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주희 SIDE>
정신을 차려보니, 어딘가 익숙하지만 자주 오지 않았던 걸로 기억되는 장소였다.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됬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분명 결과가 있으면 원인과 과정도 있는 법인데 그 원인과 결과 사이에 놓여진 과정만을 싹 지워버린 것처럼 상당히 불쾌한 기분이다.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건 현진이가 세 여인들 사이에 안겨있었던 그 장면, 그것이 원인이 되어 지금의 결과가 이루어졌다.
그 장면을 보고, 말로 설명할 수 없지만 가슴 속에 강하게 억눌려있던 어떤 격렬한 감정들이 순간 화산 폭발처럼 폭발해버렸고, 그 감정이 전신을 지배해 누가 눈을 가린 것도 아닌데 눈 앞이 깜깜해지며 정신이 날아가버렸다.
근처에 나무 의자가 눈에 띄어 지치고 피곤한 마음에 의자에 앉아 고개를 들었다. 집으로 향할 때만 해도 쾌청했던 하늘이 지금은 내 심정을 대변하듯 회색빛으로 어둑어둑해졌다.
그러고보니 오늘 비가 온다고…… 일기 예보 했었나?
아마 비가 온다고 들었다. 그렇다면 지금 내 뺨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는 이 액체의 느낌은 빗방울일 것이다. 내 얼굴이 뜨거워서 그 빗방울이 뜨겁게 느껴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설명되지 않는다.
내가 눈물을 흘릴리가 없어. 이 최주희가! 팔이 잘려나가고 배에 구멍이 뚫렸을 때도 울지 않았던 이 최주희가! 정부 비밀기관 '삼족오' 최고 지휘자의 유일한 딸인 이 최주희가! 용사의 수호기사가 되겠다 맹세한 그 순간부터 결코 눈물을 흘리지 않겠다 맹세한 내가! 이제와서 눈물을 흘릴리가 없잖아…….
그렇지?
톡, 톡.
톡톡톡톡톡톡톡.
쏴아아아─
거봐. 역시 비였잖아. 역시 난 울지 않았어. 이건 비지 눈물이 아니야. 눈물이 아니라고! ……하지만 울고 싶다. 저 하늘에서 쏟아지는 비처럼. 저렇게 펑펑 쏟아지는 비처럼 눈물을 흘리며 울면 좀 기분이 나아질 것 같다.
아, 이때 옆에 현진이가 있어줬다면. 지금이라도 달려와 내 곁에 있어준다면. 날 끌어안아준다면, 용서해줄수도 있는 마음이 없는 건 아닌데…….
옷이 젖어가는 것도 신경쓰지 않고, 차가운 비로 몸의 열기가 급격하게 식어가는 것을 느껴도 난 움직이지 못했다. 그냥 조용히, 비가 마음 속의 끓어오르는 감정도 씻어주었으면 하는 마음에 의자에 앉아 근처에서 비를 맞기 싫어 빠르게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았다.
주변에 인기척이 사라지니 이번엔 머리카락 앞에 방울져 떨어져가는 빗방울을 멍하게 보고 있자니, 문득 옆에 누군가가 앉아있었다.
현진인가? 싶어 고개를 돌리니, 현진이가 아니라 지호가 내 옆에 앉아 나와 같이 비를 맞고 있었다.
현진이가 아닌 것에 좀 실망했지만, 그런 감정보다 안도감, 기쁨, 의아함 등이 더욱 컸다.
"……뭐해?"
어이없다는 듯이 묻자 지호가 날 바라보며 과장되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엇, 주희야. 너가 있었어? 이야~ 전혀 몰랐네. 그런데 여기서 뭐하는거야?"
"……내가 먼저 물었잖아. 여기서 뭐하는거야?"
"으음, 실연의 상처를 매꾸는 중이었달까? 아, 너는 모르지? 내가 좋아하는 사람. 그 사람이 결국 좋아하는 사람에게 고백할 각오가 생긴 것 같아서 이렇게 비를 맞으면 좀 가라앉을까 싶어 와봤지."
바보, 알고 있어. 네가 좋아하는 사람은 나잖아. 4년간 계속 날 좋아해왔다고 했잖아. 너가 하는 말, 다 들었다고.
"그런데 주희는 뭐하고 있어? 비로 목욕하는 취미가 있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혹시 여기에 누구랑 만날 약속을 했다거나?"
"너랑 같은 이유…… 겠지, 아마."
나직히 중얼거리는 내 말의 뜻을 눈치챈건지 지호가 곤란한 듯 뺨을 긁적인다. 그러면서도 입꼬리가 말아올라가져 있는 것이, 내가 차였다는 것에 기쁨을 느끼는 것 같아 지호에게 좀 화가 났다. 동시에 이 녀석이 날 정말로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진짜? 설마…… 으음, 아니다. 이런건 여기서 말할 게 못돼지. 미안하다. 쓸데없는 걸 물어봐서."
"별로, 내가 평소 비 맞는 취미는 없지만 오늘은 여기서 그냥 맞고 싶어."
"으음……."
쏴아아아─
그냥 소나긴 줄 알았는데 의외로 길게 온다. 아니, 여기에서 느껴지는 시간이 길게 느껴지는 건가?
끼이익.
그때, 자동차 소리가 들리더니 빗길을 파해치며 내 앞에 멈춰선 고급차의 운전석에서 본 적이 있었던 지호의 집사 할아버지가 우산을 펼쳐들고 내 앞에, 정확하게는 지호 앞에 섰다.
"아이고! 도련님, 여기서 뭐하고 계십니까! 어서 집에 가시지요!"
"……하하, 걱정시켜서 미안해요, 집사 할아버지. 아, 모처럼 실연 동지를 만났는데, 만난 기념으로 실연의 상처 회복 겸 우리집에 놀다 갈래? 식은 몸도 따뜻하게 데울 겸."
집사 할아버지가 우산으로 비를 막아주며 돌아가자는 말에 지호가 나를 돌아보며 말을 걸어왔다. 그러고보니 지호와 친해지게 된 계기가 이루어진 것도 이 공원의 이 의자에서였지. 바로 얼마 전의 이야긴데 한동안 잊고 있다가 세삼스럽게 떠오른다.
"……됬어."
"야, 그러지 말고. 아, 예전에 그 사진 다 지웠다? 오해하지 마. 그리고 널 어쩌려는 게 아니라, 그냥 널 친구…… 로서 위로해주고 싶어서 이러는거야. 나보고 혼자 집에 가라고? 나보고 이런 차가운 비가 내리는 추운 날에 친구를 버려두고 가는 나쁜 놈이 되라는거냐!"
"아가씨도 같이 가시지요! 도련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데 여기서 아가씨를 두고 간다면 도련님의 집사로서 명예에 흠집이 날 것입니다! 이 할아범도 간곡하게 부탁하겠습니다!"
두 명이서 이렇게 말하니 차마 거절할 수가 없어 고개를 끄덕여 승낙했다.
"알았어."
"좋아, 그럼 얼른 타. 많이 추우니까."
"자, 이 우산을 쓰시고 안으로 드시지요. 히터를 틀어서 따뜻합니다!"
그렇게 나는 하늘이 내려준 운명처럼 두번째로 지호의 집에 가게 되었다.
<최주희 SIDE OUT>
<이현진 SIDE>
"허억, 허억, 허억."
주희가 떠나고, 다급히 옷을 고쳐입고 밖으로 뛰쳐나갔지만 주희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다급히 동네 전체를 뒤지며 주희의 이름을 외쳤지만 주희의 모습은 커넝 머리카락 한 올도 발견할 수 없었다.
어느 새 학교까지 오게 되었고, 학교 주변을 돌아보고 있는데 먼 차도에 정차되어있는 어느 차가 어째선지 눈에 띄었고, 그 차에 타고 있는 주희가 들어왔다.
"주……."
큰 소리로 주희의 이름을 외치려는 순간, 주희의 바로 옆에 타고 있는 인영의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그 인영은 바로 내 친구, 유지호였다.
"지호야……."
멍청하게 지호의 이름을 중얼거리고 있을 때, 신호가 빨간 불에서 파란 불로 바뀌었는지 정차되었던 지호의 차는 다시 앞으로 향해 나아갔다. 차가 저만치 빠르게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난 이유 모를 허탈감과 뭔가를 빼앗긴 것 같은 공허함, 자괴감에 짓눌려 쓰러져버릴 것 같았다.
"어머, 네 친구에게 여자를 빼앗겨버렸네? 후후, 불쌍해라."
"닥쳐!"
등 뒤에 들려오는 여성의 목소리. 난 억눌린 감정을 토해내듯이 크게 소리지르며 성검을 꺼내들어 목소리가 들린 곳을 향해 휘둘렀다. 하지만 정식 검술도 아닌 움직임에 걸려들 정도로 상대는 약하지 않았다. 간단하게 성검을 피해버린 그녀는 얄밉게 싱글벙글 웃었다.
"네가, 네가……!"
"으음, 분명 저 여자애를 친구에게 빼앗기게 한 원인은 반 쯤 나에게 있긴 하지, 후후후. 사과의 말로 네게 한 가지 좋은 정보를 줄게."
닥쳐, 닥쳐, 닥쳐! 이건 모두 저 여자 때문이야. 주희가 상처입은 것도, 내가 이런 더러운 기분이 드는 것도, 모두 저 여자 때문이야! 죽일거야, 죽이겠어. 죽여버릴거야아아아아!
"합!"
"흐음, 약해."
팅!
"윽!"
손짓 한 번에 성검이 나가떨어지며 난 볼품없이 흙과 빗물로 가득한 거리에 쓰러졌다. 하지만 지독한 분노에 지배당하고 있던 나는 좀비처럼 다시 일어서 여자에게 성검을 휘둘렀지만 여자는 몸을 빙글 돌리며 춤추듯이 성검을 피해 등 뒤에서 발차기를 먹여 날 쓰러뜨렸다.
"크으윽!"
"아이참, 네게 좋은 정보 하나를 준다고 했는데 왜 말을 안 듣니? 하아, 이런 고집불통이 싫은 것은 아닌데 이런 상황에서는 참 난감하네."
"닥쳐! 무슨 말을 해도 듣지 않을거야! 이 악마! 악녀!"
"칭찬 고마워? 후후, 그럼 듣지 않아도 들을 수 밖에 없도록 해줄까?"
여자는 내 귓가에 입을 가까이 대고 이성을 잃은 내가 제정신을 되찾을 정도로 달콤한 말을 했다.
"나랑 계약하면. 저 여자애와 다시 친해질 수도 있다고?"
"뭐?"
나도 모르게 솔깃해져 되물었다. 지금 상황으로 주희와 찢어지리라 생각했는데, 주희와 다시 친해질 수 있다고? 그 광경을 들키기 전과 같이 돌아갈 수 있다는 얘기?
"내 능력을 말해줄까? 난 인간의 색욕(色慾)을 지배해. 너희 어머니와 그 꼬마 아가씨가 어째서 그런 상식 밖의 행동을 해버렸을까? 그리고 넌 어째서 아무 행동도 못하고 색욕에 빠져버린 걸까? 그건 바로 내 능력 때문이야. 일정 영역을 지정해 그 영역 안에 존재하는 모든 이의 색욕을 완전히 지배할 수 있는 능력! 때문에 넌 색욕에 지배당했고, 그 꼬마 아가씨는 너에게 처음부터 호감이 있었기 때문에, 너의 어머니는 색욕에 지배당해도 이성을 잃지 않았기 때문에 끝까지 가지는 않았겠지만 꼬마 아가씨를 향한 마음이 그렇게 만든거지. 그 아가씨의 경우는 너무 갑작스러운 침입이라 능력을 발휘할 기회도 없이 떠나버렸지만."
"그래서…… 어쩌라는거지?"
"간단해. 나랑 계약만 해주면 네가 그 여자애랑 사이좋아지는 것은 물론, 어떤 욕망도 받아줄 수 있도록 해줄 수 있어. 그 여자애의 몸을 마음대로 해도 미워하긴 커넝 그것마저 쾌락과 호감을 느끼게 하는 너만의 성노예로 만들 수 있어. 너만의, 너 외에 누구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고 네 말에 지극히 순종하는 강아지처럼, 그 여자애를 조교하는거야. 어때? 괜찮지 않아?"
"주희를…… 내 것으로……?"
한 순간에 피어오른, 검디 검은 욕망. 주희를 내 것으로 만들고 싶다는, 수컷의 어쩔 수 없는 본능이자 늑대 같은 음욕은 평범한 고교생인 나에게 결코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매력적이고 유혹적이었다.
그러나 난 그걸 참고 손에 들린 성검을 몸을 돌림과 동시에 찌르는 것으로 대답했다.
"쳇!"
이번엔 방심했는지 배에 성검이 살짝 긁히자 고통에 신음하며 배를 쥐었다.
"크윽! 용사…… 네 놈!"
"그딴 건 이미 내가 바라는 주희가 아냐! 내가 원하는 건 나에게 순종하는 주희가 아니야. 내가 바라는 것은, 늘 티격티격하고, 아침에 머리를 때리며 깨워주고, 즐겁게 어머니와 소이와 나랑 함께 식사를 하고, 바보라고 말하면서도 일부러 자기 공부 시간을 쪼개주면서 공부를 도와주고, 굉장히 힘든 훈련을 시키지만 날 걱정해주는 그런 주희야! 내 욕망대로 움직이는, 그런 꼭두각시가 되는 주희를 원한 것이 아니라고!"
"……흥, 좋아. 오늘은 이만 물러나지. 하지만 명심해! 넌 언젠가 다시 나를 찾아오게 될거야. 그리고 반드시 나랑 계약하게 될거야. 네가 싫다고 해도, 결국엔 운명이 그렇게 만들거야. 후후후, 그때를 기다리고 있을게? 호호호호~!"
간드러지는 웃음소리를 내며 그 여자는 유령처럼 모습을 감췄다. 이를 뿌드득 갈며 나직하게 분노를 담아서, 그 여자가 없는대도 그 여자가 눈 앞에 있는 것처럼 말했다.
"결코 그럴 일은 없을거다."
성검을 사라지게 하고, 몸을 돌렸다. 집에 가서 어머니와 소이가 어떻게 되었는지 걱정된다.
"주희는…… 네가 감싸줘, 지호야."
나는, 내 소꿉친구 주희를…… 지호에게 부탁할 수 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