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화 (15/18)

엘프의 보랏빛 생기있어 보이는 머리카락은 중간으로 나누어져 양 갈래로 땋아 귀엽게 드리우고 있었는데, 낯익은 그 모습은 엘리야가 분명했다.

허나 묘하게 로한을 헷갈리게 만드는 것은 그 분위기였다. 어떠한 청춘의 활력? 같은 것이 느껴졌고, 항상 보이던 우아한 눈빛 속에는 마치 로한처럼 순진함만이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그 눈망울은 이제 로한에게 고정되어 있었는데 절망적이던 순간에 용사처럼 나타난 오크 전사에 대한 기대와 희망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로한은 본능적으로 저 모습이 젊은 시절의 엄마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리고 자신이 지금 서 있는 곳이 과거라는 것을..!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의 모습과 비교 해보면 나이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조금 다를 뿐 엘리야의 모습은 변한 것이 없었다.

"핫하! 전사님께서 저 엘프가 맘에 드십니까? 나쁘지 않지요.. 포획 과정에서 한 쪽 눈을 다쳐서 흉이 진 게 조금 흠이긴 하지만.. 시력에는 이상이 없을 겁니다. 그리고.. 저 년은 미리 노예의 각인을 새겨놔서.. 주인 인식 과정만 거치면 평생동안 고분고분하게 잘 따를게 분명합니다."

보아하니 엘프에게 푹 빠진 모습의 오크를 보고 일이 잘 풀리겠다 느낀 노예상은 속으로 안심하며 계산을 마치고 있었다.

'나쁘지 않다, 처녀인게 조금 아깝긴 하지만 나머지 엘프들마저 모조리 잃을 순 없지..'

"안돼요-!! 제발.. 절 원하신다면 주인으로 모실게요! 제발.. 저희를 도와주세요 오크님!"

엘리야는 노예상인의 말에 넘어가는 것처럼 보이는 오크 전사의 모습을 보며 필사적으로 소리쳤고, 그 모습에 화가 난 노예상이 소리쳤다.

"이런.. 건방진! 노예 주제에 니가 뭔데 감히 주인을 선택하느냐! 이 년이!"

-쫘악!

"꺄악!.."

가죽 채찍이 사나운 파공성을 내며 쇠창살을 후려치자 놀란 엘리야가 손을 놓고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로한은 엘리야의 간절한 말을 듣고 마치 충격적인 듯 제자리에서 작게 중얼거릴 뿐이었다.

"정말로.. 약속하는 겁니까?"

"네.. 세계수 어머니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겠어요 제 마음과 몸, 영혼까지 모두 바치겠습니다.."

"엘리야! 안돼! 너 지금 숲의 맹세를..!"

그런 엘리야의 말에 놀라 손목을 잡으며 말리는 또 다른 엘프가 있었다. 에메랄드 빛의 단발의 머리, 묘하게 닯았으나 조금 더 눈꼬리가 올라가 사나운 눈매와 도톰한 입술, 암표범처럼 단련 된 매끈한 근육들과 탄력적인 허벅지를 가진 여인이었다.  

"괜찮아! 언니.. 어차피 난 이미.. 노예의 각인이 새겨진 걸.. 마을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해.."

"읏.. 그건.."

매우 폐쇄적인 사회의 엘프 부족에게 혼혈로 인한 하프엘프이거나, 고대의 노예 각인이 새겨진 엘프는 절대 안으로 들이지 않는다는 규정이 있다. 그렇기에 때마침 이름모를 오크 전사가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는것을 보며 기회라 느끼고 나선 것이다. ?자신을 희생해 남은 엘프들을 구하기 위해...

그리고 그런 엘리야의 노림수가 먹혀든건지 오크는 또 다시 이해할 수 없는 신묘한 몸놀림으로 순식간에 이곳 저곳에 잔상을 남기며 남은 노예상들을 무력화시키고 있었다.

-뚜두둑! 우둑! 크아악!! 히익!!

"해치워! 어떻게든 죽이란 말야! 컥!"

-뚜두둑..

마지막으로 감히 엘리야에게 채찍질을 한, 뒤쪽에서 소리치던 간사한 노예상 또한 로한의 손에 목이 잡혀 180도로 꺽여 뒤로 돌아가며 혀를 빼물고 죽게 되었다.

그 모습을 보며 엘리야의 언니, 센티널 가드로서 부족을 지키던 여전사, 일리아나는 날카롭게 눈빛을 빛냈다.

'틀림없어 저 오크.. 저 문신은 고대의 정령문신이야.. 그렇다면 저 힘은 분명 정령의 힘을 빌린 것인데.. 대체 어떤 정령인거지?'

일리아나는 비록 숲의 맹세로 동생인 엘리야가 저 오크를 주인으로 섬기게 되고, 덕분에 자신 또한 자유를 되찾는다 하여도, 순순히 동생을 더러운 오크 따위에게 넘길 생각이 없었다!.. 절대로! 

'네 녀석 오크.. 명심해라 언젠가는 반드시..'

"은인이시여.. 저희를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갇혀있던 이들 중 유일한 남성이었던 엘프가 가장 높은 사람인지 대표로 로한에게 감사 인사를 보내고 있었다.

"음.. 저는 단지..."

"물론 말만으로 은혜를 갚을 생각은 없습니다."

정중한 감사 인사에 내심 바라는 바가 있어서 그랬다고는 하기 뭐한 로한이 말끝을 흐리자, 말 안 해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엘리야의 손목을 잡아끌며 로한 앞으로 데려오는 남성 엘프였다.

엘리야를 바라보며 대표인 남성엘프가 짧게 말했다. 

"엘리야, 네가 대표로 어머니 세계수의 이름하에 숲의 맹세로 이 오크 전사에게 은혜를 갚을 생각인가?"

잠시 우물쭈물하던 엘리야의 꽃잎 같은 입술이 벌어지며 작지만 결연한 음성이 새어나왔다. 

"네." 

"그래, 잘 생각했다. 어차피 넌 두 번 다시 우리의 일원이 될 수 없지, 평생동안 숲으로 돌아올 수도 없으니, 이처럼 강한 전사에게 목숨을 맡기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네, 언니를 포함해서 모두의 목숨을 구해 준 은혜, 전사님을 노예각인의 주인으로서 섬기며 제가 대신 갚겠어요"

잠시 후 그는 결정을 내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장로님! 엘리야! 다시 한 번 생각하렴!"

그 때였다. 엘리야와 닮았으나 묘하게 날카로운 인상의 얼굴인 녹색 보브컷의 엘프 여인이 말리자 장로라 불린 남성 엘프가 크게 화를 내었다.

"그만! 지금 장로인 내 말에 거역하는 것인가?! 센티널 가드, 일리아나!"

"크윽.. 아닙..니다."  

말을 마친 장로 엘프는 로한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엘리야를 데리고 가시오. 그녀는 이제 우리 일족이 아니오, 본래라면 우리 엘프를 건드린 이종족들은 숲의 전사들의 집요한 추적을 죽을 때까지 받게 되지만, 이번은 더렵혀진 동족이 숲의 맹세를 통해 스스로 희생한 점을 들어 예외로 하겠소."

그렇게 엘리야를 제외 한 모든 엘프가 다른 곳으로 떠날 때, 마지막까지 남아 로한을 노려보던 일리아나가 로한에게 작게 속삭였다.

"기다려라.. 오크, 언젠간 반드시 내 동생을 되찾을꺼다.."

'음?! 자매?! 그렇다면 이 여자가 내 이모란 말인가?'

"이.. 이름이..?"

"일리아나다 오크, 네 녀석은 이름이 뭐지?"

"어.. 음.. 로한.."

존칭을 하기엔 영 분위기가 아닌, 세상에 다신 없을 원수를 보듯 자신을 노려보는 이모에게, 뭔가 어물쩍, 대답해버린 로한은 그대로 등을 돌리고 떠나버리는 일리아나의 모습을 바라보며 엄마를 챙기고 원래 둘의 보금자리가 있던 여관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하아.. 하아...

짧은 거리인데도 엘리야는 오랫동안 제대로 먹지 못해 체력이 달리는지 자꾸 로한보다 뒤쳐졌다. 그동안 매우 힘든 꼴을 당한것이 분명했다.

허름한 누더기 차림, 꼬질꼬질하게 검댕이 묻은 피부와 얼굴.. 그 모습에 가슴이 뭉클해진 로한은 번쩍 젊은 엄마를 번쩍 들어올려 안았다.

그러자 엘리야는 로한을 보며 어쩔줄 몰라하다 가냘픈 목소리로 말했다.

"아.. 감사합니다. 주인님"

조심스레 말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며 로한은 무언가 맘에 들지 않았다. 한 순간에 타인이 되어버린 기분이랄까..? 비록 오크의 몸이 되어버렸지만 아들인 자신도 몰라 본채, 눈치를 보는 엘리야의 모습은 불쌍해 보이기까지했다.

그러나 이런 와중에도 비록 거지꼴을 하고 있지만 엘리야의 몸에서는 과일향과도 같은 엘프 특유의 좋은 향이 났고, 부드러운 하얀 허벅지를 만지며 로한은 어색하게 말을 걸었다. 

"음.. 저기, 엘리야씨.. 어디로 가는건지 궁금하지 않나요?"

"글쎄요, 어딘가요 주인님?"

젊은 시절의 엘리야는 의외로 매사에 아무 생각이 없었다. 로한이 기억하던 여유롭고 다정하던 모습과는 달리 아무래도 과거엔 성격이 달랐던 것 같다. 그렇기에 의아함을 느낀 로한은 이런저런 질문을 던지며 지금까지 살아 온 엘프 사회의 환경에 대해서 알게 되었고, 곧 납득하게 되었다.

아무래도 지금껏 개인적인 감정이 허용되지 않는 폐쇄적인 환경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엘리야는 아직 수동적으로밖에 감정을 표현할 줄 모르는 것이었다.

그 밖에도 엘프의 성비는 극도로 불균형을 이루기에, 일부다처제이며, 남성으로 태어나는 엘프는 기본적으로 장로나 대장로 등의 고위직을 차지하게 되고, 여성 엘프 중 대다수는 처녀인 채로 평생동안 짝을 찾지 못한 채, 공동체를 위해 일하다 죽는다는 것, 그리고 태어난 아이는 철저히 여성이 돌보는, 모계 사회를 이룬다는 것, 자존심이 강하고 감정을 절제하는 엘프의 습성등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이윽고, 마침내 익숙한 여관이 위치해 있던 장소에 도착한 로한은 그 곳이 아무것도 없는 공터인 것을 보곤 침음을 삼켰다.

'역시 과거라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군.. 곤란해, 당장 오늘 밤이라도 잠 잘 곳이 필요한데.. 앗! 저건?'

공터 한 쪽에 로한이 발견한 것은 자연적으로 벽 쪽에 형성 된 동굴이었는데 로한은 그 곳이 훗 날 자신이 맥주를 시원하게 보관하기 위해 사용하던 냉빙고가 위치하던 장소라는 것을 눈치챘다.

'동굴이라.. 일단 저 곳에서 급한대로 지내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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