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가방 멨더라. 근데 학원가는 것 같진 않던데?"
"그래? 시간이 남아서 친구라도 만나나 보지 뭐."
"언니. 참 태평도 하시우."
은선은 어떻게 운을 뗄지, 어디까지 말해야할지 망설였다. 조카 동훈이에게 민아와의 일을 말하지 않겠다고 다
짐은 했지만, 언니 은혜에게 약간의 암시라도 주어 아들 단속에 신경쓰도록 하는게 도리라고 느끼던 참에 마침
마주친 기회를 놓치기 아깝다.
"왜? 할 말 있으면 빨리 말해? 답답하게 뜸 들이지 말고."
은혜는 불안하기는 하지만 크게 걱정하지는 않는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앞질러 무서워할 필요는 없다.
동생 은선이가 무엇을 보았든지 은혜가 두려워하는 바로 그것을 보았을 리는 없으니까. 그렇게 믿으니까.
"동훈이 말야. 요즘. 어때?"
"어떠냐니? 잘 지내지. 왜? 뭔데?"
"아니. 내가 좀 들은 얘기가 있어서."
"누구한테 무슨 얘기를 들었길래 그렇게 뜸을 들이니? 밥 다 타겠다."
농담섞어 말했지만 은혜는 손에 땀을 쥐었다. 동훈이에 대해 동생 은선이가 이토록 조심해야할 얘기를 들을 데
라곤 은혜 자신과, 미숙이 언니뿐이다.
[미숙이 언니가 뭐라고 했나? 둘이 있다 들켰나? 아니야. 그럴 리 없어. 그럼 혹시 임신한 걸.]
"누구한테 들었나가 중요한게 아니라. 언니. 요즘 애들 조숙하대. 중학생이라고 방심하면 안된다고 하더라구."
"그래서?"
"그러니까. 동훈이 잘 지켜보라고. 동훈이, 키도 크고 반반하게 생긴 편이잖아. 여자애들이 가만 안 둘 것
같아서 그래."
[난 또. 얘가 사람을 아주 들었다 놨다 하네. 아유, 심장떨려.]
다소 안심하며 다음에 이어질 이야기를 기다렸지만 은선은 거기까지만 말하고 은혜의 표정만 살핀다. 동생 은
선이의 눈초리가 언니 은혜의 얼굴에서 뭔가를 읽어내려고 하고 있다.
"왜? 우리 동훈이가 여자애랑 손잡고 가기라도 하디?"
"손잡는거 쯤이야 요즘 애들 다하잖아. 아니, 뭐 꼭 그렇다고 동훈이가 그러고 다니는 걸 내가 봤다는 건 아니
고. 동훈이가 노는 애 꼬임에 넘어가거나 하면 공부에 지장 있으니까. 내 말은 그거야. 잘 지켜보라고."
"그게 다야?"
"응. 뭐. 일단은. 혹시나 해서 그러는데. 동훈이. 여자친구 있어?"
"글쎄다. 있겠지 뭐. 교회도 꼬박꼬박 다니니까."
"그렇게 그냥 알고 지내는 친구 말고. 사귀는 애 말야."
[사귀는 애말고. 사귀는 아줌마는 둘이나 있단다.]
"그런 걸 내가 어떻게 아니? 엄마라고 일일이 다 아는건 아니잖아."
"내 말이 그 말이야, 언니. 그러니까 조심해서 지켜보라는 거야. 안 보이는데서 무슨 짓을 할 지 모르니까."
"어째 말을 좀 빙빙 돌리는거 같다? 우리 동훈이가 무슨 짓 하는걸 보기라도 했니?"
"아니, 아니. 그런거 아니라니까."
은선이 난처한 얼굴로 손을 휘휘 저었다. 동훈이가 민아라는 애랑 잤다고 하더라, 어린 중학생놈이 벌써부터
할 짓이냐, 그러니 아랫도리 단속 단단히 시키고 공부나 열심히 하게 해라. 라고 직설적으로 쏟아버릴 수 있다
면 이렇게 진땀 흘려 가며 먼 길을 빙빙 돌아갈 이유가 없다.
그러나, 그랬다가는 언니 은혜가 동훈이와 민아를 잡아 족친다고 할까봐 두렵다. 언니 은혜의 괄괄하고 못참는
성격을 익히 잘 알기에 이미 끝난 것으로 보이는 둘의 관계를 다시 까발기다가는 깨진 그릇을 다시 이어붙이는
사태가 벌어질 것 같아 그것도 걱정된다.
"그게 아니면? 그게 아니면 왜. 얌전히 공부 잘하는 얘를 지켜보라느니 조심시키라느니. 그런 말을 하니?
너 좀 이상하다?"
은혜는 동생 은선이의 당황한 얼굴을 보면서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동훈이가 혹시 은선이를. 지 이모를 건드린 건 아닐까?]
동훈이가 이모 은선이에게 모종의 성적인 접촉을 시도했고, 그래서 은선이가 깜짝 놀라 은혜에게 이런 말을 하
는건 아닐까 겁이 난다. 43살 먹은 아줌마도, 40살 먹은 친엄마도 마다 않고 꿀꺽꿀꺽 잘도 따먹는 아이다.
은선이는 올해 생일이 지나면 37살. 아직도 싱싱한 30대다.
과외를 한달 보름이나 했으니 동훈이가 맘만 먹었다면 무슨 일이 벌어지고도 남을 충분한 시간이다. 생각하면
할수록 겁이 덜컥덜컥, 이단, 삼단으로 올라간다.
"동훈이가 너한테. 무슨. 실수라도 했니?"
"동훈아. 미안해. 불러놓고 누워만 있어서."
"아니에요. 괜찮아요, 선생님. 필요하신거 있으면 말씀만 하세요."
희진이는 친구들과 놀이공원에 놀러갔다고 한다. 혼자 있기가 너무 싫어서 동훈이를 불렀다고 했다. 안방 침
대위에 동훈이는 베개를 등에 대고 허리를 세워 앉았고, 미숙은 그 허벅지를 베고 누웠다. 동훈이의 손에는 학
원 수업 교재가 들려있다.
"동훈아. 오늘. 엄마랑 했어?"
"네. 아침에."
동훈이는 안했다고 할까 하다가 사실대로 말했다.
"그랬구나. 안했으면 내가 해주려고 했는데."
"하고 싶으시면 제가 박아드릴께요."
"아니, 아니야. 내가 하고 싶어서 그런게 아니라. 오늘은 몸이 너무 안 좋아서 생각이 없어. 책이나 계속
봐. 내가 괜히 방해했네."
"며칠 동안 안 했잖아요, 우리. 선생님 보지가 어떻게 생겼는지 다 까먹겠어요."
동훈이도 아침에 엄마 은혜와 꽤 오랜 시간 화끈하게 섹스했기 때문에 성욕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며
칠동안 섹스하지 못한 상대에게 섹스를 조르지 않는 것은 예의가 아닐 것 같다. 그러다가 실제로 섹스를 하게
된다해도 나쁠 건 없다. 슬슬 즐기면 되니까.
"아침에 부실하게 했어? 어떻게 했는데?"
"평소처럼 했죠 머. 좆박고, 빨고, 싸고."
"호호호. 오늘은 되게 짧게 했네? 그게 다야?"
"헤헤. 간단히 말해서 그렇다는 거죠 머. 참. 선생님. 혹시 엄마 스물 두세 살 때. 그러니까. 한 18년,
19년전 쯤? 그 때 쯤 기억나세요?"
"18, 9년 전? 내가 초임 발령받았을 무렵이네. 글쎄? 왜?"
"그 때 동네에서 30대 초반 아저씨랑 엄마랑 사귀었었다고 그러더라고요. 선생님도 혹시 아는 사람인가 해서요."
"30대 초반? 음. 글쎄다. 그 때 은혜가 누구랑 사귀긴 했는데. 사귄 사람이 한두 사람이 아니라. 엄마한
테 들었어? 엄마가 뭐랬게?"
"엄마가 그 아저씨랑 많이 잤다고 그러네요. 그래서 선생님도 아시는 줄 알았죠."
"자기 엄마가 그래? 많이 잤다고? 어머! 둘이서 그런 얘기도 해?"
미숙은 상당히 놀랐다. 근친상간에 빠진 사이긴 하지만 그래도 모자지간이 아닌가. 그런데 은혜가 엄마로서
아들에게 과거 남자와의 성생활에 대해 미주왈 고주왈 이야기하는 것은 교육상 좋지 않아 보인다.
"왜요? 엄마랑 그런 얘기하면 안되요?"
"안된다기보다. 좀 뜻밖이라서. 은혜가 그런 얘기 하는걸 좋아하긴 하더라. 나도 좀 듣긴 들었어."
"선생님은 어떤 얘기 들으셨는데요?"
"별거 아니야. 자기 엄마한테 찬찬히 하나씩 들어. 당사자한테 직접 듣는게 더 재밌잖아."
"우리 엄마. 처녀적에 어땠어요? 좀 놀았죠?"
"놀았다고 하긴 좀 그렇고. 인기가 많았지. 남자들한테."
"인기가 많았을 것 같긴 해요. 보지 잘 돌리는 거 보면. 젖두 크구."
"호호호. 젖은 내가 은혜보다 더 큰데. 난 왜 남자들한테 인기가 없었을까? 보지를 은혜만큼 못 돌리나?
호호호."
"에이. 선생님도 보지 잘 돌리시죠. 성격 차이 아니겠어요? 우리 엄만 남자 좋아하고 발랑 까져서 그런거
구. 선생님은 조신하시잖아요."
"그거, 칭찬이지? 아! 맞다! 생각난다. 그 30대초반이라는 남자. 내 생각엔 아마 동네에서 구멍가게 하던
노총각 아저씨 말하는거 같은데? 맞나? 맞는 것 같다. 퇴근하다가 은혜가 그 가게에서 나오는 걸 몇 번 봤거
든. 어머, 어머. 그 남자 30대 초반이 아니라 40 가까이 먹었다고 들었는데."
"정말요? 마흔 살이나요? 제기랄."
"왜? 기분 나빠? 아무래도 자기 엄마가 아빠말고 다른 남자랑 잤다는 얘기는 듣기 안좋을거야."
"그래서 그런게 아니라요. 엄마가 22살에 40살짜리 남자하고 한거면. 거의 아빠뻘 되는 남자한테 따먹힌거
잖아요. 말도 안돼. 엄만 남자보는 눈도 없나. 아무 좆이나 박아주기만 하면 좋은가봐."
"은혜가 왜 남자보는 눈이 없어? 걔가 얼마나 외모 따지고 만났는데. 그 아저씨가 체격이 좀 좋은 편이었어.
노총각이긴 하지만 말끔하게 생겼구. 그래서 동네에서 말이 좀 있었지. 호모나 변태 아니냐고 말이야."
"몇 번 자고 만 것도 아니고. 많이 잤대요. 그 자식이 우리 엄마보지를 헌 보지로 만들어 놓은거에요."
"뭐? 헌 보지? 아하하하하하. 너무 웃기다. 헌 보지가 뭐야? 세상에. 하하하. 호호호호."
"선생님. 그 말이 그렇게 웃겨요?"
"조금. 푸후. 어차피 여자가 첫경험 하고 나면 다 헌 보지인 셈이지. 나도 자기랑 처음 잘 때 이미 헌 보지
였으니 억울하겠네?"
"선생님도 나이 차이 많이 나는 남자하고 사귀신 적 있어요?"
"아! 포인트가 나이 많은 남자였구나? 그럼 반대로 말하면 자기 좆은 은혜랑 나 때문에 헌 자지 되고 있는거
네? 호호호호. 헌 자지. 호호호호."
"쩝. 그런가요. 헤헤헤. 그러고보니 그렇네."
- 딩동, 딩동.
미숙이 배꼽을 잡으며 웃어대는데, 초인종 소리가 웃음을 뚝 그치게 한다. 동훈이는 미숙을 쳐다본다. 어찌하
면 좋을까 묻는 것이다. 초인종 소리가 다시 울린다.
- 딩동, 딩동.
"누구지? 올 사람 없는데."
미숙이 옷 매무새와 머리 매무새를 단정히 하고 밖으로 나와 현관문에 달린 렌즈구멍을 들여다보았다. 주춤주
춤 따라나온 동훈이를 향해 밝게 웃어보인다.
"자기 엄마야."
"우리 엄마요? 어? 엄마가 뭐하러 왔지?"
미숙을 한 발 물러서게 하고, 동훈이가 나서서 문을 열어주었다. 얼굴이 사납게 굳은 은혜가 까만 비닐봉지를
든 채 문안으로 들어선다. 현관문이 잡아주는 손이 업는 탓에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 쿵!
"은혜야. 어서 와."
"엄마! 왜 왔."
- 짜악!
경쾌한 마찰음과 함께 동훈이의 얼굴이 한 쪽으로 돌아간다. 은혜의 손바닥이 동훈이의 뺨을 강타한 것이다.
미숙은 너무 놀라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어머나!"
동훈이는 따귀맞은 볼이 화끈거렸지만 무슨 일이, 왜 벌어졌는지 실감나지 않았다. 멍한 기분으로 돌아간 얼굴
을 은혜쪽으로 원위치 시켰다. 엄마 은혜가 분노에 가득찬 얼굴로 동훈이를 무섭게 노려본다.
[엄마가 왜 그러지? 얌전히 학원 예습하고 있었는데.]
미숙과 뒷담화를 까는 소리가 엄마 은혜에게 들렸을 리도 없다. 아무리 아파트 방음설비가 개판이라 해도 말이
다. 그런데 엄마 은혜의 얼굴은 뒷담화 현장을 때마침 덮친 사람처럼 분기탱천한 표정이다. 작년 가을 미숙이
선생님과의 관계를 알고 쳐들어왔던 때와 또 약간 다르다. 그때만큼 살기등등하진 않다.
"왜 그래, 엄마?"
동훈이는 볼을 어루만지며 엄마 은혜의 눈치를 살폈다. 켕기는 것도 없는데 목소리가 떨린다. 눈도 차마 마주
보지 못하겠다. 바닥을 보니 엄마 은혜의 손에 들렸던 비닐봉지가 나뒹굴고 있다. 뭔가가 꼼지락꼼지락 기어
나온다. 밝은 회색빛으로 꿈틀거리는 다리가 하나, 둘, 셋.
[오징어인가? 아. 낙지구나. 아직도 살아 있네.]
"은혜야! 무슨 일이길래 애를 때리고 그래?"
"언니는 잠자코 있어. 언니가 참견할 일 아냐."
미숙이 앞으로 나서서 동훈이와 은혜의 중간을 가로막자 은혜가 미숙을 옆으로 밀쳐내며 동훈이에게 한 발 다가
선다. 동훈이가 움찔하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미숙은 무안을 당한 기분이다. 그러나 은혜의 표정이 너무
심각해서 뭐라고 더 말리지는 못하고 지켜보기만 한다.
"너! 작은 이모한테 실수한 거 있지?"
은혜는 미숙이 지켜보고 있기 때문에 그 정도로 서두를 시작한다. 차마 내놓고 은선이를 건드렸냐고는 물어볼
수 없었다. 어쩌다 근친상간에 빠져 그 맛에 미쳐버렸지만. 그래서 미숙이 언니를 대할 때마다 떳떳할 수 없
는 자신을 다그치며 뻔뻔하게도 당당함을 가장해왔지만. 동훈이가 친엄마도 모자라 친이모까지 건드린 사실
을 미숙이 언니가 아는 날이면 그 즉시 은혜를 간신히 지탱하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릴 것이다. 은혜네를 얼마
나 콩가루집안으로 볼 지 눈에 선하다. 엄마도 모자라 이모까지 나서서 보지를 대준다며 세상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자매이라고, 피는 못 속인다고 비웃을게 분명하다. 그런 꼴은 절대로 두고 못본다.
"이모한테? 실수? 무슨 실수?"
동훈이는 호되게 맞은 뺨을 손바닥으로 감싸고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엄마 은혜에게 갖가지 방법으로 맞
아봤지만 맨 손으로 따귀를 맞은 것은 생전 처음이다. 키도 자기보다 한참 작은 엄마 은혜가 위로 팔을 휘둘러
정확히 뺨을 맞추었다는게 신기하다.
[아니 지금 내가 신기한게 문제가 아니지. 엄마가 왜 이러시지? 이모가 뭐?]
따귀를 때리고 맞는 장면을 직접 본 적은 없다. TV 드라마에서나 봤을 뿐이다. 대개는 여자에게 파렴치한 짓
을 하다가 남자가 맞는 설정이었다.
[내가 이모한테 무슨 파렴치한 짓이라도 했단 말이야?]
이모와 관련해서 동훈이가 마음에 걸리는 거라곤 민아와의 일을 털어놓은 것과 과외비 뿐이다. 그런데 엄마 은
혜는 지금 이모에게 실수했다고 따져묻고 있다. 그럼 민아는 관련이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남은 것은 과
외비 뿐이다.
과외비가 마음에 걸리는 것은 2월달치 20만원을 선불로 받고도 온전히 한 달 꽉 채워서 해주지 못했기 때문이
다. 과외를 2주 정도밖에 못해줬으니까 받은 과외비에서 못해도 10만원은 돌려줘야한다. 그런데 문제는 동훈
이 수중에 그만한 돈이 남아있지 않다는 거다.
한번에 20만원이라는 거금을 과외비를 탔을 때는 재벌이라도 된 듯했다. 아무리 써도 줄 지 않을 것만 같았
다. 실제로 첫달은 5만원도 채 쓰지 못했다. 그랬더니 2월 첫 날 또 선불로 과외비를 받고 나니 돈이 35만원
으로 불어난다. 기고만장해서 개학하고부터는 말 그대로 흥청망청 써댔다. 친구들에게 음료수와 햄버거를 사
고, 민아와 만날 때 드는 비용도 대부분 동훈이가 냈다. 결정타는 철원에 갔다온 것이다. 차비로 숭텅숭텅 나
가더니 서울로 돌아왔을 때 지갑에 남은 것이 고작 3만 몇천원. 철원간 것을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차비
로 나간 돈 아껴서 잘 먹지도 못하는 불쌍한 미숙이 선생님에게나 쓸 것을.
"엄마. 과외비 땜에 그래?"
그러니 이모에게 실수한 것을 굳이 찾는다면 채우지 못한 과외비 절반을 돌려주지 않고 용돈이 모일 때까지 뒤
로 미룬 것뿐이다. 그런데 그게 따귀를 맞아야할 만큼 파렴치한 실수인가? 엄마 은혜가 이모와 그 돈을 놓고
싸우기라도 한 걸까? 그러나 시장에서 단돈 500원, 1000원을 깎으려고 소리높여 언쟁을 벌이는 엄마 쪽은 그
럴 수 있다쳐도, 넉넉하고 용돈 인심 후한 이모 은선은 그러지 않을 것 같은데.
"이 자식이 시치미 떼고 있네. 너! 가방 챙겨! 가방 챙겨서 나와!"
은혜는 미숙이 듣고 서있는 게 아무래도 껄끄러웠다. 동훈이를 집에 데려가서 앉혀 놓고 제대로 추궁해볼 생각
이다. 미숙이 있는 자리에선 도저히 못하겠다. 동훈이의 어깨를 잡아 홱 밀친다. 덩치 큰 동훈이의 몸이지만
휘청거린다.
[어? 과외비도 아닌가? 그럼 뭐지? 뭐야 대체?]
동훈이는 영문을 모르고 당하기만 하다가 슬슬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무턱대고 따귀를 날리고 전후 사정에 대
한 설명도 없이 몰아대는 엄마 은혜의 권위적이고 몰상식한 태도에 화가 난다. 아침에는 알몸으로 보지를 대주
며 남자친구니, 남편이니 하면서 살살거리다가 갑자기 180도 돌변해 잡아먹을 듯이 다그치는 모습이 기가 막히
다.
"은혜야. 여기서 얘기해. 뭔가 오해가 있나본데."
동훈이의 얼굴에서 억울하다는 심사를 읽은 미숙이 은혜의 팔을 잡으며 적극적으로 말리고 나섰다.
"오해는 무슨 오해? 언니! 언니 앞이라 내가 그래도 참고 있는거야."
"엄마! 무슨 일인지 얘기를 해줘야지! 내가 이모한테 무슨 실수를 했는데?"
동훈이가 제법 강한 목소리로 항의한다. 은혜는 동훈이를 데리고 어떻게든 빨리 이 집을 벗어나고 싶다. 아들
동훈이와 둘만 있는 자리에서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고 이실직고하라고 다그쳐야 효과가 있다. 작년, 미숙이 언
니와의 관계를 실토하게 만들 때 톡톡히 재미본 방법이다. 그런 다음 동생 은선이와 삼자대면하면 되는 것이다.
"집에 가서 얘기해! 가방 챙기라니까!"
"싫어! 여기서 얘기해! 난 아무 잘못한 거 없으니까 여기서 다 얘기해!"
동훈이는 어깨죽지를 잡고 있던 엄마 은혜의 손을 뿌리치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엄마 은혜의 발치로부터
한 걸음 뒤에 낙지가 여전히 꾸물럭꾸물럭 움직이고 있다. 비닐봉지 주변에 물이 흥건하다. 그런데 은혜나 미
숙은 그 쪽엔 시선조차 주지 않는다. 어차피 도망갈 데가 없는 놈이긴 하다.
"그래, 은혜야. 니가 뭘 잘못 안 거 아니니? 성재 엄마한테 무슨 얘기를 들었길래 그래?"
은혜는 동훈이가 퍼질러 앉아 그녀를 노려보는 서슬에 기세가 약간 꺾이는 걸 느낀다. 미숙이 언니가 자꾸 오
해아니냐고 동훈이를 거드는 것도 귀에 거슬린다. 동훈이를 편드는 미숙이 언니에게 보기좋게 한 방 날려야겠
다. 물론 주먹은 안되고 말로.
[젠장. 이 뻔뻔한 자식. 결국 미숙이 언니 앞에서 얘기하게 만드네.]
"언니! 동훈이 얘가. 글쎄 얘가. 얘가 은선이를. 방금 내가 은선이를 시장에서 만났는데."
"은혜야. 차근차근 알아듣게 좀 말해봐."
"그러니까 내 말은. 동훈이 이 자식이. 아유. 내 입으로 말하기 민망해 죽겠네. 동훈이 이 자식이 은선이
를 건드렸나봐."
"뭐어? 은선이가 그래? 동훈이가. 동훈이가 자기를. 건드렸다구?"
어버버 말을 더듬는 은혜를 보며 미숙의 표정도 심각해진다. 은혜가 화를 잔뜩 내면서도 속사정을 시원히 털어
놓지 않은 이유를 이제야 짐작할 것 같다. 일그러진 얼굴로 동훈이를 돌아보았다. 동훈이는 난 아무 것도 몰라
요라고 얼굴에 덕지덕지 써붙여 놓고 미숙과 멍하니 시선을 맞춘다. 이럴 때보면 영락없이 세상물정 모르는 순
진한 10대 꼬마다.
[설마. 설마 동훈이가 그랬을려구. 표정이 아니잖아. 모르겠다는 얼굴인걸.]
설마가 사람잡는다는 말이 있다. 민아와 섹스하는 핸드폰 영상도 설마. 30살 가까이 차이나는 엄마친구인 아
줌마 미숙과 저지르는 불륜도 설마. 친엄마 은혜와 근친상간의 패륜을 저지르는 것도 설마였다. 다음으로 사
람잡으려고 기다리는 설마가 친이모 은선이와의 관계일 가능성은 그리 낮지 않은 편이라고 볼 수 있다. 가장
가까운 지친인 친엄마도 아니고, 미숙과의 나이차이까지 고려하면 이모 은선이는 아주 양반인 셈이다.
그런데 이제 겨우 17살이 되려는, 맑고 곱고 앳된 동훈이의 얼굴이 그 모든 설마를 의심케 한다. 그래서 방심
하게 한다. 미숙은 방심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민아나 또래 여학생들에게만 신경을 쓰고 있
었다. 또래를 만나는 건 막을 수 없지만 깊이 사귀지는 말아주었으면 하고 감시하고 있었다. 이모 은선이는 전
혀 예상치 못한 복병이다.
"무슨 소리야, 엄마? 내가 언제 이모를 건드려?"
동훈이는 건드렸다는 말의 의미가 잠시 혼란스러웠다. 때렸다고 그러는건지, 따먹었다고 그러는건지. 대개
는 따먹었다는 의미로 쓰임을 잘 알지만 지금 상황은 때렸냐고 묻는게 올바른 이해가 아닐까 한다. 이모를 따
먹은 적도 없고, 따먹을 생각을 한 적도 없으니까. 단지 하나. 궁금했던 건 있다. 친자매인데, 엄마 은혜처
럼 젖이 클까? 보지가 비슷하게 생겼을까? 어디까지나, 정말로 어디까지나 순수한 호기심이었다.
"은혜야. 건드렸나봐가 뭐야? 니 생각이야, 아니면 은선이가 그렇게 말했다는거야? 확실하게 좀 말해봐. 은
선이가 뭐라고 했는데?"
"은선이가 그러잖아. 동훈이 조심시키라고. 요즘 애들 조숙하다면서. 걔 표정이 꼬옥."
얼굴이 꼭 남의 가정 깰까봐 차마 얘기를 못하겠다는 그런 표정이었다. 불륜드라마를 많이 봐나서 그런 쪽에는
훤한 은혜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다만 꺼림직한 것은 아무리 물어봐도 동생 은선이가 그 이상은 얘기하지 않
았다는 것이다.
"아이 참. 언니! 그냥 그렇다구. 동훈이가 나한테 무슨 실수를 해? 무슨 얘기를 못하겠네. 언니. 나 먼
저 갈께."
"야! 가긴 어딜가? 우리 동훈이가 뭘 어쨌다는거야? 얘기를 꺼냈으면 끝을 맺고 가야지."
"몰라. 궁금하면 동훈이한테 직접 물어보던가. 언니! 동훈이한테는 내가 뭐라고 했다는 말은 절대 하면 안
돼! 알았지? 나 진짜 가우."
동생 은선이는 은혜가 잡는 것을 기어이 뿌리치고 달아나듯이 가버렸었다. 동훈이한테 직접 물어보라는 말과
동훈이에게 자기 얘기는 절대 하지 말라는 말이 은혜의 마음을 괴롭혔다. 장을 보는 동안 의혹은 점점 몸을 불
렸고 급기야 적어도 성추행, 어쩌면 성폭행에 가까운 일을 동훈이가 벌였다는 단정하에 미숙의 집으로 달려와
아들 동훈이의 뺨따귀부터 날리고 본 것이다.
"표정? 그럼 너 지금 확실한 증거도 없이 이러는거야?"
"증거가 무슨 필요가 있어? 언니도 동훈이 얘 행실을 잘 알잖아."
"내 행실이 어때서?"
동훈이가 발딱 일어나며 엄마 은혜를 향해 소리쳤다. 어째서 행실이 어쩌구하는 얘기까지 들어야하는지 동훈
이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미숙이 동훈이의 어깨를 한 팔로 감싸 안고 남은 손으로는 동훈이의 팔을 잡아 진정
시켰다. 동훈이가 은혜에게 다가서는 모습이 위협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은혜야!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얘기해. 흥분해서 아무 말이나 막 하지 말고. 그러다 나중에 후회할라."
"엄마! 빨랑 얘기해봐. 내 행실이 어떻냐구?"
은혜는 미숙의 충고에 뜨끔해서 금방 내뱉은 말을 후회하고 있었는데 동훈이의 거센 항의와 험상궂은 얼굴표정
에 오기가 솟았다. 보지를 대주고 오빠니, 여보니 해가면서 비위를 맞춰주었더니 안하무인이 되어가는구나 하
는 생각이 들어 괘씸하다.
"너, 이 자식아. 그걸 엄마가 직접 말해야 되겠니? 아줌마 건드려서 애나 배게 만들고. 지 엄마도 마다않고
따먹는 놈이 이모라고 그냥 뒀겠어? 과외한다고 열심히 들락거릴 때부터 내가 알아봤어야 하는건데.
어유."
"씨발! 엄마가 봤어? 내가 이모 따먹는거 엄마가 봤냐구? 씨발. 좆같이."
동훈이는 안방으로 들어가 투닥투닥 가방을 챙겼다. 화가 잔뜩 난 상태라 태도가 거칠기 이를데 없다. 엄마가
그런 식으로 말했다는게 믿기지 않는다. 미숙이 선생님이 임신한 것은 동훈이 자신이 모르게 된 일이고, 엄마
은혜와의 관계는 시작만 강제적이었을 뿐 그녀 자신도 즐기고 있지 않은가. 하지 않은 일을 했다고 몰아세우는
것도 억울한데 동훈이 자기에게만 행실이 나쁘다고 욕하는 것은 공평하지 않다는 생각이다. 행실을 따지려면
엄마 은혜와 미숙이 선생님도 함께 욕해야 맞다.
- 쿵! 쿵! 쿵! 쿵!
동훈이는 가방을 들고 현관문으로 갔다. 발걸음 소리가 무겁다. 은혜가 곁을 지나치는 동훈이의 가방을 낚아
채며 말했다.
"엄마 얘기 안 끝났어!"
"놔! 씨발! 학원 가야돼!"
"이게 어디서 엄마가 말씀하시는데 욕이야? 너 오늘 한번 뒤지게 맞아볼래?"
"흥!"
동훈이가 은혜의 손을 사납게 뿌리치고는 운동화를 신고 현관문 밖으로 나가버렸다. 미숙은 동훈이의 서슬이
너무 무서워 잡을 생각도 못한다. 동훈이가 그토록 무섭게 화내는 것은 처음이라 심장이 벌렁벌렁 뛴다.
.
"은혜야. 따라 가봐. 그냥 저대로 보낼거야?"
"내가 왜 따라가? 내가 아쉬울게 뭐 있다구. 못된 놈의 자식. 엄마를 아주 똥으로 알아요."
- 삑, 삑, 삑. 삑, 삑, 삑, 삑. 삑, 삑, 삑, 삑.
"언니! 전화하지마. 이따 학원에서 돌아오면 내가 알아서 족칠께."
"동훈이가 아니라. 지금 성재 엄마한테 하는거야."
"걔한테는 뭐하러?"
"잠깐 있어봐. 여보세요? 어, 나 희진이 엄마. 잘 있지? 어, 어. 2학년 맡을거 같애. 어. 그래. 그렇
지 뭐. 아니, 다름이 아니구. 아까 시장에서 동훈이 엄마 만났다면서? 동훈이 엄마 지금 우리 집에 와있거
든. 동훈이 엄마한테 시장에서 뭐라고 한거야?"
은혜는 자기도 모르게 숨을 죽이고 미숙이 통화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렇고 미숙이 언니의 말처럼 오해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은혜의 확신에 찬 분노를 야금야금 갉아댄다.
"응, 응. 그랬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동훈이 엄마는 동훈이가 성재 엄마 몸을. 어떻게. 어떻게 한 것 같
다고 생각하더라고. 아니야? 정말 아니야? 그렇지! 우리 동훈이가 그럴 리 없지. 하유. 난 동훈이 엄마
말만 듣고 얼마나 놀랬는지."
미숙이 전화기를 든 채 은혜를 향해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좌우로 살살 흔들어보였다. 은혜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닌데? 은선이 표정이 정말 이상했는데?]
어쩌면 상대가 미숙이 언니라서 사실대로 말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은혜는 아들
동훈이의 뺨까지 시원하게 올려붙이고 행실 운운하며 험한 말을 주고 받았다. 엄마가 맞고, 아들이 틀려야 정
상이다. 그래야 어른의 권위가 서고 교육이 가능하다.
"언니! 이리 줘봐. 은선아! 너 사실대로 말해! 우리 동훈이가 니 몸 건드렸어, 안 건드렸어?"
"동훈이가 내 몸을 왜 건드려? 언니! 혼자 또 무슨 이상한 상상 했구나?"
은선은 언니 은혜가 전화기에 대고 갑자기 큰 소리로 다그치는 바람에 귀가 멍멍하다. 시장에서 언니 은혜에게
괜한 얘기를 꺼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끼는 조카이고, 하나뿐인 친언니라 걱정돼서 힌트만 준다고 한 말을
이상하게 받아들였나 보다.
"아니 왜 쓸데없는 소리를 해가지고 애를 잡게 만들어? 너 땜에 애꿎은 우리 동훈이만 혼났잖아!"
은혜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은선이는 전화기를 귀에 가까이 댈 수가 없다.
"기집애가 나이가 몇인데 진중하지 못하고 아무렇게나 입을 나불거리니? 그래가지고 애들 제대로 키우겠어?"
"아니 내가 언제 아무렇게나 나불거렸다고 그래? 언니! 말을 왜 그렇게 해? 애들 얘기는 왜 나와?"
은선이는 기분이 잔뜩 상했다. 자기는 좋은 뜻으로 어렵게 해준 말인데 이런식으로 꼬깝게 되돌려줄 줄은 몰랐
다. 대충 말을 모아보니 언니 은혜가 조심시키라는 말을 혼자 오해해서 동훈이를 때려잡았고, 실수한 걸 알고
는 죄없는 은선에게 화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너 아까는 무슨 얘기야? 뭘 가지고 착실한 우리 동훈이 조심시키라고 난리야, 난리가?"
"허이구. 꽤나 착실하기도 하겠다. 쯔쯔. 언니. 내 말 들으면 아마 언니 까무라칠걸?"
은선은 입술을 앙다물었다. 민아 얘기는 절대 하지 않으려고 했었다. 그런데 언니 은혜가 이렇게까지 악다구
니를 퍼부우니 가만 있을 수 없다. 동훈이가 민아랑 잤다는 얘기를 폭로하여 천방지축 날뛰는 언니 은혜의 콧
대를 납작하게 만들어주고 싶다.
[아니지. 아니야. 동훈이랑 철썩같이 약속했잖아. 그래. 내가 참자, 참어. 괜히 평지풍파나 일으키지.]
"뭐하니? 얘기안하구? 어디 얘기해봐. 까무러치나 안 치나 좀 들어나 보자."
은선이가 말을 안하고 뜸을 들이자 은혜가 비아냥댄다. 비아냥대는 버릇은 정말 고치지 않는다. 은선이가 제
일 싫어하는 언니 은혜의 말투다. 기껏 가라앉힌 짜증이 격하게 솟구쳐 오른다.
"동훈이, 민아랑 잤대! 잤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는 알지? 그것도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 잤대지 아마? 언닌
전혀 몰랐지? 그래. 몰랐을거야. 착실한 아들이라고 태평하게 사시는 분이 그런 걸 어찌 알겠어?"
은선이는 은혜의 비아냥을 한껏 되돌려주며 속이 후련해짐을 느꼈다. 전화기에 잠시 침묵이 흐른다. 언니 은
혜의 표정이 눈에 선하다. 너무나 뜻밖의 사실에 놀라고 동생에게 한 방 먹은 것이 분할 것이다. 다만, 곁에
미숙이 있다는 점이 걱정스럽다. 언니 은혜는 동훈이의 엄마이니 결국 알아야할 것을 안 것이지만, 남남인 미
숙에게까지 알려져서는 안될 비밀이다.
"뭐야, 너? 겨우 그거 가지고 그렇게 호들갑 떤거니?"
은혜는 조금 놀라긴 했다. 민아와 동훈이가 섹스한 사실은 이미 알고 있으므로 그것 때문은 아니고, 동생 은선
이가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놀란 것이다. 은선이가 민아를 개인적으로 알 리는 없다. 미숙이 언니가 그
얘기를 나서서 했을 리도 없다. 그런 얘기가 새나올 곳은 동훈이 본인 밖에 없다.
[이 자식이 아주 동네방네 자랑을 하고 다니나 보네.]
남자들에게 여자랑 잤다는 것은 큰 자랑거리라는 건 은혜도 익히 잘 안다. 누구랑 잤느니, 몇 명이랑 잤느니,
여자가 얼마나 좋아하더라느니 시시콜콜 자랑하는 남자와 사귀어본 적도 있다. 여자가 제일 싫어하는 타입이
다.
[설마 친구들한테도 자랑하고 다니는건 아니겠지?]
엄마라고 아들의 성격을 낱낱이 꿰뚫어볼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래도 은혜는 아들 동훈이를 믿고 싶다. 그렇게
가볍게 처신하는 사내는 아닐 거라고 생각하고 싶다.
"언니. 안 놀라네? 혹시 알고 있었던거야? 아니지? 모르고 있었지?"
"모르긴 왜 몰라? 내 아들 일인데. 너 그 얘기 누구한테 들었어? 우리 동훈이한테 들었어?"
모르고 있었다고 하면 자존심이 상한다. 엄마가 되서 그런 것도 모르고 있었냐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다. 그래
서 은혜는 알고 있었다고 말해버렸다. 말해버리고 나니 후회가 된다. 이유는 모르겠다.
"동훈이한테 듣지 그럼 내가 누구한테 듣겠어. 언니! 정말 알고 있는거 맞어? 동훈이는 언니한테 비밀로 해
달라고 신신당부하던데? 언니. 솔직히 말해봐. 몰랐지? 자존심때문에 알고 있었던 척 하는거지?"
은혜는 곤란해졌다. 은혜도 아들 동훈이에게 들어서 다 알고 있는 내용이라고 말할 참이었다. 그런데 그게 어
그러져 버렸다. 동훈이가 비밀로 해달라고 했을 줄은 전혀 몰랐다.
[이 녀석이 뭐하러 쓸데없는 말은 해가지고 엄마를 난처하게 만들어. 참 나.]
"알고 있었다니까 그러네?"
"언니는 그럼 어떻게 알았는데?"
"그게."
은혜는 어쩔 수없이 동훈이가 핸드폰에 찍어놓은 섹스장면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고 은선이에게 띄엄띄엄 설명
했다. 얘기를 하면서도 괜한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숙이 곁에 서서 근심어린 얼굴로 지켜본다.
"어머나 세상에! 그런 일이 있었어? 언제 그랬는데? 작년에? 언니가 그걸 직접 봤단 말야? 그런데 왜 보고
도 동훈이한테는 아무 말 안했어? 동훈이는 언니가 아는 줄은 까맣게 몰라."
은선이는 동훈이에게 직접 들었을 때보다 더 놀랐다. 얘기로 듣는 것과 눈으로 직접 보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언니 은혜가 그 핸드폰 영상을 보고 얼마나 충격을 받았을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누구보다도 성격이 급한
언니 은혜가 그 일로 동훈이를 족치지 않고 여태까지 모른 척 했다니 그것 또한 놀랍기 그지 없다.
"괜히 다그쳤다가 더 빗나갈까봐 아무 소리도 못했어. 성적이 떨어졌으면 가만 안뒀을텐데. 공부는 열심히
하더라고. 그리고 내가 동훈이 앉혀놓고 넌지시 얘기했지. 여자는 나중에 가서 사귀어도 되니까 지금은 공
부에만 신경쓰라고. 알았다고 그러대? 그래서 말귀를 알아들었구나 했지."
"그랬어? 그랬구나. 난 혼자 괜히 노심초사했잖아. 언니가 아무것도 모르는 줄 알고. 아유. 이제야 속이
시원하네. 내가 동훈이한테 그 얘기듣고 얼마나 고민했는지 언니는 모를거야."
속이 완전히 뻥 뚫린 것은 아니다. 언니 은혜는 작년 그러께 동훈이가 민아와 끝낸 것으로 아는 눈치다. 그런
데 동훈이는 최근까지 민아를 만났다. 비록 앞으로 다시는 민아를 만나기 싫을 정도로 배신감을 느낀 것 같기
는 하지만 언니 은혜가 모르는 부분이 있다는 걸 알려줘야할 지, 말아야할 지 마음이 복잡하다.
"아, 참! 언니 옆에 지금 미숙이 언니 있잖아. 미숙이 언니 있는 자리에서 그런 얘기 해도 돼?"
"응, 그게, 저기. 미숙이 언니도 알고 있어. 작년에 그거 보고 내가 미숙이 언니랑 상의했었거든."
"그래?"
언니 은혜와 미숙과의 돈독한 관계로 보아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마 언니 은혜가 성격대로
아들 동훈이를 몰아대지 않은 건 미숙의 조언 탓일거다. 동훈이가 미숙이 언니에게 무진장 감사해야할 것 같
다. 물론 그런 얘기를 동훈이에게 해줄 생각은 없다. 동훈이가 홀딱 벗고 섹스하는 장면을 지 엄마가 봤고, 엄
마 친구인 아줌마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고 하면 아마 기겁을 하고 놀랄 것이기 때문이다.
[후훗. 한번 놀라게 해볼까.]
장난기가 발동되려고 한다. 그러나 간단히 장난치고 웃어넘길 일이 아니다. 작은 일도 예민한 청소년에겐 크
나큰 시련과 방황의 계기가 될 수 있다. 오래전이긴 하지만 은선도 그런 청소년기를 지나왔다.
"언니도 참 용하다. 난 우리 애들이 그러는 거 봤으면 기함을 하고 놀랐을텐데. 아마 두드려 패서 반 죽여놨
을 걸."
"나도 그러려고 했지. 그런데 그렇게 해서 될 일이 아니더라고. 요즘 애들이 팬다고 말을 듣니?"
동생 은선이의 말대로 핸드폰 영상을 보자마자 두드려 패서 다리몽둥이라도 하나 부러뜨려 놨다면 지금은 상황
이 많이 달라졌을 것 같다. 미숙이 언니와 일을 벌이지도 않았을 것이고, 은혜 자신도 아마 모자상간이라는 패
륜짓에는 절대 빠지지 않았을 것이다. 동생 은선이와 얘기를 나누고 있으니 지나간 일들이 모두 꿈만 같다.
"언니. 지금이라도 동훈이 붙잡아 앉혀 놓고 타일러 보지 그래?"
"다 지난 일인데 이제와서 뭐하러? 잘 크는 애 괜히 들쑤셔서 뭐 좋을거 있다고."
동생 은선이의 충고가 공허하게만 들린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잘 알기에.
"언니. 그런데 어떻게 그런 생각을 다 했어? 왜 동훈이가 날 건드렸다고 생각한거야?"
"아니. 난. 그러니까. 니가 아까 표정이 이상하길래. 조심시키라고 신신당부하질 않나."
"언니. 지금 언니 얘기 듣고 생각난건데. 아니다. 옆에 아직도 미숙이 언니 있어? 그럼 지금 말고. 나중에
언니가 집에 가면 그때 얘기하자."
"아니야. 미숙이 언니 지금 베란다에서 빨래 돌리고 있어. 뭔데? 말해봐?"
- 쉬잇!
은혜가 곁에서 번들번들 놀고 있는 미숙을 향해 입에 손가락을 대고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낸다. 미숙은 영
문도 모르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혹시 말이야. 혹시. 동훈이가. 동훈이가. 언니 몸. 건드린 적 있었어?"
은선이 아주 조심스러운 말투로 느릿느릿 말했다. 은혜는 흠칫 놀랐다. 마치 점쟁이가 용하게도 한번도 본 적
이 없는 사람의 과거를 맞추는 거처럼 너무도 정확히 정곡을 찔러대는 동생 은선이의 말에 온몸에 전율이 인다.
"무, 무슨 말이니, 그게?"
"언니. 되게 놀랜다?"
"노, 놀라기 누가 놀라? 니가 하, 하도 어이없는 소리를 하니까 기, 기가 막혀서 그러지."
"그래? 정말 그래? 그럼 왜 동훈이가 날 건드렸다고 생각했어? 언니도 그런 적 있어서 그런 생각한거 아냐?
언니. 나한테만 살짝 얘기해줘봐. 비밀 지킬께."
"그런거 아니라니까? 사람 오해하게 만든건 너면서 왠 딴소리니? 우리 동훈이 그런 애 아냐. 그런 이상한 소
리나 할거면 전화 끊어."
"언니! 끊지 말고 내 말좀 끝까지 들어봐. 그런 일이 있었으면 애가 못하게 타일러야지. 왜 가만 둬? 언니한
테 그랬으면 나한테도 그럴 수 있다는거잖아. 계속 그냥 두고 볼거야?"
"뭘 두고 봐? 그런 일 없다니까. 너 나중에 동훈이한테 쓸데없는 소리 하지마! 끊는다!"
- 딸깍.
전화를 끊고 나서도 은혜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끊고나니 동생 은선이가 해명을 확실히 받
아들였는지 걱정된다. 오히려 의심만 산 것이 아닌지 두렵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아들 동훈이와 근친상간
이라는 천륜에 어긋나는 짓을 하고 있다는 죄의식에 더 당당하고 떳떳하게 대처하지 못했다.
"은혜야. 은선이가 뭐랬길래 얼굴이 그리 하얗게 질렸니?"
"내 얼굴이 그래 보여? 아니. 별 일 아니야."
"별 일 아니긴? 보니까 분위기가 심각하던데."
미숙의 얼굴에도 그늘이 가득 드리워져 있다. 은혜는 서있기가 힘들어서 거실 소파로 추적추적 걸어갔다.
은혜를 따라 미숙도 소파 옆자리에 앉는다.
"언니. 은선이가. 은선이가. 동훈이가 날 건드린 적이 있어서 자기도 건드렸다고 의심하는거 아니냐고 그
러네."
"정말? 아니라고 그러지!"
"아니라고 했지. 그런데. 그런데 내가. 심장이 떨려서. 말을 잘 못하겠더라구. 언니도 알다시피. 나.
떳떳하지 않잖아. 동훈이랑."
은혜가 무릎위에 두 손을 모아쥐고 발끝을 내리 보며 말했다. 모아쥔 손이 부르르 떨리고 얼굴 표정은 망연자
실해 있다.
"떳떳하지 않을게 뭐가 있어? 니가 동훈이 해꼬지 하는 것도 아닌데. 그리고. 떳떳하지 않기로 말하면 나는
다르니? 너무 걱정마. 은선이가 뭘 알고 그런 말한 건 아니잖아."
"알고 한 말은 아니지. 그런데. 그런데. 흑흑. 언니! 나 죽일 년이지? 나 미친 년이지? 세상에 아들이
랑 붙어먹는 엄마가 어딨어? 나 진짜 천벌 받을거야. 흑흑흑."
은혜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울음을 터트렸다. 상체를 무릎에 묻고 어깨를 들썩이며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
하지 못한다. 미숙도 옆에서 지켜보다가 따라서 기분이 울적해지며 눈물이 한 방울씩 똑똑 떨어졌다. 미숙이
은혜의 등을 토닥거려주며 말한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어쩌겠니? 나도 혼자서 후회 해봤는데. 그래봐야 소용없더라."
"언니! 흑흑. 은선이가 알면 어쩌지? 흑흑. 세상에 비밀은 없다잖아. 흑흑. 나 무서워."
"아유! 꿈에도 그런 끔찍한 소리는 하지 마! 너나, 내가 입다물고 있으면 은선이가 어떻게 알겠니? 마음 약한
소리하지 말고. 동훈이 입 단속할 생각이나 해."
"동훈이 그 자식! 이따 학원끝나고 집에 오기만 해봐 그냥. 내가 아주 입을 확 꿰매버릴거야. 흑흑."
"은혜야. 그 전에. 동훈이한테 전화해서 오해해서 미안하다고 사과부터 해야되지 않겠니?"
"사과? 흥! 내가 걔한테 사과를 왜 해? 다 그 자식이 입을 싸게 놀려서 그렇게 된 건데."
"그래도 오해한 건 사실이잖아. 다짜고짜 따귀부터 때린 건 니가 잘못한거야. 동훈이, 화가 나도 아주 단단히
난 것 같더라."
"몰라. 그런 자식은 맞아도 싸. 크응! 크응!"
은혜가 탁자에 놓인 휴지통에서 휴지 한 장을 꺼내 코를 풀고 눈물을 닦는다. 미숙도 휴지 한 장을 뽑아 눈 주
위를 닦았다. 은혜가 불쑥 일어서더니 현관문 앞에 떨어져있는 까만 비닐봉지를 집어든다.
"그게 뭐니?"
"이거? 낙지하고, 전복 좀 샀어. 해삼도 살려고 했는데 물이 안 좋아서 이것만 샀어."
"그걸 뭐하게?"
"언니가 입덧때문에 잘 못 먹잖아. 그래서 이걸로 해물죽이나 좀 쒀줄려구. 우리 친정엄마가 전에 해주시던
거야. 많이 쒀놓을테니까 틈틈이 챙겨먹어."
미숙은 은혜가 비닐봉지를 주방의 싱크대로 가져가는 걸 지켜보며 감동에 젖었다. 은혜가 미숙 자신을 미워하
고 질투하는 줄로만 생각했었는데 천만 뜻밖이다. 친정어머니가 살아돌아오신 것처럼 의지가 되는 느낌이다.
사실 동훈이는 아기 아빠이기는 하지만 아직 너무 어리다. 같이 있으면 외롭지는 않지만 온전히 의지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다.
"은혜야! 그건 내가 닦을께."
"그럴래?"
은혜가 현관문 앞 비닐봉지가 떨어져 있던 자리의 물을 훔쳐내려고 들고온 걸레를 미숙이 가로챈다. 물이 꽤
많이 흘러서 화장실에 가서 걸레를 짜내고 다시 닦아내야 했다. 그 사이 은혜는 주방에서 낙지와 전복을 손질
했다. 미숙은 걸레질을 하면서 은혜, 그리고 동훈이와 한 집에서 모여살면 어떨까 생각해본다.
[씨발. 엄만 날 뭘로 보고.]
학원 수업에는 전혀 집중할 수 없었다. 속으로 내내 엄마 은혜를 욕했다. 그러다보니 시간이 후딱 지나가버린
다. 평소에는 그렇게도 지루하고 더디게 가던 학원수업시간이다. 엄마 은혜는 증거도 없이 동훈이의 뺨을 때
리고 모욕했다. 동훈이가 꿈에라도 이모 은선을 어떻게 해보겠다는 상상을 한 적이 있다면 그나마 덜 억울했을
것이다.
[당장 이모한테 가서 따져?]
이모가 사건의 발단이다. 이모가 엄마 은혜에게 뭐라고 쏘삭거렸고 그 말에 엄마 은혜의 머리꼭지가 돌아버린
것이다. 동훈이는 이모 은선도 미워진다. 그러나 따귀때린 엄마 은혜만큼 미운 것은 아니다. 보아하니 이모
는 엄마 은혜에게 민아와의 일은 말하지 않았다. 비밀을 지키겠다는 약속을 완전히 어긴 것은 아니니 그 점은
높이 산다. 그러나 엄마 은혜에게 약간이라도 언질을 준 것이 못마땅하다. 이모 딴에는 동훈이를 걱정한다고
그랬을 것이나 사태가 이렇게 되었으니 좋은 뜻으로 그랬다는게 무슨 소용인가.
학원수업이 끝나고 동훈이는 마냥 정처없이 걸었다. 어디로 갈지 막막하다. 이모에게 따지고 싶으나 당장 이
모얼굴을 보기는 싫다. 미숙이 선생님 댁에는 아마도 희진이가 돌아와 있어 불편할 것 같다. 그럼 집으로? 싫
다. 엄마 얼굴은 꼴도 보기 싫다. 정말 왕짜증이다. 핸드폰을 꺼냈다.
"여보세요? 뭐하냐? 농구공가지고 나와라. 농구나 하게."
친구 명철이에게 전화한 것이다. 다행히 집에 얌전히 있단다. 불러내서 농구나 몇 판 하면서 시간을 보낼 참이
다. 저녁은 라면과 김밥으로 때워야할 것 같다. 그러다보면 갈 곳이 정해지겠지 싶다.
"글쎄, 얘가. 집전화로 해도 안 받어. 은선이네도 안 갔다고 그러구. 어떡해, 언니. 벌써 시간이 10시가 다
되가는데."
"걱정마. 곧 들어오겠지. 진작에 나한테 전화하지 그랬어? 내 전화는 받을 거 같은데. 아저씨는 들어와 계
셔? 아저씨는 뭐라고 안해?"
"동훈이 아빠한테는 친구집에서 자고 온다고 얘기해놨어."
"그랬어? 동훈이 들어오면 뭐라고 하게?"
"그거야. 갑자기 사정이 생겨서 친구집에서 못자게 됐다고 하면 돼지. 아니. 동훈이가 밤에 늦게 들어와도
별 잔소리는 안하는데. 언제 들어올 지 알 수가 있어야지. 11시, 12시 넘어도 안 들어오면 어떡해? 그러니
별 수 있어? 자고 온다고 말해놓는게 낫지."
"그래. 그건 잘했다. 은혜야. 내가 동훈이한테 전화해서 집으로 들어가라고 해볼께."
"동훈이랑 연락되면 지금 바로 들어오라고 해줘. 더 늦으면 아주 혼구멍을 내준다고 말야."
"잘못은 니가 먼저 해놓고 너무 그런다. 아무튼 전화해보고 다시 연락줄께."
미숙은 은혜와의 통화를 끝내고 잠시 시계를 보았다. 밤 10시 5분 전이다. 그만한 일로 동훈이가 가출같은 걸
할 리는 없지만 은혜에게 단단히 화가 난 것만은 사실인 듯하다. 어처구니없이 따귀를 맞았으니 자존심이 무척
이나 상했을 것이다. 집에 돌아갈 명분을 미숙이 만들어줘야할 듯 싶다.
"여보세요? 동훈아!"
"선생님."
역시 미숙의 전화는 동훈이가 받았다. 동훈이의 목소리에 힘이 하나도 없다. 불쌍하다.
"동훈아. 화 많이 났어?"
"그냥 조금요."
"은혜가 많이 걱정해. 집에 들어가야지?"
"흥! 싫어요. 안 들어갈거에요."
"동훈아. 그러면 안돼. 자기 엄마가 지금 얼마나 걱정하는데? 전화를 왜 안 받아?"
"목소리도 듣기 싫어요."
"그럼 안돼지. 그래도 자기 엄만데. 전화를 받아줘야 자기 엄마가 사과를 하지. 많이 미안해 하던데."
"정말 미안하면 문자 메세지라도 보냈겠죠. 아마 하나도 안 미안할 걸요?"
미숙은 말문이 막혀버렸다. 역시 아들이라 엄마를 잘 안다. 동훈이가 아닌 다른 아이였다면 꾸짖음을 섞어가
며 집에 들어가라고 달랬을 것이다. 그런데 친구집에서 자고 온다고 말해뒀다는 은혜의 얘기가 생각나면서 슬
며시 다른 꿍꿍이가 떠오른다.
"동훈아. 정 집에 들어가기 싫으면. 우리 집에라도 와서 잘래?"
앙금이 있을 때 둘을 붙여놔봐야 아웅다웅 싸우기만 할테고, 싸우다가 안 좋은 말로 상대방 기분이나 더 긁기
쉽다. 적당히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으면서 감정이 사그라지도록 기다리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네? 그래도 되요? 희진이는 요? 그래도 집에는 오늘 들어가야 되는데."
"희진이 지금 자니까 조용히 몰래 들어왔다가. 자고 아침 일찍 가면 돼. 집에는 내가 얘기해줄께. 친구집에
서 잔다고 하면 되잖아."
은혜와 동훈이 둘 사이가 갈라진 틈을 타 이득을 얻으려는 건 절대 아니다. 추운 바깥에서 방황하는 동훈이를
불러들여 따뜻한 방에서 재우고 은혜를 너무 미워하지 말고 용서해주라고 타이를 작정이다. 오랜만에 미숙은
외롭지 않은 밤을 보내게 될 터이지만 그 쯤은 정당한 보상이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