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화 (14/18)

머리만 남은 채 나머지 몸 전체가 초록불에 휩싸여 불타오르는 다이어 울프의 눈은 죽는 그 순간까지도 엘리야를 향하고 있었다. 짐승이 되어버렸지만, 엘리야의 비명 소리에 반응해 자신의 암컷을 지켜야 한다는 본능 하나로 리치에게 달려든 실베스트였던 것이다.

허나, 이건은 로한에게 천운이었다. 극도의 정신집중이 요구되는 마법 시전 도중 늑대에게 머리를 물린 채 이리저리 휘둘리느라 로한에게 건 정지 마법이 풀린 것이다.

'지금이다!'

다시는 오지 않을 기회임을 느낀 로한이 힘차게 도끼를 내려찍자 리치의 호언장담과는 달리, 거짓말처럼 기다렸다는 듯 석판이 반으로 뚝 갈라지며 눈부신 섬광이 눈 앞을 가렸다.

-이.. 이런! 안-- 돼---!!

리치의 듣기싫은 처절한 외침과 함께 로한은 의식을 잃었다. 

우웅- 팟!

"윽!"

갑작스레 공중에서 나타나 밑으로 떨어진 오크의 입에서 비명이 새었다. 아무런 대비도 없이 허공에서 맨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래도 다행히 그리 높지 않은 높이에서 떨어진 것이라 다치거나 하지는 않았다.

"이.. 이곳은? 난 분명 석판을 내려쳤는데.."

난데없이 싱그러운 풀 위와 새들이 지저귀는 숲 속에 떨어진 오크는 갑작스런 이동에 따른 부작용인지 어지러운 머리를 부여잡고 천천히 일어섰다.

주변을 둘러보는 오크는 여전히 믿기지 않는 듯이 주변을 둘러보고 있는데 분명 여관에서 리치의 습격을 받은 것은 한 밤중이었건만, 지금 이곳은 늦은 아침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내가 기절을 한 채로 많은 시간이 흐른 것인가? 석판이 빛난 건 단순히 순간이동 때문이었나?'

-우웅.. 우웅...

그런 생각을 품기도 잠시 문신에서부터 전해져오는 거대한 존재감에 로한은 본능적으로 자신과 이어진 정령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눈치채곤 되물어 보았다.

'네가 날 여기로 보내준 거니? 날 살리기 위해서?'

-우웅.. 우웅...

영적으로 이어진 끈을 통해 무언가 감정의 편린을 느낄 수 있기에 정령의 긍정적인 대답을 느낀 로한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색이 어두웠다.

'리치! 분명 엄마를 밴시로 만들어 평생을 부려 먹으려 했다! 이럴 때가 아니야!'

서둘러 이 곳이 어딘지는 몰라도 길을 찾아 나선 로한은 다행히도 낯익은 표식들을 발견하며 길을 찾아 나설 수 있었다. 저 멀리 보이는 돌산 꼭대기의 오래 된 느티나무는 이 곳 정령의 숲에서 방향을 가늠할 때 로한이 종종 이용하는 표식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군.. 느티나무의 가지가 몇 개 안 보여.. 크기도 좀 작아진 것 같기도..'

어쨌든 이 곳이 아직 정령의 숲이란 걸 확인하자 마자 집을 향해 움직이던 로한은 말들의 투레질 소리와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를 내며 숲을 가로지르는 용병 무리들처럼 보이는 무장 집단을 발견하게 되었다.

'어라, 이상하네? 여긴 분명 이종족 연합의 도시로 향하는 대로가 있어야 하는데..'

-부스럭..

"안녕하세요?"?

로한이 아까부터 느껴지는 묘한 이질감들을 느끼며 일단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모습을 드러내며 인사하자 커다란 천으로 무엇을 싣고 가는 지 가리고 있던 마차의 호위대가 사납게 소리치며 검을 뽑았다.

"오크다!"

로한은 서둘러 병장기를 내밀어 주변을 경계하는 태세를 취하는 용병들을 보며 의아한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이종족 연합 도시 근처에서 오크를 보는 것이 이토록 놀라운 일이란 말인가?

"노예들을 지켜! 아무래도 혼자 있는 놈 같다!"

노예라는 말에 인상을 찌푸린 로한은 마차의 뒤편에 실린 게 무엇인지 깨닫고 사나운 눈으로 노예상들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10년 전, 이종족 연합 도시가 세워진 이후로 이 곳 정령의 숲 근처에서 노예상들을 본 적이 한 번도 없던 로한이었지만, 말로는 들어서 그 존재를 알고 있었다.

특히나 이들 이종족들을 사냥하는 노예상들이 원하는 게 뛰어난 미색과 긴 세월 젊음을 유지하는 엘프이기 때문에 부족과 떨어져 아들과 단둘이 살아가는 엘리야는 표적이 되기 쉽다고 여겨 경계했기 때문이다.

"당신들.. 노예상입니까?"

짧은 시간이지만 묘하게 존댓말을 하고 어리숙한 로한의 모습에 노예상들이 눈 앞의 오크가 살벌한 겉모습과는 달리 순박한 어린애라는 것을 짐작한 용병들이 서서히 밧줄과 그물을 들고 창을 내밀며 포위를 좁히기 시작했다.

"크크.. 이마에 피도 안 마른 핏덩이같은 오크가 몸만 믿고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구나.. 얌전히 잡히면 다치지 않을 것이다."

"도와주세요! 제발.."

그 순간 로한의 귓가에 마차의 뒤편에 실린 채 어렴풋이 들려오는 낯익은 목소리에 익숙한 목소리라 생각한 로한이 주변을 경계하며 싸울 태세를 잡자 노예상들 또한 긴장한 것인지 신중해졌다.

아무리 어린 나이여도 이미 성인이 된 오크의 피지컬은 그 자체만으로 인간에겐 위협적이기 때문이다.

장정 허벅지 굵기의 팔뚝에서는 초록색 근육이 꿈틀거렸고 단단한 뼈, 인간보다 능히 3배는 두꺼운 목 둘레, 게다가 로한은 전신에 문신을 새기고 키도 2m를 넘길 정도로 보기 드문 그야말로 전사의 체격을 가진 오크였기에 조롱하고 비웃는 말과는 다르게 노예상들은 천천히 접근하고 있었다.

만약 오크가 맨손이라 무방비하지 않았으면 노예상들은 로한을 냅두고 지나갔을 것이다.

"덮쳐!"

주춤주춤 좁혀오다 마침내 타이밍을 노린 노예상 중 하나가 제일 먼저 그물을 던지자 그 순간 로한의 머릿속에 정령의 힘이 발휘되는 느낌이 전해져오며 세상이 조금씩 느려지기 시작했다.

-키이잉....

'이건?!'

순간 모든 것이 일시 정지한 것처럼 그물이 펼쳐지는 속도가 점점 느려졌다. 마치 로한을 빼고 주변이 시간이 극도로 느리게 흐르는 것처럼 느껴졌는데 사납게 로한을 덮치라고 소리쳤던 노예상의 입에서 튀긴 침이 더럽게 공중에 그대로 있었다.

헌데 그런 와중에도 로한은 전혀 압박감을 느끼지 않은 채 평상시처럼 움직일 수 있었는데 로한은 감탄하며 정체모를 마도시대의 석판에 깃들어있던 정령에게 말을 걸었다.

'혹시 네가 도와주는거야?'

-우웅.. 우웅....

알아줘서 기쁜 듯 긍정의 신호를 보내는 정령의 대답을 들으며 로한은 천천히 손을 뻗어 주변의 노예상들을 하나하나 뼈를 부러뜨리며 정리하기 시작했다.

-우득! 뚜두득!

"커..허..어..어...억...."

"도오오오... 마아아앙.. 쳐어어어어어...!!"

그리고 그 광경을 지켜보던 마차에 남아 노예들을 지키던 노예상들이 보기에 그건 인세에 도래한 지옥이었다. 긴장한 듯 쉴새없이 주변을 눈으로 훑으던 오크 하나가 순간, 잔상이 남아 여러명으로 보일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며 눈 깜박할 사이에 모든 동료들을 제압하는 게 아닌가?

"커헉!"

"도망쳐!"

"괴..괴물! 히익..! 이건... 이런 건.. 거짓말이야..!"

저 정도로 빠른 움직이라면 응당 함께 할 거센 바람이나, 큰 타격음도 없이, 단순히 길가에 난 꽃을 꺽는 것처럼 너무나 태연한 표정의 오크를 보라.. ?믿기지 않는 비현실적인 광경....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을 목격하면 공포감을 느끼기 마련이고, 그건 노예상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만! 그만하십시오 오크님! 저희가 잘못했습니다!"

-펄럭.. 노예상이 가림막을 치우자 마차의 뒤편에 쇠창살로 된 우리 속에 반 나체의 엘프들이 한가득 갇힌 채 서로의 손을 잡고 주저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감히 전사님을 몰라보고 실례를 한 사죄의 의미로 엘프 성노예를 한 마리 드리겠습니다. 어떻습니까? 골라보시죠 하하.."

간사하게 두 손을 비비며 말하는 노예상의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않은 채 로한의 눈은 마차에 실린 어느 한 엘프에게 고정된 채였다.

'어.. 엄마?!'

꼬질꼬질하게 때가 묻은 더럽고 찢어진 리넨 옷감 밑으로 미처 가리지 못한 분홍의 꼭지가 보이고, 오래되고 피고름이 묻은 붕대로 한 쪽 눈을 가린 엘프, 아담한 얼굴과 고운 눈썹 밑으로 맑고 아름다운 한쪽 눈이 마치 겁 먹은 사슴처럼 두려움으로 떨리고 있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