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13/15)

< --3. 비밀-- >

"리안! 문 따는데 얼마나 걸려?"

"아으.... 적어도 5분은 있어야해!"

"큿... 최대한 빨리해줘!"

파티의 홍일점인 도적 리안이 잠겨버린 출구를 피킹(Picking)하는 동안 전사 아벨이 그녀를 지키듯 가로 막아섰다. 오우거의 거대한 몽둥이가 휘둘러질 때마다 엄청난 파공음이 들려왔다. 몇 번은 피해내던 아벨의 방패위로 휘둘러진 몽둥이가 둔탁한 소리를 만들어냈다.

"쿠어어어어!!!"

오우거의 포효가 아벨의 귓가에 선명하게 들려왔다.

휘둘러진 몽둥이를 방패로 밀쳐낸 뒤 그들의 연계가 빛을 발했다.

"하베스!! 지금이야!!!"

"얼어붙은 동토. 빙결의 숨결이여 휘몰아쳐라! 블리자드!!"

하베스의 가공할 위력이 담긴 마법으로도 마물들의 제왕인 오우거를 쓰러뜨리기엔 역부족이었다. 마력을 한계까지 끌어올려 비전 마법을 사용한 하베스도 그리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마나에 대한 내성이 높은 오우거의 질긴 가죽 앞에서는 마나를 다루는 마법사들이 활약하기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사인 아벨이 오우거를 막아서는 동안 리안의 손끝이 달달 떨려왔다.

'빨리... 빨리....'

수준 높은 모험가들로 이루어진 리안의 파티가 이렇게 궁지에 몰리게 된 까닭은 사제인 사샤가 오우거의 몽둥이질 한방에 부서져버린 던전 외벽에 깔려버렸기 때문이다. 무너지는 돌무더기에 피할 틈도 없이 깔려버린 그녀는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했고, 사제가 없이 저런 괴물과 대적한다는 것은 자살행위였다. 만약 그녀가 살아있었다면 한번 해 볼만 했을지 모르지만 말이다.

뒤편에서 들려오는 아벨의 신음성이 그녀를 더욱 초조하게 만들었다. 친구였던 사샤가 죽었고 자신의 연인인 아벨마저 사라질지 모른다는 생각에 손끝이 달달 떨렸다. 평소 같았으면 이까짓 문정도야 조금 더 빨리 해제 했을 테지만 자꾸만 떨리는 손끝의 감각이 어긋나게 만들었다.

"아... 제발.... 제발.... 되... 됬어!!"

"뛰어!!"

"쿠어어어어!!"

아벨의 외침과 오우거의 포효가 뒤섞였다.

뒤도 보지 않고 달리길 한참. 어느덧 아벨들은 던전이 있던 숲을 벗어나 있었다. 얼마나 달렸는지 땀이 비오듯 쏟아졌고 등까지 축축해져 있었다. 아벨들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헉헉... 모두 다친데는 없어?"

"마력이 바닥난 것 빼고는 괜찮아.. 후우..."

"나... 나도 ...."

"일단은 휴식부터 해야겠어."

"동감이야."

힘없이 터덜거리며 돌아가는 길엔 아벨들은 말이 없었다. 보통 때 같았으면 획득한 전리품들이나 시답잖은 이야기들로 떠들썩했겠지만 빠져버린 그녀의 자리가 가슴 아팠다. 다들 몇 번이고 겪어왔던 일이지만 동료를 잃게 되는 아픔은 조금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마을로 돌아가면 술 따위로 그녀를 기리겠지.

------------아벨이 흐느껴 우는 리안의 어깨를 살짝 감싸 안았다. 연인의 품에서 점차 안정을 찾았는지 흐느낌이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그녀와의 가벼운 스킨쉽을 즐기던 아벨이 취기에 붉어져버린 목덜미에 입 맞추며 어깨를 쓸어내리는 것을 리안이 손으로 쳐냈다.

"아벨~ 오늘은 그러고 싶지 않아."

"미안해.. 리안... 네가 사샤를 많이 아꼈단 걸 알고 있는데도...."

리안이 아벨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오늘은 사샤를 기려야 하는 날이었다. 피가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리안에게 사샤는 가족과도 같았다. 리안보다 나이는 어렸지만 어떨 때는 언니 같기도 어머니 같기도 한 그녀였기에 그 아픔은 더욱 컸다.

"......... 언제나 이런 아픔은... 익숙해지지 않네..."

아벨이 다시금 흐느껴 떨리는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드르륵~작은 잔 두 개가 테이블 위로 밀려 둘의 앞에 내어졌다.

"당점의 서비스입니다. 손님~"

--------------------아벨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탁자위에 놓인 냉수 주전자를 들이켰다. 간밤에 조금 무리하게 마셨는지 차가운 냉수가 달게 느껴졌다. 하기야 밤새도록 마셔댔는데 숙취가 없을 리가 없었다. 얼마나 마셔댔는지 제법 주량이 쌘 편에 속하는 아벨이지만 방에 어떻게 돌아 왔는지 조차 전혀 기억이 나질 않았다.

"후우... 해장이나 해야겠군..."

삐걱이는 나무 계단을 따라 내려간 곳에는 동료인 하베스가 구석진 자리에 앉아 식사를 해결하고 있었다. 이내 계단을 내려오던 아벨을 발견했는지 하베스가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늦었네. 어제 많이 마셨나?"

"어. 네가 먼저 자릴 뜨고 난 뒤에도 마셨는데 얼마나 마셔댄건지 기억이 안나."

바삭하게 구워진 베이컨 조각을 나이프로 자르던 하베스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푸핫! 천하의 말술이라고 불리던 아벨도 한물 가버렸군!"

"어우.. 오랜만에 마셔서 그런가 이거 원~"

"그나저나 리안은?"

"너도 알잖아 리안이 사샤를 엄청 아꼈다는걸.. 밤새 마셨으니 아마 아직 자고 있을거야."

"그래도 한번 올라갔다 와. 벌써 해가 중천인데 밥은 먹어야지."

"훗.. 알았어."

아벨이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무계단을 오를 때마다 아벨의 무게에 못 이겨 삐걱거리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덩치 큰 아벨이 걷기에는 통로도 너무 좁았고 거닐 때마다 어깨나 머리끝이 스치는 것이 영 불편했다.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 좁은 통로 외벽도 그의 연인인 리안을 만날 생각을 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져갔다. 그가 2층 복도 끝에 위치한 리안의 방문을 두들겼다.

똑똑똑똑몇 번을 두들기고 나서야 방안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리안? 아직 자?"

".............."

"리안?"

".............. 들어오지마!"

"왜 그래? 어디 몸이 안좋아?"

"........ 고 했는데...."

"들어갈게~ 리안!"

보통 때 같으면 살갑게 자신을 맞아줄 연인의 반응이 이상했다. 무언가 이상한 기분이 든 아벨이 그녀의 방문을 거칠게 열었다. 다행히도 방문은 잠겨있지 않았고 리안은 침대위에 앉아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리안 왜 그래? 어디 몸이 안좋은데라도 있어?"

"저리가!....."

"왜~ 그래?"

"어떻게... 그렇게 뻔뻔할 수 있어?"

"왜 그러는거야? 내가 뭔가 리안에게 잘못한 거야?"

"........... 나쁜 놈............"

무릎에 파묻은 리안의 얼굴이 아벨을 향해 들렸다. 리안은 밤새 울었는지 두눈이 붉게 물들어있었다. 입술을 살짝 깨문 채 퉁퉁 부어버린 눈으로 아벨을 흘기고는 다시금 고개를 파묻었다.

"오~ 리안 제발.. 구체적으로 말해줘. 어제 취해서 기억이 없다고..."

"..... 그럴 기분 아니라고 했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어?"

그녀의 엉덩이 아래로 붉게 물든 침대보가 아벨의 눈에 들어왔다. 아벨과 리안은 사샤가 맺어준 연인이었는데 둘이 교제한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털털한 겉모습과는 다르게 리안은 남성 경험이 없었고, 그녀와는 진심어린 교제를 하고 싶었기에 아벨은 난잡했던 여자관계도 모두 청산했다.'제길... 그동안 쌓인 성욕 탓에 술에 취해 리안을 덮쳐버린건가 ... '

"나쁜 놈! 흑..."

"미안해! 리안.... 내가 미쳤었나봐... 정말 미안해... 술에 취해서 너한테 몹쓸 짓을 했나봐..."

"흑... 저리가라고..."

"미안해... 정말 미안해 리안.."

손바닥이 닳도록 빌어댄 아벨은 해가 질 무렵이 되어서야 그녀의 용서를 받을 수 있었다.

============================ 작품 후기 ============================선추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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