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22)

지호와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지호와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유지호, 중학교 때 만난 내 절친한 친구로 우연히 같은 반이 되었다가 사소한 것이 계기가 되어 친해졌다. 그리고 지금은 옆에 없으면 이상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내 '평범한 일상'에서 없어서는 안되는, 일상을 지내는 데 무척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다.

"하렘이라…… 뭐, 하렘이라면 하렘일 수도 있겠네."

모든 남성의 꿈이라고 여겨지는 하렘이라면 자신도 관심이 있다. 관심이 있다못해 폭발할 정도다. 게다가 내가 아는 미소녀만 해도 3명, 문제는 그 중 2명이 평범하지 않다는 것과, 자신에게 관심이 가지고 언제나 내 곁에서 머무는 이유가 단순히 이성으로서 나에게 관심이 있기 때문이라면 얼마나 좋았겠냐만…….

문제는 그런 단순하고도 좋은 이유가 아니라는 것이다.

나에겐 한 가지 비밀이 있다.

배프인 지호에게도 숨기는 비밀. 되도록 지호에게 그 비밀을 들켜서 말려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내 주변 인물들이 위험한데, 평범한 일상 속에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지호가 불행해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나에게 얼마 없는, 날 진심으로 걱정해주고 위해주는 친구니까.

그래서 더욱 그 친구를 지키고 싶었다.

"그럼……."

발걸음을 멈추고 눈을 감는다. 손을 쭉 뻗어 몸 안에 잠재된 자신의 힘을 이끌어낸다. 손 끝에서 범접할 수 없는 성스러운 힘이 담긴 빛이 번득인다.

눈을 뜨자 약 1m정도의 한국 전통검인 환두대도가 제일 먼저 눈에 띄였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칼처럼 보이지만, 도신(刀身)에서 느껴지는 압도적인 신비로운 기운은 그 검이 평범한 검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었다.

"시작해볼까? 거기의 마물들."

[크르르르.]

[키에에에에.]

[가르릉.]

전봇대 위에서, 벽 아래에서, 하수도 구멍에서, 기분 나쁜 검은 액체가 흘러나오더니 그 액체에서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손과 흉흉한 붉은 눈빛을 가진 전설에서나 나오는 늑대인간과 비슷한 형태의 검은 괴물들이 나타났다.

마물, 마왕의 잔재들로서 성검을 빼앗고 성스러운 힘을 몰살시키는 것 외에 아무것도 모르는 악(惡)의 전투병기들.

"이번 마물은 셋인가? 흐음, 조금 힘들겠지만…… 그래도 아예 못할 정도는 아니지!"

[크르르, 용사, 용사다.]

[용사를 죽인다. 용사를 죽인다.]

[마왕님을 위해서. 마왕님을 위해서.]

[[[성검을 빼앗아라!]]]

동시에 마물들이 나를 향해 달려든다. 예전 같았으면 무서워서 떨었겠지만, 지금은 무섭지 않다. 오랫동안 훈련을 받아왔으니까! 똑바로 검을 쥐고, '부장'에게 배웠던 풍백류(風伯流)를 떠올리자 반복해서 휘둘렀던 풍백류의 검의 흐름에 따라 저절로 몸이 움직였다.

"풍백류(風伯流) 일식(一式) 격참(擊斬)!"

팟!

풍백류는 하나하나가 일격필살의 검술, 온 몸을 무게를 실어 단숨에 마물의 몸이 반으로 갈라지고 연기가 되어 사라진다.

한숨을 내쉬고 다시 몸을 돌린다. 남은 마물은 둘, 아직 마음을 놓을 때가 아니다.

하지만 눈 앞의 광경에 금새 긴장이 풀리고 말았다. 날 죽이려 했던 그 마물들은 이미 연기가 되어 사라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검은 연기의 사이에서 나온 앳된 외모의 소녀는 나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언제 온거야, 소이야?"

"방금."

여전히 돌아오는 대답이 짧다. 하지만 그게 날 싫어해서가 아니고 원래 말하는 소이의 말투가 그렇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임소이.

예전에 마물에게 습격당하던 것을 구해준 것으로 인연을 만들게 된 소녀.

짧은 은빛 단발에 루비처럼 예쁜 붉은색 눈동자를 가진, 아기처럼 곱고 투명한 피부에 상당히 오밀조밀하나 예쁘다기보다 귀여운 인상이 먼저 드는 미소녀다. 나이는 많이 쳐줘도 중학교 1학년 정도이며 늘상 무표정해서 감정을 잘 표현하려고 하질 않는다. 현재는 지낼 곳이 없다고 해서 우리집에서 나와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다.

"오늘도 마중 나와준거야? 고마워."

"괜찮아."

난 소이에게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소이는 마치 소동물처럼 누군가가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것을 좋아했다. 물론 아무에게나 그런 것은 아니다. 자신이 진심으로 마음을 연 사람에게만 머리 쓰다듬는 것을 허용했다. 소이의 머리를 쓰다듬을 수 있는 사람은 나, 어머니, 그리고 주희 뿐이다.

처음엔 나도 머릴 쓰다듬으려다가 손을 물렸다.

내가 머릴 쓰다듬어주면서 기특하다는 듯이 말하자 소이는 아주 살짝,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미소를 지었다.

소이는 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주희는?"

"주희는 좀 나중에 온데. 볼일이 있다나봐. 그러니까 오늘 저녁은 나하고 어머니끼리만 먹자."

"알았어."

난 소이의 손을 잡고 다시 집으로 향했다. 문득, 소이의 보드랍고 매끄러운 손이 느껴지자 아까 지호와 했던 대화가 어째서인지 저절로 떠올랐다.

'집에 돌아오면 마치 남편을 기다린 새색시처럼 '그 아이'에게 마중 받고, 그 아이가 해주는 밥을 먹고, 같이 목욕하고, 같이 자는 그런 생활이 그냥 친하다고오오오오?!!'

'으갸갸갸갸각! 마, 마지막! 마지막 둘은 아냐! 함께 목욕한 적도 없고 잔 적도 없단 말야!'

'진짜?'

'……얼마 전에 우연히 걔가 들어가 있는 줄 모르고 문을 열었다가 알몸을 본 것과 걔가 방을 착각해서 내 침대에 잔 적은 있지만…… 아파아아아아아악!'

'이 빌어먹을 정도로 부러운 쌔끼! 걍 니가 다 해먹어라! 하렘을 만들어버렷!'

'우와아아아악!'

남편을 기다리는 새색시…… 그 녀석이 괜히 그런 말을 해서인지 얼마 전에, 정말 우연히 봤던 목욕하려고 옷을 벗던 소이의 알몸이 떠오르고, 그날 소이가 방을 착각해 침대에 올라와 키스를 할 정도로 가까웠던 얼굴이 떠올랐다.

굉장히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볼 건 다 봤다. 어린아이 특유의 자라기 시작하는 봉긋하게 솟아난 작은 가슴과 온 몸에 잡티 하나 없이 깨끗한 우유빛 피부에 적당하게 찌지도, 마르지도 않은 체형. 유려한 라인을 그리는 매끄러운 허벅지.

그리고 잠잘 때 무심코 봐버린 소이의 얼굴에 유독 도드라졌던 분홍빛 입술은…….

두근두근두근두근.

애써 잊으려 했던 그 기억이 떠오르자마자 얼굴이 불에 댄 듯 화끈거리고, 심장이 터질 듯이 두근거린다. 한참 성에 관심이 많을 나이였고, 당연히 야동을 본 적도 있지만 실제로 여자아이의 알몸을 본 체험은 코피가 터질 것 같이 흥분되는 광경이었다.

"얼굴, 붉어?"

"허, 허헉! 아, 아,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냐! 아하하, 하하하! 어, 얼른 가자! 어머니가 기다리겠다!"

"현진, 이상해."

부끄러운 나머지 소이의 손을 잡은 체 앞으로 걸어나갔다. 내 붉어진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말이다.

<이현진 SIDE O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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