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5
회사 앞에서 유주는 가을바람을 쐬며 기분 좋게 눈을 감았다. 아침의 섹스 때문에 후들거리는 기분이 들더니 이제는 몸이 개운한 것 같았다.
그가 다리 사이로 파고든 흔적이 아득하게 남아 있었다. 그게 묘한 만족감이 들었다. 유주는 자신의 변화에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상상했어. 서유주 바지를 벗기고 그 아래에서 네 다리를 벌리고.”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그에게서 나던 향이 그녀에게도 흘러 누군가 가까이 와서 찾아내려 한다면 남성스러운 향이 날 것 같았다. 묵직하고 편안한 향이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어울리는 것 같다는 아이러니한 생각이 들었다.
집에서 그와는 여전히 거리감이 있었지만 오늘 같은 아침, 갑작스레 섹스하는 사이가 된 게 뭔가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와 비밀스럽게 가까워진 게 자꾸만 웃음이 나려 했다.
경쾌한 걸음으로 조금 늦게 출근한 사무실은 더욱 활기차 보였다.
“안녕하세요. 실장님.”
“어어. 유주 씨. 안녕!”
목소리가 우렁찬 정 실장이 회복을 마치고 무사히 돌아와서인 듯했다.
“몸은 어떠세요? 이제 괜찮으세요?”
정 실장은 교통사고 후 수술과 재활의 과정이 있었다. 심각한 수술은 아니라고 했지만 그래도 체력을 회복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긴 했다. 그녀의 염려가 어린 인사에 정 실장이 근육을 자랑하려는 것처럼 과장하며 팔을 들어 보였다.
“아우. 거뜬하지. 너무 쉬었더니 몸이 찌뿌둥해서 헬스도 끊을까 생각 중이야.”
“훗. 그래도 아직은 조심하셔야죠.”
“말이 그렇다는 거지. 하하.”
정 실장의 썰렁한 농담에 유주는 자리에 앉으며 웃음을 띠었다. 병문안을 갈 때마다 정 실장의 회복 속도가 좋아 보이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은 염려가 되었다.
“하여간 좋다고 하니 다행이에요.”
“원체 건강 체질이라, 뭐…. 그런데 유주 씨 어딘가 모르게 화사해진 것 같다.”
문득 정 실장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물었다.
“네?”
“그사이 애인 생긴 거 아냐?”
정 실장의 물음에 유주가 능숙하게 웃음을 띠었다.
“뭐만 이상하면 애인이 생겼다고 하죠? 실장님은?”
“하하. 빨리 좋은 사람 만났으면 좋겠다 싶어서 그러지.”
“언젠간 만나겠죠. 뭐.”
그녀의 웃음에 정 실장이 문득 고개를 갸웃했다.
“그거 말고도 뭔가 달라진 것 같다. 유주 씨?”
“그래요?”
유주가 웃음을 띠며 물음을 던졌다. 그녀의 목소리에 왠지 여유로움이 묻어나는 것 같았다.
고요한 사무실에선 달칵, 달칵, 마우스가 움직이는 소리만이 났다. 그러나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일이 아닌 다른 생각만 떠올라 집중이 되질 않았다.
“입술이 예뻐.”
“상상했어. 바지를 벗기고 그 아래에서 네 다리를 벌리고.”
“매일 미치고 싶은데.”
누군가에게 그런 말을 듣는 게 어색했다. 그러면서 좋기도 했다. 좋거나 흥분이 된다는 게 맞을 것 같았다. 생각이 짓쳐들 때마다 얼굴이 붉어졌다가 심장이 떨렸다. 온몸이 이상 자극에 반응했다.
식탁 아래로 기어 들어가고 싶다는 말이 무척이나 유혹적이었다. 지금까지 그녀의 삶과는 전혀 통하는 게 없는 말들인데 그런 말을 익숙하게 받아들이는 자신도 신기했다.
그녀는 겁이 많은 사람이었다. 상처받는 것이 싫어 자신을 감추는 것에 익숙했다. 또한 그게 모두를 위한 평화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니 윤미가 선을 보라고 하면 선을 봤고 일 때문에 진혁이 주말에 어딜 가자고 하면 그렇게 했다.
누군가가 부탁해 오는 걸 거절하는 게 어려웠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말하거나 요구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한경은 그런 자신과 달랐다. 그는 하고 싶은 말을 가감 없이 했는데 거기엔 야하고 괴상한 말을 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그런 그가 자유로워 보였다. 가끔은 그를 보는 것만으로 숨이 탁 트이는 기분이었다. 대리 만족이란 게 이런 건지 몰래 숨어 그를 구경하는 것도 즐거웠다.
어느새 그에게 전염된 것 같았다. 그녀는 절제의 선을 넘어 버린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를 만끽하고 싶었다.
지금 그녀의 주변은 온통 핑크색이었다. 자꾸만 그가 생각나 몸이 뜨거워졌다.
***
집중력이 흐려진 관계로 일이 느리게 진행되었다. 원래도 할 일이 많은데 공상과 망상으로 사무실에서의 시간을 허투루 보내자 퇴근 시간이 더 늦었다.
그러나 기분만은 좋은 상태였다.
나직이 허밍을 내며 차에 시동을 걸려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액정에 한경의 이름이 떠 있었다. 그걸 보자 또다시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유주는 마음을 가다듬으며 전화를 받았다.
“네.”
- 퇴근은?
지금 만나자고 하는 것일까.
아침에 섹스를 한 게 무색하게 한경을 만나면 몇 번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벌써부터 몸이 달아오르는 것을 보니.
“지금 막 나왔어요.”
- 그래.
그는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네.”
- 늦겠군.
아뇨. 늦지는….
“뭐….”
자신이 덥석 괜찮다는 말을 던지게 될까 봐 유주는 말을 얼버무렸다. 기대가 되는 마음이 조바심을 일으키는 것 같았다.
- 내일 새벽에 수영을 할까, 하는데.
그의 말에 조금 심호흡을 할 뿐, 유주는 잠시 답을 하지 못했다. 머릿속으로 많은 생각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
검은색 작은 수영복을 들고서 유주는 망설였다. 이걸 입는다는 것 자체가 너무 노골적인 것 같았다. 하지만 망설임은 과정을 위한 수순일 뿐이었다. 그녀는 처음부터 결심을 마친 상태였고 과감해지기로 했다.
유주는 이곳 수영장에서 처음 부끄러운 기억을 안겨 주었던 수영복을 입었다. 그렇게 입고 수영장에 들어가자 예상했던 대로 한경의 눈이 탐욕스럽게 빛났다.
그가 가까이 다가와 유주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예쁘네.”
단단한 가슴, 넓은 어깨, 큰 키. 유주가 얼굴을 붉히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피곤하지 않아요?”
“피곤해.”
“그런데 하필 아침에….”
“널 안으면 그게 풀리거든.”
유주가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참 영양가 없는 말인데.”
그리고 한경에게 솔직히 말하고 싶었다.
“끌려요. 나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게 아닌데도.”
유주가 담담히 읊조리자 그가 부정하지 않는 듯 가벼운 미소를 띠었다.
“이런 내가 마음에 안 들어. 그런데도 당신이 부르면 나오게 돼.”
“우리가 잘 맞으니까.”
한경이 유주의 수영복 팬티 안으로 손을 넣어 엉덩이를 주무르며 속삭였다. 그 말이 참 허무하게 들렸다.
“섹스가요?”
“다른 걸 해 본 적은 없잖아?”
한경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지만 그가 이 관계에서 다른 걸 기대하는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는 섹스만으로 만족했고 굳이 다른 무엇을 시도할 생각도 없어 보였다.
“나쁜 사람인 거 알죠?”
“…….”
“여자랑 데이트는 해요?”
유주가 물었지만 한경은 아무 말도 답하지 않았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더욱 짐작할 수 있는 반응이었다. 유주는 가볍게 웃어 버렸다. 마음에 안 든다고 해서 여기서 울 수는 없었다.
“하지만 괜찮아. 알고 오는 거니까.”
그녀도 쿨하고 싶었다. 한경처럼 담담하게, 무심하게.
그녀도 섹스를 원하고 있다는 것을 그냥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싶었다.
“빨아 줘요.”
그녀는 처음 그랬던 것처럼 수영복 상의를 밑으로 내렸다. 곧 하얀 젖가슴이 튀어나왔다. 유주 스스로 내보이는 행위에 한경이 만족스러운 웃음을 띠어 보였다.
고개를 숙인 그가 젖가슴을 한껏 베어 물었다. 그녀를 끌어안은 손에 강한 힘이 더 실렸다.
***
이른 저녁 윤미와 정주는 온실에서 차를 마시던 중이었다.
“날씨 정말 좋다.”
윤미가 손에 든 홍차를 한 모금 들이켜며 향을 음미하듯 입을 열었다.
“한경이가 나간다는 소리에 좋다 말았지?”
정주는 넌지시 솔직한 말을 꺼내었다. 이 시간에 갑자기 불러 차를 마시자고 하는 걸 보니 윤미가 하고 싶은 말을 터놓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윤미는 우아하게 잔을 내려놓았다.
“상관없어. 걔가 있다고 내가 신경 쓸 것도 아니고. 때가 되면 저 혼자 튕겨 나갈 텐데.”
그녀가 괜찮다며 차분한 어조로 말했지만 불편하게 거슬리는 기색을 완전히 숨기지는 못했다.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그녀는 한경을 의식이라도 하는 듯 다시 유주의 말을 꺼내었다.
“그나저나 유주 선보는 게 마음대로 안 돼서 좀 그러네.”
“그러게. 네가 우리 유주 참 많이 신경 써 주었는데.”
한경에 관한 말을 하려나, 하고 나왔는데 윤미가 유주의 선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유주의 선이라면 정주가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주제였다.
“그래도 걱정 마. 또 좋은 자리를 찾을 거 같거든.”
“어머. 정말?”
정주가 넌지시 기뻐하며 물었다. 사실 윤미가 두 번이나 소개를 했는데 잘 되지 않아 마음이 쓰이고 속상하던 차였다. 이게 어떤 기회인데…. 혹시나 윤미가 선자리를 주선하는 걸 포기해버리면 어쩌나 하고 아쉬워했었다.
딱 한 번만 더 선을 봐서 유주가 제 짝을 찾았으면. 그런 기회를 바라고 기도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유주는 리아처럼 화려한 스타일은 아니지만 선한 인상이 깨끗하고 티가 없는 타입이었다. 젊어서는 리아처럼 화려한 타입이 눈에 띄지만 결혼 상대로는 유주가 훨씬 나을 것이다.
그러니 사실 윤미의 딸보다 자신의 딸이 낫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 윤미가 골라 준 기회를 기다려야 했다. 자신의 딸이지만 유주는 분명 좋은 집과 인연을 맺을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예뻤다.
유주의 말로는 지금 결혼할 생각이 없다고 하지만 그건 아직 세상 물정을 몰라 괜히 하는 소리일 터였다. 원래 그 나이 때는 그런 말을 하며 거부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만했다. 하지만 그렇게 버텨 봤자 유주는 워낙 순하고 착한 편이어서 끝내 엄마의 청을 거절하지는 않을 듯했다.
“우리 유주가 부족한 게 많은데 그래도 선 자리가 계속 들어오네. 어휴. 얼른 좋은 결과가 있어야 할 텐데. 윤미 너한테 미안하다. 괜히 고생만 많이 하게.”
“그 정도야, 뭘. 오히려 재밌어.”
윤미가 다시금 찻잔을 들자 정주도 잔을 들었다.
“그럼 다행이고.”
그때 정원으로 누군가 올라오는 기척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