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화 (19/30)

"어머니요?"

"응. 자기 어머니. 시어머니가 손주 돌봐주는건 당연한 거 아냐? 자기도 그렇게 생각하지?"

"언니! 그거는 며느리가 시부모를 한 집에서 모시고 살 때 얘기지."

"요즘은 그렇지도 않아. 학교에서 학부모 모임 가져보면 같이 안 사는 친할머니, 외할머니도 많이들 오신단 

말야."

"그 할머니 소리 좀 제발 하지마, 언니! 한번 들을 때마다 10년씩은 늙는거 같어."

"듣기 싫어도 미리 연습해 놓으렴. 나중에 우리 희동이한테 귀에 못이 박히게 듣게 될테니까. 

동훈이를 한쪽에 제껴두고 또 둘이서 티격태격 한다. 동훈이는 아빠가 된다는 것도 아직 실감이 나지 않는데

출산후의 육아문제에 대해서는 더더욱 생각해본 적이 없다. 어쨋거나 엄마 은혜는 가정주부니까 교사인 미숙

보다는 시간이 많이 나겠다 싶어 일단 미숙의 편을 들어준다.

"엄마. 엄마는 집에서 놀잖아. 엄마가 좀 도와줘."

"내가 놀긴 뭘 놀아요? 맨날 등골이 휘어져라 집안일 하는거 안 보여요?"

"엄마가 무슨 등골이 휘어? 꼿꼿하기만 하구만."

동훈이가 은혜의 등을 손바닥으로 쓸어보았다. 스웨터 밑으로 브래지어가 느껴졌다. 옴폭 패인 척추선이 손

끝에 느껴진 순간 은혜가 등을 비틀며 발끈 성을 낸다.

"하여간 남자들은 집안일을 우습게 안다니까. 지들은 집에서 손 하나 까딱 안하면서."

"엄마 말이 맞아, 희동이 아빠. 집에서 논다는 말은 좀 심했다. 집안일이 얼마나 고된데."

미숙이 은혜의 비위를 살살 맞춘다. 은혜는 그 속셈을 모르지 않는다. 미숙이 결국 아기를 지우지 않고 낳게

된다면 은혜는 별 수 없이 그 뒷감당을 해야할 것이다. 그러나, 호락호락하게 도와주겠다고 해버리면 은혜에

게 기댈 수 있다는 안도감 때문에 출산의 결심을 아주 굳히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미래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지금은 결심이 철석같아도 언제까지나 한결같지는 않을 거다. 

"엄마는 집안일만 하지만. 미숙이는 학교일도 하고, 집안일도 하고. 하는게 더 많잖아."

"희동이 아빠. 자기 어머니도 말씀을 저렇게 하시지만 나중에 도와주실거에요. 그렇지, 은혜야?"

동훈이가 '미숙이'라고 부르자마자 미숙이 존대말을 붙인다. 동훈이는 아까부터 미숙이 엄마 은혜에게 '어머니'

라고 부르는 것을 듣자니 느낌이 묘했다. 

"미숙아! 우리 엄마. 시어머니 삼기로 했어? 엄마! 미숙이. 엄마 며느리 된거야?"

동훈이의 물음이 자못 진지하다. 좀전까지 전혀 진지하지 않게 장난치던 두 여자는 말문이 그만 막혀버렸다.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눈동자만 또륵또륵 굴린다.

[시어머니는 무슨. 내가 은혜 얘보다 세 살이나 위인데.]

[며느리? 시어머니보다 늙은 며느리가 세상에 어딨어?]

"아까 부엌에서 하는 얘기 얼핏 들으니까. 시어머니가 어쩌고, 며느리가 저쩌고 하던데. 둘이 그러기로 한

거 아냐?"

"아니에요!"

"아니요!"

동훈이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은혜와 미숙이 이구동성으로 부인했다. 그러고나서는 인상을 구기며 서로 

마주 본다. 동훈이는 둘의 표정으로 상황을 대충 파악했다. 

[뭐야? 난 또. 둘이 그냥 장난친 거구나.]

따지고 보면 은혜가 시어머니뻘인 건 맞다. 물론 달리 따져보면 미숙은 조강지처, 엄마 은혜는 불륜상대 내지

는 세컨드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처가에 가면 처갓집 예법에 따르고 시댁에서는 시댁의 예법에 따르는 것

이다. 그래서 아니꼬와도 나이어린 처남을 '형님'이라 불러야 하고, 나이많은 늙은 시누이라 쟁그랍더라도 '아

가씨'라 부르는 수밖에 없다. 지금은 미숙이 은혜네 집에 와 있으니 은혜에게 호칭을 맞춰주는게 당연하다.

"아니긴? 듣기 좋은데 머. 미숙아, 계속 그렇게 부르지, 왜?"

"네? 어떻게요?"

"방금 니가 그랬잖아. 어머니라고. 그렇게 부르면 되겠네."

"싫어요. 둘이 정식으로 결혼한 사이도 아니면서. 그리고 언니가 나보다 세 살이나 더 많은데 어떻게 언니

한테 어머니 소리를 들어요, 내가?"

동훈이가 미숙에게 권유하는 말을 듣고 은혜가 질색하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띠동갑이니, 장인 장모와

나이차이가 몇 살밖에 나지 않느니 등등의 말은 들어봤어도 시어머니보다 나이많은 며느리가 있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다. 

[세 살이나.? 누가 그걸 모르나? 나이는 왜 걸고 넘어져? 지도 나랑 똑같이 마흔 줄이면서. 쳇.]

미숙은 은혜가 나이를 언급해서 기분이 나빴다. 동훈이와 관계를 가지기 전에도 은혜는 솔직하게 할 말은 하

는 편이었다. 그러나 내키는 대로 상대방 자존심 긁어가며 쏟아내지는 않았었다. 그런데 최근 들어 은혜는 미

숙의 속을 긁는 말을 곧잘 해댄다. 그 전에도 자잘한 다툼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동훈이가 끼어드는 바람에 원

만하기만 하던 미숙과 은혜 둘의 관계가 전과는 달리 모난 곳이 생겼다. 모난 곳에 닿으면 아릿하다.

"어머니. 국물 넘치는 거 같은데. 가스불 줄여야되지 않겠어요?"

"어? 어머! 정말!"

미숙의 말에 은혜가 깜빡 놀라며 주방으로 다다닥 달려갔다. 동훈이가 미숙에게 엄지손가락을 들어보이며 윙

크 한다. 잘한다는 격려다. 미숙은 일단 동훈이가 하라는 대로 시어머니 대접을 해줄 생각이다. 이 집은 어쨌

거나 은혜네 집이니까. 나중에 은혜를 미숙의 집으로 불러 되갚으면 된다. 그때는 해물탕이 아닌 다른 메뉴

가 될 가능성이 높지만 되로 받은 것을 말로 넉넉하게 되돌려주련다. 

- 세컨드 주제에. 첩년이 어디서. 

[좀 심한가?]

그 정도가 심하다 싶으면 지금 은혜에게 극진히 시어머니 대접을 해서 농도를 맞추면 될 일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말에는 말. 은혜가 돌아와 앉자, 미숙이 웃으며 사근사근 말했다. 

"어머니이~ 며느리 주시려고 해물탕도 손수 끓이시고. 이렇게 좋은 시어머니는 세상에 또 없을거에요."

"언니. 재미없어. 장난 그만 해."

"장난이라뇨, 어머니! 며느리가 어떻게 감히 시어머님께 장난을 쳐요? 저는 지금 진심으로 드리는 말씀이에

요!"

"어우, 닭살! 그만 하자니까, 언니!"

"야! 엄마! 넌 여자가 왜 그렇게 못됐냐? 좀 받아줘라! 받아주면 어디가 덧나냐?"

은혜는 머리가 어질어질 하다. 자기보다 나이많은 아줌마가 시어머니라고 살살 거리는 것도, 새파랗게 어린 

아들놈이 하늘같이 떠받들어도 모자랄 친엄마에게 반말질을 하는 것도, 모두 비정상이요, 미친 짓거리다. 그

러나 둘이 미쳤다면 은혜 자신은 정상인가? 아니다. 은혜도 아들 좆에 미친 년이다. 비정상적인 엄마다.

"정말, 사람 기분 이상하게. 뭘 어떻게 받아주라고요?"

"드라마 같은데 보면 나오잖아. 며느리가 잘 하면 시어머니가 덕담 한 마디쯤은 해줘야지."

[덕담 좋아하시네. 며느리가 어디 한 구석 귀엽고 사랑스러운 맛이 있어야 덕담을 해주던가 말던가 하지.]

드라마에서 며느리를 구박하는 시어머니의 마음을 이제야 알 것 같다. 미숙이 언니는 좋은 친구요, 친자매나

다름없다고 여길 만큼 가까운 사람이지만 며느리감으로는 전혀 눈에 차지 않는다. 나이가 어리길 해, 유부녀

에다가, 남의 애를 둘씩이나 낳았지, 게다가 은혜와는 연적이다. 

"오늘이 명절날도 아니고 갑자기 덕담은 무슨 덕담을 해요? 아유, 탕 끓네. 밥이나 차려야겠다."

"어머니! 제가 도와드릴게요."

은혜가 황급히 몸을 일으키자, 미숙도 따라 일어섰다. '어머니' 소리가 능숙하다. 거리끼는 기색이 전혀 없

다. 미숙은 학부모에게 늘상 써왔던 말투라 새삼 어색할 게 없는 셈이다. 학생집에 가정방문을 왔다고 생각하

면 그만이다.

"언니. 하지 말라니까. 언니가 자꾸 장단맞춰 주니까 동훈이가 더 그러잖아."

은혜가 미숙에게 불만스런 목소리로 속삭였다. 딴에는 작게 말한다고 했는데 그 소리가 동훈이에게 들리고 말

았다.

"야! 엄마! 너 씨발, 지금 뭐라고 했어?"

"아니요, 아니요! 도와줘서 고맙다구요!"

은혜가 화들짝 놀래서 손을 휘휘 내저으며 변명했다. 동훈이가 눈을 부라리며 노려보는데 분위기가 무지 험악

하다. 은혜는 미숙의 손을 잡고 주방으로 조르르 도망쳤다.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아멘."

지연은 성재의 작고 까만 두 손을 잡은 채 짧지 않았던 기도를 끝마쳤다. 방은 커튼때문에 어두운 편이었다. 

지연은 성재의 손을 놓고 일어나 커튼을 좌우로 열어젖히고 책상앞 의자에 앉았다.

"교회 빠지지 말고 나와야지."

"그 형이 때릴까봐 무서워서 못 나가겠어요."

"그 때 말고 또 만난 적 있니?"

"아니요."

성재가 지연의 얼굴을 올려다 보며 싱글벙글 웃는다. 함께 있으면 기분 좋은 사람. 동훈이형, 그리고 윤지연

선생님. 방안에 꽃화분이 놓인 것 같다. 화사하고 향긋한 꽃내음에 코가 시원하게 뚫리는 느낌이다.

"동훈이한테는? 얘기. 했니?"

"아니요."

"그래, 잘했다. 앞으로도 계속 우리 둘끼리만 비밀로 하는거야, 알지?"

"네."

"교회 나와. 동훈이랑 같이 나오면 되잖아."

"동훈이형이 그 형 이겨요?"

"친구 사이에 이기고 말고가 어딨어. 걱정마. 그 형도 교회에서는 시비걸고 그러진 않을테니까. 내가 동훈

이한테 얘기해줄까? 같이 나오라고?"

"네."

솔직히 성재는 교회에 나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윤지연 선생님은 학교에서 보면 된다. 교회에 나가도 윤지

연 선생님이 성재를 각별히 챙겨주지는 않는다. 교회에 나가서 오랜 시간 재미없는 설교 듣고, 잘 알지도 못하

는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고, 결정적으로 무서운 그 형과 마주치는게 괴롭다. 또래 아이들도 성재를 대하는게 

학교에서와 비교해 특별히 다르지 않다. 친구 사귀는건 어딜 가나 어렵다. 

"선생님. 점심 먹고 가실거에요?"

"아니. 할 일 있어서 금방 가봐야돼."

"점심 먹고 저랑 놀다 가시면 안되요?"

성재가 풀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학교 기술실에서 윤지연 선생님과 성경공부를 이틀 하다가 사흘 째 되는 날 

빠졌었다. 그런데 윤지연 선생님은 성재를 부르지 않았다. 나흘 째도, 닷새 째도. 부르면 가야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막상 선생님이 부르지 않으니 제 발로 찾아가기가 점점 힘들어졌다. 그러다가 성경공부는 흐지부지 

되어버리고 말았다. 다른 선생님들과 달리 윤지연 선생님은 성재를 예뻐해준다고 생각해서 기뻤었다. 그 형

과의 일도 있어서 한결 더 친근해졌다고 생각했었다. 

"선생님도 그러고 싶은데. 오늘은 정말 일이 있어서 안돼. 미안해, 성재야. 내일 학교에서 보면 되잖아."

성재는 선생님이 성경공부를 다시 시작하자고 얘기해주시기를 기대했다. 성재가 먼저 나서서 얘기하면 되지만

그러기는 싫다. 성경공부는 재미없기 때문이다. 단지, 윤지연 선생님과 함께 있을 수 있는게 좋을 뿐이다. 

성경공부 말고 다른 것을 하고 싶다.

"내일 기술 안 들었는데."

"선생님 보고 싶으면 기술실로 놀러오면 되잖아. 놀러와. 선생님이 빵 사줄께."

지연이 성재의 옆으로 다가와 앉으며 뒷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성경공부 다시 시작하자는 말은 끝내 없다. 

약간 실망이다. 그래도 빵 사줄테니 놀러오라는 말을 들은 건 기분 좋았다.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부드러운 손

길이 가슴을 두근거리게 한다. 성재는 고개를 돌려 윤지연 선생님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갸름한 턱선과 깨끗한 피부. 

[와. 눈 되게 크다.]

눈이 크면 겁도 많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난다. 그러나, 윤지연 선생님은 예외인 것 같다. 그 무서운 형에

게 손목을 잡혀 끌려가면서도 선생님의 얼굴은 약간 굳어 있기만 했을 뿐 두려움 따위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성재는 처음만큼 확신하지는 못하지만 윤지연 선생님이 자기를 다른 학생들과 달리 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었다. 그러니 이렇게 찾아와 주고 머리까지 쓰다듬어 주는 것이리라. 선생님과 자기처럼 가까운 학생은 없을 

것 같다. 학교에 가서 친구들에게 마구 자랑하고 싶다. 물론 들어줄 친구는 없다.

"아유, 점심 금방 되는데."

"죄송해요, 성재 어머니. 다음에 또 올테니까 그때 맛있는거 많이 해주세요. 성재야, 학교에서 보자."

"안녕히 가세요."

은선이 아무리 붙잡고 애원해도 지연은 구두를 신고 현관문에 서서 요지부동이다. 은선은 지연을 주저앉히려

는 마음에 뺏어들고 있던 핸드백을 할 수없이 넘겨주고 말았다. 상대가 선생님이 아니었으면 신발을 감춰서라

도 잡았을 것이다. 

"가보겠습니다."

"아유, 어쩌나. 그냥 가시면 안되는데. 아유, 아유."

은선은 지연을 따라 엘리베이터에 올라타서 1층으로 함께 내려가 아파트 입구까지 배웅했다. 마지막 인사를 

나눌 때까지 지연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걸음이 바쁜 것 같아서 물어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젊은 나이

에도 불구하고 진중한 성격을 가진 듯하다. 

"조심해 가세요, 선생님. 더 안 나갈께요."

귀찮아할 것 같아서 더 멀리 배웅하지 않고 은선은 돌아섰다. 얘기를 마치고 나온 아들 성재의 얼굴빛이 환한

것을 보고 한시름 덜었구나 싶었는데, 윤지연 선생이 아무런 언질도 주지 않으니 궁금증이 전보다 더 커졌다. 

어쩌면 성재는 윤지연 선생님에게도 속마음을 털어놓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래서 윤지연 선생도 은선에게 해

줄 말이 없는건지 모른다.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필 정도로 좋아하는 여선생님에게도 털어놓지 않는 일이라면 예상보다 훨씬 더 심각한 

일이 아들에게 벌어지고 있는게 아닐까? 역시 동훈이에게 말해보는게 더 나았을까? 성재가 아빠, 엄마와는 

비교도 안되게 좋아하고 따르는 유일한 사람이 동훈이다. 동훈이에게만은 비밀을 털어놓겠지 싶다. 만약에 

동훈이 앞에서조차 입을 다물어 버린다면 더는 방법이 없다.

은선은 일단 아들 성재의 행동거지를 며칠 더 지켜볼 작정이다. 그래서 또 이상한 모습이 보이면 윤지연 선생

님께 학교로 직접 찾아가보는 거다. 그래도 해결책이 안나오면 최후로 동훈이에게 손을 내미는 수밖에. 제발

이지 그럴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성재야. 성재야. 너는 애가 누굴 닮아서 이렇게 엄마 속을 썩이니.]

은선은 언니 은혜네 아파트 동을 올려다 보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형부는 오늘 출근하고 집에 없을 것이다. 

형부가 없는 집안에서 언니 은혜와 조카 동훈이는 어제 콘도에서처럼 알몸뚱이로 엉겨붙어 음란한 신음소리를 

내고 있겠지. 

철이 들어가면서 점점 멀게만 느껴지던 언니 은혜다. 여태 데면데면 거리를 두고 살아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그

렇게 살면 그 뿐이다. 단지, 남부끄럽게만 안했으면 좋겠다. 은선이나 성재와 영재가 누구 동생, 누구 조카라

고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받는 일만 생기지 않는다면 집에서 둘이 무슨 짓을 하건 상관하기 싫다. 

[미숙이 언니는 정말. 아는거야, 모르는거야?]

먼발치에서 지켜봐온 바에 따르면 미숙이 언니는 언니 은혜에 비해 무척이나 반듯한 여자다. 어쩌다 은혜 언니

와 어울리게 됐는지 이상하게 생각될 정도로 둘은 많이 다르다. 부부가 닮는다는 말이 있듯이 성격이 전혀 다

른 사람이더라도 오래도록 가까이 지내다보면 상대방을 닮는다고 한다. 먹을 가까이 하면 검게 물든다는 말처

럼, 미숙이 언니도 언니 은혜에게서 주홍물이 옮았을까?

혹시 모르니 미숙이 언니를 멀리해야 겠다. 집에서의 몸가짐에도 각별히 신경써야 겠다.

은선은 언니 은혜와 한 핏줄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만 싶다.

[난 아냐. 난 언니랑은 달라!]

반 분위기에 적응하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중학교 동창이거나 같은 교회 교인이어서 알음알음 알 

고 지내던 얼굴들이 많은 편이어서 친하게 어울리는 급우가 금새 여러 명 생겼다. 점심식사를 같이 하고 나서 

팀을 만들어 농구게임을 즐기는 대여섯 명의 친구들이 그중에서도 가장 가까워졌다. 같은 반이 되지 못한 명철

이도 자주 한 팀이 되어 게임을 뛰었다. 워낙 농구실력이 좋아서 명철이가 끼는 것을 반대하는 친구는 없다.

"야, 패스, 패스! 이쪽, 이쪽 좀 봐! 야!"

"하나! 하나 남았어! 하나만 더 넣자!"

명철이와 함께 뛴 게임은 져본 기억이 없다. 명철이는 플레이가 지능적이다. 교묘한 반칙성 플레이에 능하다.

반칙을 해놓고도 항의하는 상대방을 큰 덩치로 위압하곤 한다. 상대팀이 너무 약하다 싶으면 노골적으로 약을 

올리기도 한다. 같은 편인게 다행인 녀석이다. 

오늘도 다른 반 아이들을 큰 점수 차이로 이겼다. 점심 종이 울리기 몇 분 전, 아이들은 교실로, 매점으로, 화

장실로 각기 흩어진다. 동훈이는 농구공을 퉁퉁 튕기며 명철이와 교실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너, 아직 여친 안 생겼냐? 내가 하나 분양해주랴?"

"자식. 여자친구가 무슨 아파트냐? 분양을 하게? 그리고, 씨발아. 니가 건드린 애를 내가 왜 사귀냐?"

"새끼. 누가 너보고 사귀래? 심심할 때 데리고 놀라는거지. 야, 생각있으면 언제든지 말해. 이 형님이 깔

삼한 애루다 하나 구해줄테니까."

"부모님이 너 그러고 다니는거 아시냐?"

"당연히 모르시지, 임마. 나 간다. 이따 또 보자."

"나 오늘 수업끝나고 어디 가봐야 된다."

"그래? 그럼 내일 보자."

"그래, 잘 가라."

수업종소리를 듣고 동훈이는 중앙복도에서 명철이와 갈라졌다. 중학교 시절 둘도 없이 가장 친한 친구였었다.

고등학교 올라와서는 중학교 때보다 거리가 조금 멀어진 느낌이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어깨를 나란히 하고 달

렸었는데 지금 명철이의 어깨는 동훈이의 어깨와 나란하지 않다. 명철이가 앞서 가나 싶을 때가 종종 있다. 

- .이 켜졌습니다. 건너가도 좋습니다. 건너가도.

미숙은 정지선에 차를 멈춰 세우고 사람들이 횡단보도를 모두 건널 때까지 기다렸다. 병원으로 향하는 길에는 

통행량이 거의 없다. 반대차선은 퇴근시간을 앞두고 벌써부터 막히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진찰을 마치고 돌

아올 일이 걱정이다.

"선생님. 저는 진찰실 안에 못 들어가는거죠?"

"같이 들어가. 간호사한테 내가 말해볼께. 아마 될거야. 병원에서는 엄마라고 부르는거, 알지?"

미숙은 동훈이를 데리고 산부인과에 정기진찰을 받으러 가는 중이다. 한번은 꼭 같이 가보고 싶었다. 동훈이

가 같이 가자고 먼저 얘기를 꺼내주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미숙은 기다리지 못했다. 은혜에게도 양해를 구해

놓고 조퇴를 신청하여 1시간 일찍 퇴근하고 나와 고등학교 근처에서 동훈이를 픽업했다.

"여자들만 있을텐데. 제가 가도 진짜 괜찮을까요? 이상하게 보지 않을까요?"

"괜찮아. 긴장 풀어. 얼굴이 굳었다. 좀 웃어."

미숙이 오른 손으로 동훈이의 오른 쪽 볼따구를 주욱 잡아 당겼다. 피부가 두껍고 탄력이 좋다. 얇디 얇고 힘

없이 늘어나는 미숙의 볼살과는 정반대다. 동훈이가 볼이 잡힌 채로 억지로 웃어보였다. 미숙도 마주 웃어주

고 볼을 놔준다. 

"김미숙님, 들어오세요."

"저기, 우리 아들이랑 같이."

"네, 같이 들어오세요."

미숙은 주눅이 들어서 주춤주춤 걸음을 옮기지 못하는 동훈이를 진찰실안으로 힘주어 떠민다. 미숙은 책상앞 

의자에 앉고, 동훈이는 옆에 섰다. 담당의사가 동훈이에게 잠시잠깐 시선을 주었다가 진료기록쪽으로 거두어

간다. 동훈이는 의사의 무관심이 고맙다. 그런데 의사 발치에 서서 뚫어져라 바라보는 간호사의 시선은 영 부

담스럽다.

"저 쪽으로 가서 누워보세요."

"이쪽으로 오세요."

- 촤르륵.

미숙이 간호사의 인도를 받아 진찰대에 눕고 커튼이 쳐졌다. 커튼 너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전혀 알 수 

없다. 자잘한 소리와 고요가 짧게 교차한 후 다시 커튼이 걷어졌을 때에는 미숙이 단정한 모습으로 진찰대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미숙은 책상앞으로 와서 의자에 다시 앉는다.

"지금까지 경과는 아주 정상적이에요. 영양제 잘 드시고 계시죠? 네, 그럼, 다음에. 아드님이 참 얌전하세

요. 듬직한 아들 두셔서 좋으시겠네."

"수고하셨습니다, 선생님."

동훈이도 미숙을 따라 의사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문을 닫고 나오는데 퍽이나 싱겁다는 생각이 든다. 

"엄마, 이게 다야? 뭐가 이렇게 간단해?"

"몸에 아무 이상이 없으니까 간단히 끝난거야. 왜? 시시해?"

"응. 괜히 떨었네."

"시시한거 같아도 하나하나 다 중요한 과정이야. 너두 이런 보살핌을 받아서 건강하게 태어난거구."

"그럼, 이제 집에 가는거야? 와. 20분밖에 안 지났네. 난 한참 걸리는 줄 알았는데."

"그냥 가기 아쉬워? 그럼 엄마가 좋은 구경 시켜줄까?"

"무슨 구경?"

"후후. 미리 얘기해주면 재미없지."

미숙이 동훈이의 손을 잡고 한적한 구석 쪽을 향해 또각또각 걷는다. 의사에게 동훈이는 아들이 아니라 아이의 

아빠라고 당당하게 소개하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가 가슴 아팠다. 병원에서는 동생이 되고, 병원을 나서면 남

남이 되며, 아무도 없는 곳에서만 동훈이를 아빠로 부를 수 있는 복잡한 현실을 희동이가 견뎌낼 수 있을지 걱

정이다.

"수유실? 엄마! 여긴."

"쉿! 넌 입 다물고 눈요기나 실컷 해."

미숙이 동훈이를 데려간 곳은 모유수유실이었다. 휴게실처럼 꾸며진 좁은 공간은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엄마

들로 가득차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농밀한 젖내음이 얼굴로 후욱 달려든다. 미숙은 동훈이의 손을 잡

고 여자들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며 누군가를 애타게 찾는 시늉을 했다. 

"저기요. 키가 요만한 여자아이 혹시 못 보셨어요?"

"여자애요? 못 봤는데요?"

냉큼 가슴을 가리는 여자도 있었지만 나머지 대부분은 갑자기 등장한 미숙과 동훈이를 무심한 눈으로 멀뚱멀뚱 

올려다볼 뿐이다. 미숙의 연기를 진짜로 알고 엉터리로 설명하는 인상착의를 진지하게 듣는 사람도 눈에 띈다.

동훈이는 미숙의 등뒤에 서서 수유실안을 휘휘 둘러보았다. 제일 먼저 가슴을 가렸던 여자가 동훈이를 매섭게 

째려봤지만 다시 볼 일 없으려니 하고 무시했다. 

여자들의 얼굴은 화장기가 없어서 푸석푸석해 보이고 대체로 부어 있었다. 그리고 하나같이 젖가슴이 풍만하

게 육덕져 보였다. 들어설 때 놀랬던 마음이 차츰 진정되어가면서 여자들의 젖가슴이 더욱 또렷하게 눈에 들어

온다. 납작 가슴이 한 명도 없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모두가 글래머다. 글래머인 엄마의 하얀 젖가슴을 

바알간 아기들이 맛나게 빨아대고 있다. 

"여긴 없나보네. 얘가 어디 갔지?"

미숙은 괜히 소파 밑을 두리번거리며 여자들을 한번 더 귀찮게 한 다음에야 동훈이와 함께 모유수유실 밖으로 

나왔다. 둘은 웃음을 참느라 쿡쿡거리면서 주차장으로 바삐 걸었다. 그리고 차안에서 비로소 웃음을 터뜨렸다.

"오호호호. 내 덕분에 구경 잘 했지?"

"아하하하. 네. 덕분에 잘 봤어요."

"기분이 어때? 다른 여자 벗은 가슴 보니까 흥분돼?"

"아니요. 별루요. 젖가슴보다는. 애기들이 더 귀여운데요. 저 때는 다 저렇게 빨개요?"

"응. 사람꼴이 안 나지? 갓 태어난 거 보면 놀랄걸? 얼마나 쭈글쭈글 못 생긴 애기가 많은데."

"나도 그렇게 쭈글쭈글 했어요?"

"아니. 자기는 통통하고 토실토실했어. 너무너무 예뻤지. 어쩌면 내가 그때부터 자기한테 반했는지도 몰라."

"에이."

동훈이가 농담으로 받아치려다가 만다. 미숙의 애틋한 눈동자가 서서히 다가왔기 때문이다. 미숙의 눈동자가 

닫히는걸 본 순간 입술에 촉촉한 것이 와닿았다. 미숙의 입술은 잠깐동안만 머물렀다. 노상 주차장이라 그 이

상은 힘들다.

"이건 희동이가 아빠한테 주는 뽀뽀. 같이 와줘서 고맙대, 희동이가."

"은선아, 은선아! 너는 왜 사람을 보고도 아는 체를 안하니?"

은선은 언니 은혜에게 따라잡혀 마지못해 발걸음을 멈췄다. 좁은 시장길이라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방해가 안

되도록 한쪽으로 비켜선다. 은혜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지만 입가에는 웃음이 서글서글하다. 걱정이나 고민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얼굴이다. 

[내가 잘못봤나.]

친아들과 근친상간에 빠진 여자가 이토록 천연덕스러운 얼굴을 하고 돌아다닐 수 있을까? 그러나, 그 날의 광

경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누가 봐도 둘은 연인같아 보였다. 팔짱낀 동훈이의 팔에 가슴을 기대며 눈웃음

을 살살치던 언니 은혜의 모습이 낯설지 않다. 신혼시절 형부에게 그랬다. 그리고, 형부와 결혼하기전에도 많

은 남자들이 언니 은혜의 눈웃음을 받았었다. 

"못 봤어, 언니. 저녁 찬거리 사러 나왔어?"

"응. 너는 뭐 샀니?"

"버섯이랑 피망만 좀 샀어. 어디, 언니는? 고기 샀어? 저녁에 구워먹게?"

"저녁에도 먹고. 장조림 할려고. 동훈이가 요며칠 자꾸 반찬투정을 해대서. 집에 가는 길이지? 같이 가자."

"동훈이. 공부 열심히 해?"

"열심히 하겠지 머. 성적표나 나와 봐야 열심히 했구나, 안했구나 알지."

시장을 벗어나 집으로 천천히 걸어가는데 은혜의 말투가 태평하기 그지 없다. 은선이라면 이처럼 한가하게 말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순간부터 대학을 향한 입시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자식은 

병사, 엄마는 지휘관이다. 자식이 한시도 헛되이 놀지 않고 공부에 매진하도록 엄마는 늘 감시의 눈을 번뜩이

고 있어야 한다.

[흥. 동훈이가 열심히 공부하면 자기는 심심하다 이거겠지.]

"성재는? 친구 좀 생겼니?"

"모르겠어."

"걔도 큰 일이다 참. 학원을 보내보지 그러니? 요새 애들은 학원에서 친구 만든다고 하던데."

"생각 중이야."

이미 몇 군데 알아두었다. 시간표도 다 짰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빠듯하다. 공부에 대한 열의를 보여주

지 않아서 은선의 애를 태우는 아들 성재이지만, 학원에 살다시피 하다보면 한 귀로 흘려듣고 말더라도 머리속

에 남는게 없지는 않을 것이다. 자기 방에만 틀어박혀서 멍하니 허송세월하고 있는 꼴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 

"성재가 영재 반만 닮아도 좋을텐데. 둘이는 같이 잘 노니?"

"잘 놀지, 형젠데."

둘째 영재는 걷을 수 있을 때부터 형인 성재의 뒤를 아장아장 열심히도 따라다녔다. 아주 손놓고 다른 일을 하

진 못해도 둘이 같이 놀고 있으면 안심이 됐었다. 그런데 친구들과 노는 재미가 더 좋은지 요즘은 형 곁에 거의 

가지 않는다.

"형젠데도 어쩜 둘이 그렇게 딴판으로 생겼나 몰라. 큰 애는 아빠랑 똑같고, 둘째는 엄마만 닮고." 

"왜, 언니? 영재도 지 아빠 닮았다는 소리 많이 들어."

"그러니? 이상하다. 내가 보기엔 전혀 안 그런데."

은선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둘째가 엄마만 닮았다는 말이 예사로 들리지 않는다. 은선은 언니 은혜의 눈

치를 살펴보았다. 다행히 진지한 표정은 아니다. 지나가는 말로 툭 던져본 것 같다. 더 깊이 생각하기 전에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 아파트 입구에 멈춰 서서 은선은 초조해진다. 다른 화제로 언니 은혜의 신경

을 돌려놓기만 하고 바로 안녕하고 싶다. 아들하고 붙어먹는 더러운 엄마하고는 오래 어울리기 싫다.

"언니, 언니! 윤지연 선생님 있잖아. 중학교 기술 선생."

"어? 어어. 그 선생? 그 선생이 왜?"

"학교로 한번 찾아갈까 하는데. 봉투에 얼마를 넣는게 좋을까? 언니때는 보통 얼마 했어?"

"난 촌지에 촌자도 모른다, 얘. 촌지를 왜 주니? 그냥 박카스나 한 상자 사들고 가."

"그러지 말고 좀 가르쳐줘. 촌지 안줘본 엄마가 대한민국에 어딨다고."

"정말이야. 동훈이한테 물어봐. 학교도 딱 두 번인가 밖에 안가봤다, 얘. 그것도 졸업식 때 간 거까지 해서 

두 번이야."

"어쩜, 언니는. 어떻게 그렇게 아들일에 무심할 수가 있냐? 동훈이가 섭섭했겠다."

"내가 왜 무심해? 중학교 3년 다니는 동안 지각 한번 안 시켰어. 동훈이가 선발고사는 또 얼마나 잘 봤는데?"

- 빵빵! 빵빵!

은혜가 은선이에게 한참 핏대를 세우고 있는데 자동차 한 대가 경적을 울리며 둘 사이를 가르고 들어왔다. 둘

은 뒷걸음 치면서 위험하게 차를 모는 이 못된 운전자가 누굴까 싶어 운전석쪽을 주시한다. 그런데 운전석에서 

손을 흔드는 여자는 다름아닌 미숙이다. 조수석에서는 동훈이가 손을 흔든다. 은혜와 은선은 운전석 쪽으로 

다가갔다.

"언니!"

"잘 지내셨어요, 언니?"

"자매가 길 한가운데 서서 무슨 얘기가 그렇게 재밌어?"

"별 얘기 안 했어, 언니. 동훈아. 너, 양반되긴 글렀다. 한참 니 흉보고 있었는데."

은혜가 아들 동훈이를 보고 농담을 던졌다. 동훈이는 해사하게 웃기만 한다. 은선은 조카 동훈이와 눈이 마주 

쳤지만 외면해버리고 미숙에게만 시선을 준다. 동훈이가 뒷자리에서 가방을 챙겨들고 밖으로 나왔다. 미숙은 

은선을 보며 말했다.

"오다가 보니까 혼자 걸어가길래 태워왔어."

"언니. 온 김에 우리 집에서 저녁 먹구 가. 언니가 먹을 복이 있나보다. 고기 사가지고 오는 길인데."

동훈이 태우고 온 얘기를 왜 엄마도 아닌 자기를 보며 얘기할까 은선이 의아해 하는데 은혜가 중간에 끼어든다.

교복차림으로 가방을 멘 동훈이가 은혜의 옆으로 와서 장봐온 비닐봉지를 넘겨받든다. 은혜는 동훈이의 한 팔

에 팔짱을 끼고 생글생글 눈웃음친다.

"오늘은 그냥 갈께. 수업준비도 해야되고. 할일이 많아. 은선아, 또 보자. 동훈아, 선생님 간다."

"네, 선생님. 안녕히 가세요."

"또 뵈요, 언니."

미숙의 시선은 은혜와 은선을 거쳐서 동훈이를 향했다. 동훈이가 들고 있던 비닐봉지를 은혜가 팔짱 낀 쪽의 

손으로 옮겨잡고 미숙을 향해 손 흔들어 인사했다. 은혜와 동훈이, 그리고 미숙을 둘러싸고 따스한 기류가 흐

른다. 세 사람에게만 우산이 씌워져 있는 것 같다. 외톨이가 된 느낌이다. 

"나도 갈께, 언니."

은선은 미숙의 차가 멀어지는 것을 보다가 은혜에게만 인사하고 돌아섰다. 동훈이와 시선이 엉기는 것은 피한

다. 늘 만만하던 조카 동훈이였는데 며칠 새 더 자랐는지 올려다보는게 부담스럽다.

"언제 오나, 언제 오나 했는데. 봄은 봄이다."

"그치, 언니. 우리 아파트에도 벚꽃이 활짝 피었더라. 4월달 되니까 어떻게 날씨가 확 바뀌네."

미숙과 은혜, 두 아줌마는 예전의 평범했던 시절을 완전히 회복했다. 주말에 넷이서 외식도 몇 차례 가졌고, 

틈만 나면 전화해서 수다떨던 습관도 되살아났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봄날씨처럼 평온한 하루하루가 이어진

다. 안정되고 조용한 날이 이어지다보니 문득문득 무료할 때도 있다. 

"이번 주 토요일에도 또 우리끼리 뭉치는거니?"

"그러자. 이번 주는 뭐 먹으러 갈까, 언니?"

"날씨 보고. 날씨 좋으면 차가지고 나가고. 날씨 안 좋으면 가까운데 가자. 아니면 집에서 먹던가."

"일기예보 보니까 주말에 비온다고 하는 것 같던데?"

"그래? 그럼 니가 동훈이 데리고 우리 집으로 와라. 간만에 파전이나 부쳐먹자."

"뭐 넣고? 내가 굴 좀 사갈까?"

"굴? 굴전 해먹자고? 글쎄다. 그걸 내가 먹을 수 있을까 모르겠네. 암튼 미안하지만 재료는 니가 좀 준비해

줘. 밀가루랑 부추는 집에 있으니까 니가 넣고 싶은 걸로 사와."

"알았어, 언니. 내가 알아서 할께."

은혜는 은선이에게 미안하다. 코앞에 사는 친동생을 챙겨주지 못한다. 미숙이 언니가 불편해 한다는 핑계로 

이렇게 은선이네를 따돌리는 일이 잦다. 은선이의 태도에도 문제가 있다. 은선이가 적극적으로 자리를 주선

하고 찾아다니고 하면서 친분을 쌓을 생각을 해야하는데 그러지 않는다. 동네 돌아가는 사정에 대해 물어볼게 

많을 법한데 친언니인 은혜에게 전화도 거의 하지 않고, 찾아오지도 않는다. 그래서 미안하면서도 괘씸하다.

"동훈이는 자니?"

"아니. 시간이 몇 신데 벌써 자? 지 방에 있어. 왜? 바꿔줘?"

"됐어. 아까 초저녁에 통화했어. 어떻게. 저녁에 재미 좀 봤니?"

"어어, 재미는 무슨. 오늘은 간단히 끝냈어. 쟤, 내일 쪽지 시험 있대."

"정말 간단히 하고 말았어? 그래도 박기는 박았을거 아냐?"

"저녁먹고 방에서 얌전히 책보고 있길래 빨아주기만 할려고 들어갔는데. 동훈이 쟤가 한사코 박겠다잖아."

"그래서? 동훈이 방에서 했어?"

"응, 언니. 저녁에는 동훈이 방이 제일 맘 편해."

"하긴 그렇겠다. 거실은 밖에서 보이고. 안방은 빨리 치워야 하니까. 많이 싸디?"

"모르겠어, 많이 쌌는지. 오늘은 보지안에다 쌌거든."

"오늘은 너보고 뭐라고 하든? 전에 한번은 손님받고 왔냐고 하더라며?"

"아이 참. 내가 괜히 그 얘길 해가지구. 언닌 말만 나왔다 하면 그 얘기네."

"재밌어서 그래. 어떻게 그런 생각을 다한다니, 큭큭. 동훈이 하여튼 알아줘야 해."

"누가 아니래. 내 속으로 나은 자식이지만 기가 찰 때가 많다니깐."

"그게 다 인터넷 탓이야. 동훈이도 야동 많이 보지?"

"나도 얼마전에 알았는데, 언니. 저 녀석이 나 몰래 틈틈이 보긴 보나 보더라구. 언젠가 내가 과일 깎아서 방

으로 들여가는데, 글쎄."

"보고 있디?"

"어어! 그냥 보고만 있었으면 내가 말을 안해. 글쎄, 이 녀석이. 자지를 꺼내서 막 흔들고 있지 뭐야."

"어머나. 자위하다 들켰구나. 창피했겠다, 동훈이."

"으응. 얼굴이 아주 빨개지데. 난 또 얼마나 놀랐게? 그때 동훈이 아버지도 거실에서 TV보고 있었거든."

"어머, 어머. 아저씨도 계신데 방에서 자위를 하고 있었어. 어떻게 그러니?"

"그러니까, 내 말이. 이 자식이 간이 배밖으로 나와도 분수가 있지 말이야."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했는데? 한 소리 해줬니?"

"지 아빠한테 다 들릴텐데 그 자리에서 뭐라고 하기가 좀 그렇더라고. 그래서 머리에 꿀밤만 몇 대 쥐어박고 

말았지."

"그리고? 그게 다야? 그게 끝이야?"

"어. 왜?"

"뒷얘기 없어? 니가 자지를 빨아줬다거나. 남자들은 일단 한번 세우면 못 참잖아. 좆물을 싸야지."

"어유, 언니두? 동훈이 아빠 있었다니까? 동훈이 아빠도 있는데 어떻게 걔 자지를 빨아줘?"

"에이, 아저씨 계셔도 몰래몰래 빨아주고 보지대주고 그런다던데 머. 동훈이한테 다 들었어."

"동훈이가 그래? 하여간 이 자식은 남자새끼가 입이 가벼워 가지고. 그 날은 안 빨아줬어. 정말이야, 언니."

"흐흠. 동훈이 얘기를 한번 들어봐야 겠는걸."

"아유, 정말 내가 못 살아. 내가 졌어, 언니. 인정해, 인정. 빨아줬어, 빨아줬다구. 됐어?"

"그러게 금방 들통날 거짓말을 왜 해? 나라도 빨아줬겠구만. 스릴 만점이었겠다?"

"스릴은 무슨. 자식이 자지를 있는대로 깊이 쑤셔넣는 바람에 토나오는 거 참느라고 혼났어."

"호호호. 고생 많이 했구나?"

"고생 정도가 아니야, 언니. 알고 보니까 자식이 아주 이상한 걸 보고 있었더라고."

"왜? 뭐가 얼마나 이상하길래?"

"자식이 한참 자지를 빠는데 내 뺨을 손바닥으로 툭툭 치는거야."

"나한테도 며칠전에 그러더라?"

"언니한테? 동훈이, 언니 집에 갔었어?"

"아니. 우리 집은 아니고. 차 안에서 내가 좀 빨아줬거든."

"그랬어? 그럼 동훈이가 언니 얼굴에 침도 뱉었겠네?"

"침? 동훈이가 얼굴에 침을 뱉었어? 그럴 리가? 그럴 애가 아니잖아."

"뭐야, 그럼. 내 얼굴에만 침 뱉은거네? 동훈이 이 자식, 죽었어. 엄마 얼굴에만 침을 뱉었다, 이거지."

"정말이구나? 침 뱉었다는거. 어어? 동훈이가 왜 그랬을까?"

"내가 나중에 막 뭐라고 뭐라고 했더니. 야동보고 따라해본 거라지 뭐야. 지도 꼭 한번 해보고 싶었대나."

"저런, 쯧쯧. 그렇게 해보고 싶었으면 나한테 얘기하지. 아들이 엄마 얼굴에 침 뱉는건 좀 심했다."

"동훈이 쟤가 날 아주 물로 봐. 존대말로 살살 떠받들어주니깐 아주 눈에 뵈는게 없다니까. 어떡하면 좋아, 

언니. 내가 계속 이렇게 살아야돼?"

"잘 타이르지 그랬니?"

"내가 차근차근 얘기 했지. 야동은 야동이다. 여자를 배려해야지, 이렇게 일방적으로 학대하고 모욕하면 못 

쓴다. 여자에게 먼저 얘기해서 양해를 얻어라."

"얘기 잘 했네. 알아듣지?"

"고개는 끄덕끄덕 하는데. 영 불만인 눈치더라구."

"불만스럽기도 하겠지. 은혜야, 다음부턴 그런 일 있으면 그냥 넘기지 말고 나한테 꼭 얘기해."

"어쩌려구?"

"한창 호기심많고 왕성할 나이인데 참고 누르기만 하면 안 좋잖아. 니가 못하는거 내가 대신 받아줄려구."

"언니, 뭐야. 나만 악역 맡으라고? 언니만 동훈이한테 점수 따게?"

"그게 아니라. 니가 못하는건 내가 하고, 내가 못하는건 니가 해서 서로 보완하자는거지. 그래야 동훈이가 

한눈을 안 팔 것 아니니."

"정말 그 생각밖에 없어?"

"아유, 이젠 좀 믿어라, 믿어. 우리 둘이 서로 믿고 의지하면서 좀 살자. 너나 나나 동훈이만 바라보고 사는 똑

같은 신센데."

"알았어, 언니. 믿어, 믿어. 동훈이는 못 믿어도 내가 우리 미숙이 언니는 이제 확실히 믿지."

"잠깐. 은혜야, 무슨 소리 들린다? 누가 부르는거 아니니?"

"어? 아. 동훈이가 부르네. 잠깐만 언니. 저, 여기 있어요. 저, 안방에 있어요, 오빠!"

미숙은 수화기 너머로 은혜가 소리쳐 동훈이를 부르는 것을 들었다. 아들 동훈이를 향해 엄마인 은혜가 오빠라

고부른다. 들을 때마다 기분이 묘하다. 미숙도 아들뻘인 동훈이에게 아빠라고 부르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

나 매번 희동이 아빠라고 하기 번거로와서 간략히 줄인 호칭에 불과하다. 감은 멀지만 수화기를 통해 은혜와 

동훈이의 대화 소리가 들려온다.

"오빠. 저는 왜 찾아요?"

"누구야? 미숙이? 아아. 출출해서. 집에 뭐 먹을 거 없어?"

"라면 끓여줄까요?"

"은혜야, 라면은 몸에 해로와. 다른거 해줘."

미숙이 전화기에 대고 말했다. 그러나 은혜는 듣지 못했는지 아무런 대답이 없다. 다행히 라면 대신 다른 것

을 찾는 동훈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라면 말고. 치킨 시켜 먹으면 안돼?"

"한 마리 혼자 다 먹을 수 있어요?"

"엄마, 넌 안 먹어?"

"밤에 뭐 먹고 자면 얼굴 부어서 싫어요, 난. 오빠나 먹어요."

"그럼 치킨 시켜줘. 근데 둘이 무슨 얘기 하고 있었어."

"그냥 이런저런 얘기 하고 있었어요. 오빠. 이번주 토요일에 미숙이 언니네 같이 가요."

"미숙이네? 토요일 언제?"

"점심때요."

"알았어. 빨리 시켜줘, 엄마. 배고파."

"알았어요. 통화 빨리 끝내고 시켜줄께요. 언니? 아직 있지?"

미숙도 덩달아 허기가 느껴진다. 이럴 때가 제일 괴롭다. 은혜네 집이 엎어지면 코가 닿는 옆집이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본다. 희진이를 재워놓고 혼자 거실에 나와 있으면 사람사는 집 같지 않고 적막하기만 하다. 

"응. 듣고 있어."

"우리 동훈이가 치킨 먹고싶다네. 전화 끊어야겠다. 미안, 언니. 얘기가 한참 재미있어지는데 중간에 끊어서."

"그래. 나중에 또 얘기하지 머. 잘 자. 끊어."

"잘 자, 언니."

제사에 손을 보태기 위해 시댁에 갔다 온 뒤로 며칠간 은선은 신경이 곤두서서 지냈다. 시어머니 눈치보며 늦

도록 힘들게 일하고 불편한 잠자리에서 한데 잠을 잔 데다가 꼴도 보기 싫은 시누이들에게 억지 웃음을 지어보

이느라 입이 돌아가지 않은게 이상할 정도로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고 왔다.

"영재야, 옷에 이렇게 자꾸 묻히면 어떡해? 흘리지좀 말고 먹으란 말야."

거의 신경질을 내본 적이 없는 둘째 영재에게도 아침부터 으르렁거리게 된다. 모처럼 아침 식탁에 온 가족이 

모였건만 은선은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짜증스럽기만 하다. 남편과 성재는 잠이 덜깬 얼굴로 무표정하게 수저

질을 하고 있다. 밥먹는 모습도 판박이가 따로 없다. 

"당신. 큰 아가씨한테 얘기 했어요?"

"무슨 얘기?"

"일전에 빌려준 거 말이에요. 이번에 얘기 안 했어요?"

"거, 애들 듣는데 아침부터 돈타령이야. 나중에 얘기해."

"빌려준 지가 도대체 언젠데. 갚을 마음 없는거 아니에요?"

"갚겠지. 그 돈 몇 푼이나 된다고."

"몇 푼 안되는 돈을 왜 몇 년째 안 갚고 입을 싹 닫느냐고요."

"나중에 하자니까."

실제로 몇 푼 안되는 돈이다. 돈 몇백 만원이 없어서 아쉬울 정도의 살림은 아니다. 그러나, 자기는 손끝에 물 

한 방울 안 묻히면서 올케인 은선은 죽어라 부려먹는 심보가 미워서 그런다. 너도 한번 당해보라는 심정으로 

빚독촉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남편이 이번에 제사지내러 가서 시누이에게 아무 말도 안한 것 같다. 부부가 

손발이 짝짝 맞지 않는다. 내 신발 치수가 아닌지 자꾸 뒷꿈치가 까지고 물집이 잡힌다.

"아, 네, 아가씨. 제가 정말 급히 좀 쓸 데가 있어서. 장사 잘 되시잖아요."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은선은 남편이 있는 자리에서 전화를 걸었다. 아침부터 빚독촉을 해야 하루 일진이 나

쁘고 재수없을 것이다.

"아유, 저런. 요즘 다들 어렵다고들 하긴 하데요. 저희 애들 아빠도 일감이 많이 줄긴 줄었어요. 전에 한창 

바쁠 때는 하루에 세 곳도 다녔는데. 요즘은 그렇게는 안하나 보더라구요. 네에. 일은 늘 있죠. 꾸준해요.

당연히 오늘도 나갔죠. 아침 일찍 나갔어요."

남편은 소파에 앉아 리모콘을 꾹꾹 눌러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보고 있었다. 은선의 통화에는 아무 관심도 없다

는 표정이다.

"아침부터 돈 얘기 해서 죄송해요, 아가씨. 장사가 잘 안되신다니까 마음이 안 좋네요. 천천히 갚으세요, 그

럼. 계는 안 하고 말죠 머. 근데 이번이 세번 째 바꾸신거 아니에요? 아유, 어쩌나. 이번엔 잘 되셔야 할

텐데. 쯔쯔쯔. 어떻게 매번 그렇게 장사운이 안 따르실까. 네. 네. 그럼 들어가세요. 또 연락드릴께요."

은선이 조금 후련해져서 전화기를 내려놓고 주방을 향해 돌아서는데 남편이 혀를 찬다.

"사람 참."

"내가 뭐요?"

"그런 얘기는 뭐하러 하나? 장사 안되서 힘들어 하는거 뻔히 알면서."

"내가 알긴 뭘 알아요? 난 당신 시집식구들 어떻게 사는지 하나도 몰라요."

"적당히 해. 이번엔 너무 오래 가는거 아냐?"

"흥."

남편과 얘기해봐야 그나마 후련하게 뚫렸던 가슴이 다시 막힐 것 같아서 은선은 더이상 댓거리하지 않고 주방

으로 갔다. 아침먹고 담궈논 그릇들을 잘그락잘그락 요란하게 설거지한다. 설거지가 끝날 때까지 남편은 거

실 소파에 앉아 리모콘을 들고 있다. 보통은 아침밥을 먹자마자 안방에 들어가 벌렁 누워버리곤 하는데 오늘 

아침은 다르다. TV에서 볼만한 거라도 하나 싶다.

"다 끝났어?"

설거지를 끝내고 화장실로 가는 은선을 남편이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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