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원치 않아-17화 (17/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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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주는 당황하며 쩔쩔맸다. 옷장을 마음대로 뒤지는 두 사람을 말리고 싶었지만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일단 이 집, 이 드레스 룸, 이 옷장까지도 모두 이 집안의 재산 중 하나였다.

그러니 마치 주인의 행세를 하듯 옷을 살피는 윤미를 말릴 수가 없었다. 사실 유주와 정주가 이 집에 기생해서 살고 있다는 건 누구도 부인할 수 없었다. 설령 그게 자격지심일지라도.

옷을 몇 벌 더 뒤적거리던 윤미가 유주를 돌아보며 말했다.

“앞으로 몇 번이나 더 선을 봐야 할지 모르는데… 아예 선볼 때 입을 옷을 좀 사 둬야겠다. 응?”

“네?”

유주가 깜짝 놀란 눈으로 대답했다.

‘아니요, 괜찮아요, 제 옷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왔지만 유주는 차마 그 말을 꺼낼 수 없었다.

또한 윤미는 어려서부터 유주에게 많은 옷을 사 주었다. 어렸을 땐 그게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는 채 그냥 돈이 많은 이모가 참 좋다는 생각만 했었다.

이 집에 들어와 살기 전 유주는 힘든 시간을 보냈었다. 이혼을 하고 혼자 자신을 키우던 엄마와 결국 교회에 들어가 하루하루를 버티면서 그게 얼마나 고생스러운 시간이었는지도 알았고 자신이 안정적으로 사는 다른 친구들을 얼마나 부러워했는지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집에 온 이후 유주는 매일같이 신에게 감사 인사를 드렸다. 교회에서 말하던 천국이 이런 거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녀를 약 올리고 무시하던 친구들에게도 참고 인내하며 버텼더니 신께서 이런 선물을 주시는 거구나.

이후로 그녀가 가진 많은 문제들이 해결되었고 엄마와도 행복하고 감사한 시간을 함께할 수 있게 되었다.

어둡고 슬퍼 보였던 정주의 얼굴에 다시금 웃음이 찾아왔다. 맛있는 식사, 안락하다 못해 과분하고 넘치도록 부유한 환경, 옷과 자가용, 기사와 여타의 많은 것들에 유주는 완전히 혼을 빼앗겨 버렸다.

그렇게 십수 년이나 이 집이 주는 혜택을 누리며 살아 왔는데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있다고 해서 끊어 내듯 말을 할 수 없었다. 이제 나이가 들고 머리가 컸다고 매정하게 구는 건 어른에 대한 도리도 아닐 것 같았다.

“뭘 그렇게 놀라? 너 좋은 사람 만날 때까지 이모가 팍팍 밀어 주겠다는데. 으이그. 걱정 마. 난 이상한 사람 붙여 놓고 억지로 정략결혼 같은 거 안 시켜. 몇 번이고 만나면서 마음에 꼭 드는 사람 만날 때까지. 알았지?”

윤미가 유주에게 찡긋 윙크를 했다. 윤미는 그게 유주를 위해 꼭 필요한 배려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니요. 괜찮아요.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 이모.

“근데 세상에. 진짜 언니 옷이 훨씬 많네. 어머… 이건 또 언제 샀대? 요것도 너무 이쁘다.”

옷 구경에 신이 난 듯, 윤미가 정주의 옷에도 손을 대며 말하자 정주가 혀를 끌끌 차며 고개를 저었다.

“이 나이에 내가 꾸며서 뭘 어쩌겠어. 하나뿐인 딸이 이래서 걱정이지. 건축 회사인가 뭔가, 현장에서 뛰려면 청바지가 장땡이란다. 아주 먼지며 페인트는 또 얼마나 묻혀 오는지. 사내애를 키우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말을 안 듣는지 몰라. 여자가 건설이 뭐니, 건설이.”

“호호호호. 그러게. 유주 너도 참 웃겨. 우리 미술관에 와서 일하면 좀 좋니? 우아하고 고상하고…. 이 일이 월급이나 받자고 하는 일이 아니거든. 요샌 여기도 아무나 함부로 올 수 없는 자리야. 거의 기업가 3세들이 포진해 있는 건 알지? 고상한 직업에 그들만의 인맥, 예술적 소양을 닦고 유행을 간파하고… 그런 스펙 정도는 되야 가능하지. 여기서 교류되는 정보며 비즈니스가 얼마나 어마어마한데. 다들 그런 거 보고 잡는 자리니까.”

“어휴. 지금이라도 미술관에 들어가라니까.”

정주가 속상한 얼굴로 유주를 타박했다.

“엄마, 좀.”

“유주야. 너 이런 조건 흔하지 않아.”

“…….”

“응? 세상에 어느 이모가, 응? 그것도 팔촌 이모가, 너 이렇게 뒤 밀어주고 도와주겠니? 넌 굉장한 행운아라는 걸 인정해야 해. 이런 조건이면 할 수 있는 건 다 누려야지. 용돈 필요하면 말해. 사 달라는 거 다 사 줄게. 옷이랑 가방, 백… 응?”

“이모. 저도 돈 벌어요.”

유주가 씁쓸하게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어어?”

“많지는 않지만 제게 필요한 거, 제가 알아서 할 수 있어요. 옷도 이거 정장 입으면….”

“어휴….”

유주가 검은 정장을 들어 올리자 윤미가 고개를 저으며 그녀를 응시했다.

“이렇게 날이 좋은데 칙칙하게 무슨 블랙이야. 우리 유주가 얼마나 화사하고 예쁜데. 얜 정말 자기가 얼마나 예쁜 줄 모르는 모양이야. 유주야. 넌 피부가 하얘서 밝은색 옷을 입어야 해. 그러면 엄청 예쁠 거라고. 어휴. 안 되겠다.”

유주에게 안쓰럽다는 듯 고개를 저은 그녀가 갑자기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어. 리아니?”

전화가 연결되자마자 등장한 사람은 리아였다.

워낙 넓은 곳이라 한집에 살아도 집에 누가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서로가 생활하는 공간이 달랐고 각자의 사생활이라는 게 있으니 작정하고 알아보지 않으면 서로의 부재를 알지 못했다.

리아는 집에 있던 모양이었다. 윤미가 전화를 걸어 사정을 이야기하자 리아가 자신의 옷을 빌려주겠다며 흔쾌히 대답했다.

당사자인 유주는 내키지 않았지만 윤미는 옷을 골라 줄 생각에 신이 난 뒤였다. 덩달아 들뜬 정주의 손에 이끌려 하는 수 없이 리아의 드레스 룸으로 가자 리아가 뒤늦게 머리를 긁적이며 나타났다.

“어휴. 여기 또 다른 난관이네….”

윤미가 작게 미간을 구기며 말했다.

“이 방은 너무 화려해서 문제네. 스팽글에 휘장에… 색상은 어쩜 이렇게 다 형광이 도는지….”

몇 벌을 더 뒤적거린 윤미가 고개를 저으며 리아를 돌아보았다.

“우리 리아도 자유분방해서 점잖은 옷이 없구나.”

그러자 방관자처럼 팔짱을 끼고 구경만 하던 리아가 옷을 한 벌 꺼내었다.

“이건 어때?”

모두들 유주가 얼마나 민망해하는지 모르는 채 옷을 고르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건 너무 짧다.”

윤미가 고개를 젓자 리아가 다른 옷을 찾아 꺼냈다.

“이건?”

“색이 너무 화려해.”

“웬만한 것들은 유주에게 클 텐데.”

리아가 다시금 옷을 고르며 말했다. 그 말대로 키가 160센티미터인 유주보다 그녀가 10센티미터는 컸기에 사이즈가 딱 맞지는 않았다.

“다이어트 했을 때 옷은 없어? 유주가 많이 말랐잖아.”

“아. 있다.”

윤미의 말에 리아가 뭔가가 생각난 듯 손가락을 딱, 교차했다. 그러고는 한쪽 구석에서 옷을 찾아 꺼내자 윤미도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나마 이게 좀 낫다.”

까다롭게 옷을 고르던 윤미가 드디어 결정을 내렸다. 그녀가 반긴 옷은 펄 감이 가미된 핑크색 트위드 소재의 원피스였다.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옷을 리아는 심드렁하게 내어 주었다.

유주가 한사코 손을 저어도 세 사람의 합작 공세에 손을 들었다. 결국 핑크색 원피스로 갈아입고서 드레스 룸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지금만큼은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사람을 만났다. 이곳에서 빠르게 벗어나기 위해 인사를 건네고 돌아서려는데 하필 한경이 같은 복도에 서 있었다. 어색하게 머뭇거리는 순간 윤미가 한경에게 말을 걸었다.

“어. 어디 나가나 보지?”

그녀의 물음에 한경이 가볍게 묵례하며 자리에 멈췄다.

하필.

유주는 조용히 입술을 깨물었다.

누가 봐도 선 자리에 어울리는 옷을 입고 있는 모습은 그에게만큼은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날이 좋네요.”

어디를 가냐는 물음에 한경은 구체적으로 답을 하는 대신 다소 비켜난 답을 건네 왔다. 날이 좋으니 외출을 할 거라는 정도의 의미였다.

“흠.”

“그러니?” 하고 시선으로 답하듯 윤미가 심드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각자 갈 길을 갈 것 같은 분위기라 유주는 내심 안도했다.

“유주 원피스 입은 모습 어떠니?”

그때 윤미가 뜬금없는 말을 던졌다.

“……?”

뭘 묻는 것인지 바로 알아들을 수 없어 자리에 선 모두가 윤미를 바라봤다.

“남자가 볼 때. 이런 스타일 괜찮지?”

“……!”

평소라면 한경에게 하지 않았을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윤미가 갑자기 왜 그러는 것인지, 조금 전 옷을 고르며 들뜬 마음이 아직 여파로 남은 듯했다.

창피하고 부끄러운 기분이 들어 몸이 뜨거워졌다. 유주가 당황해하며 시선을 들자, 한경이 그녀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귀 끝이 뜨거워지는 느낌에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리아 옷인데 조금 큰가. 우리 리아가 키가 커서.”

‘이모. 제발.’

“오늘 유주 선보는 거 알고 있지?”

그에게 알려 줄 필요 없는 괜한 오지랖이었다.

그때였다. 한경이 미세하게 고개를 갸웃하며 입을 열었다.

“옷이 크네요.”

자신의 가슴 쪽 원단을 툭, 잡아당기면서.

“……!”

말을 마친 한경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몸을 돌렸다. 그가 시야에서 멀어져 가는 동안 모두가 자리에 굳어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허, 어, 어머….”

잠시 뒤 윤미가 기가 막힌 목소리를 터트렸을 때 말뜻을 알아들은 유주의 얼굴은 조용히 붉어졌다.

옷이 크네요. ‘가슴’ 쪽이.

“허. 기가 막혀. 진짜.”

뒤늦게 정주도 당황스러운 듯 한탄을 뱉었다. 코웃음을 친 리아만이 저만치 가는 한경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그를 싫어할 수밖에 없는 대답이었다.

어색한 시간이 지난 후 윤미는 더 이상 유주에게 옷을 강요하지 않았다. 유주는 처음 입기로 했던 자신의 검은 색 원피스를 입었다.

선을 보기로 한 호텔로 운전을 하고 가던 유주는 신호 때문에 차를 멈출 때마다 운전대에 머리를 박고 싶었다. 창피한 마음도 들었지만 가슴에 대한 간접적인 지적을 받자 자꾸만 수영장에서의 만남이 떠올랐다.

그날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날이었다. 마치 운명처럼 하필 야근을 마치고 새벽에 들어와, 하필 수영을 하고 싶었던 것인지, 왜 그 비키니를 입고 싶었던 것인지.

아아.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차라리 선배를 따라서 별내로 일이나 갈걸.

돌이킬 수 없는 후회가 괜스레 이것저것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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