이 바르르 떨이고 있는 김현미의 눈 위에 가볍게 키스를 했다. 이어서 코와 얼굴에 입을 맞췄다. 갈증을 참지 못하는 김현미가 입을 벌리는 것을 보고 그 안에 혀를 집어넣었다.
“헉!”
김현미는 갑자기 뜨거운 물을 뒤집어쓰는 듯 한 충격 속에 사로잡히자마자 그의 혀를 아프도록 빨았다. 그러나 그건 거의 순간뿐이었다. 입안을 뜨겁게 휘젓던 그의 혀가 빠져나가면서 목을 애무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김현미의 목을 부드럽게 애무하면서 손을 밑으로 뻗었다. 그녀의 넓적다리를 어루만지면서. 입은 젖꼭지 주변을 부드럽게 핥았다.
“이런 벌써 축축이 젖어 있군요.”
사내가 무겁게 속삭였다.
“모……몰라요.”
김현미는 언젠가 나이트클럽 남자와 했던 장면이 떠올라서 얼른 사내의 손을 밀어 냈다. 그러나 사내는 멈추지 않았다. 김현미의 무릎이 바르르 떨리고 있는 것을 느끼면서 손으로 꽃잎의 둔덕에 동그랗게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김현미가 턱을 하늘로 들어 올리는 것을 잠깐 바라보다가 아랫배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김현미는 가슴 저 밑바닥에서 모닥불이 활활 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불은 조금씩 화력을 더 해가서 온 몸의 실핏줄을 타고 퍼져 나갔다.
그의 몸이 뜨거운지. 자신의 몸이 타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의 혀와. 손이 스쳐갈 때마다 뜨거운 전율이 꿈틀거리면서 용솟음치고 있다는 점이었다.
사내는 외로운 얼굴 속에 타오르고 있는 정염의 불꽃을 견디지 못하고 김현미의 몸에 달라붙었다. 본능적으로 그녀의 몸 깊숙이 들어가기 위해 상체를 반쯤 일으켜 세웠다.
김현미는 자신의 안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사내가 힘찬 용솟음을 하기 시작했을 때. 난파선에 매달려 있는 조난자처럼 그의 목에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언제부턴지 땀이 비 오듯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상관이 없었다. 땀이 온 몸을 흠뻑 적시고 담요 위로 떨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며 그의 입술을 더듬었다.
사내가 얼른 고개를 숙였다. 이어서 그의 운동이 갑자기 둔화되는 것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그녀도 깊은 나락으로 천천히 추락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
사내는 한참 동안 거친 숨을 내쉬며 김현미 옆에 누워 있었다. 김현미도 그의 뜨거운 어깨와 넓적다리의 감촉을 아스라하게 즐기며 거친 숨을 내쉬었다. 좁은 방갈로 안에는 이내 뜨거운 욕정의 흔적들이 부나비처럼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남편이 기다리지 않을 까요?”
사내는 말을 하기 전에 김현미의 두 눈을 지그시 응시했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촛불이 타오르는 것을 바라보며 무거운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좀 더 있다 가겠어요.”
김현미는 마른침을 삼키면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 몇 올이 반듯한 이마에 붙어 있었다. 손을 뻗어 그것을 때어 주고 싶었으나 팔이 움직여 주지 않았다.
“오늘만 날이 아니지 않소.”
갑자기 사내의 말투가 바뀌었다. 김현미는 그때서야 부끄러운 미소를 지으며 일어나 앉았다.
작은 마당 앞을 지나서 굴참나무 가지가 우거진 오솔길로 들어설 때까지 사내는 말을 하지 않았다. 사내는 눈을 감고 걸어도 길을 알고 있다는 몸짓으로 여유 있게 걸었다.
김현미는 길 가운데까지 뻗어 있는 굵은 나무뿌리며, 발등 보다 높은 키로 뒹굴고 있는 돌멩이 등을 피하기 위해 조심조심 걸었다.
“나도 당신이 이 밤을 여기서 보내길 원하고 있소.”
억새풀 너머로 검은색 아스팔트가 보이는 지점에서 멈춘 그가 입을 열었다.
“무엇이 문제죠. 난 여기서 밤늦은 시간까지 머물 수 있어요. 남편한테는 적당히 핑계를 대면 된 다구요. 제주에 내가 알고 있는 친구가 있거든요.”
김현미는 김영혜의 얼굴을 떠올리며 애원을 하듯 말했다,
“다음에는 그럽시다. 하지만 오늘은 그냥 가는 것이 좋겠어.”
“알았어요. 그럼 키스 해 줘요.”
김현미의 그의 목을 껴 않으며 눈을 감고 턱을 치켜올리며 입술을 내 밀었다.
“내일 또 올 수 있지?”
그는 망설이지 않고 김현미를 가볍게 껴안았다. 그리고 고개를 비스듬하게 돌려서 그녀의 입술에 부드럽게 키스를 해주고 나서 이내 떨어졌다.
“내일 꼭 오겠어요.”
김현미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돌리며 울듯 한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며칠이 지났다.
비가 올 조짐인지 바람이 서늘했다. 수평선 위에 떠 있는 어선들의 집어등 불빛이 유난히 밝았다. 하늘을 봤다. 별은 보이지 않았으나 먹장 빛은 아니었다. 흐릿하게 떠 있는 구름이
보일 정도였다. 바닷가를 산책이나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닷가에 나가면 바람이 차가울 것 같아서 티셔츠 위에 방수가 되는 푸른 색 파커를 껴입었다. 밑에는 그냥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평범한 스커트에 힐을 신었다. 그러나 바닷물에 발을 담그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힐을 벗고 샌들을 신고 호텔 밖으로 나왔다.
로비를 지나서 바다 쪽의 정원으로 천천히 걸었다. 검푸른 바다가 한 눈에 펼쳐지면서 바람이 강하게 불어왔다. 머리카락이 휘날리는 것을 짓누르며 걸음을 멈추었다. 이렇게 바람이 강하면 그냥 호텔로 돌아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더 이상 머리카락을 휘날리게 할 정도의 바람은 불어오지 않았다. 얼굴을 서늘하게 스쳐 가는 바람을 뚫고 바닷가로 통하는 계단을 내려갔다.
“어머!”
김현미는 부드러운 해변에 막 한 발을 내린 상태로 우뚝 멈췄다. 누군가 뒤를 따라오고 있는 인기척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 뜻밖에도 거기 방갈로의 사내가 서 있었다. 호텔에서 뻗어 나오는 불빛을 역광으로 받고 서 있는 그는 거인처럼 보였다.
“어제 오기로 한 약속을 잊어 버렸습니까?”
“갑자기 일이 생겨서 가지 못했어요. 여긴 어떻게?”
김현미는 어제 남편과 같이 시간을 보내느라, 사내를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대로 말을 할 수가 없어서, 자신도 모르게 거짓말을 했다.
“난 그런 줄도 모르고 해가 있을 때부터 저 쪽 해변 가에서 당신이 밖으로 나올 때까지 기다렸지 뭡니까?”
그는 반바지에 허리 아래까지 내려오는 길이에 모자가 달린 파커를 입고 있었다. 한 계단 밑으로 내려오면서 화를 참고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전화를 하려고 했지만 거긴 전화가 없잖아요.”
김현미는 그가 계단 밑으로 내려오는 것을 쳐다보며 뒷걸음을 쳤다. 계단 끝으로 내려와서 어둠 속에 서 있는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며 바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내가 어제 당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를 거야.”
그는 바다를 보고 있는 김현미 뒤로 갔다. 뒤에서 그녀의 가슴과 허리를 껴않으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지금은 안돼요.”
김현미는 그의 팔을 풀고 돌아섰다. 계단이 있는 언덕 위로 호텔의 불빛이 보였다. 자신과 종현이 머물고 있는 객실의 베란다도 한 눈에 보였다. 창문은 닫혀 있었으나 커튼은 양쪽으로 밀려나 있었다.
“당신이 꼭 여기로 나온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어. 하지만 난 저 자리에서 세 시간 동안이나 서 있었어.”
그는 다시 앞에서 김현미를 껴안았다. 그리고 그녀의 귀에 입술을 바짝 같다대고 뜨겁게 속삭였다.
김현미는 그의 숨결이 뜨겁게 뭉쳐 있는 것을 느끼고 더 이상 거절을 하지 않았다. 귀를 통해 들어온 그의 뜨거운 입김이 온 몸에 퍼져 나가면서 몸이 생각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저 쪽으로 가면 호텔의 불빛이 보이지 않을 거야.”
사내는 김현미의 허리를 꼭 껴않은 자세로 모래밭을 걷기 시작했다.
안돼……여기서, 이 사람을 보내야 해.
김현미는 속으로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그가 이끄는 대로 모래밭을 걸어갔다. 키가 큰 그가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으므로 김현미는 숨이 찼다.
그래도 사내는 보폭을 줄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김현미는 발가락 사이로 모래가 들어와서 거북했다, 그러나 어두운 해변을 향해 거침없이 걷고 있는 그의 품을 빠져 나올 엄두를 내지 못했다. 마치 밀려오는 파도를 피해 달아나는 몸짓으로 허우적거리며 그를 따라 갔다.
그가 잠시 걸음을 멈춘 곳은 작고 큰 바위가 있는 곳이었다. 그는 김현미의 허리를 감고 있던 팔을 풀었다. 대신 그녀의 손을 잡았다. 김현미는 그가 손을 꼭 잡을 수 있도록 손가락을 벌려 주었다. 이내 투박한 손가락이 깍지 껴 지는 것을 느꼈다.
“이 위로 올라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