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여고동창생 (1/45)

 # 1

1화. 여고동창생

────────────────

서울 강북의 나름 부촌이라 불리는 성수동 빌라 단지.

고가의 아파트로 형성된 지역과는 다르게 이 곳에서 오랫동안 거주해온 원주민들이 모여사는 동네였다. 흔히 말하는 알부자들이 사는 지역. 

그리 높지 않은 언덕을 오르면 나오는 빌라 밀집지역으로 오르는 베이지색 실루엣의 여인(女人).

그녀의 이름은 천은경. 올해 나이 39살의 유부녀, 아니 이제 ‘돌아온 싱글’이 된 여자.

주변에서는 그녀를 ‘내일 모레 마흔’이라며 놀려댈 법도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은경을 서른아홉 아니 서른 중반대의 나이로도 보지 않았다.

수영과 헬스 그리고 필라테스로 다져진 빈틈없는 몸을 베이지색의 고급 투피스로 가리고 있는 그녀. 그녀와 함께 운동을 하는 남자들은 그녀의 옷을 원망할 것이다. 통 넓은 옷을 입어도 완벽한 골격을 자랑하는 은경의 몸은 모두의 관심사였으니까.

특히 언덕을 오를 때 드러나는 그녀의 히프 라인은 은경의 뒷모습을 보는 사람들에겐 감탄을 자아내게할 정도로 매력이 있었다.

매끈한 등과 그 밑으로 불룩 튀어나온 엉덩이는 ‘오리궁둥이’로 불릴망정 볼륨이 없다는 말을 들을 일은 절대로 없을테니까.

여자들은 질투와 부러움의 시선을, 남자들은 그저 자신들의 본능이 내면에서 외치는 ‘갖고싶다’라는 갈망에 그저 흥분된 눈초리로 그녀의 뒷모습을 주시할 수 밖에 없었다.

그녀가 이 곳을 찾은 이유는 바로 여고 동창생인 정숙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또래에 비해 과하게 일찍 결혼한 그녀의 남편이 해외로 장기 출장을 떠나면서 올해 스무살이 된 아들과 둘이 살고있는 친구의 집을 은경은 찾아 헤매고 있었다.

두 사람이 20여 년만에 만난 곳은 동네에 새로 생긴 헬스 클럽.

연예인이 프렌차이즈점을 내면서 대대적인 광고를 한 이 곳을 은경은 흥미삼아 한번 찾아보았고, 우연찮게 고교시절 단짝으로 불렸던 정숙을 만나게 되면서 두 사람은 자기들도 모르게 환호성을 질러댔다. 

그 다음엔? 주변 사람들이 모두 쳐다볼 정도로 호들갑을 떨면서 반가워하는 그들. 마치 열여덟살의 여고생들로 돌아간 것처럼 그들은 거침이 없었다.

“은경아! 너 은경이 맞지?”

“정숙이? 정말 정숙이야? 이게 얼마만이니···.”

“그러게. 은경이 넌 어째 완전 예전이랑 똑같다. 아니 더 예뻐진 거 같아. 호홋. 난 완전 변했지···?”

비쩍마른 몸에 교복 하나를 걸치고 혹은 운동복 차림으로 교내를 활보하던 두 사람. 세월이 오래 지났다지만 은경은 예의상으로도 정숙에게 ‘너도 예전이랑 똑같아’라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었다.

살이 찐다는 이유로 저녁마다 콜라를 마시고 자던, 점심 도시락을 두 개씩이나 들고 다녔던 말라깽이 정숙은 이제 후덕한 몸매를 펑퍼짐한 옷으로 감추고 있는 아줌마에 불과했다.

“아니야. 너도 여전히 예뻐.”

몸매에 대한 이야기는 숨기고 칭찬을 해줬지만 정숙은 은경의 그 말이 반가운지 얼굴 가득 함박웃음을 지었다.

“정숙아, 우리··· 스무살 때 이후로 처음인가? 그동안 뭐하고 지냈어?”

“나야, 항상 똑같지 뭐. 아들 낳고 남편 뒷바라지 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얘. 은경이 넌 어때?”

“나? 후훗.”

“왜? 혹시 좋은 일 있구나?”

정숙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눈치가 없었다. 예전에 비해 살까지 찌다 보니 오히려 둔해 보이기까지 했다.

“나··· 최근에 ‘한번 다녀온 여자’가 돼버렸어. 무슨 말인지 알지?”

“어머···. 그래? 미안.”

“미안은···. 네가 이혼하라고 한 것도 아닌데 뭐. 후후. 남편은 어때?”

“에휴. 맨날 똑같지 뭐. 나 요즘 후회 엄청해. 결혼을 너무 일찍해버린 거 같아서···.”

언덕길 막바지에 이르러 빼곡이 들어선 빌라 단지들이 눈에 보이자 은경은 더 예전의 일들을 회상하고 있었다.

20여년 전. 그러니까 그녀가 갓 대학에 입학한 스무살이 되던 해.

고교시절 가장 친한 친구라고 생각했던 정숙은 졸업도 하기 전에 덜컥 결혼을 선포하고 말았다. 그것도 여덟 살이나 많은 직장인 아저씨가 그녀의 남편이었다.

‘너무 일찍 결혼했어···.’

대학 입학식날 치러진 정숙의 결혼식. 결국 대부분의 여고 동창생들은 그 자리에 참석하지 못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은경이 대학 생활에 적응할 때 즈음 뜻밖의 소식이 들려왔다.

정숙의 아들인 용준의 돌맞이 잔치.

그녀가 결혼한지도 몰랐던 몇몇 동창생들은 경악스런 탄식을 터트리기도 했다. 착하고 선머슴 같기만 했던 정숙이 결혼을, 그것도 벌써 아들을 낳다니···.

은경은 당연히 돌잔치에 참석했고, 그제서야 정숙의 남편을 볼 수 있었다. 살짝 이마가 넓은 땅딸막한 덩치의 사내. 

키까지 작았으면 정말로 초라해 보일 정도로 정숙의 남편이 가진 외모는 보잘 것 없어 보였다. 하지만 정숙과 남편 사이에서 낳은 첫 번째 결실인 아들, 용준을 본 순간 은경은 놀라움에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아직 돌밖에 안 된 애가 저렇게 이목구비가 뚜렷해도 돼? 완전 반칙이잖아? 몸도 엄청 크네? 부모도 안 닮은 거 같구, 어떻게 저리 예쁘지?’

“용준아, 은경이 이모야, 인사 해야지?”

엄마 손에 붙잡혀 자신을 보며 손을 흔드는 용준. 순간 눈이 마주치자 까르르 웃는 잘생긴 아기의 얼굴에 은경은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잘 생겼다···.”

“후훗. 그렇지? 근데···.”

“근데 뭐?”

“아니···. 그게···.”

“뭔데? 너 혹시 저 애···.”

보잘 것 없는 정숙 남편의 얼굴을 다시 한 번 슬쩍 훔쳐보며 은경이 속삭이자 그 뜻을 알아챈 정숙은 어이없다는 듯 미소를 흘렸다.

“아니야. 우리 남편이 내 첫 남자인 걸.”

“그럼 왜?”

“이거 볼래? 후훗.”

아기 용준을 덮고 있던 포대기를 살짝 들추며 정숙은 미소를 지었다. 지금까지 엄마인 자신만이 알고 있던 비밀을 가장 친한 친구니까 털어놓는다는 듯 그녀의 얼굴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어머. 얼른 가려. 얘.”

“크지? 아기인데 벌써 이만하면. 쿠쿡.”

“얘는···. 아직 시집도 안 간 처녀한테 못 하는 말이 없어.”

“왜? 우리 아들인데. 아직 갓난 애긴데 뭐 어떠니.”

“그래두···.”

“나중에 너도 남자친구 사귀고 결혼하구 그러면 내 맘 이해할 거야. 휴우···. 우리 남편이 이랬으면 얼마나 좋겠니···.” 

“어머. 속도위반까지 하신 분이 못 하는 소리가 없어?”

“속도위반? 은경이 너 어떻게 안 거야? 아무도 모르는 일인데···.”

“모르긴. 임신하고 10개월 후면 출산하는 걸 모르는 바보가 어딨니? 정숙이 너, 결혼한지 6개월 조금 지났잖아.”

“히힝. 맞네. 하여튼 우리 아들 예쁘지?”

“그래. 나중이 좀 걱정이 되긴 하지만. 그래두 잘 됐어. 결혼하구 애 낳구···.”

“글세. 지금은 엄청 행복하고 좋은데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모르지. 엄청 후회힐 수도 있고, 불편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구.”

‘후회하는 건 아니구?’

은경은 아직도 행복에 겨운 미소를 짓는 친구를 바라보며 피식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 모습을 본 정숙이 웃음의 미소를 캐물으며 까르륵 거리는 사이 돌잔치도 서서히 끝이 났고, 그 만남을 마지막으로 두 사람은 며칠 전에 봤던 프렌차이즈 헬스장이 재회의 장소가 되고 말았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