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
2화. 친구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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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우···. 그나저나 정숙이, 얘네 집은 도대체 어디야···.’
어느덧 은경의 이마에는 땀이 흐르고 있었다. 팔과 어깨 그리고 겨드랑이까지 조금씩 새어나온 땀이 베이지색 투피스 상의를 적셔가는 느낌을 받은 은경이 손부채를 만들어 자신의 얼굴에 바람을 끼얹을 때쯤 멀찌감치에서 얼핏 봐도 이 동네 사람이 분명한 청년 하나가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저기요···. 뭐 좀 물어봐도 될까요?”
“······.”
자신과 눈이 마주친 청년은 갑작스런 질문에 당황했는지 그 자리에 멈춰섰다. 그리고 한참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런 청년의 모습에 은경은 자신이 놀래켜준 것이 아닐까라는 미안함에 위축이 됐지만 한참을 더 동네를 헤맬 바에야 청년에게 조금 더 미안해지기로 마음먹었다.
“혹시 331-1호가 어디쯤인지 알아요?”
“331-1호요? 거긴 왜요?”
“아···. 지금 친구집을 찾고있어서···.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요.”
굳이 하지 말아도 될 ‘친구를 오랜만에 본다’라는 말까지 하면서 은경은 조금 더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러자 청년의 얼굴에서 또 한 번 당황스러움의 빛이 스쳐지나갔다.
“거긴···.”
말을 하다말고 얼버무리는 청년. 새삼 은경은 사내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이제 막 스무살이나 됐을까? 하얀 피부에 큼지막한 눈매. 쌍꺼풀이 없이 크고 맑은 눈동자가 자신의 얼굴을 빤히 바라볼 때 은경은 잠시 부끄러움을 느끼기도 했다.
오똑한 콧매와 살짝 붉은 입술의 모습은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 흔히 말하는 꽃미남이 바로 청년 자신이라고 외치는 듯 해 보였다.
“331-1호··· 우리 집인데··· 요···.”
“우리 집? 그럼 혹시 박정숙씨 아세요?”
“박··· 정숙···. 우리 엄만데요?”
“엄··· 마?”
“네···.”
“그럼 혹시··· 네가 용준이?”
“네, 제 이름이 장용준인데요. 근데 누구시죠?”
처음엔 살짝 당황한 듯 보였지만 이내 평정을 찾고 되레 자신에게 물어보는 용준의 모습. 은경은 그런 그의 모습에서 묘한 이질감이랄까? 나이답지 않게 성숙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 정숙이 친구야. 이은경이라고 해. 반갑다. 네가 용준이 맞지?”
“네.”
순간 아주 오래 전에 있었던 돌잔치의 그 날이 다시 떠올랐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결혼을 했던 정숙.
뱃속에 이미 용준을 가진 상태로 웨딩마치를 올렸던 정숙의 당돌함이 생각났다.
한 때는 여고 동창생들 중 가장 먼저 결혼을 했다는 이유로 관심을 독차지했던 정숙. 그런 그녀에게 이렇게 잘생긴 아들이 있었을 줄이야. 하긴, 돌잔치 때 이미 떡잎은 알아봤지.
“이 건물 방향으로 쭉 올라가시면 돼요. 오른편 돌면 바로 건물이 한 채 나오는데 현관문에 번지수가 쓰여있을 거에요.”
“그, 그래···.”
엄마 친구라는 사실을 말했음에도 여전히 무심한 표정을 짓는 용준. 오히려 자신이 처음 말을 걸었을 때보다 더 굳은 표정이었다.
“전 약속 때문에 나가던 길이라···.”
“어머, 그래. 미안.”
왠지 모르게 섭섭한 감정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은경은 용준이 가르쳐준대로 건물을 따라 올라가 길을 꺾었고, 정말로 그의 말대로 정숙이 사는 아파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휴우···. 너희집 찾기가 왜 이렇게 힘드니···?”
문을 열자 달려드는 정숙을 살짝 째려보며 은경이 장난스럽게 내뱉었다.
“호홋. 생각보다 빨리 찾은 거 같은데? 너희 집에서 별로 안 멀지?”
“내 발걸음이니까 그런 거지. 차타고 오면 20분도 넘게 걸리겠다. 빙빙 도느라.”
“알았어. 얼른 들어와. 근데 생각보다 정말 빨리 왔다.”
“사실은···. 요 밑 거리에서 용준이를 만났지 뭐야.”
“용준이? 걜 네가 어떻게 알아?”
“호호. 그냥 아무나 잡고 331-1호가 어딘지 물어봤더니 걔지 뭐야.”
“정말? 후후.”
재미있다는 듯 보조개가 살짝 들어간 미소를 짓는 정숙의 표정에서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긴 했지만 학교에서 매일 보던 여드름 투성이 소녀의 모습이 남아있었다. 은경은 반가운 그 얼굴을 바라보며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우리 아들 잘 생겼지? 예전 우리 대학 다닐 때 말마따라 ‘킹카’가 따로 없지 뭐.”
“그래. 요즘 애들 말대로 ‘꽃미남’이더라. 키도 크구.”
어느새 벗어내리는 투피스 자켓을 받아주는 정숙을 바라보며 은경이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치···. 지네 아빠 닮아서 덩치도 좋구.”
“얼핏 보면 애인지 어른인지 모르겠더라. 뭘 먹였길래 애가 그렇게 컸대?”
“요즘 애들은 자기 알아서 잘 큰답니다~.”
“뭐라구? 호호호호.”
두 사람은 즐거운지 또 한 차례 여고생 시절로 돌아가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낙엽 한 장 떨어지는 모습만 봐도 뭐가 즐거운지 웃어댔던 그 때 그 시절을 회상하며 짓는 그녀들의 미소에는 예의 천진난만하던 시절의 향수가 아직 남아있는 듯 했다.
“그래봤자 아직 어린앤데 뭐. 이제 막 스무 살 됐어···.”
“스무 살? 그럼 정숙이 네가 결혼하던 그 나이잖아? 호홋. 재밌네.”
“그만 좀 갈궈. 얼른 들어오기나 하셔~.”
팔을 벌려 은경의 몸을 끌어안는 정숙. 기분 좋게 자신의 팔을 누르는 그녀의 살집을 느끼며 은경은 현관문 안으로 들어섰다.
“스무 살 때 보고 처음인가? 나 대학 신입생 때.”
“후후. 아니야. 우리 용준이 돌잔치 이후로 두 번 정도 더 본 거 같은데?”
“정말? 우리가 언제···.”
“어머. 너 기억 안 나? 남편이랑 약속있어서 너한테 용준이 맡겼었잖아. 은경이 너랑 네 동생, 이름이 은영이였던가···?”
“아···. 은영이···.”
그제서야 기억이 났다. 대학교 2학년에 올라가자마자 갑자기 연락이 왔던 정숙. 거의 1년만에 연락이 온 친구의 전화를 은경은 반갑게 받았었다. 물론 얼마 후 벙찐 표정을 지을 수 밖에 없었지만.
‘미안···. 정말로 부탁할 사람이 없어서 그래···. 은경아, 한번만 부탁할게. 응?“
‘참···. 나 정말로 아기 본 적 없단 말이야···.’
간곡한 정숙의 부탁에 결국 연년생 친동생인 은영이와 정숙의 집을 방문했던 은경.
정숙은 자신의 집으로 들어온 은경에게 고맙다는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남편의 손에 끌려 집을 나가버리고 말았었다.
“맞아···. 정말 그랬었지···. 후훗. 기저귀 갈아본 적도 없는 처녀 둘이서···. 후훗.”
당시 아기였던 용준을 돌보던 기억이 났다. 조그맣지만 우렁찬 목소리로 울어대던 아기.
돌잔치 때 봤던 알찬 꼬추를 흔들면서 마치 자기를 엄마라고 생각하는 듯 방실거리던 용준의 얼굴이 어렴풋이 떠오르자 은경은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후후···. 기저귀 갈아줄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자기 머리보다 하나가 더 있는 용준의 큼지막한 키와 근육질의 몸이 생각나자 은경은 갑자기 생각난 듯 물었다.
“용준이는 지금 뭐해?”
“용준이? 으응···. 재수생.”
“재수생? 그럼 아직 스무살이 안 됐네?”
“그렇지 뭐. 그래도 걔 친구들은 다들 대학생이야. 우리 용준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