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3 22. 패왕색과의 데이트 =========================================================================
안명수 고객으로부터 온 메시지는 정수의 퇴근 시간을 말해달라는 것이다. 그 시간에 그녀는 백화점 입구에서 그를 기다릴 것이고, 자기가 오늘 커피를 사겠다고 했다. 궁금해하는 세영에게 정수는 숨김없이 모두 말해주었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은 세영은 그야말로 뚜껑이 열리려고 한다.
"무슨 이런 일이?"
"진정하세요. 그냥 커피만 ..."
"장난치나? 시작이야 커피죠. 다들 아이스크림, 떡볶이 음료수 이렇게 시작해."
"내가 고객이랑 사고 치겠어요?"
"네가 고객이랑 사고 치는게 아니라, 고객이 너랑 사고치는 게 문제야!"
"그럴 일 없을 거라니까."
"패왕색기를 이기려면, 자기는 견문색기를 방출 해야해. 알았지?"
"이거 원 ... 도대체가 ..."
"뭘 투덜대? .. 가르쳐주면 고맙다고나 해!"
정수는 불안해하는 세영을 간신히 세영을 달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세영에게서 저녁 6시에 퇴근하도록 허락을 받아냈다.
그런데 그의 부탁을 들어주어야 하는 세영은 마음이 괴롭기만 하다. 이런 일이 올 줄로 알고 있었지만 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잘 견뎌왔다. 그런데 드디어 오늘 무슨 일이 또 생기려나보다. 저녁 6시가 되자 칼처럼 퇴근하겠다고 나서는 그는 그야말로 입이 귀에 걸려있다. 한번즘 세영의 마음을 생각해주면 안되나? 세영은 서운하다. 가슴이 시려온다. 그가 얄입다. 가게 문을 나서서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그의 넓찍한 등짝을 한대 갈기며 세영이 한마디를 던졌다.
"저녁 6시에 도대체 언넘이 커피를 마셔?
그 시간이면 저녁 먹고 술 마실 것이 뻔할 뻔자구만.
누구는 왕년에 연애 한 번 안 해 본 줄 아나?
그럼 술이 술로만 끝나냐?
잘 해보셔. 흥!"
"사장님, 함 두고 보세요."
"두고 보긴 뭘 두고 봐? .. 내 촉이 이렇게 쏠리는데!"
그는 백화점 입구에서 기다리는 안명수 고객에게로 갔다. 안명수는 그를 차에 태우고 출발했다.
"마약씨, 지금 퇴근 한 거죠?"
"예."
"어느 노동이건, 노동이라는 것은 항상 살인적인 거야."
"살인은 표현이 좀 심한 것 같네."
"그런 노동을 끝낸 사람은 누구나 그 이후의 시간을 꿀처럼 즐길 권리가 있어야 해."
"기대되는데요."
"나도 오늘 살인적인 노동을 했으니까 이제부터는 마약씨랑 꿀처럼 즐길 거야. 좋죠?"
"그런데 ..."
"왜? .. 뭐 .. 불만 있어요?"
"운전 좀 제발 똑바로 ... 저 아직 일년은 더 살아야 해요."
"엉? .. 웬 일년만?"
"다음 오디션까지는 살아야죠. 하하"
안명수는 운전하면서 가끔씩 정수를 곁눈질로 본다. 아예 고개를 돌려서 볼 때도 있다. 그는 등받이에 기댄 채로 잔뜩 못마땅한 척 하고 앉아서 전방을 주시하고 있다. 이런 정수의 모습이 얼핏 봐서는 제법 섹시해 보인다. 정수는 못마땅해 할 리가 없다. 그는 지금 어디까지나 연극중이다.
그런데 안명수가 정수를 데리고 간 곳은 바로 자기집이었다. 차에서 내리면서 안명수는 정수의 표정을 살피며 묻는다.
"실망?"
"애당초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실망이 있겠어요?"
"이러언. .. 이렇게 섹시한 누나가 데리고 나가는 데, 기대를 하지 않았다고?"
"저는 마음을 비웠어요."
"그건 어디까지나 마약씨 잘못이야."
정수의 눈에 보이는 안명수의 얼굴에는 피로의 기색이 역력하다. 또 정수가 자신의 오늘 하루를 돌이켜봐도 순탄한 하루였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런 하루를 살인적이었다고 표현하는 것이 괜찮을까? 이제부터 꿀처럼 즐기겠다는 그녀의 말은 무슨 뜻일까? 그런데 저렇게 아름다운 여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어쩌면 극단적인 표현까지도 막힘이 없을까?
안명수는 정수를 거실에 팽개쳐두고 방에 들어가서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다행스럽게도 그 날처럼 슬립은 아니었지만 위태로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원피스와 슬립이 색깔과 천의 재질만 다른 것이고 생김새는 똑같았기 때문이다.
그날 처럼 안명수의 가슴은 아슬아슬하게 옷에 가려져 있었지만 역시 불룩하게 솟아있다. 정수가 손을 뻗어서 한 번 만져보고 싶은 마음이 오늘따라 유난히 강하게 일어난다. 정수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는 거실 소파에 앉아있고 그녀는 저녁식사를 준비한다면서 배달 음식을 주문하는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와인 한 병을 꺼냈다. 정수가 생각할 때 세영의 말이 딱 맞아 떨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정수는 마지막에는 세영의 침대에 가있을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그런데 그 때 주문한 음식이 왔다. 다름 아닌 냉채족발과 보쌈이다. 아마도 3인분은 넘을 것 같다. 두 사람은 식탁에 거의 나란히 앉았다. 마주 앉지 않은 것은 명수의 고집 때문이다.
"내가 너무 섹시해서 마약씨가 늑대로 변하면 안되니까."
이것은 명수가 거짓말을 한 것이다. 아마도 그가 명수의 건너편에 앉는다면 명수는 숨쉬는 법을 잊어버릴 것만 같다. 한번 명수의 시선이 그의 시선과 붙으면 떨어질 줄 몰라 한다는 것. 이런 저런 문제로 명수는 그를 옆자리에 앉게 했으나, 나란히는 아니고 직각으로 앉았다.
명수는 창문을 보고, 또 정수는 거실의 벽을 보고 앉았다. 이들 두 사람 사이에는 테이블의 모퉁이가 자리하고 있었다.
이 남자.
문명 뭔가가 있다.
명수가 가진 여성의 본능적인 촉이 감지한 사실이다.
생김새도 묘하고. ..
어쨌든 지금까지 다른 남자에게서는 느끼지 못했던 그 무엇인가가 확실히 있다.
그의 붉은 입술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면서 명수의 시선을 잡아 끈다. 그의 입술이 살짝 멀어질 때 명수는 정신이 혼미해온다. 입술의 여성스러운 라인과는 달리 턱선은 뚜렷한 남성라인이다.
거리가 좁혀져도 이렇게 직각으로 좁혀지니까, 명수는 정수에게 향긋한 향기를 풍겨주고, 정수는 그 대신에 명수의 마음을 동요시킨다. 정수는 또 명수의 안구를 정화시켜주고, 명수는 정수에게 이상한 변태 같은 생각을 갖게 한다.
명수가 그를 처음에 세탁소에서 봤을 때, 또 이 집으로 배달 왔을 때 그때부터 왜 자꾸 명수의 마음에서는 화산이 폭발하듯 여러가지 감정들이 복잡다양하게 끓어오를까? 왜 그 날 이후로 날이 갈수록 정수에 대하여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서럽고 섭섭한 감정만 쌓여왔을까?
욕정이다. 더 정확히 표현하면 성욕이다. 명수의 여성적인 촉이 또 이런 결론으로 매듭지었다. 이것을 인정해야 하는 것은 참담하다.
명수 자신은 미녀임에 틀림없으므로 저 남자는 마수이어야만 할 것 같다. 원래 명수의 예감은 집요하고 지독한 면이 있다. 이 예감은 이번에 불길하고 야릇하게 다가온다. 발 끝부터 머리 끝까지 전신에 걸쳐서 불쾌한 예감이 휘감아온다.
정수는 열심히 족발과 보쌈을 입에 구겨넣고 우걱댄다. 양쪽 볼이 제법 요염하게 실룩댄다. 저대로 두면 체해서 나중에 잡에 갈 때는 손가락 발가락 다 따고 먹은 것을 다 토해서 내용물을 일일이 확인하는 진귀한 풍경이 벌어질 것만 같다.
명수는 우선 자신의 모든 마음과 표정을 숨겼다. 그녀는 현명하게도 그의 모든 식사행위를 중단시키고 생수 한 컵을 비우게 했다. 인류의 구원이 별것인가? 아무리 위대해도 일단은 바로 옆에 있는 한사람에게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 아닌가? 물론 첫발자욱은 항상 힘들다.
이 남자는 제법 예쁘게 스타일링이 되어있다. 비쥬얼은 봐 줄만 하다. 그런데 그게 문제가 아니다. 근본이 너무 잘생겼다. 그게 문제다.
안명수는 답답하다. 문제를 어렵게 찾아냈으나 해결책이 없는 것이다.
다음 주 주말에 이 남자를 데리고 엄마에게 가서 인사시키고, 엄마가 허무맹랑한 맞선 자리로 자신을 내모는 행위를 더 이상은 하자 못하게 금지해야겠다고 다짐해본다.
이런 각양각색의 오만 잡생각을 다하면서 족발과 보쌈을 먹으니까, 드디어는 명수 자신도 체할 것 같다. 이 남자도 아까 머리 속이 복잡했었구나. 머리가 복잡할 때 음식을 먹으면 체할 확률이 높아지는 것은 남녀 공통이구나.
"맛있어?"
"예"
"거짓말 하지 않아도 돼. 내가 한 것 아니니까."
"거짓말 안 해요."
"내가 누나 하면 안될까?"
"하고 싶으시면 하세요."
"허쭈? 내가 큰맘 먹고 누나 해주겠다는 데, 너도 따라서 큰맘 먹고 하라고 하냐?"
"그건 아닌데 ..."
정수는 경애누나가 생각났다.
언젠가는 누나와 침대에 가세 된다는 사실.
급속히 맺어진 남매결연이 레드와인 한잔으로 조인되었다. 안명수는 그에게 그의 과거사에 대해 질문을 했다. 정수는 친절하게 대답했다.
어린 나이에 부모님의 사망,
누나와 살던 시절,
길거리 스카우트,
음악공부 와 학교공부,
오디션 그리고 본선에서 쓴 잔,
세탁소에 아르바이트생으로 취직
자신의 인생에 이렇게 굵직한 항목들이 많이 있음을 정수는 이 자리에서 처음 알았다.
"동생아."
"예?"
"눈물난다. 진심이야."
"엥? .. 그렇다고 진짜로 울지는 마세요."
"진짜로 울겟다고는 안했는데?"
"그럼?"
"눈물이 날 정도로 슬프다 이말이야."
"예."
"이 섹시한 누나가 정수를 도와줄까?"
"어떻게요?"
"누나 직업이 뭔줄 알아?"
"방송사에서 근무하신다면서요?"
"맞아. 서울 LBS 기자야."
"예."
"이거 기사로 만들자."
"무슨 기사?"
"마약의 성분"
"참나..."
"오늘의 네가 있기 까지 무슨 일이 있었나..."
"그거 누가 관심 있어해요?"
"연예 쪽은 이런 내용이 아주 좋은 기사가 될 수 있어."
"예?"
"일단 이번 주말 쯤 해서 신문기사로 한 번 뜨고."
"흐으음 ..."
"다음에는 TV 프로에 좌담회나 예능 프로 뭐 이런 거."
"쉽지는 않을 것 같아요."
"네 후배들을 생각해.
어렵더라도 이 엉아 처럼 좌절하지 말고 꿈을 잃지 말고 살으라고."
"그렇게 될 수도 있나? .. 그렇다면 할께요."
"내 말 대로 해. 일단 기사를 써보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휴지통에 버리면 돼."
안명수 기자는 한정수가 자기의 어려운 환경을 극복해서 성공신화를 창조해내려고 한다는 점을 소스로 해서, 현재 노력 중인 한정수를 취재하기로, 또 어떻게든 기사화 해보기로 약속했다.
이런 저런 이야기가 모두 끝나자 정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안명수는 시간이 늦었다면서 그를 위해 전화를 해서 택시를 불러주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정수는 마음이 복잡하다. 자신의 사생활이 이렇게 공개되는 것에 어려운 환경에 있을 후배들을 생각한다는 명목하에 동의하기는 했지만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커피가 아닐 것이라는 세영의 말은 들어맞았다. 그러나 그 이상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세영의 촉이 다 맞는 것은 아니다.
============================ 작품 후기 ============================
이 글이 왔어야 하는데, 이 글이 오지 않고 다음 글이 중복해서 와있네요. 정말 죄송해요. 제가 지금 제정신이 아니라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