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5
시동을 건 유주는 바로 음악을 틀었다. 핸들을 돌리며 차고를 빠져나오자 그제야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았다. 누군가 그녀를 강제로 억압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텅 빈 골목을 빠져나와 혼자 달리는 시간은 상쾌했다.
사실 이것이 진짜 바라고 원하는 자유인가 하면 꼭 그런 건 아니었다. 이럴 때가 아니면 아니면 뭔가를 즐길 시간이 없으니까. 직업의 특성상 야근이 많아 그녀 자신만의 온전한 시간을 가지는 건 어려웠다.
진정한 자유는 시간에서 자유로운 것 아닐까.
아직 젊으니까 일을 이어 나가다 보면 언젠가는 시간마저 통제할 수 있는 자유가 오겠지, 라고 생각하며 유주는 생각을 이어 갔다.
물론 좋은 조건의 사람을 만나면 시간으로 돈을 살 수 있는 진짜 자유가 생길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진정 자유로울까.
윤미가 추진하려는 기업과의 결합에서는 그런 자유를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이쪽에서 훨씬 기대에 못 미친다면 상대 쪽에 굽히고 들어가야 할 테니 그런 식의 결합은 정말 싫었다.
하지만 자신은 그녀의 뜻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러니 윤미의 뜻대로 그저 몇 번 선을 보다가 흐지부지 아무것도 아닌 게 되는 게 나을 것이다.
“빌붙어 살아가는 인생.”
그때 한경의 얼굴이 떠올랐다. 빌붙어 살아가는 인생이라니. 어떻게 남의 인생에 대해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인가.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말이었다. 그동안 자신이 노력해 온 시간까지도 무시당하는 것 같았다.
물론 그녀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이 있으니 애초에 그럴 여지가 없는 게 당연했다. 좋은 인상을 기대한다는 것부터가 어리석었다.
하지만 상황이 그렇다 해도 그가 견제해야 할 사람은 자신이 아닌 이 집 장남인 태윤이었다. 시비를 걸려면 그에게 걸 것이지 가만히 있는 사람은 왜 건드리는 것인데.
정말이지 무례하고 모욕적인 말이었다. 뼈에 사무칠 정도로 싫었다.
악랄하고 사악한 인간.
하아.
하지만 속으로 외치는 고요한 아우성이 과연 무슨 힘을 발휘하겠는가. 결국 그녀가 선택해야 할 현명한 답은 이 집을 나가 독립하는 것이었다.
그 생각만 하면 속이 쓰렸다. 이미 몇 년 전부터 독립을 준비해 왔다. 그러나 지금은 수중에 돈이 없었다.
지난해 열심히 모은 돈을 한순간 탕진했다. 엄마가 엄청난 정보를 얻었다며 유주의 돈을 며칠만 쓰겠다고 했다. 지난해 에스테틱 숍을 크게 확장해 옮기며 수중에 가진 돈이 없었기에 급하게 유주의 돈을 빌려 가게 되었다.
유주는 그게 주식에 투자하려는 돈인 줄은 몰랐다. 이전에도 엄마가 급전을 돌리겠다며 돈을 빌렸다가 돌려주고 한 적 있어 그런 일이 벌어질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걱정 마. 얘. 엄마 돈 잘 버는 거 몰라? 큰손 고객이 하도 좋은 정보라기에 푼돈이라도 투자하려고 했던 건데. 조금만 기다려. 내가 이자까지 두둑하게 쳐서 갚아줄 테니까.”
간단히 말하는 엄마의 답에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 울 기운도 없었다. 사실 엄마가 돈이 궁한 사람은 아니니까.
처음 이 집에 들어와 살면서 엄마는 자신도 살길을 찾을 거라며 열심히 일을 하고 기술을 배웠다. 그런데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 한 번씩 엄마를 돕는 윤미의 통은 컸다.
처음 에스테틱 숍을 시작하게 된 것도 그녀 덕이었고 지금까지 좋은 고객을 소개하며 숍을 확장할 수 있게 지지한 것도 그녀의 덕이었다.
그러니 돈을 못 받을까 봐 겁이 나는 것은 아니었다. 몰래 독립을 생각했던 바람이 좌절된 것일 뿐. 사실 그녀가 집을 나가겠다고 선언하면 엄마와 이모의 반대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또한 지금까지 이 집에서 받은 혜택이 얼마인데 그런 것들을 전부 무시한 채 나가는 것도 쉽지 않은 문제였다. 그러니 지금의 처지에서 독립이라는 게 가능하겠는가. 최한경이 뭐라고 하든, 윤미가 선 자리를 잡든 당분간은 얌전히 머리를 조아리며 사는 수밖에.
“응? 지금도 만나자는 여자가 널렸다 이거야.”
갑자기 그 생각은 왜 나는 것인데.
“…….”
그러자 진혁에게도 고백할 수 없는 처지가 씁쓸했다. 그녀도 이제 그를 좋아한다는 말 한마디만 뱉어 내면 될 것 같은데 그게 그렇게 어려웠다.
조금 더 용기를 내어 진혁에게 다가가고 싶었다. 선이고 뭐고, 정말 서로를 알아 가고 싶은 사람은 진혁이었다. 어느새 마음이 점점 커져 갔다. 아닌 척 숨기고 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버거운 것 같았다.
유주는 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전방을 주시했다. 9월에 접어든 지가 꽤 되어 아침저녁으로 선선하게 기온이 떨어지고 하늘이 시원스럽게 높아졌다.
대금을 받은 싱크대 업체가 연락이 두절되어 그 일을 수습했고, 의정부에서 의뢰가 들어 온 토지의 형질 변경에 대한 일을 처리하느라, 도면 수정 및 계획 설계 작업 등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날들이 흐르고 있었다. 거의 완공된 건물의 계단 용접 작업에 하자가 발생해 예측하지 못한 시간과 공을 들이기도 했다.
특히나 도면과 계획 작업은 시간 대비 노동력이 상당히 요구되는 작업이었다. 회사 내부의 10여 명의 직원도 수정과 보완을 반복하며 정신없는 날들을 보내자 어느새 2주가 훌쩍 지나고 금요일이 되었다.
작업량이 많은 사무실은 퇴근 시간에 다다를 때까지 역동적으로 움직였다. 외부 현장에 나갔다가 느지막한 시간에 들어온 진혁이 도면 작업자에게 성큼 다가갔다.
“성질 급한 양반, 아주 전화가 오고 난리가 나셨다.”
“응?”
그러자 책상에서 서류를 살피고 있던 정 실장이 눈을 들었다.
“회기동. 어떻게 되고 있냐고.”
“아. 또 그 양반?”
정 실장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인 진혁이 담당 작업자에게 물었다.
“회기동. 내부 조감도 좀 볼까?”
“아. 네.”
사무실에 오자마자 자신의 자리로 오는 진혁을 보며 준비하고 있던 직원이 화면을 열었다.
“응. 이거야?”
“네. 이쪽 방 크기 약간 줄여서 복도 공간 확보한 거 이 부분에 반영했고… 이게 거실에서 중정 쪽을 바라본 거예요.”
수정 작업을 다 마쳐 놓은 작업자가 진혁에게 설명하자 수정 부분을 집중해 확인한 진혁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수고했네.”
“중정 덱이 마당이랑 연결되어 있어서 흥미로운 것 같아요.”
“그렇지.”
“그 양반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자기가 뭘 좀 안다고 너무 귀찮게 구네.”
정 실장의 말에 진혁이 그러게 말이다, 하며 고개를 휘저었다.
“근데 지금 뭘 어쩌겠다고? 이 시간에.”
도면 수정안을 왜 시간이 촉박한 지금 확인하는 것인지 정 실장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내일 잠깐 미팅 잡을 것 같네.”
“토요일에?”
“오전에 잠깐 봐야지. 뭐.”
“어어. 버릇 나빠져. 일을 할 땐 하고 쉴 땐 쉬어야지.”
“큰 손이시잖냐.”
진혁의 말에 정 실장이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유주도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외부 현장에 다녀온 진혁의 얼굴이 오늘 유난히 까칠해 보였다.
“선배. 밥은요?”
“먹어야지. 대충 뭐 좀 시켜야겠다.”
“뭐 시켜 드려요?”
“어. 그럼 고맙고.”
진혁이 털털한 웃음을 띠었다. 유주는 그게 더 안쓰럽게 느껴졌다.
진혁이 식사를 마치기 전에 직원들 모두가 퇴근을 했다.
사무실에는 유주와 정 실장만 남아 있었다. 진혁이 식사를 하면 유주도 슬슬 일어나 퇴근을 할 생각이었다. 그러지 말고 치맥이나 한잔할까요, 제안하고 싶었지만 얼마 전 결혼을 해 신혼 생활 중인 정 실장과 오늘도 야근을 할 게 뻔한 진혁에게 그런 말을 건네기가 애매했다.
“다 드셨어요?”
진혁이 먹은 그릇을 정리해 나오자 유주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응. 아직 안 갔어?”
“이제 가려고요.”
“나도 집에 기다리는 사람 있으니 얼른 가야겠다.”
정 실장도 기지개를 켜며 맞장구를 친 뒤 고개를 돌려 진혁에게 물었다.
“밖에 비 오는 거 같지?”
“응.”
조금 전부터 한두 방울씩 떨어진 비의 양이 제법 많아졌다. 바깥의 날이 어둑했다. 비에 섞인 내음이 더욱 짙어졌다. 사무실을 꾸민 나무 향에 무겁게 젖어 드는 것 같았다. 나른하게 게으름을 피우고 싶은 날씨였다. 유주는 싸늘해지는 가을과 차가운 비를 좋아했다.
그러나 비가 오면 현재 진행 중인 공사에 차질이 있으니 먼저 그게 마음에 걸렸다. 올해는 유난히 비가 많이 와서 공사가 지연되는 일들이 꽤 되었다.
“넌 오늘도 야근?”
“조금 더 하다 가지, 뭐. 집에서 기다리는 사람도 없는데.”
진혁이 양치질을 준비하며 심드렁하게 답했다. 퇴근을 할 생각에 신이 난 정 실장은 작업 중이던 프로그램을 저장하기 시작했다.
“배가 살살 아프네. 유주 씨 먼저 가. 나 좀 걸릴 듯.”
유주는 정 실장과 함께 복도로 나왔다. 그런데 엘리베이터 앞에 선 정 실장이 배를 문지르자 유주가 빙긋 웃으며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네. 먼저 갈게요. 천천히 일 보고 가세요.”
“응, 응.”
그때 바깥이 번쩍, 하더니 번개가 치는 게 보였다.
엘리베이터에 올라 문을 닫은 유주는 집에 갈 때까지 비가 많이 내리지 않기를 바랐다. 야밤의 빗길 운전은 집중력이 배는 더 필요해 아무래도 피곤할 테니까.
그녀는 1층 버튼을 눌렀다. 그때 우르릉 쾅, 하고 커다란 천둥소리가 나더니 갑자기 덜컹하며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어….”
갑작스러운 상황이었다. 당황한 유주가 계기판으로 눈을 올렸다. 층 번호는 5층을 가리킨 채 엘리베이터가 움직이지 않았다.
몇 번 더 버튼을 누른 유주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엘리베이터가 멈췄다는 걸 알았다. 그녀는 노란색 비상 버튼을 누르려다가 손을 거뒀다. 휴대폰을 꺼내어 진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 어. 무슨 일이야? 출발하지 않았어? 집에는 잘 가고 있어?
“선배.”
- 응?
“여기 엘리베이터가 멈췄어요.”
어처구니가 없었다. 하지만 겁먹은 목소리로 감정을 표현하는 성격이 되지 못해서 유주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저쪽에서 놀란 듯 어? 하는 소리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