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로태극문-2-10년전 그 날
10년전...
“하아”
봄바람이 살랑살랑 부는 어느 날이었다.
바위에 걸터앉아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는 송하결의 눈에 두둥실 흘러가는 흰 구름이 잡혔다.
하늘을 비행하는 새의 날개모양을 하기도 하고, 가만히 바라보다 보면 어느새 무당파가 위치한 자소봉의 모양으로 변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구름이 어느덧 완만한 곡선을 이루며 변하더니 두 개의 봉우리 모양이 되었다.
“헙”
당황하여 얼굴이 붉어진 송하결은 누가 볼새라 얼른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 주위에는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송하결은 나란히 자리잡은 두 개의 구름 봉우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조물조물.
두 눈과 두 개의 구름 봉우리 사이에 손을 위치시킨 송하결은 마치 소중한 보물을 만지듯 가만히 손을 쥐었다 폈다 하였다.
얼마후 바람의 흐름에 따라 봉우리의 모양이 일그러지더니 순식간에 두 봉우리는 사라지고 잔뜩 화가난 무범사형의 얼굴로 변하는 것을 본 송하결은 앗 뜨거 하는 표정으로 얼른 손을 물리고 황급히 짐을 챙겨 산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산문으로 돌아오는 내내 송하결은 어제의 일을 곱씹고 있었다.
송하결은 무당산에서 자랐다.
무당파 산문 내에서 생활하지만 정식 무당제자는 아니다.
아주 어린 시절, 핏덩이를 갓 벗어난 채로 무당산 해검지 주변에 버려진 송하결을 무당파에서 거두어주었다고 한다.
송하결은 정식제자는 아닌 상태로 무당파 내에서 거주하며 허드렛일을 해주는 허노인의 거처에서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다.
나이가 조금씩 들면서 잔심부름을 할 수 있게된 이후로는 허노인을 따라다니며 산에 나무를 하러 가기도 하고, 약초를 캐거나 물을 긷는 등 온갖 종류의 일에 불려다녔다.
어린 시절부터 무당산에서 나고 자라서 나이 여덟 살이 될 때까지 무당산과 그 주변 이외의 세상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고 지냈다.
가끔씩 수련생들이나 장기적으로 머물러 있는 향화객의 심부름을 하느라 허노인이 아랫마을에 갈 때면 송하결도 허노인을 따라 마을로 내려갔다 오는 것이 다일 정도로 송하결은 세상에 대해 무지한 상태였다.
어제 심부름을 가던 송하결은 시선을 다른 곳에 빼앗겼다가 우연히 향화객 중 어느 여인과 부딪히고 엉겹결에 가슴을 만지게 되었다.
오똑한 콧날에 보기 드물게 하얀 피부가 인상적이이었던 여인의 얼굴보다는, 어린 송하결의 고사리 손 두 개를 모아도 다 담지 못할 넉넉한 크기의 가슴이 훠얼씬 강하게 기억되었다.
부딪히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꽉 쥐어버린 가슴의 촉감에 화들짝 놀란 송하결은 웃으며 다치지 않았느냐고 안부를 물어보는 여인의 말에 죄송하다는 말만 거듭 되풀이하다 황급히 도망치듯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급하게 사과하고 자리를 떠났지만 그 후 손 끝에 남은 그 감각이 떠나지 않았다.
심부름에서 돌아오는 내내 송하결은 멍한 표정으로 떨리는 손을 바라보았다.
아주 어린 시절 무당산에 오르기 전에 느꼈던 어머니의 품속처럼(?) 아늑하고 따뜻한 느낌이 좋았던 송하결은 어떻게 하면 그 느낌을 다시 찾을 수 있을까 고민했다.
그러나 주변에는 온통 남자들 밖에 없다보니 송하결로서는 직접 만져볼 기회가 좀처럼 생기지 않았다.
오늘도 송하결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산에서 내려오는 중이었다.
“막내야”
누군가 송하결을 무르는 소리에 돌아보니 무범(武汎) 사형이 서있었다.
뜨끔.
구름 속 가슴을 만지다 무범사형에게 혼나는 상상을 할 만큼 무범은 송하결에게 두려움의 존재였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무당에서 자라다 보니 나름 어른들의 사랑과 관심을 받고 자란 송하결이다.
부모의 사랑 없이 자란 송하결에게 나름 안쓰러운 감정도 있는지라 크게 나무라는 사람도 없고 어지간한 말썽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주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개중에 송하결의 규율을 담당하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무범이었다.
워낙 말썽부리기 좋아하는 송하결이라도 무범만 보면 겁부터 집어먹었다.
무범이 특별히 송하결을 미워하거나 그런 적은 없으나 무범의 인상이 워낙 험상궂어 보여 어린 송하결에게는 염라대왕의 얼굴을 보는 것처럼 무서워보였다.
따라서 송하결의 장난이 적당한 수준을 넘어 성가시다 생각이 들면 무범이 불러 송하결의 폭풍장난을 진압시키곤 하였다.
무범은 천하제일검문인 무당파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진무각(眞武閣)에 조만간 들어갈 것이라고 누구나 예상할 정도로 그 인상만큼이나 무공에 자질이 뛰어난 2대제자이다. 무범은 또한 속가제자들이 거주하며 무공을 수련하는 정진각(正進閣)에 파견되어 무공사범으로 활동하는 중이기도 하다.
“안녕하세요. 무범사형. 어쩐 일이신지요.”
꾸벅 인사를 하며 무범을 향해 다가갔다.
“그래. 너는 어딜 그리 급하게 가는데 이 사형도 본채만채 가느냐.”
“사형, 그... 그게 아니라... 제가 왜 사형을 모른 채 하겠어요.”
급하게 두 손을 휘저어가며 변명을 하는 송하결을 무범은 무섭게 노려보았다.
안그래도 무당파 내에서 한 인상 하는 무범이 눈에 힘을 주고 바라보자 송하결은 오금이 저려와 감히 마주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사내 자식이 그리 겁이 많아서야 원... 쯧.”
‘사형이 아침마다 동경을 보면서 사형 얼굴을 비춰보십쇼. 아마 사형도 깜짝 놀랄걸요.’
차마 입으로 뱉지 못하고 입안에만 맴도는 말이었다.
“올 해 너의 나이가 몇이더냐.”
“여덟살인데요.”
“그래.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이제부터라도 수련을 시작해야겠지. 너는 내일부터 새벽에 정진각에 와서 수련을 함께 한다.”
“예?”
“두번 말하게 하지마라. 내일 새벽에 정진각에 와서 속가제자들과 함께 수련하라고 장문께서 허락하셨다.”
“제가 왜요?”
“왜긴 왜겠느냐. 네가 아무리 무당의 본산제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너는 본산의 식구이니 기본 무공이라도 익혀야 하지 않겠느냐. 남들은 쉽게 주어지지도 않는 귀한 기회이니 열심히 수련하도록 해라.”
나는 결정했으니 너는 그저 따라오기만 해. 라는 단호한 말에 송하결은 감히 대꾸할 말도 찾지 못하고 우물쭈물 하자 소극적인 태도가 맘에 들지 않는다는 듯 가뜩이나 험한 인상을 더욱 험하게 찡그린 무범은 내일 보자는 말을 남기고 떠나갔다.
숙소로 돌아온 송하결은 허노인을 찾았다.
“할아버지. 저 왔어요.”
“잘 다녀왔느냐.”
채취한 봄나물과 약재들을 마당에 말리기 위해 널어놓고 있던 허노인이 대답했다.
허노인에게 조금전 무범사형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이야기를 다 들은 허노인은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허허, 그래 무당의 식구이니 기본공 정도는 가르쳐주겠다고 해주시니 고맙구나.”
무당파의 정식제자가 아닌 잡일꾼으로 살아가는 송하결이지만, 무당의 그늘 아래 살아가는 사람인지라 입문무공인 태극권을 배우는 특혜를 얻게 되었다.
만약 무공의 소질이 보인다면 정식으로 사부를 두고 무당제자로 받아줄 수도 있는 기회를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 송하결에게 주된 관심은 무공이 아니라 가슴을 만지는 촉감이다 보니 무공을 가르쳐준다는게 송하결 본인에게 얼마나 소중한 기회인지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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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새벽 일찍 일어난 송하결은 허노인이 미리 준비해준 무복을 입고 속가제자의 수련이 시작되는 정진각을 향했다.
정진각에서 가르치는 이번 속가제자는 약 백여명으로 주변 유력가문의 자제이거나, 무당속가 출신으로 나름 성공한 인사들의 자제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이들은 이미 본가에서 무공의 기틀을 다지고 입문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무당은 그들이 이전에 어떠한 수련을 했다 하더라도 상관 없이 처음엔 기본공인 태극권부터 가르쳤다.
수련생이 이에 대해 불만을 가지건 말건 이는 무당이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원칙으로 삼았다. 송하결이 아무런 무공의 기초도 다져지지 않은 상태로 엉겁결에 정진각에 와서 다른 수련생과 함께 설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정진각에 들어선 송하결은 반가운 듯 반갑지 않은 얼굴을 마주하게 되었다.
“왔느냐.”
“네. 사형”
입가를 실룩거리며 반겨주는 무범사형의 모습이 어린 송하결에게는 맹수가 으르렁거리는 것처럼 느껴져 얼른 인사를 하고는 고개를 숙였다.
사형이라는 말에 주변에 있는 수련생들의 눈빛이 반짝이며 송하결과 무범을 돌아보았다.
어색한 눈빛을 뒤로하고 무범은 송하결을 이끌고 앞으로 나아갔다.
“네 자리는 이쪽이다. 오늘이 첫 날이라 좀 바쁘구나. 이따 다시 와서 봐주마.”
무공의 기초가 전혀 잡혀있지 않은 송하결을 배려하려는지 송하결의 위치는 맨 앞자리의 한쪽 구석이었다.
무범은 송하결을 자리에 세워두고는 첫날이라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다른 속가제자들의 자리를 배정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이제 좀 여유가 생겨 주변을 돌아보니 이미 안면이 있는지 여기저기 무리를 지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런 사람들 중에 특이하게도 여인들도 눈에 띄었는데, 열 살 정도부터 열여섯 사이로 보이는 사람들이 열 명이었다.
그 중에 보기 드물게 오똑한 콧날에 하얀 피부가 인상적인 여인의 얼굴보다는, 고사리 손 두 개를 모아도 다 담지 못할 넉넉한 크기의 가슴이 ... 가슴이?
“헉.”
이제보니 어제 송하결을 심란하게 만들었던 바로 그 여인이다. 처음에 얼굴을 보고는 바로 알아보지 못했지만, 새벽에 이제 떠오르기 시작하는 햇살에 비추어지는 저 도드라지게 빛나는 가슴을 보니 알겠다.
그 날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당황하여 사과도 하는둥 마는둥 하고 돌아섰지만, 그래서 얼굴도 가물가물하다 이제야 기억이 떠올랐지만, 저 가슴만큼은 이틀이 지난 오늘까지 여전히 손 끝에 기억을 머물게 한다.
송하결이 한동안 멍하니 그 여인의 얼굴과 가슴을 번갈아 보며 손을 꼼지락거리고 있는 사이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여인이 고개를 돌려 송하결을 바라보았다.
눈을 크게 뜨고 자신을 바라보는 모습을 보니 저 여인도 송하결을 기억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안절부절 못하는 송하결에게 여인이 먼저 다가왔다.
“안녕. 그제 봤던 그 아이로구나. 여기서 또 만나다니 반가워.”
활짝 웃으며 말하는 그녀의 얼굴이 하얀 목련을 닮았다.
말하는 순간순간 숨쉬며 오르내리는 그녀의 가슴이 탐스럽게 빛난다.
“난 구예방이라고 해. 호남 장사(長沙)에 있는 구룡표국이 우리 집이야. 넌 이름이 뭐니?”
짜릿한 손 끝의 감각에 빠져 잠시 나가있던 정신이 급하게 돌아온다.
“안녕하세요. 전 송하결이라고 하고 여기 무당산에서 살아요.”
“응? 무당파 제자라고? 근데 본산제자가 여기는 무슨일로 왔니?”
구예방은 깜짝 놀라 되물었다. 이 곳 정진각은 속가제자들만 가르치는 곳이라고 알고 있는데,앞에 있는 아이가 난데없이 무당산에서 산다고 하니 나이는 어리지만 본산제자이겠거니 라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구요, 전 무당파 제자가 아니구 그냥 무당에서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살아요. 그래서 여기 무당산이 제 집이구요.”
“아하... 난 또 본산제자인줄 알고 깜짝 놀랐지 뭐야. 오해해서 미안. 암튼 만나서 반가워.”
이야기를 나누는 중임에도 힐끔힐끔 그녀의 가슴을 훔쳐보았다. 구예방과 키가 머리 하나만큼은 차이가 나다보니 눈을 마주치느라 고개를 올려다보고 다시 시선을 내리면 딱 가슴 높이라 자연스럽게 시선을 따라 가슴을 훔쳐볼 수 있었다.
“아니예요. 저도 만나서 반가워요. 그리고 저번에 부딪혀놓고는 제대로 사과인사도 안하고 그냥 가서 미안해요.”
“뭘 그런걸 가지고... 호호. 귀엽게 생겼네. 예의도 바르고. 동생 삼으면 좋겠다.”
“저도 누님같은 분이 제 누이였으면 좋겠어요. 히히”
진심으로 매일 이렇게 볼 수 있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아이구. 말도 참 예쁘게 잘하네. 이리와.”
와락.
헉.
구예방이 기습적으로 껴안은 바람에 송하결은 자신의 얼굴과 같은 높이에 있는 구예방의 큰 가슴에 푸욱 파묻히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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