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화. 4자 대면 (29/45)

 # 29

29화. 4자 대면

────────────────

결혼한 지 오래돼서일까? 아니면 일 년 중 대부분의 시간을 떨어져서 보내기 때문일까?

지난밤 용준이 목격한 것과는 달리 부모님들의 모습은 다정하기 그지 없었다. 

용준 앞에서 오히려 더 다정한 척 하고 심지어 아버지의 숟가락에 일일이 반찬을 얹어주는 엄마의 모습을 보면서 용준은 어쩌면 어젯밤 자기가 술에 취해서 꿈을 꾼 것이 아닐까라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섹파하기로 했냐?”

학원에서 만난 윤진은 용준에게 계속해서 은경의 이야기를 꺼내면서 놀려댔다. 하지만 용준은 연락조차 되지 않는 은경에 대한 약간의 간절함 때문에 윤진의 그런 놀림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줌마, 잘 지내요?]

[저 이번 달 성적 나왔어요. 지난 달보다 조금 오른 것 같아요···. 다 아줌마 덕분이에요.]

[제발 답장이라도 해줘요. 무슨 일 생긴 거 아닌가 걱정돼요···.]

자신의 채팅 내용 앞에서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 ‘1’이라는 글자.

마치 하루를 시작하는 의식마냥 아침 수업에 들어가기 전 은경에게 메시지를 남긴 용준은 다시 수업에 몰두했다.

‘그래, 일단 공부부터 하고 보는 거야. 성적도 오르고 내가 좋은 대학에 가게 되면 아줌마도 어쩔 수 없이 날 다르게 보겠지. 어쩌면 그 때는 아줌마가 먼저 나한테 달려들 걸? 잘생기고 좋은 대학교에 다니는 대학생이라면 엄청 매력적으로 보일테니까!’

그렇게 각오를 하던 용준. 뜻밖에도 점심시간에 은경과의 채팅창을 확인한 그의 눈앞에 생각지도 못한 변화가 닥쳐왔다.

‘이··· 읽었어? 아줌마가 내 메시지를 잃었다구?’

‘1’이 지워져있는 걸 보니 은경이 자기 메시지를 읽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생겨서 메시지를 읽지 않은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자 서운한 감정이 밀려드는 걸 느꼈다.

‘어쨌든 전화하면 받을 거 같은데···. 수업 끝나고 전화해볼까?’

오랜만의 통화라 망설일 수 밖에 없었다. 은경의 반응이 반가웠지만 일단 전화를 하는 것은 나중으로 미루기로 마음먹었다.

“용준아!”

“엄마?”

수업이 끝날 때쯤 갑자기 정숙의 전화가 왔다. 무심결에 전화를 받은 용준에게 정숙은 뜻밖의 말을 했다.

“너 오늘 수업 끝나고 최대한 빨리 집에 와야 돼.”

“왜요?”

“아빠가 오늘 외식하자고 하시더라. 오랜만에 가족끼리 외식이나 하자구.”

“외식?”

“그래. 수업 끝나고 바로 와야된다. 딴 데 세지말구.”

“알았어요.”

은경에게 전화하는 건 나중으로 미루기로 했다. 은경도 자기처럼 기다려봐야 된다는 소심한 복수심도 살짝 깔려있었다. 하지만 집에 도착했을 때 용준은 또 다시 전혀 생각지도 못 했던 의외의 상황에 당황하고 말았다.

“용준아, 은경이 아줌마 왔다.”

“은경이··· 아줌마?”

“그래, 오랜만에 얼굴이나 보자구 내가 불렀어. 그동안 프랑스 파리에 가있었다구 하더라?”

“프랑스··· 파리? 좋은 데 있었네···.”

아, 그동안 나한테 연락을 안 한 이유가 이거였구나. 

해외에 있으니까 전화를 못 받는 건 당연했지만 요즘엔 로밍 서비스가 좋다고 하던데···. 그녀가 왜 외국 여행을 갔는지에 대한 이유는 전혀 생각하지 않은 채 용준은 단순히 그런 생각만 했다.

“용준이 왔냐? 자식, 빨리 옷 갈아입고 나와. 아버지가 오늘 제대로 쏠 테니까. 아, 은경씨. 오랜만입니다. 예전에 저희 부부가 결혼식할 때 뵈었다고 하던데.”

“네, 너무 오래됐죠? 상만씨, 반가워요.”

오랜만에 보는 은경의 모습.

여전히 늘씬한 몸매에 예쁜 얼굴이었다.

한눈에 봐도 꽤나 고가로 보이는 검은색 드레스. 치마 밑으로 길게 뻗은 은경의 허벅지부터 종아리는 검은색 스타킹이 신겨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용준은 잠시 머릿속에 치밀어 오르는 생각 때문에 정신을 가다듬어야 했다.

‘저 냄새 맡고싶다···. 벗겨서라도···.’

은경이 신고있는 검은색 스타킹. 그걸 보자 왜인지 모르게 그녀의 기다란 다리에서 자기 손으로 스타킹을 벗기고, 그것을 코에 갖다댄 뒤 냄새를 맡아보고 싶다는 욕망이 끓어올랐다.

너무 오랜만에 은경을 봐서인 걸까? 

용준이 그렇게 마음속으로 갈등을 하고 있는 사이에도 아버지 상만의 재촉은 계속됐다. 은경과 가볍게 악수를 마친 뒤 무언가 이어서 말을 붙이는 아버지의 모습.

‘아버지도 주책이지. 결혼까지 한 양반이 마누라 친구한테 집적대는 거 같잖아?’

흥분해서 말을 이어가는 상만을 보면서 용준은 피식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우리 그냥 안에서 차려먹으면 안 돼? 오랜만에 집밥 먹고싶은데···. 정숙이 네가 해준 청국장 찌개랑 제육볶음 먹고싶다···.”

“청국장? 제육? 은경씨, 오랜만에 봤는데 제가 근사한 곳으로 모실게요. 촌스럽게 무슨 찌개에 고기볶음입니까?”

“어머, 정숙이 요리 엄청 맛있어요. 지난 달까지만 해도 그거 먹으려고 집에 들락거렸는데···.”

상만의 말에 대답하던 은경이 말을 하다말고 슬쩍 용준을 바라보았다.

무심결에 생긴 상황이지만 묵묵히 말이 없이 자신들의 대화를 듣고있는 용준을 뒤늦게 발견한 은경은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연기를 하면서 용준을 훔쳐본 것이다.

“허허. 그럼 은경씨 원하시는대로 집에서 밥 먹죠? 다만 배달 음식도 좀 시켜서 먹는 걸로···.”

“네, 그러세요. 호호. 용준아, 오랜만이다?”

은경은 상만과 대화를 마친 후 아무렇지 않은 척 용준의 어깨를 살짝 두들긴 후 화장실로 향했다.

자신을 보면서 대수롭지 않은 척 행동하는 은경.

용준은 은근슬쩍 부아가 치밀어 올랐지만 역시나 은경처럼 내색을 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다가 고개를 돌린 용준에게 뜻밖의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아버지···? 왜···.“

화장실로 향하는 은경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상만. 

눈동자는 희번덕거리고 입가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져있었다.

‘아버지가 왜 저런 눈빛으로 아줌마를 쳐다보는 거지? 설마?’

상만의 모습은 얼마 전까지 은경을 바라보던 자신의 눈과 닮아있었다. 물론 훨씬 더 순진해 보이는 쪽은 용준이겠지만. 그저 자신의 예상이 틀리기를 바라면서 용준 역시 화장실로 향했다.

‘흐흐. 정말 오랜만이란 말야? 그 사이 엄청 예뻐졌는데?’

상만은 은경을 기억하고 있었다.

결혼식 날 신부측 하객으로 참석했던 은경.

하지만 지금같이 아름다운 외모는 아니었다.

아직은 성숙한 티가 나지 않는 풋풋한 대학 신입생의 모습.

회사에 취직을 하자마자 정숙을 만나고, 열 살이라는 나이 차이가 남에도 자신에게 좋아한다는 표현을 하는 정숙이 마음에 들어서 결혼까지 하게 되었지만 아직까지 은경의 얼굴이 생각날 정도로 낯이 익었다. 

그 때보다 훨씬 더 농염해지고 우아해졌다고 해야될까?

결혼식 때에는 그저 파릇파릇 자라나는 새싹 정도로 보였던 은경이 이제는 섹시함과 우아함을 동시에 뽐내는 ‘여자’로 보이는 것이 사실이었다.

은경이 다시 거실로 돌아올 때까지 그녀가 사라진 주방에서 눈을 떼지 못 했던 상만은 용준이 몇 번이나 부르고 나서야 정신을 차린 모습이었다.

‘마누라 친구만 아이었어도···.’

아들까지 있는 마당에 더 오래 그녀를 주시할 수도 없다고 생각한 상만은 그제서야 방으로 향했다. 용준 역시 아버지가 방에 들어간 후 옷을 갈아입을 생각이었다.

‘아버지 눈빛이 뭔가 심상치 않았어···. 아니, 내 착각일 수도 있지. 은경이 아줌마 정도면 어떤 남자라도 관심을 가질 걸? 연상부터 연하까지 모두 다.’

그런 생각을 하니 씁쓸했다. 그리고 잠시 후 은경과 다시 마주쳤을 때 용준은 더욱 서운함을 느꼈다. 확실히 은경이 그리웠나 보다라는 생각을 하면서 용준은 식탁으로 향했다.

처음엔 정숙의 요리와 배달 음식으로 시작한 저녁식사.

다시금 오랜 친구라는 설명을 하는 정숙은 계속해서 수다를 떨면서 테이블 분위기를 이끌었다.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한 채 대화에 몰두하는 엄마의 모습이 새삼 안타깝게 느껴졌다. 

‘어젯밤엔 아버지가 너무 심했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잠시 은경에게 다시 눈을 돌렸을 때 그녀는 웃으면서 아버지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간간히 웃고있는 그녀의 손이 아버지의 팔뚝을 슬쩍 스칠 때면 불길한 예감이 들기도 했다. 왠지 은경을 아버지에게 뺏긴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은경씨, 언제 골프나 한번 치러 가요. 제가 모시죠.”

“정말요? 필드 나간 지 너무 오래됐는데···.”

“그래요? 그럼 제가 도와드릴게요. 제가 이래봬도. 으흐흐.”

아버지와 은경이 나누는 이야기들.

이런 대화에 능숙한 사람들이 나누는 모습이었다.

자신이 모르는 어른들의 세계. 

점점 그곳으로 은경을 빼앗기고 있는 기분이었다. 질투심이 서서히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비단 용준 뿐만은 아니었다.

“둘이 무슨 대화를 그렇게 나누고 그래? 식사 좀 해가면서 이야기 해요.”

아버지의 옆에 나란히 앉아있던 엄마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오랜만에 만난 남편이 밤새 자신을 거부하고 자신의 친구와 스스럼 없이 어울리는 모습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런 엄마의 경계에도 아랑곳 없이 아버지는 은경과 연달아 술잔을 기울였고, 결국 술이 약한 은경은 꽤 취한 듯 비틀거리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에 아버지와 아들의 눈동자가 동시에 번뜩였다.

“용준아, 너 은경이 아줌마 좀 데려다줘라. 차 가지고 왔다고 하더라.”

여자의 육감일까? 그런 분위기를 깬 것은 정숙이었다. 남편보다는 아들을 더 믿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물론 아들이 자기와 동갑인 친구와 특별한 사이로 발전할 것이라는 상상은 추호도 하지 않았기 때문일테고.

“괜찮아···. 대리 기사 부르면 되는데 뭘···.”

“얘는. 든든한 총각이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 이래봬도 용준이가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운전면허 땄어. 가끔 우리 차도 몰구.”

2종 원동기 면허는 이미 고등학생 때 땄었다. 운전은 무조건 자신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은경을 집에 데려다주라는 엄마의 명령이 더 없이 반가운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차 놓고 가도 되는데···. 차라리 내일 가지러 올게.”

어떻게든 용준을 떼어놓고 가고 싶은 은경. 하지만 용준은 쉽게 그녀를 놓아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얼마나 오랜만에 은경과 재회한 것인데.

“괜찮아요. 멀지도 않은데요 뭘.”

“그래두···. 괜찮은데 정말···.”

“어서 가세요. 제가 모셔다드릴게요.”

“그래, 아들~ 네가 수고 좀 해~ 엄마는 아빠랑 오붓한 시간 좀 보내고 있을 테니까.”

엄마의 윙크를 뒤로 한 채 용준은 슬며시 은경의 등을 떠밀 듯 집을 나섰다.

현관문을 나가기 전 뒤를 돌아봤을 때 아버지의 표정이 살짝 굳어있다는 것은 용준 혼자만의 착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근데 쟤가 어떻게 은경이 집이 우리집에서 가깝다는 걸 알지? 내가 말했었나?’

친구와 아들을 배웅하며 돌아선 정숙은 잠시 그런 생각을 들었다. 하긴 은경이가 우리 집에 드나든 게 한 두 번인가? 예의 최대한 요염한 눈빛을 하며 남편을 향해 돌아섰을 때 그는 무심한 표정으로 전화를 받고 있었다.

“어, 나 지금 집인데? 왜? 그렇게 급한 일이야?”

남편의 전화받는 모습이 심상치 않았다. 아들을 보내고 남편과 둘만 남은 집.

어젯밤 실패한 남편과의 동침을 시도하려 했던 그녀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알았어. 그렇게 급하면 어쩔 수 없지. 한 시간쯤 걸릴테니까 기다리라구. 지금 곧 출발할게.”

상만이 전화 통화를 마쳤을 때 이미 정숙은 실망한 표정으로 그의 옷을 챙겨들고 있었다.

캐주얼 복장에 정장 외투 하나만 걸친 채 집을 나서는 상만.

무심한 표정으로 나간다는 말도 없이 현관문을 열고 나서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정숙은 불현 듯 뜨거운 눈물이 자신의 볼을 타고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남편이 너무도 원망스러웠다.

자신을 몰라주는 남편, 아직은 뜨겁기만한 30대 후반의 아내를 매일 홀로 두는 남편이 밉기만 했다. 하지만 남편은 이미 집을 나가버린 상태였다. 자리에 주저앉아 오열하기 시작하는 정숙의 모습은 너무도 쓸쓸해 보이기만 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