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0095 94. 게다가 안하던 짓을 한다. 향수까지 뿌리고 나서는 것이다. (95/116)

00095  94. 게다가 안하던 짓을 한다. 향수까지 뿌리고 나서는 것이다.  =========================================================================

월요일 아침.

하늘은 맑고 깨끗하다. 그런데 그 하늘 아래에 서있는 안명수의 마음이 결코 편하지는 않다. 오늘은 정수가 미팅에 나가고, 또 그 자리에는 신예원이 나오기 때문이다.

오늘은 석가 탄신일이다. 부처님도 안명수의 마음에 평화를 주실 생각을 아예 접으신 것 같다. 안명수의 마음에 활활 타오르는 이것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안명수도 대학 시절에 미팅을 해본 적이 있다. 그녀의 미모 때문에 간판으로 끌려가다시피 한 것이 1학년 그리고 2학년 해서 딱 두번이다. 그 자리에서 남학생들은 그녀에게 아예 대놓고 대쉬해왔다. 

그 당시에는 여학생들이 말을 별로 하지 않고 묵묵히 있었던 시대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여학생들이 오히려 더 설쳐댄다는 말을 들었다. 정수가 오늘 무사할까? 미팅에 나가는 사람은 한정수인데, 불안한 것은 왜 안명수의 마음일까?

안명수가 자기 생각만 하자면 정수에게 미팅 금지령을 내려야 하겠지만, 정수도 대학생활을 하면서 한번쯤은 해봐야 할 것 같다. 별것 아닌 것이 마음에 앙금으로 남으면 좋을 일도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진짜 한정수 눈꼴 셔서 못 봐줄 지경이다. 오늘 아침에는 슈트를 꺼내 입고, 게다가 안하던 짓을 한다. 향수까지 뿌리고 나서는 것이다. 이건 더 이상 그대로 보고 넘어갈 사항이 아니다. 따질 것은 따지고 넘어가야 한다. 원만한 부부관계를 위해서. 아직 결혼을 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부부는 부부가 아닌가?

"자기네는 무슨 미팅을 아침부터 한대?"

"미팅은 오후 4시에 옐로우에서 해요. 누나도 생각 있으면 나오세요."

"그런데 왜 아침부터 난리야? 아침에 어디서 좋은 일 있어?"

"평소에 이 정도면 기본 아니었나? 하하"

"어이없다. 기본은 청바지에 남방 이었는데? 향수는 또 뭐야?"

"하루 종일 좋은 기분으로 있다가 나가려구요.  헤헤"

"오늘 오후까지는 어디에 있을 껀데?"

"오늘은 하루 종일 연습실에 있어야 해요. 콘서트도 있고 또 앨범 준비도 해야 하고. .."

안명수는 어린애들 하는 짓이 귀엽다고 생각해버렸다. 그러나 안명수는 지난날 자신이 미팅에 나가면서 투피스 정장을 입었거나, 향수를 뿌리거나, 화장을 하지는 않았었다. 요새 애들 참 웃긴다.

그들은 각자 자기 차에 올라서 서울을 향하여 출발했다. 정수는 오늘 수업이 없다. 석가 탄신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안명수 모르게 아침 일찍 윤수지를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윤수지와 만나서 미라네 집 지하실에 있다는 연습실에 가볼 생각이다.

그는 윤수지와 약속한 장충동으로 갔다. 대형 마트 정문 입구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윤수지는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부시시한 모습이다. 아마도 이제야 잠에서 깨어난 것 같다. 윤수지 앞에 차를 세우자 그녀가 정수 옆자리로 탔다.

"누나, 어디 아파요?"

"아프기라도 하면 좋게? 병원에나 갈 수 있거든.  이건 뭐 .."

정수는 심상치않은 분위기를 포착했다. 

"어디로 갈까요?"

"한남동으로 넘어가.  한강다리 건너서 강남으로 가자."

정수는 그녀가 가라는 곳으로 차를 몰았다. 그곳은 삼성동에 있는 고급 주택가이다. 거기까지 가는 동안에 그녀는 길안내 말고는 특별한 말이 없다. 정수도 묻지 않았다. 정수가 주차하는 사이에 윤수지는 김미라에게 전화를 한다며 차에서 내린다.

정수가 백팩을 들고 차에서 내리고, 수지도 통화를 끝냈다. 두 사람이 대문 앞에 서자 덜컹 하고 문이 열린다. 넓은 잔디밭, 그리고 3층짜리 집이다. 수지가 앞장선다. 정수는 두세걸음 거리를 두고 수지의 뒤를 따른다. 수지의 큼직한 엉덩이가 요염하게 흔들린다. 안무 때문에 훈련이 잘 된 것 같다. 갑자기 수지가 걸음을 멈추고 뒤로 돌아선다.

"무슨 생각해?"

"별로.. 아무 생각 안하고 .."

"거짓말.  내가 모를 줄 알아?"

수지는 다시 몸을 돌려서 3개짜리 계단을 올라갔다. 정수가 수지의 엉덩이를 쳐다본 것이 들통이 난 것 같다. 그런데 수지는 화를 내는 안색이 아니다. 

수지가 현관 문을 당기고 안으로 들어선다. 잠시 후에 수지가 나와서 정수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선다. 미라가 화사한 드레스 차림으로 웃으며 맞이한다. 홈웨어는 아닌 것 같다. 

"오빠가 내 연습실이 궁금하다고 했다며?"

"잘돼있다고 수지누나가 워낙 자랑을 해서. .."

"언니는 옷이 그게 뭐래?"

"귀찮아."

수지가 신경질적으로 대답한다. 미라가 뻘쭘해한다. 미라는 정수의 팔에 팔짱을 끼고 지하로 가는 계단을 내려간다. 미라에게서 향긋한 화장품냄새가 정수를 자극한다. 수지가 이들의 뒤를 따른다. 오늘의 미라는 지난날의 그 미라가 아니다. 그 동안에 무슨 일이 있었음에 틀림없다. 

미라의 연습실은 수지가 말한 것처럼 잘 되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주택가라서 그런지 방음은 엄청 꼼꼼하게 잘한 것 같다. 중앙에 그랜드 피아노와 키보드가 있고, 긴 테이블에는 통키타 그리고 바이올린이 놓여있다.  그 옆에 있는 테이블에 수지와 정수가 앉았다. 미라는 잠시 기다리라고 하고 연습실을 나선다.

"방음은 잘 되겠죠?"

"왜? 미라 노래 시키게?"

"누나가 먼저 시범을.."

"야아아. 자다가 이제 막 일어난 사람한테 무슨 노래야? 나, 절대 안해!"

"지난 번에 내가 한 얘기는 미라도 알고 있겠죠?"

"내가 전했어. 그새 까먹지는 않았겠지?"

미라가 음료수, 빵, 과일, 커피가 든 보온병 그리고 잔까지 힘들게 들고 내려온다. 수지가 같이 들어주면서 한마디 한다.

"정수가 오니까 아예 살림을 차리려고?"

"아이. 참. 언니는.  아침부터 엄청 미안하니까."

오늘은 세상이 뒤바뀐 것 같다. 수지는 딱딱거리고, 미라가 조신하다. 미라는 주섬주섬 먹을 것과 마실 것을 테이블에 올려놓는다. 또 커피도 따라준다. 정수는 먹고 마시기만 하고 있다.  수지와 미라는 정수의 눈치를 보는 것 같다. 이 어색함. 정수가 가장 싫어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어색한 분위기이다. 정수가 입을 열었다.

"김미라씨."

"무슨 김미라씨? 그냥 말 놔. 내가 오빠라고 부를께."

"그래도 좋고. 미라가 솔로를 해보겠다고 했나?"

"딱히 그런 건 아니고. 나도 뭔가를 해야 하잖아. 솔로건 그룹이건. 아무것도 안되면 예대라도 들어가야지. 그런데 포트폴리오로 앨범이 필요하다고. 앨범에 넣을 노래가 있어야 하고."

"만일 예대에 들어가는 것 마저 안되면 어쩌지?"

"걱정마. 나는 캐나다로 아니면 호주로 유학가면 돼. 그 대신에 .."

"그 대신?"

"내기 이 나라를 떠나게 되면 그냥 조용히 나가지는 않지. 그 동안 당한 것을 까발리겠다 이거야. 순수하게 내 입장에서. 그러면 아마도 정윤희도 본의 아니게 ..."

"지금 나나 윤희를 협박하니?"

"오빠. 완전 오해야. 내가 뭐 하러 그런 치사한 짓을 하냐?"

"내 말이."

"나도 이 바닥에서 뭔가를 해보려고 투자한 돈이나 시간이 있거든. 그런데 내가 아무것도 건진 것이 없어. 그리고 내가 털고 일어서야 한단 말이야. 그럼 나는 내가 당한 것이 있으니까 그걸 까발린다고. 거기까지가 내가 하겠다는 거야."

"으음.."

"다시 말하는데, 내 말을 오해하지 마. 그럼 그 파급효과가 다른 사람들 한테 가겠지? 그럼 난데없이 윤희씨가 피해를 볼 수도 있을 것 같다고 미리 말해주는 거야. 내가 이런 말을 하지 말 껄 그랬나? 나는 걱정스러워서 하는 말이야."

"증거없이 그러면 명예훼손인데?"

"그건 내 알바 아님. 내가 미국에서 까발리면 어쩔래? 나는 꼭 처벌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야. 그냥 말을 뱉어버리겠다고. 그 이후는 자기들끼리 지랄을 치겠지? 켕기는 놈들은 발악을 할꺼고, 아무 상관 없는 사람들은 나를 비웃을꺼고. 이런 일 한두번 겪는 것이 아니잖아?" 

"그럼 미라 말은 윤희를 걸고 넘어지겠다는 것이 아니네?"

"내가 뭐가 아쉬워서 그런 짓을 해? 예를 들어서, 내가 어떤 매니저에 대해서 까발리면, 그 사람에 대해서 조사가 이루어진다고 치자. 그럼 윤희 얘기가 안나온다고 보장할 수 있어? 내 바로 앞엔데. 아무리 가명으로 처리한다고 해도 피해가 생기는 것을 막을 수는 없죠."

정수가 미라의 말을 들으면서 천천히 생각을 정리해보니까 미라가 틀린 것 같지 않다. 미라도 나름대로 답답하고 억울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을 지금까지는 혼자 삼키면서 참고만 있었지만, 어느 시점에서는 더 이상 참지 않고 말하겠다는 얘기다. 

"음 .."

"이해가 가?"

"알았어."

"이제 그런 얘기 고만하고 .. 연습실 어때?"

"잘 꾸몄네."

"댄스 연습하느라고 벽에 거울을 주욱 붙였었는데, 전에 열받아서 다 깨버렸어. 다시 붙일꺼야."

"미라가 노래하는 음은 어느 범위지?"

"나야 모르지. 하라고 주는 것은 다 했지."

"내가 한번 볼께.  악보 가진 것 있어?"

"없어.  ..  있던 것 다 불태웠어.""

정수는 가방에서 자기 악보를 꺼냈다. 낮은 음과 중간 정도의 음에 걸쳐서 노래하는 곡을 펴주었다. 미라가 조용해지면서 악보를 들여다본다. 수지도 옆에서 같이 본다.

"발성연습을 따로 할 필요는 없겠지?"

"했으면 좋겠는데... 그냥 하지 뭐."

"오케이. 녹음 되나?"

미라와 정수가 피아노로 갔다. 정수는 피아노 앞에 앉는다. 미라가 피아노 앞에서 녹음기의 녹음 버튼을 눌렀다. 수지는 이들 둘을 바라본다. 그가 전주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정수가 미라에게 턱으로 싸인을 하자 미라는 노래를 시작했다. 미라의 노래를 듣던 수지가 조용히 웃는다. 

노래가 끝이 나자 미라가 녹음을 종료시키고, 수지에게 따지듯 묻는다.

"언니!  뭐야?  왜 비웃어?"

"비웃긴 누가 비웃어? 그냥 웃었거든."

"웃을 일이 없는데 웃으면 비웃은 거지."

"나한테 묻지 말고 정수 생각을 들어봐."

정수는 수지를 불러냈다.

"미라가 노래를 부를 줄도 알아야 하지만, 들을 줄도 알아야 하니까, 누나 미안하지만 .."

"아이.. 참."

수지는 마지 못해서 앞으로 나온다. 미라는 다시 녹음 버튼을 누른다. 똑같은 노래를 이번에는 수지가 부른다.

"미라 네가 이거 나중에 들어보면, 아까 수지누나가 왜 웃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거야."

"안들어도 알 것 같아. 감정이 없다 이 말 아닌가?"

"미라, 넌 그냥 가시를 읽었잖아? 그래서 내가 웃었어. 비웃은 것은 아니야."

"난생 처음 악보를 보고 부른 노래인데, 그럼 어쩌라고?"

"미라, 넌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우리가 무대에 서서 노래하면, 사람들은 우리 노래를 열심히 들으면서 감동하는 줄 아니?  욕하고, 야유하고, 벼라별 일이 다 일어나.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주어진 노래를 제대로 불러야 하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야." 

"그게... 언니는 프로잖아. 난 아직 아니고."

"돌겠다."

"오빠, 나 불합격이야?"

"이건 오디션이 아니고, 미라 음역을 보는 거니까 합격 불합격이 없지."

"어땠어?"

"이 부분은 누구나 다 해내는 부분이잖아? 그럼 고음 하나만 해보고."

정수는 높은 음이 나오는 곡을 내주었다. 미라가 이번에는 악보를 조금 더 신중하게 들여다본다. 이번에도 정수는 미라와 수지가 차례로 그 노래를 부르도록 해서 녹음을 해두었다.

"아아아. 언니 노래 들으면 빡친다. 감정 없는 것 말고는 어땠어?"

"열심히 부르는 모습은 보기가 좋네."

"잘 부른다는 말은 끝끝내 안하네."

"처음 받은 곡인데. .."

"어떤 상황에서든 잘하라며?"

"못하면 연습을 부지런히 해야죠."

이들의 대화를 듣는 수지가 또 키득대고 웃는다. 미라는 수지를 향하여 눈을 흘긴다. 

"두 사람이 부른 노래가 여기 들어있으니까, 미라는 잘 들어야 해요. 노래를 또 하고 녹음을 해봐도 좋지만 그럴 필요는 없겠고, 그 대신에 연습이나 많이 해놓으세요." 

"오빠, 또 언제 올껀데?"

"오늘은 뭐라고 말 못해. 수지누나 편에 연락해줄께."

"이제 난 빠지고 너네 둘이 하면 안돼?"

"와아아. 언니, 의리 진짜 없네."

"몇번을 말해야 알아? 지금 나도 내 코가 석자라니까."

"석자?  삼십자짜리 내 코 안보여?"

수지와 정수는 미라네 집을 나섰다. 정수는 수지네 집 앞에 수지를 내려주고 학교로 갔다.  실용음악과 연습실에는 윤경식이 혼자 피아노 앞에 앉아있다. 정수는 경식이의 어깨에 손을 얹으면서 말한다. 

"야. 오후 4시라고 않했냐?"

"맞아."

"지금 겨우 두시인데, 왜 벌써 나와서 청승이냐?"

"보기에 영 별로지?"

경식이는 한숨을 푸욱 내쉰다. 

이 때 정수의 휴대전화기로 수지에게서 문자메시지가 들어온다.

'미라 엄마가 너한테 얼마를 내야 하냐고 묻는데 뭐라고 하지? 계좌번호도 달랜다.'

정수는 답장을 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경식이에게 물었다.

"작년에 같이 했던 랩 하나 할까?"

"좋지."

경식이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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