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교했던 길을 그대로 따라가 다시 학교 인근의 작은 공원에 도착했다. 공원이 워낙 넓고 공원에 산책하러 나온 건지 사람도 많아서 그 중에 사람 1명을 제대로 찾을 수 있을지 걱정했지만 그 걱정은 기우였다는 듯이 금방 내가 찾던 사람을 볼 수 있었다.
살짝 두근거리는 심장을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쉬면서 진정시킨 뒤 발걸음을 빨리했다.
천천히 걸어나가자 그 공원의 중심에 마치 다른 세상의 사람 같은 분위기를 내며, 마치 이계에서 온 공주님처럼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인물.
한 올 한 올 직접 정성스럽게 도금한 것처럼 아름다운 금발에 호수를 떠올리게 하는 맑고 투명한 푸른색의 눈동자, 체형은 동양인이었지만 서양인의 피를 잇고 있어서인지 다른 사람보다 유독 새햐앟게 보이는 상아빛 피부에 오똑한 코와 동글동글한 커다란 눈.
남자들은 힐끔힐끔 주변을 지나다니면서 소녀의 외모를 볼 정도로 아름다웠고, 여자들은 질투의 시선을 날리며 그 소녀의 미모를 품평하는 기색이었다.
드디어 찾았다는 기쁨에 씨익 웃으며 천천히 발걸음을 빨리하고 그녀의 앞에 선다. 고개를 숙이고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그녀는 그림자가 드리우자 슬쩍 고개를 든다.
눈을 마주치자 놀란 표정을 지은 소녀에게 나는 손을 들어 인사했다.
"여어, 또 만났네. 최주희."
그녀는 바로 이현진의 소꿉친구, 최주희였다.
"너 였어?"
찌릿! 하고 몸에 소름이 돋을 듯한 적의가 나에게 꽂힌다. 으음, 바람이라도 불면 쓰러질 듯한 연약한 외형을 지니고 있지만 역시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할 수 없는 법이다. 여자이지만 각종 무술 유단자에다가 우리, 이현진 암살회가 이현진을 공격했을 때 여유롭게 우리들의 공격을 막고 또 반격했던 그 날렵한 움직임은 틀림없이 달인급 실력이다.
까딱하면 주희에게 목이 날아갈 수도 있겠군. 아니, 그래도 난 그 녀석의 '친구'니까 목까지는 아니더라도 전치 10주 쯤 병원에 신세질 것 같다. 지금의 적의로만 따져보면 그 정도는 예상할 수 있다.
왜 내 친구, 현진의 소꿉친구인 주희가 공원에서 나와 이렇게 만나고 나에게 적의를 쏟아내는 것일까? 간단하다. 그건 지금 내 손에 들린 사진 1장 때문이다.
이 사진 때문에 주희는 나에게 적의를 쏟아내는 동시에, 나를 함부로 대할 수 없게 되었다. 이 사진에는 그녀의 비밀이 감춰져 있기 때문이다.
"맞아. 내가 네 책상 사물함에 몰래 사진과 편지를 넣었고, 공원으로 불러낸 장본인이야. 그나저나……."
검지와 중지 사이에 꽃힌 사진을 돌려 시선을 보냈다.
"이런 무시무시한 장면을 우연히라도 사진으로 찍게 될 줄은 몰랐는걸?"
그 사진 속에는, 검은 색의 괴물들과 주희가 싸우는 모습이 찍혀 있었다. 더구나 그 사진 속의 주희의 모습이 더 큰 문제였다.
"처음엔 영화라도 찍는 줄 알았는데, 이 세상에는 우리가 모르는 비일상의 세계라도 있다는건가."
"크윽, 네가 상관할 바 아냐. 넌 너대로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면 돼. 이 비일상의 세계에 너 같은 평범한 일반인이 휘말리면 현진이도 슬퍼할거야. 자, 그러니까 어서 사진을 내놔!"
"그럴 순 없지."
나는 사진을 교복 안쪽 주머니에 넣고 손가락으로 톡톡 그 부위를 두드렸다. 그리고 장난스러운 미소를 입가에 매달았다.
"이걸 어떻게 찍은 사진인데 그냥, 아무 댓가 없이 달라고? 그건 좀 심하지 않아? 앗, 혹시라도 날 제압해서 뺏을 생각은 하지 마. 이 사진이 단 1장만 있다고는 말 안했으니까."
"큭…… 뭘 원하는데."
주희는 흠짓하며 손을 아래로 떨구고 눈살을 찡그리며 힘 없이 물었다. 됐다! 미끼를 물었다. 이제야 내 말을 제대로 들을 준비가 된 것 같다.
지금 이 사진을 협박용으로 사용하고 있지만 그녀가 이렇게 나에게 밀리는 것은 내가 현진과 친구 사이이기 때문이고, 워낙에 갑작스러운 상황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 사진으로 큰 것을 바란다면 나는 즉시 최주희의 뒤에 있는 거대 조직에 의해 기억이 지워지고 사진도 모두 빼앗길 것이다.
"간단한 일이야. 매우 간단한 일."
그래서 나는 지금 당장 최주희를 이용하려고 했다. 그것도 최주희에겐 매우 간단한 일을.
"내 집에 가서 하룻밤을 같이 지내줘."
"죽어."
쿵!
갑자기 뇌가 크게 흔들리며 뇌진탕을 일어난 듯, 정신이 날아갔다. 처음엔 눈 앞에 깜깜해지고, 그 다음엔 푸르른 하늘이 보이고, 나 자신이 공중에 떠있다는 것을 느낄 때 쯤 땅바닥에 처박혀 전신에 통증으로 기절할 것 같았다.
"이 변태 자식. 잠시라도 네 놈을 믿었던 내가 바보같다. 그냥 뒈져, 세상에서 사라져, 이 별의 먼지가 되버려어어엇!"
"자, 잠깐! 뭔가 심한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오해는 무슨 얼어죽을 오해! 나와 현진이를 위해 세포 하나 남기지 않고 소멸시켜주지!"
"머, 멈춰! 내 얘기를 들어…… 커헉!"
퍽! 퍽! 쿵! 퍽! 꾸욱. 퍽! 딱! 쿵! 우득! 빠직!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악!"
"그럼 그렇다고 진작에 말을 하지 그랬어."
"……난 분명 오해라고 먼저 말했다."
"……미안해."
주희는 차마 면목이 없는지 고개를 숙여 미안하다는 심정을 듬뿍 담아 나에게 사과했다. 나는 그 사과를 받아줄 기력도 없이 땅바닥에 뻗어 있었다. 너무 얻어맞아서 몸을 제대로 겨눌 수가 없다.
"그냥 친구집에 자고 가라는 정도로 한 말이었는데…… 그걸 어떻게하면 성적인 묘사로 들을 수 있는거야."
"하, 하지만 보통 집에 자고 가라는 말을 하면 그거잖아. 게다가 넌 사진으로 협박하고 있었고…… 그런 장면이 눈 앞에 있으니 좋지 않게 볼 수 밖에 없었어."
"에휴, 설마 내가 내 친구의 소꿉친구에게 그런 말을 하겠냐."
"윽."
도대체 얼마나 최주희가 날 신뢰하지 못하는지 알 것 같다.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상체를 들자마자 통증이 느껴져 다시 누워야했다.
"크으……."
"괜찮아?"
내가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아파하자 자기가 너무 심하게 때렸다고 생각했는지 매우 걱정스럽게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 녀석, 양심은 제대로 갖추고 있구나.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아픈데 괜찮아보이니?"
"윽, 저, 정말 미안."
"후우."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으니 이쯤에서 봐주도록 할까나.
"으음."
"이, 일어설 수 있겠어?"
"하아, 어떻게든 움직일 순 있을 것 같아. 아무튼, 내 제안 받아들일래? 받아들이지 않을래?"
내 갑작스러운 질문에 깜짝 놀란 주희는 당황하며 고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나쁜 뜻은 없다는 건 아는데 가기는 좀……."
"으윽, 몸이, 갑자기 몸이 쑤실듯이 아파!"
"아, 알았어! 갈게! 가면 되잖아!"
계획대로.
나는 주희가 보지 않게 고개를 돌려 슬그머니 썩소를 지었다.
집에 도착한 뒤, 나는 주희와 함께 내 방으로 향했다. 도중에 집사 할아버지와 만나 내 너덜너덜한 모습을 보더니 깜짝 놀라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냐고 물었지만 계단에서 굴렀다는 번명으로 해결했다. 물론 도중에 주희가 양심에 찔린 듯, 움찔해 먼산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은 여담이다.
수많은 책들이 꽃힌 책장과 컴퓨터, 책상과 책상 위에 올려진 필통이나 책, 햇빛이 잘드는 창가에는 침대가 놓여져 있고 벽 한쪽에는 대형 벽면 TV가 걸려있는 내 방에 도착하자 주희의 입에서 감탄의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너…… 부자집 아들이었구나……."
"이 정도는 부자도 뭣도 아냐."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주희는 이런 방에 온 것이 신기한 듯, 두리번거리다가 문득 책장에 시선이 꽂혔다.
"어, 이건 순정…… 만화? 너 이런 것도 봐?"
"뭐 어때? 여자가 보는 만화라도 재미있으면 뭐든지 봐. 거기 있는 책장은 순정만화책이고, 그 아래는 배틀 만화책, 그 아래는 러브코미디 만화책이다. 반대쪽 책장은 소설이 꽂혀져 있어. 음, 관심 있어?"
"음…… 조금?"
"봐도 상관없어. 아니, 그냥 다 가져가도 돼."
"지, 진짜? 뻥 안치고?"
"아아, 난 다 봤으니까."
'역시 부잣집 아들, 통이 크구나'라고 중얼거리며 기쁜 표정으로 주희는 순정 만화책들을 향해 달려갔다. 음, 역시 은근히 소녀 취향으로 순정 만화책을 좋아한다는 현진이의 제보는 사실이었군.
나도 가만히 있기는 뭐해 컴퓨터를 틀고 인터넷 웹써핑을 했다. 주희는 조용히 순정 만화책을 읽고, 내가 컴퓨터를 하는 도중에 순정 만화책에서 시선을 땐 주희가 나에게 물었다.
"그런데, 왜 날 여기로 부른거야?"
"응?"
"그게…… 너랑 나 사이에는 현진이가 있기 때문에 안면도 있고 같은 반이지만…… 사실 우린 그렇게 친하진 않잖아?"
그건 사실이다.
만약 현진이가 없었다면 주희 씩이나 되는 미소녀가 나랑 말을 섞을리 없다. 내가 현진이의 소중한 친구이기 때문에, 주희가 나에게 말을 건 것이고 그렇게 어느 정도 거리를 좁힐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은 '클래스 메이드' 정도의 사이로, '친구'라고 거리낌 없이 부를 정도는 아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날 네 집에 부른거야? 정말로 그, 그런 이유는 아닌거지?"
그 의심은 아직도 없어지지 않은거냐?
고개를 옆으로 돌려 진지하게 날 바라보는 주희를 보고 있자니 괜히 놀리고 싶어진다.
"네게 관심이 있으니까?"
"뭐…… 뭣?!"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며 벌떡 몸을 일으키는 주희. 그 표정에는 엄청난 경악이 서려있었다.
"농담이지만."
"큭!"
달아오른 얼굴이 빠르게 원상태로 돌아오면서 놀림받았다는 것에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반은 진담이고."
"어느 쪽이야!"
"네 마음대로 생각해."
"마음대로 생각하라니, 그런 애매한 말을…… 아니, 그보다 왜 날 여기로 불렀냐고 묻고 있잖아!"
쳇, 말 돌리기 실패인가. 어쩔 수 없이 진실을 말해줘야겠다. 별로 재미있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널 왜 여기로 불렀냐면…… 별로 재미없을지도 모르는데?"
"상관없어. 말해줘."
"별 거 아냐. 거대 조직의 보스가 우리 아버지이고, 난 사생아. 아버지가 죽고 형들이 권력 투쟁으로 날 죽여서 아버지가 나에게 준 재산을 빼앗으려고 하는 정도의 이야기. 끝~!"
"뭐야 그건?!"
내 입에서 나온 말이 어지간히도 의외의 말이었기 때문일까? 그렇지 않아도 동그란 눈이 더욱 동그랗게 떠지며 손으로 입을 가리는 것으로 놀라움을 표현했다. 나에게 그런 사정이 있었는 줄 몰랐나보다.
"그, 그런 이야길 어떻게 하면 그렇게 활기차게 말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으면 우울하게 말할까? 뭐, 괜찮아. 그때 본 너 정도의 실력이라면 히트맨 2, 3명 쯤은 간단히 물리칠 수 있을거야."
"그런 문제가 아니고……!"
탕!
바로 그때, 아랫층에서 들러오는 한 줄기의 소음.
"……."
"……왔나보네."
참 타이밍 한번 좋다.
"자, 주인공이 등장이다. 그럼 주희야, 잘 부탁할게."
"너, 설마 날 여기로 불러온 이유가……."
박수를 치며 뒤로 물러선 나에게 불신어린 시선을 보낸 주희가 제발 아니라고 말해달라는 어조로 말했지만 나는 그 부탁을 들어줄 수 없었다.
"응. 그 괴물을 상대할 정도로 강하다면, 조금 강한 인간 정도야 별 것 아니지 않겠어?"
"그나마 가장 평범하다고 생각했던 녀석조차 평범하지 않다니, 내 인생은 참……."
"어, 아련한 회상을 시작할 때가 아닌데요? 지금 실시간으로 히트맨의 위협이 오고 있는데요? 이럴 때 어서 용사가 나서야지요! 그 괴물을 쓰러뜨릴 때처럼 파박하고 쓰러뜨려야지요?"
"……유지호, 잘 들어."
"그보다 어서 히트맨을……."
"으득! 닥치고 들으렴, 이 망할 자식아."
"네."
주희의 살기에 재빨리 몸이 반응해 무릎을 꿇고 주희님의 말씀 경청할 준비를 마쳤다.
"내 힘은 말이지. 마물을 상대할 때나 통하는 능력이란다. 즉, 특화된 힘이라는거지."
"마물?"
"네가 본 그 괴물 녀석들."
"아하."
"아무튼, 내 능력은 어디까지나 대마물능력, 대인용 무기가 있긴 하지만 집에 두고 왔어."
"어…… 즉, 그 말씀은 주희님이 히트맨을 상대할 능력이 없다는?"
"너보다는 낫겠지만 없는 건 어쩔 수 없지."
"왜 진작에 말 안했어!"
"이런 일이 갑자기 생길 줄은 몰랐지! 일언반구없이 날 여기로 데려온 건 너잖아!"
"아악! 죽을거야! 난 죽고 말거야! 너 하나 믿고 사람들을 모두 피신시켰는데에에!"
"나야말로 너 때문에 현진이 용사가 되는 것도 보지 못하고 죽을 위기에 빠졌잖아! 책임져! 나 대신 총알받이 방패가 되어 죽어!"
"이 잔인한 여자 같으니! 어떻게 친구를 방패로 삼을 생각을 해!!"
"나랑 니가 친구냐! 그냥 같은 반의 아는 애니까 문제 없어!"
"큭, 어쩔 수 없지. 알았어!"
"알았으면 얼른…… 뭐?"
내 말이 얼빠진 표정을 짓는 주희. 내가 정말로 방패가 될 생각을 할 줄은 몰랐나보다. 으이그, 좀 솔직해져라. 그러니까 현진이 아직도 네 맘을 못 알아채지!
"널 끌여들인 건 나니까 내가 책임지는 수 밖에 없지. 내가 녀석들의 시선을 끄는 동안 대피해!"
"야, 잠까……."
주희가 날 말리려는 모습이 보였지만 그 전에 재빨리 문을 발로 차 밖으로 나가서 히트맨들이 잘 들리도록 외쳤다.
쿵!
"여기다, 이 자식들아!"
탕!
"우왓! 말을 하자마자 쏘는 법이 어딨냐!!"
뭐야, 바로 앞에 있었어?! 젠장, 그보다 진짜 총을 쏘냐? 위험하잖아!
탕!
"그만 좀 쏴!"
탕!
"도망이닷! 젠장, 이 형들의 개 같은 히트맨들아! 여기다, 메롱~!"
탕탕탕탕탕탕탕탕!
"힉! 총소리에서 분노와 짜증이 느껴진다!"
히트맨의 모습을 확인하기도 전에 나는 도망치고 도망쳤다. 다행이 이 저택의 지리는 내가 잘 안다. 이 저택 내에서는 어느 정도 유리한 고지를 취할 수 있을거다.
……라고 생각했던 때가 저에게도 있었습니다.
"왜 히트맨이 내 눈 앞에 있는거지?"
"저택 내부의 설계도는 이미 파악하고 있으니까."
"헐, 어떻게."
"우린 일류 히트맨이니까."
아, 일류 히트맨이라서 사전 조사는 다 했다는 거군요. 예, 알겠습니다. ……후우, 이걸로 끝인가.
"아저씨들. 기왕 잡힌 건 어쩔 수 없으니까 제 목숨은 포기하겠는데. 인간적으로 여자애는 놔줍시다. 아무 상관도 없는 평범한 여자앤데……."
"쿡, 상관없다. 우리는 목표만 처리하면 그만이니까."
"그나마 다행이네요~ 그럼 되도록 아프지않게 해주세요."
"그 말을 남자에게 들으니 토할 것 같다."
"그건 동감입니다."
"그럼…… 잘 가라."
나는 한숨을 쉬며 눈을 감았다. 그래, 이걸로 됬다. 이걸로 된거다. 이제 슬슬 지겨워지기도 했고 하니…….
"자기 죽이러 온 암살자랑 농담 따먹기나 하면서 목숨을 가볍게 포기하지 말란 말이야, 이 바보얏!"
퍽!
"꾸웩!"
헐, 저것이 바로 전설의 '뒷치기'인가! ……아니, 이게 아닌가?
아무튼 도망친 줄 알았던 주희는 몽둥이를 들고 두 히트맨 중 1명의 정수리를 내리찍었고 1명의 히트맨은 그대로 정신을 잃은 듯이 쓰러졌다.
다른 히트맨이 당황했지만 과연 일류라고 말할 만 한지 재빨리 품에서 총을 꺼내 주희에게 겨두려고 했다. 그러나 그보다 내가 더 빨리 몸을 날려 총을 뺏었다.
"큭!"
"빈틈!"
총을 뺏기자 나에게 달려들려고 했던 히트맨은 주희의 날아차기를 안면에 박고 쓰러졌다. 주희는 쓰러진 히트맨의 다리 사이를 차…… 그 이상은 남자로서 말 못한다.
"후우~ 어떻게든 간신히 성공했네."
"너 도망친 거 아니었어?"
"이 바보야! 그런 말까지 하고서, 날 구하려고 떠난 녀석을 두고 어떻게 달아나!"
신경질적으로 외치며 주먹으로 내 머리를 퍽퍽 때리는 주희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며 주먹에 순순히 얻어맞았다. 솔직히 아프게 때린 것도 아니고…….
"후아아, 대인 전투는 무기를 들지 않고 싸운 적은 처음이라 걱정했는데…… 잘 됬네."
"그러게. 특히 네가 그 남자의 뒤통수를 친 것은 정말 대단했어! 짱이었다니까!"
"흠흠, 그 얘긴 그만하고, 이 사람들은 어떻게 할까?"
"생각 같아서는 그냥 묻어버리고 싶은데…… 알아내야할 것도 있고, 사람들을 불러서 처리할 생각이야."
"그래, 으으. 그 사진 하나 때문에 이게 무슨 꼴…… 아, 그러고보니 네가 날 데려온 목적은 이뤘으니까 그 사진 도로 내놔."
"알았어. 그 정도야 뭐…… 앗, 위험!"
"응? 앗!"
내가 품에서 사진을 꺼내주려고 할 때, 갑자기 쓰러진 줄로만 알았던 히트맨이 주희를 향해 총을 겨두고 있는 모습이 보이자 주희를 밀었고 '탕!'하고 총소리와 함께 배에 격한 통증을 느꼈다.
"아직 기절하지 않았나!"
퍽!
"꼬르륵……."
다른 히트맨에게 한 것처럼 다리 사이를 쳐 기절시킨 주희는 쓰러진 나를 부축했다.
"으윽……."
"괜찮아! 야, 정신차려!"
"벼, 병원…… 에……."
"아, 알았어!"
주희가 핸드폰으로 병원에 전화를 거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으음……."
"정신이 들어?"
눈을 뜨니 모르는 천장이다.
희미한 약품 냄새와 새하얀 벽, 그리고 침대의 상태나 이불을 볼 때 적어도 내 방은 아니다. 그럼 여긴 어딜까? 뻔하다. 바로 병원이다.
"주, 희야?"
"응, 나야."
"나도 있어. 대체 어떻게 된거야?"
"아, 아…… 너도 왔구나."
힘겹게 입을 열어 말을 꺼내며 시야에 들어온 인영들을 바라봤다. 좀 흐릿하지만 목소리를 들어보니 주희와 현진이 여기에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도련님! 이 집사가, 이 집사가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집사 할아버지, 진정하세요. 저 아직 안 죽었어요."
"흑흑, 그렇지만 이 집사는!"
아무래도 집사 할아버지까지 왔나보다. 아아, 귀찮아. 이 집사 할아버진 정말로 잔걱정이 많아서 탈이다.
"이 바보얏! 왜 그런 짓을 해서……."
"그치만…… 나도 모르게 몸이 움직였단 말이다……."
"으으, 그렇게 말하니 화를 낼 수가 없잖아……."
서서히 회복되어가는 시신경에 마침내 모여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주희와 현진이를 비롯한 반 학생들에, 담임 선생님까지…… 아무래도 전원이 문병을 온 모양이다.
"괜찮냐?"
"선생님…… 전 괜찮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담임 선생님, 그냥 정 선생님이라고 불리는 우리의 담임은 약 2m 쯤 되는 덩치에 온 몸이 근육질로 뒤덮힌 근육 마초다. 누가보면 체육 선생님으로 착각할 수 있겠지만 담당 과목은 영어다.
흉악한 근육과는 다르게 얼굴은 제법 잘생겼고 학생들을 많이 걱정하는 좋은 선생님이다. 그리고 우리집 사정을 알고 계신 분이기도 하다.
"어떻게 몸을 가눌 수 있겠니?"
"아뇨, 움직이기는 힘든데요?"
"야, 진짜 걱정했다."
"나도 걱정했다. 내가 죽더라도 이현진 암살회 회장으로서 너만큼은 처리하고 떠나려고 했는데 이대로 가야하는지……."
"그게 죽어서라도 이루고 싶은 목표냐!"
"안심하세요, 회장!"
"그렇습니다, 회장. 설사 회장이 없더라도 저희는 끝까지 이현진 암살회의 오랜 숙원을 이루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 노력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역시 저희에겐 회장이 필요합니다!"
"회장, 빨리 나으시고 옛날처럼 다 함께 이현진을 사형시키기 위해 작전을 짜요!"
"사랑합니다, 회장!"
"어이, 겉으로 보면 훈훈하긴 한데 거기에 담긴 뜻이 굉장히 질이 나쁘거든?!"
아아, 이렇게 날 원하는 사람이 많다니, 적어도 이현진 암살회를 괜히 만든 게 아니구나…… 열렬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나를 원하는 이들을 보자 무척 뿌듯했고 가슴이 따뜻해졌다.
"하하, 그래. 나도 재활 훈련하면서 빨리 낳을게. 너희도 열심히 이현진이 염장을 지르려고 하면 재빨리 막아서라!"
"""예스! 유어 하이네스!"""
"아, 모르겠다. 니들 맘대로 해라."
현진은 더 이상의 태클을 포기한 듯, 어깨를 축 내렸다.
잠시 잡담을 나누고 시간이 제법 오래 지나자 그제서야 정 선생님과 학생들을 돌아가보기로 했다.
"그럼 어르신, 지호를 잘 부탁합니다."
"암요! 도련님을 지극 정성으로 모실겁니다. 선생님도 나중에 도련님이 학교로 갔을 때 잘 봐주십시요."
"하하, 맡겨주십시요!"
정 선생님이 나가고, 현진도 나가고, 학생들도 나가고, 주희도 나가려다가 발걸음을 멈추고 힐끔 나를 바라보더니 가까이 다가가 "빨리 낳아!"라고 외친 후 부끄러운 지 얼굴이 새빨게져서 도망쳤다.
끼익.
문이 닫히고, 집사 할아버지가 정 선생님과 학생들이 떠나는 모습을 창문 밖에서 바라본 후 나에게 물었다.
"그런데…… 몸은 괜찮으십니까?"
"집사는 이게 괜찮아보여요?"
"그렇게 보이진 않지만…… 도련님, 그냥 제가 치료하면 안될까요?"
"안돼요. 제가 죽을 고비에 있다는 것을 형님들에게 보여줘야해요. 제가 약하다는 것을 철저하게 보여줘야 형님들이 방심합니다."
"이것 참, 저희 세력이 약하다는 것이 뼈저리게 느껴지는군요."
한숨을 쉬며 집사 할아버지는 창문에 커튼을 치며 말했다.
"도련님의 형님들을 속이기 위해서, 도련님이 직.접. 총.을. 맞.는. 연.기.를. 하시다니."
"후훗, 하지만 이걸로 형님들도 제법 안심했을거에요. 겨우 총알 한 방 맞고 쓰러진 마.왕.족.이라니, 얼마나 우수울까요! 지금쯤 제 소식을 듣고 안심하고 있을 형님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네요."
"하지만 도련님. 그런데 왜 갑자기 움직이기 시작하시는거죠?"
"네? 그게 무슨 소린가요?"
집사 할아버지의 말이 의아해 바라보자 집사 할아버지는 힐끔 밖에서 서서히 멀어져가는 학생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도련님이 용.사.의. 후.손.인 이현진에게 일.부.러. 접.근.한지도 어언 3년째입니다. 저는 도련님이 용사의 후손을 죽여 마.왕.의 정.통.성.을 얻고 마.왕.으로 즉.위.하시려는 줄로만 알았습니다만."
"하하하, 집사 할아버지도 참…… 머리가 안 돌아가시네."
용사의 후손을 죽인다? 그래, 그것으로는 충분히 마왕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마 대부분의 마족이라면 집사 할아버지의 말이 타당하게 느낄 것이다. 마왕이 된다면 모든 마족들의 위에 설 수 있다는 말이니 충분히 매력적인 제안이다. 하지만 겨.우. 그.것. 뿐.이다.
"껍대기에 불과한 마왕의 자리 따위엔 관심 없어요. 제가 원하는 건 진정한 마왕…… 모든 마족들이 통치할만한 진정한 마왕이 되길 원합니다. 그렇지만 제겐 그걸 이뤄줄 세력이 없어요. 저 개인으로는 '형님들'을 능가하지만, 제게 필요한 건 세력이에요. 그리고 지금의 마족들은 형님들을 중심으로 모여 암투를 계속하고 있어요. 마족 중에서 절 따를만한 마족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제겐 세력이 없으니깐 말이죠."
"과연, 그래서 용사의 후손인 이현진을 이용하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예, 그런거죠. 이현진은 강해져야 해요. 그래서 형님들을 모조리 죽이고, 마족들이 저를 통치자로 받들게 만들어야해요. 마족들의 기둥이 두 개나 사라지면, 새로이 의지할 기둥을 찾게되죠. 세력은 없지만 마왕의 혈통인 저와 같은 인물을 말이죠. 큭큭큭."
용사와 마왕의 이야기.
먼 옛날, 이 대한민국에는 사악한 대요괴와 그 대요괴를 봉인한 최강의 퇴마사가 있었다.
그 대요괴의 이름을 지금은 마왕이라 부르고, 대요괴를 봉인한 최강의 퇴마사를 지금은 용사라 부른다.
마족들의 진정한 명칭은 요괴, 요괴라 불렸던 마족들은 대요괴인 마왕을 부활시켜 이 세상을 마족들의 세상으로 만들어주기를 원하고 있다. 때문에 마족들은 대요괴의 힘을 이어받은 자들을 마왕족이라 불리며 마왕족만이 마족들의 유일한 희망으로서 마왕족을 중심으로 모여 세상을 혼란에 빠뜨리려고 한다.
그러나 마왕을 봉인했던 최강의 퇴마사인 용사는 마족들의 목적을 눈치채고, 마왕의 부활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최강의 퇴마사라 불리는 용사 역시 섭리를 거역할 수 없는 인간! 자신의 언젠가 죽을 것을 직감하고 자신의 다섯 명의 아이들에게 각자 다른 힘을 나눠주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이 힘을 합해 마족들의 음모를 막고 마왕의 부활을 막아주기를 바라며 땅 속에 묻혔다.
그때부터 대대손손, 대한민국의 음지에서 용사와 마왕의 암투가 시작되었다.
때론 용사가 이겨 태평성대를 맞이했고, 때론 마왕이 이겨 극심한 혼란을 일으키키도 했다.
그러나 용사와 마왕의 피는 끊기지 않고 계속 이어져왔다. 그리고 오늘에 이르렀다.
"다.른. 용.사.의. 후.손.이 움직이기 전에 이현진을 최강으로 만들겁니다. 이현진은 지금의 저로서는 유일한 희망이라 할 수 있으니까요. 다른 용사의 후손이 형님들을 쓰러뜨려선 안되요, 이현진이 형님들을 쓰러뜨려야 합니다!"
"하지만…… 이현진, 그가 너무 강해지면 나중에 도련님이 마왕이 되었을 때 제일 귀찮은 상대가 되지 않을까요?"
"확실히 그렇겠죠. 마왕이 되면 가장 먼저 죽어야 하는 녀석이 바로 이현진입니다."
이현진은 나의 친구다. 단지 내가 말하는 '친구'가 이현진이 생각하는 '친구'랑은 일반적으로 좀 다른 뜻을 지닌 친구다. 나에게 있어 친구란, '써먹기 좋은 도구'다.
"너무 강해지면 강해진대로 문제입니다. 그 녀석에겐 재능도 있으니 머지않아 형님을 죽일 때가 된다면 저를 능가할지도 모르지요."
"헙! 그, 그럼 안되지 않습니까."
"네, 거의 10%! 3년 안에 놈이 나 이상으로 강해질 확률입니다."
"그럼 지금이라도 죽이는 게 후환을 없에는……."
"말하지 않았습니까! 놈은 제 비장의 카드입니다. 지금은 약하지만 언젠가 제 최강의 무기가 될 남자. 지금 죽여서는 안됩니다."
"그럼 어떻게……."
"뭐, 아무리 강해도 녀석에겐 약점이 있습니다. 바로 자신의 소중한 사람들이지요."
나는 생각만으로도 희열에 몸이 떨려 황홀한 웃음을 지었다. 아마 지금 내 표정은 내가 평소 인간들 사이에서 [연기]를 할 때 보다 좀 더 잔혹할거다.
"놈이 강해지고 마침내 형님들을 죽일 정도가 되었을 때, 그리고 마침내 형님들을 쓰러뜨리고 세상의 평화가 도래할 것이라 기대하며 모두가 기다리는 소중한 집으로 돌아온 바로 그 때! 그 소중한 사람들이 자신에게 검을 겨두고 있다면 어떤 기분일까요? 자신이 믿었던 소중한 사람들이, 내 아래 무릎 꿇고 발에 입을 맞추는 노예가 되어있는 추잡한 모습을 본다면, 그리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 그 녀석에게 제 진실된 정체를 밝힌다면, 얼마나 절망스러울까요……!"
기쁘다. 생각만으로도 쾌락 때문에 가버릴 것 같다. 역시 나에겐 S끼가 있나보다. 남들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이 이렇게 기쁜데, 그게 실제로 경험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역시 평소에 인간들 틈에서 '멍청한 짓'이나 하고 다녀서 조금 욕구불만이 쌓인 듯 보인다.
"큭큭큭, 너무 절망스러운 나머지 자살할지도 모르겠군요. 뭐, 개인적으로는 복수를 외치며 달아나는 편이 좋습니다만…… 그 녀석이 고통스러워하는 표정을 더 볼 수 있으니까요."
하반신이 뻐근하다. 내 분신이 존재감을 과시하며 기뻐하고 있다. 어서 자신의 욕망대로 행동하라고 시키고 있다.
"오오, 과연! 역시 제가 모시는 분은 오직 도련님 뿐입니다. 그런 사악한 발상을 하시다니…… 그런데 도련님. 최근 여자를 쓰시지 않으신 것 같은데 성노를 한 명 데려올까요?"
"으음, 부탁하고는 싶지만 거절하겠습니다. 제 욕구를 풀 상대는 점찍어뒀으니까요."
"그 최주희라는 여자아이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확실히 여마족들과 비교해도 전혀 뒤지지 않는 미모입니다만…… 그런 인간 계집 따위는 차라리 이렇게 빙 돌아서 얻으시는 것보다 마약이나 정신 마법으로 타락시키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마약을 쓰면 금방 망가지고 정신 마법도 최주희 정도의 정신력이라면 불안정합니다. 제가 총에 맞은 이유는 형님들을 방심시키기 위해서라는 목적도 있지만 더 큰 목적은 바로 최주희를 얻는 것입니다. 제가 자신을 위해 총까지 맞아줬으니 마음이 흔들리겠지요. 재밌겠지요? 사모하는 사람이 있음에도 그 사람은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고, 자신을 위해 몸까지 바쳐가며 자신을 지키려는 남자가 있습니다. 두 남자 사이에 마음이 흔들리며 괴로워하고, 고민하는 모습…… 으음, 역시 음심이 동하네요."
"그렇게 말하시니 이 집사도 이해하겠지만, 그래도 역시 그 정도까지 할만한 계집이 아닌 듯 하다는 게 이 집사의 의견입니다."
"뭐, 이해해요. 확실히 인간 계집을 위해 이렇게까지 하는 것은 보지 좋지는 않죠. 하지만 말이죠, 제가 원하는 것은 최주희의 몸이나 마음 뿐만이 아니에요. 최주희 그 자체가 필요해요! 큭큭, 제가 이현진 암살회를 만든 건 아시죠?"
"네에, 그 재미삼아 만든 장난감들을 말씀하시는거죠?"
"맞아요. 하지만 그 조직은 제 마음도 들어가 있어요. 솔직히 부럽잖아요? 아침마다 깨우러 와주는 소꿉친구, 수제 도시락을 만들고 옥상에 올라가 같이 먹는 소꿉친구, 저녁마다 같이 하교하는 소꿉친구…… 전 말이죠. 그런 소꿉친구가 갖고 싶어요."
"소꿉친구로서의 최주희를 원한다, 이 말씀이십니까?"
"맞아요. 처음엔 이현진만을 노린 거였는데, 이현진에게 그런 매력적인 소꿉친구가 보이는 게 아니겠어요? 최근 제 말을 고분고분 듣는 인형같은 성노보다 그런 속성이 붙은 여자애가 끌리네요. 큭큭큭. 또 이런 말도 있잖아요?"
나는 화사하게 웃으며, 우리나라 속담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속담을 꺼냈다.
"남의 떡이 커보인다…… 고요.".
나, 최주희는 남들과 다른 조금, 아니, 아주 많이 특별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주희야, 너는 다른 사람과 다르다."
"주희야, 너에겐 숙명이 있다. 그 숙명을 반드시 받아들여야만 한다."
"너는 네 목숨을 걸어서라도 용사의 수호기사로서, 맡은 역할을 다 해야만 한다."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었던 말. 어머니는 돌아가시던 그 순간까지 어릴 때부터 지겹게 들었던 그 말을 꺼내며 돌아가셨다. 결국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딸에 대한 사랑의 말은 단 한 마디도 없었다.
어린시절, 어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분유를 먹을 때, 나는 쓴 보약을 끓여 먹으며 어머니에게 내 숙명에 대해서 세뇌받았다.
그러니 딱히 용사의 수호기사가 되는 게 싫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보고 싶었다. 내가 지켜야할 사람을, 세상을 구원했다 알려진 그 용사의 후손을!
초등학교 1학년 때, 나는 그 용사의 후손과 만났다. 그리고 첫인상은 실망이었다. 용사의 후손, 이현진이란 놈은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도 모르고, 신비로운 힘이라고는 요만큼도 없는 그저 평범한 초등학생이었다.
그래도 내가 지켜야 할 상대였기 때문에 이현진의 주변을 돌며 이현진에게 접근하는 마물을 모조리 패퇴시켰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이현진과 친하게 됬고, 지금은 거리낌없이 소꿉친구라고 말하지만 그 당시에는 이현진을 좋게 볼 수 없었다.
솔직하게 말하겠다. 나는 부러웠다. 이현진의 자유로움이…… 이현진의 일상이 너무도 부러웠다.
나보다 더 잔혹한 용사의 운명을 가지고 있음에도 나처럼 속박되지 않고 하루하루를 충실하게, 즐겁게 살아가는 이현진이 부럽고, 질투심이 났다.
그런데 언제부터였을까? 현진의 행동에 눈을 땔 수 없었던 것이.
그런데 언제부터였을까? 현진의 칭찬 한 마디가 기쁘게 느껴졌던 것이.
그런데 언제부터였을까? 현진의 괴로워할 때 곁에 있어주고 싶다고 생각한 것이.
그런데 언제부터였을까? 현진에게 그저 그런 소꿉친구가 아니라, 현진의 가장 소중한 사람으로 있고 싶다고 생각한 것이.
정확하게 언제부터 였는지는 모른다. 그냥, 자신이 지켜야할 대상으로 보던 이현진의 모습 하나하나가 뇌리에 깊이 박혔고, 정신을 차렸을 때 그냥 이현진을 좋아하게 되었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사춘기 때 깨달은 이 마음을 간직한 지도 벌써 3, 4년 쯤 지났다.
그리고 그 녀석, 유지호!
유지호에 대한 첫인상은 나와 현진의 사이에 끼어든 굴어들어온 돌, 딱 그 정도였다.
어느 날, 현진이 유지호라는 남자애를 데려와 친구라며 소개시켜 주었을 때는 유독 오래 사귄 자신보다 더 친하고 허물없이 대하는 둘 사이에 질투마저 느꼈지만 같은 남자애니까 괜찮다고 그 마음을 가라앉혔다.
유지호라는 사람이 나와 현진의 일상에 끼어들었음에도, 우리의 생활은 딱히 변한 것이 없었다.
학교에서 수업하고, 같이 점심 먹고, 같이 하교하고…… 거기에 유지호가 끼어들었을 뿐, 달라진 건 없었다.
"아악, 짜증나!"
지가 뭔데, 우리 사이에 끼어든거야!
당장에라도 현진에게 달려가 유지호와 헤어지라고 외치고 싶었다. 그냥 현진에게 다시는 접근 못하게 뒷산에 파묻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유지호를 없엤다간 현진이 슬퍼할테니 할 수 없이 놔두면서 내내 불쾌한 눈빛을 전달했다. 그리고 그제서야 현진과 내가 단 둘이 함께 있을 때 유지호가 접근하지 않게 되었다.
진작에 그럴 것이지.
유지호, 그 녀석과의 인연은 생각 외로 질겼다. 중학교에서 3년, 그리고 고등학교조차 같은 학교였고 같은 반이었다. 말도 안돼! 나야 국가 권력을 사용해서 계속 현진과 같은 반이 되었다지만 그 녀석은 어떻게!
게다가 근 중학 시절 3년 간 유지호는 현진의 친구 자리를 굳건히 지키며 현진은 이제 유지호가 없으면 허전하다고 생각할 정도까지 되었다. 어쩔 수 없이 유지호가 현진의 친구가 된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딱 그 정도로만 인정했다. 그 이상은 인정하지 않아!
현진이의 친구이지만 내 친구도 아니고, 같은 반의 아는 애, 딱 그 정도까지만 인정했다. 그 이상은 절대 인정하지 않을 생각이었는데…….
"하아."
어쩌다보니 현진이를 지키기 위해 마물과 싸우던 모습이 그대로 사진에 찍혀 있었고, 그 사진 뒤에는 학교 인근 공원에 혼자만 오라는 협박이 걸려있었고, 두근거리는 심장으로 기다리고 있었더니 그 사진을 찍은 것은 유지호였고, 유지호의 말을 오해해서 유지호를 무진장 패버렸고, 정신을 차려보니 유지호의 집에서 순정 만화를 읽는 상황이 펼쳐져 있었다.
게다가 나에게 관심이 있다고 놀리기나 하고, 반은 진담이라고 했는데 그때 오만가지 생각이 다 떠올랐었다. 고백을 받은 경험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많다. 하지만 누구도 안면조차 익힌 적 없는 사람들이라 전부 거절했다. 그러나 이렇게 가까이의 아는 사람이 고백했던 경험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알게 된 유지호의 숨겨진 사정, 그런 심각한 상황에 있음에도 학교에서 그런 티도 내지 않고 언제나 그렇게 밝은 표정으로 다니다니…… 유지호에게 동정심이 들었다.
히트맨들이 나타났을 땐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 너무 짜증이 나서 그만 유지호에게 심한 말을 했지만, 유지호는 그런 말을 묵묵히 받아들이고 날 구하기 위해서 방패를 자처했다.
그런 말을 하면…… 도망칠 수 있을리가 없다.
다급히 무기를 찾고 저택을 돌아다녔다. 히트맨과 만날지도 모르지만 그 때는 그 녀석을 구해야한다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그래서 그 녀석이 히트맨의 앞에서 당당하게 날 살리려고 죽음을 받아들였을 때, 저절로 몸이 움직여 몰래 등 뒤에서 기습하고, 히트맨들을 공격했다.
어이없게 자신의 목숨을 버리려고 하는 유지호에게 화를 냈고, 유지호는 내 투정을 다 받아주고 날 구하기 위해서 대신 총에 맞았다.
처음이었다.
난…… 언제나 누군가를 '지키는' 입장에 서있었다.
현진이를 마물로부터 지키고, 평범한 일반인들을 비일상의 괴물들로부터 지키고, 계속 지키기만 하는 삶을 살아왔다.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날 '지켜졌다'.
이런 경험은 과거에도 없었다. 오직 지키기 위한 삶을 살아왔다고 자부하는 내가, 다른 사람에게 지켜지다니…….
"하아, 꼴볼견이야."
그래도, 지켜지는 입장에서 있는 것도…… 딱히, 싫지는 않았다.
"언젠가 현진이도 날 지켜주게 되려나?"
지금에야 현진이가 신급 병기를 사용하지 않고도 쓰러뜨릴 수 있을 정도로 약하지만, 재능이 있으니까 머지않아 강해질 것이다.
"그런데 걔한테는 뭐라고 하지……."
현진이에 대한 생각을 그만두고, 유지호가 떠올랐다. 나를 위해 총까지 맞아준 그 녀석을 이제 어떤 모습으로 만나야하는지…… 유지호를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지고 내내 안타까운 심정이 들었다.
"지호는…… 그런 일상을 살아왔다는건가."
다음에 만나면 좀 더 잘해줘야겠다.
그렇게 결심하며 내일 일찍 일어나 현진이를 깨우러 가야하기 때문에 잠이 들었다. 늦었다간 소이, 그 애에게 현진이를 깨우러 가주는 소꿉친구 포지션의 특권을 빼앗길 수도 있으니.
<이현진 SID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