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화 (18/30)

"이런거 받으면 동훈이 보기 미안한데."

하얀 봉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지연이 말끝을 흐린다. 여전히 담담한 표정이라서 받겠다는 건지, 받지 않

겠다는 건지 의중을 파악하기 힘들다. 그러나, 주려고 내놓은 것이니만큼 안 받아도 삼세 번은 권하는게 예의

일거다. 

"조금 밖에 못 넣었어요. 제가 이 동네 이사온지 얼마 안되서 아직 모르는게 많아요."

성재가 친구복이 없다보니 은선도 다른 학부모들과 친해지는데 애로가 많다. 그래서 성재네 학교의 촌지 시세

가 어느정도인지 아직까지 파악하지 못했다. 너무 적게 넣으면 선생님에게 오히려 미운 털 박히기 쉽고, 너무 

많이 넣으면 다른 학부모의 원망을 사서 왕따 당하기 쉽다. 은선이 봉투를 지연의 손에 쥐어주니 의외로 순순

히 받는다. 지연은 촌지봉투를 반으로 접어 두터운 가죽 성경책 사이에 끼워넣었다.

[사양 안하고 받아줘서 고맙긴 한데. 너무 적게 넣었나?]

은선은 손쉽게 반으로 접혀져 버린 얍상한 돈봉투가 맘에 걸렸다. 지연이 은선의 정성과 관심도 그처럼 얇다고

생각할까봐 걱정된다. 은선이 지연의 얼굴을 뚫어져라 들여다 보지만 아무 것도 읽을 수 없다.

비슷한 시각, 은혜네 집의 초인종이 울렸다.

"어서 와, 언니. 근데 왜 혼자야? 동훈이랑 같이 안 왔어? 내가 같이 오라고 신신당부했는데?"

"나보고 먼저 가라던데? 곧 오겠지 머. 그리구. 어디 같이 다니겠니? 남의 이목도 있는데?"

"이목은 무슨. 전에는 그런거 신경 안 쓰고 둘이 잘만 다녔으면서. 누가 보고 소문냈을 것 같으면 애저녁에

동네방네 소문 다 났네요. 걱정 붙들어 매시죠, 싸모님?"

은혜는 쾌활한 말투로 농담을 던지며 미숙을 반갑게 맞아들였다. 미숙의 외출복은 전체적으로 약간 헐렁하고

느슨한 느낌을 준다. 반면에 은혜의 옷차림은 가볍다. 트레이닝복 바지에 얇은 스웨터. 몸매의 굴곡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다. 미숙이 임신한지 어림잡아 벌써 3개월이다. 다른 사람은 옷차림만으로는 아무런 차이점

을 못느끼겠지만 은혜의 눈에는 보인다. 내막을 모르는 동생 은선이도 어제 물놀이를 끝내고 목욕하는데 미숙

이 언니 모르게 한 마디 했었다.

- 언니, 언니. 미숙이 언니 말야. 날씬하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아랫배에 살이 좀 있으시네?

은선이가 은혜의 배와 미숙의 배를 비교하며 속닥거리길래 핀잔을 줬다.

- 나잇살이지 머. 너는, 니 배나 좀 신경 써라. 똥배 나온 걸로 나이 매기면 우리 셋중에서 니가 제일 맏언니

뻘이야.

- 에이, 언니두? 내 나이에 이 정도면 양호한 편이지. 

미숙이 임신했다는 것을 알면 동생 은선이가 어떤 반응을 보일 지 궁금하다. 늦은 나이도 문제지만, 그 아이

의 아빠가 조카 동훈이라는 걸 알면 아마 기함을 하고 쓰러질 것이다. 미숙이 언니를 빼다박은 딸아이가 태어

나길 바랄 뿐이다. 동훈이는 발가락 정도만 닮아도 상관없다.

"집에 너 혼자 있니?"

"그럼 혼자 있지. 아침에 말했잖아. 동훈이 아빠는 현장 나간다구."

은선이가 가까이 이사오면서 아무래도 언니인 은혜네 집으로 놀러오는 때가 많다. 다른 곳에서는 괜찮지만,

은혜네 집, 아니 동훈이네 집에서 은선이와 마주치는 것은 껄끄럽다. 방해받는 느낌이다. 미숙은 거실소파로

가서 앉았다. 딱딱한 교회의자에 엉덩이가 배겼었는데 푹신한 소파에 앉으니 온몸의 긴장이 한꺼번에 풀린다.

은혜가 냉장고에서 딸기를 꺼내 씻었다.

"은선이? 걔, 아침나절엔 잘 안와. 희진이는 어때? 좀 괜찮아졌어?"

"모르지. 지금은 좀 괜찮아졌는지. 아침에 나올 때 약 먹이고 잠든 거는 봤는데. 니가 예배 끝나고 바로 오

래서 집에도 안가고 이렇게 왔잖아. 왜 불렀니, 근데?"

"왜 부르긴? 혼자 심심하니까 얘기나 하면서 같이 놀자고 부른거지. 언니, 딸기 먹어."

"혼자는 왜 혼자야? 동훈이도 곧 들어올거 아냐." 

미숙은 은혜의 권유에 따라 탁자에 놓인 접시에서 큼지막한 딸기 한 개를 포크로 찍어 입안에 넣었다.

"동훈이는 동훈이고. 점심에 얼큰하게 해물탕이나 끓일려고 하는데. 언니, 괜찮지, 해물탕?"

"점심을 여기서 먹으라고? 안돼, 얘. 희진이 땜에 안돼. 으음! 딸기 달다! 어디서 샀니, 이거?"

은혜가 꽤나 다정하게 군다. 어제 미숙이 주선해준 자리가 그만큼 좋았었다는 뜻일거다. 중매를 잘 사면 술이 

석 잔, 잘못 서면 뺨이 석 대라고 하지 않던가. 주저하는 은혜를 억지로 떠밀어놓고는 쓸데없는 짓을 벌인 건 

아닐까 찜찜했는데 결과가 좋아 다행이다.

"아파트 앞에 용달차가 왔길래 두 팩 샀어. 괜찮지? 먹을만 하지? 희진이도 이리로 불러. 우리 집에서 다같

이 먹으면 언니도 편하잖아."

"안 올 걸? 둘째 날이라 양도 많고 냄새도 좀."

"냄새? 요즘 생리대가 얼마나 잘 나오는데 냄새는 무슨 냄새가 나? 냄새 걱정되면 향수를 쓰지?"

"향수 쓸 나이는 아직 아니지. 하여튼 불편해서 아마 안 올거야."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이따가 때되면 전화 넣어봐. 아아. 옛날 생각난다. 언니, 기억해? 나 처음 멘스시

작한거 우리 엄마한테도 얘기 안하고, 언니한테 제일 먼저 얘기했었잖아."

"기억하지, 그럼."

중학교 다니던 어느 날 아침, 팬티에 묻은 생리혈을 처음 봤을 때 은혜는 허벅지나 엉덩이 어딘가에 상처가 난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이곳저곳 아무리 더듬어 보아도 상처를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

서 팬티만 갈아입고 등교했다. 그 날 하루 아랫배의 이유모를 불쾌함을 참으며 여느 때처럼 수업받고 방과 후

집으로 걸어오는데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방귀 뀌다가 설사똥을 지린 것처럼 아랫도리에 묘한 느낌이 드는 것

과 동시에 팬티가 축축해지고 배가 살살 아파왔던 것이다. 어기적어기적 텅빈 집으로 간신히 돌아와 방안에서

팬티를 내려보고는 새빨간 피와 코를 찌르는 아찔한 냄새 때문에 기절할 것처럼 정신이 아득했었다.

"희진이. 처음에 많이 놀랐지?"

"놀라긴 놀랐는데. 어째 좀 좋아하는 것 같더라?"

"좋아해? 좋아할건 또 뭐야?"

"또래보다 늦다고 고민했었나봐. 요즘 애들, 빠르잖아. "

"부러워할게 따로 있지. 그 성가신 걸 부러워 해? 지금은 아마 생각이 다를걸? 보니까 희진이도 앞으로 생리

통 때문에 꽤나 고생하겠더구만."

"누군 안 그렇니? 여자들 거진 다 비슷비슷하지."

"언니, 근데, 희진이. 수영복 새로 사줘."

"수영복? 수영복은 갑자기 왜?"

"언니 보기엔 아무렇지도 않아? 가슴이 조금. 꼭지가 티나 보이잖아."

"얘가? 아직 어린애를 갖고 왠 꼭지타령은? 그거 작년에 사준거야. 내년에 중학교 들어갈 때까진 충분히 입어."

"알았어, 언니. 언니 딸이니까 머. 언니가 알아서 하겠지. 난 그냥 내 눈에 띄길래. 그나저나. 희진이

는 생긴 건 엄마를 쏙 빼닮았는데. 몸매는 안 닮았나봐. 아직 어려서 그런가?"

"어려서 그렇지. 나도 그 맘 때는 평평했잖아. 휴. 엊그제 같은데 그 때가."

"언니는 엊그제 같아? 난 까마득한데. 언니는 희진이 보면서 옛날 생각 많이 하나보다."

"아무래도 그렇게 되더라. 희진이 보면 꼭 거울보는 것 같고. 근데 시대가 하두 좋아나서. 뭐든지 우리 때

보다는 훨씬 빠른 것 같아."

"요즘은 아들 키워서 남주고, 딸 키워서 사위자식 들인데. 언니는 동훈이 데려가고, 희진이 앞으로 커서 사위

까지 들이면. 아이구, 희동이까지 식구가 몇이야? 난 동훈이 아빠랑 달랑 둘만 남네. 쩝."

"엄살 떤다. 내가 왜 동훈이를 데려가? 동훈이는 니가 꽉 잡고 있으면서."

"꽉 잡긴? 아니야. 그렇지도 않어."

"외아들이니까 동훈이 결혼해도 니가 데리고 살아야지. 동훈이도 아마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걸?"

"모르지, 그 놈 생각이 어떤지. 동훈이도 동훈이지만 며느리될 애가 싫다고 하면 말짱 헛얘기 아니겠수? 요

새는 외아들이라도 따로 나가 사는걸 당연히들 생각하니까."

"그거야, 사람 나름이지. 시부모 모시고 사는 젊은 사람도 많아."

"언니 같으면 모시고 살겠어?"

"모시고 살아야될 형편이면 모시고 살아야지. 왜?"

"아니. 후훗."

은혜가 손바닥으로 웃음을 가린다. 정식으로 맺어진 관계는 아니지만 미숙이 언니는 아들 동훈이의 여자다. 

아들의 아이, 친손주를 임신하고 있다. 굳이 서열을 따지자면 며느리 뻘이다. 은혜는 시어머니 뻘. 

- 어머니. 점심은 뭐 드시고 싶으세요? 제가 맛있는거 해드릴께요.

- 어머니. 설거지랑 청소는 제가 다 할테니까, 어머니는 들어가서 동훈씨랑 노세요.

- 어머니. 요즘 동훈씨가 잘 박아드리고 있죠? 젖 뭉치지 않게 자주 만져드리던가요?

은혜는 잠시 혼자만의 공상에 빠져들어 실실거렸다. 아직 새파란 나이에 할머니 소릴 듣게 됐다는 것은 기분

나쁘지만, 40여년을 친언니처럼 따랐던 미숙에게서 웃사람 대접을 받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을것 같다.

"왜 웃는데?"

"언니. 혹시 말이야. 나 모시고 살 생각은 없어?"

"응? 갑자기 뭔 소리야? 내가 널 왜 모시고 살어?"

"금방 모시고 산다고 해놓고 딴 소리한다. 내가 언니 시어머니인 셈이잖아. 그러니까 모시고 살라고."

"얘는? 실없긴. 니가 왜 내 시어머니야?"

"그럼 아니야? 동훈이보고 희동이 아빠라며? 여보라며?"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니? 동훈이랑 둘이 그냥 하는 소린데."

"어허! 시어머니한테 너라니? 이것이 시어미 무서운줄 모르고. 소박을 맞아봐야 정신을 차릴텨?"

"하유, 시어머니 좋아하시네. 동훈이랑은 내가 먼저다! 넌 세컨드야, 세컨드! 어디 첩이 감히 본부인한테

대드니?"

이쯤 되면 머리채를 휘어잡고 방바닥을 뒹굴어야 제맛이다. 그러나, 그것도 이제는 다 지나간 얘기다. 둘은 

지금 장난스럽게 혀를 날름 내밀고, 팔뚝을 가볍게 때리며 농담을 주고받고 있다. 

"에게? 웃기셔! 언제는 희동이 할머니라고 하더니? 까불지 말고 얼른 제대로 못해? 시어머니한테 효도해야

지, 이 버릇없는 것아!"

"어어? 얘 봐라? 나보다 3살이나 어린 것이 아주 맞먹으려고 드네?"

"맞먹다니? 시어머니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야? 뗏끼!"

은혜가 겨드랑이에 간지럼을 태우자 미숙이 까르르 웃으며 피한다. 미숙도 역시 손가락을 까딱까딱 해보이며

간지럼 태우겠다고 은혜에게 다가갔다. 은혜가 피하고, 미숙은 쫓고. 다시 은혜가 쫓고 미숙이 피하고. 동

훈이라는 험한 길을 만나기 전에는 평탄한 인생길이었다. 각자 소소한 사연은 있지만 의지하며 함께 걸어왔기

에 쓸쓸하지 않은 40여년이었다. 영영 갈라설 뻔한 우여곡절을 겪고 나니 서로의 존재가 더욱 소중해진다. 

"야, 야, 그만하자. 숨차다. 후우, 후우."

웃으며 은혜와 투닥거리던 미숙이 손을 내저었다. 장난이긴 했지만 조금 흥분해서 핏대를 올렸더니 숨이 차고

신물도 넘어온다. 은혜가 다가 앉으며 등을 쓸어주었다.

"언니. 그렇게 힘들어 하면서. 학교 나가지 말고 집에서 쉬지?"

"안돼. 후우, 후우. 못해도 1학기는 마쳐 줘야지."

"걱정이다. 희진이도 언니 닮아서 나중에 입덧때문에 고생하면 어쩌냐?"

"설마 입덧하는걸 닮겠니? 아무리 딸이래도."

"안 닮으면 좋겠지만. 생긴게 언니를 쏙 빼닮았으니. 걱정되서 그러지."

"자식이라고 속속들이 다 닮으려구. 동훈이도 안 그렇잖아. 니네 아저씨는 보통이라며?"

"뭐? 뭐가 보통이야?"

"그거 말이야. 가운데 달린거."

"아아, 자지?"

"어머! 얘! 누구 듣는다! 나 아침에 교회 갔다왔어, 얘."

미숙이 아랫배를 가리키며 정색한다. 그러나, 무서운 것은 희동이가 아니다. 처음엔 교회에 나가 교인들과 웃

는 낯으로 인사하고 함께 기도하는 것이 무서웠다. 기도를 마치고 눈을 뜨면 십자가에 매달려 피흘리는 예수님

이 눈앞에 들이닥쳐 있을 것만 같았다. 지금도 기도할 때 두 눈을 꼭 감지 못한다. 고개를 숙인 채 기도를 하

면서도 눈만은 가늘게 뜬다. 기도는 주로 재민이, 희진이, 희동이. 그 아이들이 탈없이 건강하게 자라도록 

기원하는 내용이다. 동훈이와 미숙 자신을 위한 기도는 차마 하지 못한다. 기도 소리에 응답하시어 고개를 돌

려 미숙을 똑바로 내려다 보실까봐 오히려 두려운 것이다. 진노하시는 하나님, 징벌하시는 하나님. 미숙은 등

잔 밑의 어둠속에서 근근히 숨어 사는 심정이다.

"우리 끼린데 뭐 어때? 그렇게 내숭떨거 없잖아, 언니. 음. 자세히 보면 닮은 것 같기도 해. 사이즈는 동

훈이 께 좀더 크지만. 그래봐야 평균이지 머. 남편 꺼는 평균에서 조금 작은 거고."

"어유, 그게 평균이야? 어디 기준으로 평균인데?"

"어디 기준이긴 우리나라 남자들 평균이지. 우리나라 남자들 평균이 발기했을 때 보통 9센티에서 12센티 정

도래. 언니도 알어?"

"응. 여성지에서 봤어. 동훈이는 몇 센틴데? 재봤어?"

"당연히 재봤지."

"어머나. 너 참, 별 짓을 다 해봤구나? 아니, 놀리는 건 아니구. 신기해서. 그래서? 얼마나 되디?"

"13센티? 14센티? 그 쯤 되던걸."

"그럼 큰 거 맞네. 평균보다 큰 거네. 게다가 그 통계는 성인기준이잖아? 맞지?"

"응."

"와! 동훈이가 이제 겨우 고1이니까. 세상에. 앞으로 얼마나 더 커진다는거야?"

"에이, 아니지. 그게 키 크듯이 마냥 커지기만 할까. 아마 한정없이 마구 자라진 않을걸?"

"그래도 아직 다 큰 건 아닐거 아냐? 히유. 지금도 커서 힘들어 죽겠구만. 넌 안 힘드니?"

"왜, 나도 가끔은 힘들지."

"가끔? 은혜 너. 솔직히 말해봐. 어제 어땠어?"

미숙이 진지한 눈으로로 은혜의 얼굴을 본다. 딸기를 반동강 깨물어 오물오물 씹으며 묻는데 하얀 앞니에 빨간

딸기물이 배어있다. 은혜는 기다리던 얘기가 드디어 미숙의 입에서 나오자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미숙을 

부른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어제 일을 떠벌리고 싶어서다. 자랑을 하고 싶어서다. 전희, 삽입, 후희가 구색이

잘 갖추어져야 제대로 된 섹스를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후희의 마침표가 바로 진하게 박았다고 남에게 자

랑하는 것이다. 좆물을 싸고, 보짓물을 싸듯 자랑의 말을 줄줄 싸야 마음까지 후련하고 개운하다.

"어땠기는. 그저 그랬지 머."

은혜는 일단 가슴을 진정시키며 콜택시를 스스로 부른 것이 아니라, 걸어가는데 택시가 알아서 와서 선 것처럼

태연을 가장했다. 명색이 엄마인데 좋다고 나서서 아들과 재미있게 붙어먹었다고 설레발을 치며 나댈수는 없

는 노릇이다. 은혜도 딱 그만큼의 낯은 가릴 줄 안다. 입이 근질근질하지만 아마도 모기가 앉았던 탓일 거다. 

요새 모기는 계절을 가리지 않는다.

"얼굴 봐라. 표정을 보아하니 무지 좋았구나? 몇 번이나 했어? 두 번? 세 번?"

"언니는? 횟수가 중요한가 머? 한번을 해도 찐하게 제대로 했나가 중요하지."

한 번밖에 못했다. 그 와중에 어찌 두 번, 세 번까지 해댄단 말인가. 은혜는 우쭐하던 기세가 한풀 꺾이는 느

낌이다. 동훈이는 시간과 장소만 허락되면 두 번, 세 번이 아니라 열 번, 스무 번도 가능한, 아주 튼실한 아들

이다. 물론 가능할 것이라는 말이다. 실제로 그렇게 해봤다는 건 아니고.

"그래서? 어떻게 찐하게 했는데? 앞으로 했어, 뒤로 했어? 니가 올라탔니?"

"아이 참. 언니도 동훈이랑 해봤으면서. 잘 알잖아, 언니도. 동훈이 스타일."

단순히 동훈이랑 해본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 세 명이서 함께 섹스한 적도 있지 않던가. 그러나, 여자들 심리

라는게 남들 보는 앞에서는 안 그래도 그런 척, 그래도 안 그런 척 포장하는게 특기인지라 함께 하면서 본 것과

안 본 것이 전부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미숙도 그랬지만, 은혜도 미숙의 눈을 의식해서 단둘이 있을 때 하지

않는 행동을 했을 것이고, 단둘이 있을 때 하는 행동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두루뭉술 넘어갈 생각말고 자세히 좀 얘기해봐, 얘."

"자세하게 얘기할 것도 없다니까? 똑같애. 나는 동훈이 자지 빨아주고, 동훈이는 내 보지 빨아주고, 그러

다가."

미숙은 은혜가 뱉어내는 자지니, 보지니 하는 음란한 단어에 넋을 빼앗긴다. 은혜는 침을 꼴깍 삼키며 잠시 말

을 멈춘다. 하필 이 순간에 침이 넘어가나 싶어 쑥스러워 하며 미숙의 목덜미를 보니 미숙도 역시 침을 꿀꺽 넘

기고 있다. 

[그러고 보니까 동훈이 이 녀석. 보지를 안 빨아줬네. 박고 나서 빨아준다더니. 오늘 아침에도 시간없다

고 그냥 넘어가고. 이따 들어오면 빨아달래야지.]

"그러다가?"

"박고 쌌지 머."

"에이. 그게 다야?"

"왜? 무슨 얘기가 듣고 싶은데? 궁금한거 있으면 구체적으로 물어봐."

"집에서 할 때랑은 다르지?"

"어! 좀 색다르긴 하더라. 스릴도 있는 거 같고. 예전 생각도 좀 나고."

"예전? 언제?"

"결혼하기 전. 그땐 데이트하면 주로 여관이었잖아. 언니두 여관에서 했지?"

"아니! 처녀가 여관을 어떻게 가?"

"하긴. 언니같이 조신한 사람은 그 시절엔 여관 근처에만 가도 큰일 나는 줄 알았을거야, 아마."

20대 젊은 시절의 미숙과 10대 소년에게 보지를 대주고 그 아이의 아이까지 배고 있는 40대 미숙이 같은 여자

라는 사실은 곁에서 지켜보는 은혜도 믿을 수 없을 정도다. 깨끗한 물이 흐려지는 건 정말 순식간이다. 물론 

은혜도 처음부터 뻔뻔하게 여관을 들락거릴 수 있었던 건 아니다. 외박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하던 처녀 시

절, 여관에 첫 발을 들인건 장마비가 간헐적으로 내리던 어느날 오후였다. 그 날이 햇볕은 쨍쨍 모래알은 반짝

이는 환한 대낮이었다면 은혜의 인생도 미숙만큼이나 조신했을 것이다. 처음이라 떨렸지만 우산으로 몸을 가

릴 수 있어 여관 앞에서의 망설임이 길지 않았다. 무슨 일이든 처음이 어려울 뿐이지 자꾸 해보면 익숙해진다. 

남자따라 여관 들어가는 것도 마찬가지다. 도둑질하러 들어가는 사람처럼 남의 이목을 의식하던 경계심은 점

차 엷어지고, 어느덧 여관 드나드는게 내 집처럼 편안해졌다. 

익숙해진 다음부터는 남의 이목을 조심하는게 아니라, 익숙한 태가 날까봐 조심스러웠다. 여관문 앞에서는 항

상 떨리는 얼굴로 손사래를 쳐보였고, 억지로 끌려들어가서 남자가 카운터 앞에 서면 은혜는 멀직이 떨어져서 

얼굴이 보이지 않게 돌아서 있었다. 혹시나 카운터에서 알아보고 또 왔냐며 반가워하면 이미지 관리상 곤란하

니까. 

초반에만 조심하면 됐다. 첫인상만 잘 심어놓으면 타락의 혐의를 남자에게 뒤집어 씌우는 것은 손쉬웠다.

- 자기가 날 이렇게 만들었잖아. 아잉, 자기 때문에 내가 색녀 됐어.

[요것이 날 무시하나?]

미숙은 조신한 사람이라는 말이 칭찬으로 들리지 않는다. 유치한 호승심이 고개를 쳐든다.

"은혜 너 혹시. 학교에서는 안 해봤니?"

"엥? 학교? 언니, 학교에서두 해봤어? 언제? 고등학생 때는 아닐거구. 대학 다닐때?"

은혜의 눈이 휘둥그래 커졌다. 미숙이 씨익 웃는다. 

"너. 나 욕하면 안돼. 욕하면 앞으로 너한테 이런 속얘기 안한다?"

"아유. 내가 왜 언니를 욕해? 내가 언니 욕할 처진가, 지금? 어디서 해봤는데? 대학교 맞지?"

"대학교가 아니고. 초등학교에서. 지금 다니는 학교에서 해봤어. 교실에서."

"뭐어? 초등학교 교실? 애들 가르치는 교실에서? 어쩜, 세상에."

은혜의 입이 떠억 벌어진다. 미숙은 은혜가 놀라는 모습을 보고 의기양양 자랑스러운 기분이 들면서도 그 자랑

스러움이 부끄럽다. 상대가 은혜이기에 얘기를 꺼냈지만 자랑해서는 안될 일이다. 

"동훈이랑?"

"그럼. 동훈이 밖에 더있니?"

"어디까지 한 거야? 설마 삽입까지?"

"삽입까지 했으니까 해봤다고 얘기하지."

"누가 하자고 했어?"

"누가 하자고 했다기 보다. 어쩌다 보니 분위기가 그렇게 됐어."

"느낌이 어땠는데?"

"어떻긴. 애들이 보는 것 같아서 좀 그랬지. 들킬까봐 떨리기도 하고."

"자세가 나오나? 책상이고, 의자고 죄다 딱딱하잖아. 불편하지 않았어?"

"그게. 하니까 되더라. 난 책상에 엎드리고, 동훈이가 뒤에서." 어머. 그렇게 이상한 눈으로 보지마."

"언니, 대단하다."

사실은 속으로 미숙과 동훈이를 욕하고 있던 참이다.

[어이구, 이런 색골들. 어디 할 데가 없어서 초등학교 교실에서 그 짓을 해? 학부모들이 알면 난리나지. 쯔

쯔. 그런데, 동훈이가 뒤에서 하는 걸 좋아하나? 아침에도 내 뒤에서.]

욕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럽다. 학교 교실은 전혀 생각해보지 못한 장소다. 엄마와 아들이라고 집에서만

박으라는 법은 없다. 그런 편견은 이제 버려야겠다. 

[동훈이네 학교에 한번 놀러가 볼까?]

그러나, 미숙은 교사라서, 자기 직장이라서 가능했을 것이다. 일반 학부모인 은혜가 동훈이네 고등학교에서 

둘만의 은밀함이 보장되는 공간을 갖는다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학교 사람중에 누가 도와주면 모를까.

"대단하긴, 얘. 부끄럽게." 

"언니두 참. 사람 많이 변했다. 우리 동훈이 땜에."

미숙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은혜로서는 솔직한 심정이다. 거짓된 누명 씌우기가 아니다. 아들 동훈이가 바로

정숙하고 얌전한 미숙이 언니를 때와 장소를 안가리는 요부로 만들어 놓은 장본인이다.

"보기 흉하지?"

흉하게 볼 수 없다. 누워서 침 뱉는 꼴이다.

"아니, 흉하긴? 언니가 흉하면 나는 어쩌라구. 왜? 나도 흉해 보여?"

"아니! 전혀 안 흉해! 내가 널 얼마나 부러워 하는데."

"부러울게 뭐 있어? 이거저거 다 가진 사람이. 진짜 부러운 건 나지."

"이제 와서 얘기지만. 희동아, 미안. 애기 가진거 가끔은 후회돼. 내가 미쳤다 싶어, 이 나이에."

"그래, 그렇게 고생하는데 후회도 되겠지. 근데, 아직 안 늦었잖아. 지금이라도."

"그냥 그렇단 얘기야. 그 얘긴 더 하지 말자. 내가 괜히 우는 소리했네. 희동아, 니 얘기 아니니까 걱정 말

아요. 할머니랑 다른 사람 얘기한거야."

미숙이 은혜의 말을 외면하고는 아랫배를 살살 쓰다듬으며 말했다. 은혜는 한숨을 쉬었다. 착하지만 고집불

통인 미숙이 언니다. 

[그래. 나중에 뱃살 튿어지게 아파봐라. 내 말 들을 걸 그랬다고 피눈물 흘리기 쉽지. 우리 동훈이 탓하기만

해봐. 내가 그냥 콱.]

그 때, 

- 삑, 삑, 삐, 비, 비, 비, 빅. 철컥!

현관쪽에서 버튼누르는 소리에 이어 문이 열리고 동훈이가 들어선다.

은혜와 미숙이 동시에 일어나며 반갑게 동훈이를 맞이했다.

"동훈아!" 

"지금 와.요?"

[엥? 지금 와요?]

끝의 '요'자는 희미했지만 입술이 달싹거리는 모양을 봤기 때문에 잘못 들은 것은 아니다. 미숙은 은혜가 얌전

하게 존대말하며 동훈이에게 조르르 달려가는 모습을 보고 놀랐다. 은혜가 동훈이에게 존대말하는 것을 처음 

듣는 것은 아니다. '오빠, 오빠'하고 색을 쓰며 알랑거리는 모습도 여러 차례 봤다. 그런데도 무척 생소하고 어

색하게 들린다. 은혜가 미숙쪽을 흘깃 뒤돌아봤다. 눈이 마주치자 떳떳지 못한 사람처럼 시선을 똑 떨어뜨린다.

"은선이 걔는 치맛바람이 너무 심해."

은혜가 미숙과 동훈이를 번갈아 보며 혼잣말처럼 애매모호하게 말끝을 흐렸다. 미숙의 옆자리에 앉은 동훈이

가 이모 은선의 부탁으로 윤지연 선생을 모셔다 주고 오는 길이라는 보고를 짧게 끝내고 몇 개 남지 않은 딸기 

가운데 하나를 집어든다. 은혜는 소파 앞에 놓인 탁자에 팔을 기대고 바닥에 비스듬히 앉아 둘을 마주 올려보

고 있다. 

"일이 있어서 불렀겠지."

"이모 얼굴이 좀 심각한 것 같던데요? 엄마, 딸기 더 없어?"

"일이야 있겠지. 성재 때문에 부탁할게 좀 많겠어, 언니? 그래도 그렇지. 선생님을 집으로 부르냐."

은혜가 냉장고문을 열고 딸기를 꺼내 씻으면서 궁시렁거렸다. 동훈이의 말에는 직접 댓거리하지 않고 미숙과

만 말을 주고 받는다. 동훈이를 없는 사람 취급하는 것 같다. 은혜는 딸기를 세 번 씻은 후 채에 걸러 물기를 

빼고 탁자 위 접시에 한가득 담아냈다. 딸기 접시를 동훈이 쪽으로 가깝게 밀어주고 다시 비스듬히 앉는다. 

동훈이는 엄마 은혜가 방금 씻어온 딸기를 뭉텅뭉텅 씹어 삼키며 둘의 이야기를 들었다.

"누가 알겠니? 선생님인지, 그냥 아가씬지."

"언니. 언니는 그 선생 잘 알겠네. 같은 교회 다니잖아."

"잘 몰라. 우리 교회 다닌지 몇 년 안되서."

같은 초등학교 교사라면 나이차이도 아득하고 후배 뻘이라서 말하기 쉽다. 그러나, 윤지연은 중등교사. 십중

팔구 사범대학을 나왔을 것이고, 교육대학을 나온 미숙과는 같은 교사라 해도 태생이 다르고, 체급이 다르다.

배다른 형제라고나 할까. 그래서 호칭이 마땅치 않다.

지금의 교회는 개척교회 시절부터 다녔다. 허름한 가건물에서 벽돌 건물로, 그리고 고급스러운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지금의 모습이 되기까지 그 과정을 자기 집처럼 지켜보았다. 교회건물을 부수고 다시 세울 때마다 목사

님은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시고 사흘만에 다시 부활하시는 과정과 흡사하다고 설교하곤 했다. 매번 반복되는

설교에 교인들은 잊지않고 '할렐루야, 아멘'을 외쳤다. 예수님은 생명을 바치고, 신자들은 헌금을 바치고.

목숨같은 돈, 피같은 돈이라고들 하니 얼추 비슷하긴 하다.

"그래도 오며 가며 들은 얘기가 있을거 아냐. 어떤 아가씨야, 언니?"

동훈이도 졸업해서 이젠 그 학교 학생도 아니겠다, 은혜의 관심은 이젠 오로지 지연의 사생활에 쏠려 있다. 잘

가르치는지, 못 가르치는지, 아이들을 공평하게 대하고, 돈은 밝히지 않는지. 교사와 학부모라는 관계 때문

에 피할 수 없었던 그 관심사들은 이미 아들 동훈이와 함께 졸업시켜 버렸다.

"교회사람들끼리는 그런 얘기 잘 안해. 겉보기엔 참하고 조용한 것 같더라. 교회 일도 열심히 하고."

"사귀는 남자는?"

"있겠지. 그 나이에, 그 얼굴에. 애인이 없을려구."

"하긴 얼굴 반반하겠다, 몸매 날씬하겠다. 남자들이 가만 두지 않았을거야, 아마. 그지, 언니?"

동훈이는 귀를 쫑긋 세웠다. 선생님께 반반하다니? 엄마 은혜의 말투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남자들이 가

만 두지 않았을 거라는 말에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상상이 가지 않는다. 차분하게 성경구절을 읽어주시던 청

순하고 고아한 백조같은 윤지연 선생님을 남자'들'이 '가만 두'지 않고 건드리다니. 아니, 상상이 마구마구 

된다. 

"그럴까? 동훈이 너는 혹시 모르니?"

미숙이 동훈이에게 질문을 돌리자, 은혜가 동훈이를 보며 눈을 빛낸다. 남말 듣기 좋아하고, 남말 옮기기 좋

아하는 아줌마 은혜가 진작부터 동훈이에게 묻고 싶었던 말이다. 동훈이에게 존대말을 해야한다는 족쇄때문에

직접 말을 섞지 못하고 참았는데 미숙이 언니가 대신 물어주어 반갑다. 

"저도 잘 모르겠는데요."

"그래? 학교에서 꽤 인기 있을 것 같은데. 친구들끼리 얘기 안해?"

미숙은 완곡하게 말했지만 동훈이는 속뜻을 또렷이 알아들었다. 남학생들이 예쁘고 섹시한 여교사를 도마에 

올려놓고 얼마나 심하게 난도질을 해대는지 교사인 미숙도 알고, 학생인 동훈이도 안다. 왜 얘기를 안 했겠는

가. 윤지연 선생님 정도되는 미모의 여선생은 복도를 스쳐 지나가기만 해도 온갖 이야깃거리가 수두룩하게 떨

어져 수북히 쌓인다. 화장실에 가면 낙서천지다. 윤지연 보지는 맛있다, 오늘은 노팬티더라, 자기 여친이다, 

마누라 삼았다 등등.

"남자친구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구요. 어디에서 혼자 자취한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진짠지는 모르겠어요."

친구 명철이에게 들은 얘기다. 구체적인 위치까지 나불대면서 같이 놀러가보자고 부추기는걸 동훈이가 싫다고

뿌리쳤었다. 동훈이가 윤지연 선생님과 조금 친해 보이니까 그걸 이용해서 수작을 걸어보겠다는 심산이 엿보

였기 때문이다. 교회에서 중등부 활동을 할 때도 명철이나 친구들과 함께 있을 자리에선 일부러 윤지연 선생님

을 어렵게 대했다. 친하게 굴면 명철이나 다른 친구들도 똑같이 그럴까봐 경계한 것이다. 중학교를 졸업한 지

금에 와서는 그 때 그랬던 것이 후회된다. 학교가 달라지니 윤지연 선생님을 볼 기회 자체가 크게 줄어들어 버

리고 말았다.

"혼자 자취하면 애인 있다는 소리네."

은혜가 불쑥 끼어들었다. 동훈이의 말 뒤에 끼어들어, 동훈이의 얼굴을 보며 이야기하면서도 말끝은 미숙을 

향해 날리고 있다. 줄을 서려면 확실히 서야지. 이건 완전히 은행 ATM기 두 대에 양다리를 걸치고 선 얌체와 

똑같다. 동훈이는 엄마 은혜의 태도가 얄미워서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다.

"엄마! 니가 그걸 어떻게 알아? 니가 봤어?"

동훈이가 힐난하며 쏘아부치자, 은혜는 어깨를 움츠리고 자라목이 되었다. 미숙이 동훈이의 거친 반말투에 놀

라서 둘의 얼굴을 말똥말똥 쳐다본다. 

"아니, 난 그냥. 그럴 것 같다는 얘긴데. 봤다는게 아니라.요."

은혜가 미숙의 눈치를 살살 살피더니 슬그머니 '요'자를 붙인다.

"너. 말 흐지부지하게 한다? 똑바로 해라!"

동훈이가 한껏 저음으로 깔아 으름장을 놓았다. 확실하게 존대말로 하라는 경고다. 은혜의 어깨가 더욱 더 움

츠러든다. 미숙은 은혜가 동훈이 앞에서 이토록 기가 죽은 모습은 생전처음이다. 섹스할 때 앙앙거리는거야 

애교떠느라 그러는 것이고, 지금 이렇게 설설기는 모습과는 차원이 다르다.

"둘이 화해했다면서? 그새 또 뭔 일 있었어?"

"엄마가 선생님께 얘기 안했어요?"

"무슨 얘기?"

"야, 엄마! 니가 얘기 해. 나랑 약속한거."

동훈이가 미숙을 향해 부드러운 얼굴로 얘기하다가도 엄마 은혜에게는 짐짓 무서운 표정을 지어보인다. 은혜

가 탁자유리에 손가락을 대고 삑삑 소리를 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무리 스스럼없는 미숙이 언니라도 역시 

제3자다. 아침엔 아무렇지도 않게 아들 동훈이에게 술술 해댔던 존대말이 미숙이 언니가 빤히 쳐다보고 있으

니 목에 걸려 입밖으로 나오질 않는다. 화장실에 가서 어떻게 똥누고 왔는지 설명하는게 차라리 덜 창피할 것 

같다. 딸기를 먹었으니 빨간 똥이 나올까? 깨같은 딸기씨가 알알이 박혀서 깨가래떡이 부지직, 퐁당.

"뜸들이네, 이게. 야! 빨리 말씀드리라니까, 선생님한테! 너랑 나랑 뭐라고 약속했지?"

""어, 언니! 나, 나. 앞으로 동훈이한테. 쭈욱 존대말하기로 했어."

동훈이의 득달같은 재촉에 은혜가 황급히 말을 쏟아낸다. 미숙 자신이 한참 연하인 동훈이에게 존대말하는데 

익숙해져 있어서 그런지, 은혜가 아들 동훈이에게 존대말한다는 것 자체보다는 주눅이 들어서 쩔쩔 매는 모습

이 더 뜻밖이다. 

"정말? 그럼 아무때나, 아무데서나 동훈이한테 존대말 하는거야, 이제부터?"

"아무때나는 아니구요. 엄마랑 저랑 단둘이 있을 때랑, 선생님까지 셋이 있을 때만 그러기로 했어요."

동훈이가 의기양양하게 설명한다. 은혜는 미숙이 자신을 비웃을 것 같다. 게다가 동훈이는 미숙에게 존대말

로 한다. 엄마인 은혜에게는 반말로 막 대하면서. 불공평하다. 자존심이 상한다.

"나도 그럼 동훈이한테 반말하면 안되겠네. 엄마도 자기한테 존대말하는데."

"괜찮아요, 선생님. 선생님은 그냥 편하실 대로 하세요."

편한 대로 하라지만 동훈이가 말을 낮추지 않으면 미숙도 말을 높일 수 없다. 약속한 바는 아니지만 서로 암묵

적으로 지켜온 규칙이다. 말의 높이로 따지면 미숙은 은혜보다 반 계단 위에 서있는 느낌이다. 미숙은 존대말

과 반말 사이를 비교적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반면에, 은혜는 일정한 조건하에서 항상 존대말을 써야하니 말이

다. 물론 계단의 맨 윗쪽은 동훈이의 자리다. 동훈이는 이런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것 같다. 미숙은 불편한 기

색이 역력한 은혜에겐 미안하지만 동훈이가 원하는 쪽으로 맞춰주기로 한다. 

"은혜야. 처음에만 어색하지 금방 익숙해질거야. 나도 그랬거든."

[칫. 그거야. 언니는 생판 남남이니까 그렇지. 난 친엄마라구요.]

"그, 그럴까?"

"그래. 근데 익숙해지려면 말을 좀 많이 하는게 좋을걸? 아무래도 말은 해야 느는 법이니까."

"어, 언니! 지금 점심 준비할테니까 밥먹고 가. 알았지?"

"안되는데. 잠깐. 집에 전화 좀 해보고."

미숙이 전화하는 동안, 은혜는 주방에서 바쁘게 움직인다. 일거리를 자꾸 만들어야 말거리가 줄어든다. 먹을 

거리를 맛있게 잔뜩 만들어서 말할 틈도 없이 아구아구 먹어대도록 만들어야겠다고 은혜는 생각했다. 

"친구집? 그러지 말고 괜찮아졌으면 이 쪽으로 와. 아줌마가 맛있는거 해주신데. 동훈이 오빠? 지금 없어.

응. 아직 교회에서 안 왔어."

미숙이 동훈이를 향해 입술에 검지손가락을 대보이며 통화를 이어갔다. 생리중이라는 사실이 동훈이에게 전해

질까봐 희진이가 신경을 많이 쓴다.

"알았어, 그럼. 나갔다 와. 돈은 있지? 없어? 싱크대 맨 윗서랍에 보면 엄마 장지갑 있거든? 거기서 만원

짜리 한 장만 꺼내 가. 한 장만 꺼내. 엄마가 나중에 확인해 볼거야. 그래. 엄마 점심만 먹고 바로 갈거니

까 너두 일찍 들어와 있어. 그래, 잘 놀고 와."

점심만 먹고 가게 될 것 같진 않지만, 얘기는 그렇게 해놔야 한다. 그래야 희진이가 적당히 놀고 집으로 들어

갈 것이다. 미숙은 전화를 끊고 주방으로 갔다. 동훈이는 TV를 켠다.

"같이 하자, 은혜야."

은혜가 꽃게의 등짝을 떼내는 것을 보고 미숙이 팔소매를 걷어붙이며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은혜가 팔꿈치로

미숙의 손을 밀친다.

"아서, 언니. 저리 가. 또 속 게울라구. 도와주고 싶으면 언니는 무우나 썰어. 냉장고 야채칸에 있어."

"알았어."

미숙이 흙묻은 무우를 꺼내 수돗물에 씻는 동안 은혜가 옆으로 살짝 비켜섰다가 도마와 칼을 챙겨주었다. 미숙

은 은혜가 해물을 손질하는 동안 식탁위에서 무우를 썰었다. 비린내가 솔솔 풍겨와서 씽크대를 등지고 섰더니

냄새가 조금 덜하다.

"언니. 어제 보니까 입덧 거의 안하더라?"

"어제야 니네 아저씨도 계시고 하니까 억지로 참았지. 오늘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또 한바탕 게웠어."

"그렇게 못 먹으면서도 배는 쑥쑥 불러 오는거 보면 참 신기해. 안 그래, 언니?"

"어머! 내 배 많이 나와 보이니? 역시 티가 좀 나나? 어제 은선이가 보고 혹시 뭐라고 안하디?"

어제, 은선의 시선이 자주 아랫배에 머무는 것 같아서 마음이 켕기던 참이다. 

"언니보구 살쪘다더라. 걱정마. 걔는 모르잖아. 언니 임신한거."

"니가 보기엔 어떠니? 임신한 배 같아 보여?"

"나한테는 물어보나마나지. 나야 다 아는데. 근데 언니. 젖은 아직 안 나와?"

"젖? 젖이 벌써 나오겠어?"

미숙은 다 썬 무우를 냄비에 담으며 동훈이 쪽을 슬쩍 봤다. 동훈이는 TV프로에 몰두해 있다. 미숙과 은혜의

대화는 TV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 않을 것 같다. 미숙은 냉장고에서 양파와 쑥갓을 꺼내 다듬는다.

"아마 곧 나오게 될 걸? 동훈이 땜에. 킥킥."

"어머! 얘는?"

동훈이가 미숙의 젖꼭지를 자꾸 빨아대니 예정보다 일찍 모유가 분비될 거라는 농담이다. 미숙이 농담을 단박

에 알아듣고 은혜의 팔을 팔꿈치로 치며 눈을 흘겼다. 은혜도 지지않고 팔꿈치를 휘두르며 희희덕거린다. 웃

음소리가 들렸는지 동훈이가 얼굴을 주방쪽으로 돌렸다가 다시 TV로 향한다.

"젖 나오기 시작하면 동훈이가 이상하다고 피하지나 않을까 몰라."

"동훈이가? 아닐걸? 걔가 내 젖을 얼마나 오래 먹었는데? 걔, 젖 되게 좋아해."

"니가 언제 젖을 오래 먹여? 너는 거의 분유로 키우다시피 했잖아. 너무 분유만 먹인다고 내가 뭐라고 했던거

기억안나?"

"언니가 몰라서 그렇지, 젖도 꽤 자주 물렸어. 젖 안물리면 빽빽 울고 잠투정을 해대는데 어떻게 분유만 먹여?"

"하긴. 우리 애들도 그랬지. 근데 그건 갓난 아기때 얘기구. 그때랑 같을까? 이젠 다 컸는데?"

"다 크긴? 언니두 참. 아까는 덜 컸다고 겁난다더니 지금은 또 다 컸다고 그러네. 왜? 언니네 아저씨는 언

니 젖이 맛없대?"

"아니. 젖이 무슨 밥반찬이니? 맛이 있다, 없다 그러게?"

"재민이랑 희진이는 맛있게 먹고 잘 컸잖아. 동훈이도 아직은 애야. 애들 입맛 거기서 거기지 머. 언니네 애

들이 맛있게 먹었으면 동훈이도 맛있게 먹을거야. 언니 젖맛이 어디 가겠어?"

"그건 그렇다치고. 젖꼭지가 갈수록 까매지는 것 같아서 그것도 걱정이다."

"왜? 동훈이가 무슨 내색이라도 해?"

"아직 내색은 안 하는데. 동훈이가 착하잖아. 이상한데 참고 아무 말 안하는건가 싶기도 하고."

"언니! 내 아들 착하다고 칭찬해주는건 고마운데. 동훈이 그렇게 안 착다니까? 걔도 이상하지 않으니까 아

무 말 안 하는거야. 그리고, 쓸데없는 걱정 미리 땡겨 하지마. 그러잖아도 스트레스 많이 받으면서."

"은혜 너는 좋겠다. 배도 안 나오고. 젖도 안 까매지고. 근데 넌 혹시 생각없어?"

"무슨 생각?"

"아기 가질 생각없냐구."

"아기? 누구 아기? 동훈이 아기? 동훈이 애를 가지라구? 내가 미쳤어, 언니? 아들 애를 배게?"

"말좀 가려해라. 미치다니? 듣기 안 좋네."

[그럼 언니가 미쳤지, 정상이라고 생각해? 아까는 자기가 스스로 미쳤다고 하더니.]

은혜는 목젖까지 넘어온 말을 꼴깍 삼키고 만다. 

"아유. 언니하고 나는 사정이 다르잖아. 언니는 남남이고, 나는 친엄마고. 엄마가 어떻게 친아들씨를 받

아서 애를 배? 망측스럽게시리."

[그게 아니겠지. 나 고생하는거 보니까 만정이 다 떨어진다는 거겠지. 내가 너 같아도 그럴 것 같다.]

임신하면 고생도 고생이려니와, 동훈이가 딴 여자에게 한눈 팔게 될까봐 두려운 마음도 있을 것이다. 미숙이

임신을 후회하게 만드는 부분도 바로 그것이다. 그나마 위안은 어떤 풍파가 있어도 뱃속의 희동이가 미숙과 동

훈이를 죽을 때까지 엮어줄 끈이 되어줄 것이라는 점이다. 혈연만큼 질긴 끈은 없으니. 

"서로 뜻이 맞으면 낳아서 기르는거지. 뭘 그런걸 따져? 아이, 그만하자. 쑥갓 지금 넣을거야?"

미숙은 다듬은 쑥갓을 한쪽에 갈무리해 놓으며 말을 얼버무린다. 남편의 아기를 뱄어도 늦둥이를 가졌다고 부

끄러워할 나이에 10대소년의 아기를 밴 것은 전혀 자랑거리가 되지 못한다. 게다가 미숙이 동훈이와 뜻이 맞아

서 희동이를 가진 것도 아니다. 마주한 동훈이의 얼굴에 그늘이라도 드리우는 것 같으면 희동이 때문인가 싶어

미안해진다. 

"아니, 언니. 다 끓고 마지막에 넣어야지." 

"동훈이 엄마야. 나중에, 나중에. 희동이 낳으면. 낳고 나서 있잖아. 니가 도와줄거지?"

"뭘 도와줘?"

"희동이 기르는 거 말야. 도와줄거지? 그치?"

미숙이 냄비에 물을 붓고 가스레인지에 불을 놓는 은혜의 어깨에 두 손을 얹어 살짝살짝 주무르며 말한다. 은

혜는 낮거리에 낄 생각으로 쉽게 도와준다고 말할까 하다가 장난기를 참지 못했다. 어깨를 빼고 미숙을 향해 

피식 웃어 보인다.

"내가 왜? 내 애도 아닌데."

"에이. 왜 니 애가 아니야? 니 첫 손주잖아."

"어머! 허락도 안 받고 낳는 주제에 또 손주타령 한다. 그리고, 왠 손주? 언니는 본부인이라매? 첩이 어찌 

감히 어부인의 금지옥엽에 손을 대겠습니까요?"

"야아. 그거야, 농담이지. 누가 진짜 그렇게 생각한데? 도와줄거지? 도와줄거지?"

"시어머니 대접은 쥐똥만큼도 안 하면서 손주를 봐달라고? 일 없네요."

은혜가 간살맞게 웃으며 들러붙는 미숙을 엉덩이로 밀쳐내고 목소리에 힘줬다. 앞으로 하는 걸 지켜봐서 마음

에 들면 도와줄 수도 있다는 말투 같다.

"아이, 어머니. 이 며느리 사정 좀 봐주세요. 네?"

"히야. 어부인마님께서 세컨드한테 어머니라니. 아까는 팔짝팔짝 뛰시더니. 이거 참 황송해서 몸둘 바를

모르겠네?"

"우리 시어머니, 삐지셨나봐? 아잉. 어머니. 어머니이."

미숙이 은혜의 겨드랑이에 손가락을 대고 간지럼 태웠다. 은혜가 발작하듯 간지럼을 타며 미숙을 피한다. 또

다시 주방과 식탁사이의 좁은 공간에서 미숙은 쫓아가고 은혜는 도망가는 추격전을 벌이는 통에 집안이 왁자지

껄 소란해진다.

[저 아줌마들이 지금 뭐하냐?]

동훈이는 투닥거리는 요란한 발걸음 소리에 무심코 주방 쪽을 돌아보았다. 엄마 은혜와 미숙이 뭐가 좋은지 킥

킥거리며 쫓으랴, 쫓기랴 분위기가 아주 화기애애하다. 

- 이과든, 문과든 동훈이가 하고 싶은 걸 해야지. 동훈이는 뭘 하고 싶니?

이모네 집으로 향하면서 문과가 좋을지, 이과가 좋을지 조언을 구했더니 윤지연 선생님은 적성에 맞는 쪽을 선

택하라는 취지로 말했다. 

- 선생님은 왜 이과로 가셨어요? 수학을 잘 하셨어요? 여자들은 보통 수학 싫어하던데?

- 후후. 그건 좀 편견 같은데? 수학을 잘 했던 건 아니고. 사실. 선생님은 인문계 안 나왔어.

- 예? 그럼 과학고 나오셨어요?

- 과학고? 아니. 난 공고 다녔어. 왜? 공고 나왔다니까 이상해?

- 아, 아니요. 그건 아니구요. 공고에 여자들도 가요?

사실은 이상했다. 상고도 아니고, 공고라니. 공고는 우락부락 거칠고 험한 남자들만 가는 학교라는 선입견

이 있다. 게다가 공고 졸업하고도 교사가 될 수 있다는 얘기는 금시초문이다. 동훈이는 얼른 표정을 고쳤다.

그러나, 윤지연 선생님은 이런 반응에 익숙한 듯하다. 낯빛이 그대로다.

- 많지는 않지. 나 다닌 학교도 여학생이 한 반이 안됐으니까.

- 공고엔 왜 가셨어요?

- 가고 싶었으니까!

지연의 대답은 단순했다. 동훈이는 여러가지 의문이 꼬리를 물었지만 교회에서 아파트까지의 거리가 너무 짧

았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탔을 때 지연이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 여러가지를 고려해서 진로를 결정해야겠지만, 혹시라도 친구따라 진로를 택하거나 그러면 안돼. 동훈이, 너

자신의 인생을 사는거야. 그걸 잊지 마.

명철이가 이과로 마음을 거의 굳힌 것 같아서 동훈이도 이과쪽에 솔깃해 있던 터라 지연의 충고에 뜨끔 놀랐다.

속마음을 쪽집게처럼 읽어내는 것을 신기해 하며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치는 선생님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지

연의 시선은 거울 속 그녀 자신을 똑바로 향하고 있었다. 눈이 마주칠까 싶어 가슴이 두근거리면서도 동훈이는 

지연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찬찬히 보니 지연의 시선은 거울 안 깊숙하고도 먼 곳을 향해 있는 것 같았다. 

"동훈아! 동훈아! 쟤, 쟤 좀 잡아!"

미숙이 은혜의 손목을 잡았다가 놓치자 동훈이에게 호들갑스럽게 소리친다. 은혜가 발구르는 소리를 내며 안

방으로 달아나고 있었다. 은혜가 안방으로 한 발 내딛으려는데 미숙이 웃옷자락을 붙들고 잡아당긴다. 스웨

터가 길게 늘어난다.

"언니! 옷 늘어나잖아. 손, 놔!"

"동훈아! 와서 니 엄마 좀 잡으라니까!"

동훈이는 느릿느릿 일어나 안방문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은혜의 팔을 잡았다. 미숙에게서는 기를 쓰고 도망

치던 은혜가 아들 동훈이에게는 선선히 잡혀준다. 그 틈을 타 미숙도 은혜의 남은 한쪽 팔을 잡았다. 미숙은 

은혜의 팔을 잡은 채 거실 소파로 끌고와 앉혔다. 동훈이도 멋모르고 따라간다. 결국 세 명이 나란히 소파에 

앉게 되었다.

"뭐 하신거에요, 둘이?"

"하유, 힘들어. 동훈이, 니 엄마가. 나중에 희동이 키우는거. 안 도와준다고 그러잖아. 자기가 얘기 좀

해줘. 나 혼자서는 못 키워. 힘들어."

동훈이는 엄마 은혜를 돌아보았다. 은혜도 미숙처럼 가쁜 숨을 고르고 있다. 붉게 상기됐던 얼굴색이 조금씩

차분해진다.

"날 왜 봐요? 애는 둘이 키워야지. 나는 상관없잖아요."

은혜가 동훈이에게 볼멘 소리로 항의했다. 맞는 말인 것 같아서 동훈이는 다시 아무 생각없이 미숙을 돌아보았

다. 미숙은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 장난이지만 은혜가 완강하게 구는 바람에 오기가 솟았다. 원하지 않았더

래도 친아들이 씨를 뿌려 생긴 아이가 아닌가. 일부러 불러서 해물탕까지 끓여내주는 은혜가 진심으로 거절하

는건 아니리라 믿긴 하지만 이왕 말이 나온 김에 확실한 언질을 받아두고 싶다.

"희동이 아빠. 자기도 알다시피 나는 직장이 있으니까 하루종일 희동이 보고 있을 순 없잖아. 자기가 어머니

한테 얘기 좀 해줘."

동훈이에 대한 미숙의 말투가 애매하다. '희동이 아빠'나, '자기'라는 호칭을 따르자면 '요'자를 붙여서 존대

해야 하는데 동훈이가 미숙에게 존대말을 계속하는 바람에 어색하지만 반말투로 일관할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마치 몇 십년의 부부생활로 나이차이는 묻히고 친구처럼 되어버린 남편을 대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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