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진 SIDE>
"어머, 학부모도 같이 수학여행이라고? 꺄아~ 재밌겠다!"
나잇값도 잊어버리고 방정맞게 폴짝폴짝 뛰는 여인, 그 여인이 바로 내 어머니다. 어머니는 정말로 20, 아니 30년은 젋어지신 것처럼 양손을 맞잡고 뺨을 올리며 환하게 빛나는 전등 밖에 없는 천장을 바라보며 별빛이 담긴 밤하늘처럼 눈동자를 반짝거렸다.
"언니도 차암…… 이런 멋진 이벤트를 준비하다니. 나중에 꼭 고맙다고 연락이라도 해야겠네~!"
어머니가 말씀하시는 언니란 바로 우리 학교의 이사장님, 임세리를 말하며 나의 이모이시다. 하지만 말투도, 얼굴도, '부장'님보다도 더 딱딱한 구석이 있어서 늘 나에게 이모보다는 이사장님이라고 말하라고 시키며, 언제나 내가 복장이 불량하냐느니, 성적이 좋지 않다느니, 문제를 일으킨다느니 여러가지 이유로 야단을 치시고, 내가 세상에서 가장 어려워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런 이모, 아니, 이사장님의 얼음 방벽을 개의치않고 이래도 되는 건가 싶을 정도로 친근하게 대한다. 이사장님이 부끄럼쟁이라나, 뭐라나…… 그런 말을 하면 늘 이사장님은 불쾌한 듯 미간을 찡그렸지만 그래도 가끔씩 어머니와 연락을 주고받고, 어머니가 뭔가 부탁을 하면 묵묵히 도와주고, 시간이 빌 때면 집에 찾아와 식사까지 같이 하고 커피를 마시며 어머니의 수다를 듣다가 가시는 것을 보면 아주 싫은 건 아닌 것 같았다.
아니, 그보다…….
"어머니, 여긴 대형마트입니다. 사람들이 이상하다는 시선이 집중되고 있어요."
"어머, 내 정신 좀 봐. 너무 기대가 되다보니, 호호."
사람들의 이상한 시선…… 이라기보다, 철딱써니 없는 누나를 돌보는 어른스러운 남동생인 남매를 보기 좋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훈훈하게 바라보시는 분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소이는 이미 저만치 멀어져 시식 코너의 만두를 먹고 있다. 아, 그거 김치 만둔데.
"……매워."
소이가 다급히 내 쪽으로 빠른 걸음으로 걸어와 내 옷깃을 잡으며 말했다.
"소이도 슬슬 김치에 적응이 될 때가 되지 않았을까?"
"매운 것보다 단 것."
"단 것만 많이 먹으면 살쪄."
"괜찮아. 난 아무리 먹어도 살이 안찌는 체질이야."
아, 몸무게를 조절하느라 먹고 싶은 것도 먹지 못하고, 하루하루가 자기 자신과의 전쟁이며 죽을 힘을 다해 식욕과 싸우는 전 세계의 모든 다이어트 여전사들이 들으면 임소이 암살회를 만들어 버릴 듯한 무서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소이다. 예전에 소이가 이런 말을 꺼냈을 때 주희, 어머니, 때마침 우연히 거기에 있던 이사장님마저 불타는 눈빛으로 소이를 봤었지. 소이가 목숨의 위험을 느끼고 재빨리 피신해서 무사히 넘어갔지만.
"랄라라~♪ 그럼 도시락을 싸는 게 좋을까~ 아들이랑~ 나랑~ 놀라간다~ 이얏호♬"
가벼운 발걸음으로 깃털처럼 날아다니시는 것이 어지간히도 기분이 좋으신 모양이다.
"……현진."
"응?"
"난, 못 가?"
"아아, 정말 미안해. 소이는 우리 반 학생이 아니니까……."
"……괜찮아."
아유, 우리 소이는 참 착하기도 하지. 미안함과 아쉬울 텐데도 묵묵히 참는 소이가 대견스러워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소이는 기분 좋다는 듯이 약하지만 미소를 지었다.
"현진아, 빨리 와~ 내일 출발이니까 챙길 거 많아!"
"네에! 가요! 소이야, 가자."
"응."
얼른 카트를 밀며 소이와 함께 어머니가 있는 쪽으로 달리다가, 나는 의외의 인물과 마주했다.
"앗."
<이현진 SIDE OUT>
<최주희 SIDE>
"앗."
예상 외의 인물과 만나버리는 바람에 놀랐다. 하지만 금방 납득했다. 하긴, 내일이 수학여행 출발이고 학부모 동참도 가능하다니까 당연히 아줌마랑 함께 장보러 왔겠지. 현진이네 아줌마는 물론 같이 가는건가? 뭐, 가지 않으면 오히려 곤란하지만. 내가 아니라 아빠가.
"아, 안녕? 또 만나네."
"으, 응."
"……."
"……."
서로 어색하게 대하다가 결국 고개를 돌린다. 아아, 역시 이렇게 되버렸나?
나와 현진이의 어색한 관계는 그 날의 충격적인 모습을 본 이후로 계속되고 있다. 나중에 찾아와서 현진이가 그 여마족의 함정에 빠져서 그렇게 되어버렸다고, 그리고 어머니와 소이는 그때 그 일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으며 한심한 모습을 보여서 미안하다고 했다. 오히려 나야말로 그때 무작정 도움을 주지 못하고 도망쳐서 미안하다고 했고, 우리는 화해했다.
……그렇지만 화해한 건 화해한거고, 어색한 건 어색한거다.
최근에 나는 아침마다 현진이의 집에 가지 않게 되었고, 가끔씩 가도 아줌마와 식사를 하다가 떠날 뿐이다. 현진이랑 대화도 나누긴 하지만 필요에 따라서일 뿐, 예전에 비하면 하루에 몇 마디도 나누지 못하고 해어진다.
"얘들도 참, 대체 뭐하는거니? 설마 서로 싸웠니?"
"아, 아뇨! 싸우다뇨……."
"마, 맞아. 우린 싸우지 않았어."
단지 미치도록 서로를 마주보는 것이 어색할 뿐이다.
"어휴, 아이들 일에 어른이 나서는 것도 보기 좋지 않으니까 가만히 있다만…… 현진아, 주희야. 난 현진이와 주희가 예전의 모습으로 되돌아왔으면 하거든? 그러니 문제가 있으면 답답하게 쌓아두지만 말고 허심탄회하게 얘기를 나눴으면 좋겠구나."
"예에……."
"알겠어요, 아줌마……."
"알면 됬다. 자~ 그럼 현진아! 현진이는 치즈 김밥과 참치 김밥 중 뭐가 제일 좋아?"
"둘 다 괜찮은 것 같은데요?"
"그럼 둘 다 하는 걸로 결정! 어서 다음, 다음으로~! 자, 주희도 어서! 필요한 게 있으면 이 아줌마가 내줄게!"
"아니에요. 그럴 필요는…… 아빠에게 받은 돈도 있고."
"괜찮아, 괜찮아. 이웃 좋다는 게 뭐겠니?"
진지하게 우리를 걱정해주고, 우리가 어색하지 않게 과도하게 활기찬 목소리로 우리를 이끈다. 정말로 아줌마에게는 이길 수가 없다. 나와 현진이는 피식 웃고 아줌마를 따라갔다. 이 일로 현진이와 나 사이의 어색한 관계가 조금은 풀렸기를…… 하지만 아줌마가 없을 때는 다시 어색하게 될 것 같다.
그건 어쩔 수 없겠지. 평생 고쳐지지 않고 이대로 관계가 멀어질지도 모르고, 어떤 사건으로 다시 친해질 수도 있다. 그렇지만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건, 현진이네 아줌마야말로 나의 우상이라는 것이다. 그것 하나만큼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지갑을 깜빡 잊고 와서 현진이네 장까지 전부 계산해서 카드를 긁게 된건 좀 어떨까해요, 아줌마.
아줌마는 미안하다고 말하며 나중에 갚고, 우리집 도시락까지 전부 해주겠다고 말하자 돈은 갚지 않아도 되니까 도시락으로 충분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특히 아빠의 도시락을 많이 싸달라고 했다. 아빠는 대식가니까 말이다.
현진이는 내 말의 뜻을 짐작한 듯, 쓴웃음을 짓고 아줌마는 활기차게 '풀코스로 만들어줄게!'라고 외치셨다. 나는 앞에서 인사를 나누며 헤어졌고 안으로 들어왔다.
"다녀왔습니다!"
"우리 공주님 왔구나?"
빙긋 웃으며 얼른 안으로 들어오려면서 내가 든 짐을 들어주시는 아빠. 그런 아빠에게 나는 좋은 소식을 알려주었다.
"아빠, 내일 현진이네 아줌마가 도시락을 싸준데요."
"좋아쓰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으!"
내 말에 곧바로 무릎을 꿇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아빠. 정말로 이 인간이 일급 기밀 조직, 삼족오 최고 지배권을 가진 삼족오의 대장인지 의심이 간다.
"게다가 아빠의 도시락은 특별히 많이 싸달라고 했어요."
"우리 공주님, 장 보느라 많이 힘들지? 어서 안으로 들어가렴. 아, 용돈 필요하지? 한 3, 400만원 줄까? 가지고 있는 스마트폰, 최신폰으로 바꿔줄까? 우리 공주님이 원하는 거라면 집이라도 사줄게!"
"기쁘다는 건 아는데 정신을 차리세요, 아빠."
웃통을 벗고 하늘을 향해 손을 뻗으며 고개를 들어 [나는 인생의 승리자다!]를 온 몸으로 표현하는 포즈를 취하는 아빠가 쪽팔려 얼른 부엌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식모 아줌마에게 내일 도시락을 부탁하고 위로 올라갔다. 아줌마가 도시락을 싸주겠다고 했지만, 보나마나 김밥 뿐일테니 그냥 다 아빠에게 줘야겠다. 아빠라면 아줌마의 도시락 하나에 100만원을 주는 한이 있어도 사고 싶어할 테니까. 음, 아무리 생각해도 난 정말 효녀다.
"그 사랑 때문에 이런 짓을 벌인 것도 우숩지만."
집에 돌아오자마자 아빠에게 따져서 알아낸 이번 수학여행의 진실. 그것은 바로 아빠의 연애 작전 때문이었다.
누구라도 짐작하겠지만, 아빠는 현진이네 아줌마를 좋아한다. 엄청 사랑한다. 아빠는 어머니를 잃었고, 현진이네 아줌마도 아버지를 잃었다. 게다가 현진이네 아줌마는 엄청난 동안의 미인! 아빠가 아줌마에게 빠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래서 나는 그런 아빠를 응원하고 있다.
……물론 아빠와 아줌마는 엄청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과 성공할 리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벌써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거의 10년 가깝게 그 감정을 품고 있었으나, 현진이의 둔감이 아줌마에게 유전된건지 아빠의 마음을 한 번도 눈치채지 못하고 그저 좋은 이웃으로만 알고 있다. 그 때문에 늘 낙담해서 왠지 나를 보는 것 같아 아빠의 응원을 그만둘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아줌마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겠다는 각오를 하고, 이사장님께 사정사정해서 우리 반의 학부모 동참 2달 빠른 수학여행을 알린 것이다.
또 이렇게나 빨리 가게 된 이유가, 자신의 휴가에 맞춰야해서 어쩔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 바보 같은 아버지 같으니라구!!
-...라는게 이유인데 어떻게 생각해?-
-그 때문이었구나. 즉, 네 아버지가 모든 악의 근원이라는거네?-
-ㅎㅎ 그렇게 돼나?-
-응, 나 집에 돌아오자마자 곧바로 짐 싸느라 정신이 없었다구.-
-미안, 우리 아빠 때문에.-
-할 수 없지. 기왕 이렇게 된 거, 2달 빠른 수학여행을 최대한 즐겨야지. 어른의 연애사업은 스케일이 크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알게 되었어.-
-딱히 어른이라기보다는 우리 아빠이기 때문에 이런 바보 같은 억지가 통용될 수 있었던거지.-
-그보다 너네 아빠도 참 대단하다. 혹시 우리 집안보다 더 대단한 거 아냐? 이사장님의 마음을 움직이다니, 혹시 대기업 사장님이라도 돼?-
-아하하, 이제 짐 싸고 자야겠다. 그럼 내일 보자.-
-ㅋㅋ 그럼 잘자, 내 사랑. 쪽!-
-그런 말 하지마~ 괜히 소름 돋아.-
-그랬어? 하하, 좀 느끼했나?-
-응.-
-하지만 이게 진짜 내 마음이라는 것만 기억해주고, 내일 보자.-
-응, 내일 봐.-
"후아아……."
새빨개진 뺨 위에 손을 올리고 부끄러움 때문에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역시 지호에게 이런 말을 들으면 부끄럽다. 말이 아니라 카톡이지만 부끄러운 건 부끄러운 거다.
"어째 요즘 현진에게 예쁘다는 말을 듣는 것보다 지호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듣는 게 더 기뻐졌어."
현진이를 좋아하는데, 역시 한 번이라도 몸을 허락하면 마음도 따라간다는 말이 사실인가보다. 게다가 주말마다 그렇게 내 몸을 괴롭혔으니…… 순결은 지키고 있지만 살이 섞일수록 지호가 주는 쾌감에 뜨거워지고, 점점 지호의 것이 되어간다는 생각을 안할 수가 없다.
"아, 몰라. 잠이나 자자!"
짐은 다 싸놨고, 알람도 맞췄다. 알람이 고장나고, 하늘이 무너져도 아빠가 반드시 내일 정시에 날 깨워서 일찍 학교로 달려갈테니 늦잠을 잘 걱정은 아예 없다.
……문제는, 심장이 두근거려서 쉽게 잠이 올 것 같지가 않다는거다.
주희와의 카톡을 끝내고 스마트폰을 책상 위에 올려둔 후, 침대에 누워 골똘히 앞으로의 계획을 생각하다가 문득, 슬슬 '때'가 되었다고 생각해 몸을 일으켰다.
"응? 도련…… 주인님. 어디 가십니까?"
"그냥 계속 도련님이라고 불러도 돼. 잠깐 밖에 누굴 좀 만나고 올게."
"이런 밤에요?"
"아아, 이런 밤이 아니면 만날 시간이 없어서 말이야."
창문을 열고 허공 위에 발을 내딛자 동시에 등에서 날개가 돋았다. 마인처럼 박쥐같은 날개가 아닌, 순수하게 마기로만 뭉쳐져 이루어진 검은색의 날개, 진정한 마족의 힘을 상징하는 마족만의 날개였다.
"금방 올거야. 아마 한 1시간 정도?"
"예, 그럼 다녀오십시요."
"너도 그만 자라고. 지금은 인간이니까 내일 일찍 일어나려면 말이지."
"황송하신 말씀, 감사합니다."
규수에게 염려의 말을 전하고 나는 곧장 날개를 펼쳐 하늘을 날아올랐다. 보통 차에 비하면 충분히 빠르지만, 일반적인 마족들의 속도랑 비교하면 중급 마족의 평균 속도와 비슷해서 스피드 만큼은 자존심이 상할 정도로 느리다. 이 부분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내 능력은 전투 전용의 마기가 아니어서 어쩔 수 없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렇게 천천히 내려온 곳은 바로 제법 익숙한 집이었다. 그 집과 옆집을 보니 눈 앞의 집 안에 머무는 거주자들은 전부 자고있는 듯, 모든 불이 꺼져 있었다. 옆집은 1층에 불이 환하게 창분을 통해 밖으로 비추고 있었지만 신경쓸 일이 아니다. 내가 원하는 건 눈 앞의 집에 있는 거주자 중 1명이니까.
보자…… '그녀'는 어디에 자고 있지? 1층? 2층?
뭐…… 일단 뿌려대면 알겠지. 저 옆집사람이 눈치채지 못하게 아주 약하게, 집중해서 옆으로 퍼지지 않게 조절해서, 집 전체에 뿌렸다. 나의 마기를.
찰나에 불과했지만 틀림없이 느꼈을 것이다. 그녀는 마기에 민감하니까.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되겠지.
아, 모습도 감춰야지. 처음부터 내 모습을 보이면 후환이 걱정되니까.
내 얼굴 윗부분을 고밀도의 마기를 압축시켜 만든 가면으로 가리고 잠시 후, 역시 내 예상대로 조용히 문이 열리며 '그녀'가 나타났다.
"당신은……."
경계심과 적의로 가득한 눈빛으로 날 째려보는 그녀. 그녀는 주변에 마물들을 소환해 내 주변을 포위했다. 과연 보기 드문 마물 테이머의 재능을 가진 여자아이답다. 하지만 그녀에게 실책이 있다면, 마족 앞에 마물들을 내보냈다는거다.
"복종하라."
털석.
털석.
내 말 한마디에 마물들이 저절로 고개를 숙인다. 그녀가 경악한다. 그녀로서는 처음 경험하는 일일 것이다. 어째서 테이머인 자신의 명령을 마물들이 듣지 않은지 궁금할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모른다. 마물이 마족들에게 굴복하는 것은 본능, 토끼가 아무리 훈련을 받아도 사자나 호랑이에게 덤비지 못하듯, 그들 역시 본능적으로 이 곳에서 가장 강한 자의 마기를 느끼고 싸울 의지를 잃고 만 것이다.
"상대가 나빴군, 마물 테이머."
"크읏, 마족……."
"어느 정도 맞다고는 해주지. 마기를 뿌린 존재가 마물이라고 착각했나? 그래서 용사를 깨울 필요도 없이 자기 혼자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건가? 그게 아니라면, 내 마기에서 강함을 눈치채고 날 다른 곳으로 유인하려고 나왔나? 자신의 소중한 집에 피해를 주기 싫어서?"
"웃!"
그녀가 움찔 몸을 떤다. 아무래도 내 말이 정곡이었던 모양이다. 내 말의 나중에 반응했으니 후자 쪽이 더 가능성이 크겠지. 모두 예상한 그대로다.
용사의 후손이란 녀석은 아직도 많이 부족해 마물의 마기 정도는 느낄 수 있어도, 미약한 마기는 느낄 수 없다. 게다가 평범한 인간인 놈의 어머니 역시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남은 1명은 다르다. 그녀는 마물 테이머, 누구보다 마물과 가까이 하며, 마기를 느낀 그녀다. 내 마기를 눈치채고 전자든 후자든 그녀만 나오게 만들었다.
나는 그녀를 안심시켜주기 위해서 빙긋 웃음을 지어주었다.
"괜찮다, 소녀. 난 별로 그 집에 관심이 없어. 내가 관심이 있는 것은 너다."
"나?"
"그래, 넌 기억상실이지?"
그녀, 임소이의 두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진다. 그 녀석, 이현진에게도 들었다. 임소이, 마물로부터 이현진이 구해준 것이 계기가 되어 집에 머물고 있다는 소녀. 게다가 그 소녀는 기억상실이라 과거도, 이름도, 어떤 단서도 몰라서 어머니가 이름을 지어주고 같이 생활하게 되었다는 말을.
"날, 알아?"
"안다.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지. 너의 과거를, 너의 진정한 이름을, 그리고 너의 정체를!"
내 말에 침을 삼키는 소이. 소이는 떨리는 눈동자로 가면 속의 내 눈동자를 직시한다.
"알고 싶지 않나? 네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네가 어떤 이유에서 여기까지 왔는지, 네가 왜 기억상실에 걸려버린 것인지."
"알고…… 싶어."
"날 따라와라. 그럼 알려주지. 자, 이쪽으로 와라."
마치 3류 유괴범처럼 양 팔을 벌려 손짓하는 나에게 소이는 대놓고 수상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자신의 기억을 되찾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나에게 다가왔다.
난 소이의 등을 꼬옥 잡았다.
"그만해, 안지 마, 싫어, 소리지른다 이 페도필리아."
"마지막은 좀 심하지 않아?!"
"기분 나빠. 몸으로 강간당하는 것 같아서 불쾌해."
"크윽, 엄청난 독설…… 소녀로군. 어허허허."
계속 안고 있다간 안고 가는 내내 정신 공격이 계속될 것 같아서 하는 수 없이 안고 가는 건 포기하고 손만 잡았다.
"그럼 가도록 하지."
"빨리 가. 손 기분 나빠."
쿨럭! ……크으, 이건 엄청난 굴욕! 젠장, 난 변태가 아니란 말이다! 요 맹랑한 계집애 같으니, 으쓱한 곳으로 가기만 하면 반드시 이 굴욕을 씻어주지!
"그럼 간다."
내가 날개를 펼쳐 날아오르자 소이가 깜짝 놀라 내 손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꼭 잡았다. 후후후, 무섭냐? 무섭지 요 녀석아! 이렇게나마 작은 복수를 해보는 나였다.
곧장 내가 도착한 장소는 사람이 거의 다니지 않는, 원래 집에서 제법 떨어진 뒷골목길이었다. 그 근처에서 하기에는 강자들이 눈에 띄어서 어쩔 수 없이 멀리까지 와버렸다.
"그럼 알려줘. 내가 누군지."
소이는 불안한 듯,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도 애써 의연해하며 묻는다. 과연, 이 정도로 기죽지 않겠다는 건가? 좋은 자세다. 하지만 이 녀석은 좀 알아줬으면 한다. 칼자루를 쥐고 있는 것은 그녀가 아니라 나임을.
"얼마 줄래?"
"……뭐?"
"네 기억 되찾아주는 값으로, 뭘 줄래?"
소이가 우물쭈물하며 당황한다. 그런데 당황하는 모습이 은근 귀엽다. 아, 왜 심장이 이렇게 두근거리지?
"나, 돈 없어."
"어라? 그럼 곤란한데. 거래를 할 수가 없잖아?"
"가르쳐 줘. 나중에 반드시 갚을 테니까."
소이가 다급히 내게 다가와 옷깃을 잡고 사정한다. 으음, 무표정 소녀인 소이의 애궐하는 표정이 내 장난끼와 가학심을 일으킨다.
"네 신용을 어떻게 믿고? 나중에 네 과거의 기억만 되찾고나면 입 싹 씻을 줄 어떻게 알고?"
"저, 정말이야. 믿어줘."
"믿으라고? 어떻게? 처음 만난 사이에, 서로 싸울 뻔하고, 나에게 독설까지 날린 녀석을 어떻게 믿고?"
"우욱."
아, 울려고 한다. 이러다가 진짜 버릇 되겠네.
"뭐, 그렇다면 말이지. '오빠'라고 불러봐."
"하?"
어이없다는 눈초리로 한 걸음 뒤로 물러서는 소이. 어이, 난 변태가 아냐! 변태라도 난 변태라는 이름의 신사다! ……라는 건 농담이다.
"해봐. 한 번만 나에게 오빠라고 불러주면 네 기억을 되찾게 해줄테니."
"우우, 우욱."
"자아~ 딱 한 번만 하면 돼~! 오빠~ 라고."
"우우…… 오, 오……."
"오, 뭐?"
"오…… 빠……."
"아, 잘 안 들리네~ 뭐라고?"
"오빠……."
아직도 만족스러운 목소리가 아니지만 이 정도로 거부감을 극복하고 나에게 오빠라고 까지 불러줬으니 그만 놀려볼까나?
"됬지…… 가르쳐줘. 내 기억을…… 내 비밀을……."
그렇게나 과거가 알고 싶었구나, 이 아이는…… 그럼 당연히 가르쳐줘야지.
나는 바로 허리를 숙여 소이와 얼굴 높이를 맞춘 뒤 그대로 돌진해 입술을 부딪쳤다.
"읍!"
쪼옥~!
진하게 키스를 해주고 입 안에 혀를 집어넣는다. 소이는 멋대로 입 속에 침투하는 혀를 막아낼 생각도 못하고 내 혀에 맞춰 움직였다. 소이는 즉시 손을 움직여 날 밀쳐 도망칠 수도 있었을텐데 움직이지 못하고 내 키스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쩝…… 츄릅…… 쭙쭙, 쪼옥~ 할짝…… 츄릅…… 춥춥…….
"아웅…… 흐응…… 하웁, 으응……."
내 키스를 받아들인 직후, 입 안에서 혀를 빼고 서로 얼굴을 벌렸다. 소이의 입술에는 침이 질질 흐르고 있었으며 눈동자는 풀려있었다. 으음, 이걸로 된 것 같다.
잠시 후, 두 눈동자에서 다시 생동감이 넘치기 시작하더니 얼굴이 새빨개져서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그리곤 소이는 땅을 박차올라 내 위에서 날 덮치며 말했다.
"오빠, 오랜만이야!"
임소이…… 그녀의 본명은 십호(十號). 애칭은 시호. 내가 과거, 정체불명의 조직에 납치되어 실험체로 있었을 때, 나와 함께 있었고, 나와 함께 그곳을 탈출하고 줄곧 나와 함께 했던, 내가 이현진에게 보낸 나의 귀여운 첩자 여동생이었다.
그리고 푸르게 변해버린 피부의 감촉을 느끼며, 등에 돋아난 날개를 보고 엉덩이뼈에 솟은 꼬리를 쓰다듬으며, 나는 간만의 재회에 기쁨의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이다, 우리 시호."
빙긋 웃으며 마인이 된 시호를 품에 안고 부드러운 머릿결을 쓰다듬어주었다. 내 손이 그렇게 기분 좋은지 시호의 꼬리가 강아지 꼬리처럼 세차게 흔들린다.
그런데 갑자기 시호가 '핫!'하고 뭔가 떠올리고 바로 강하게 날 밀쳤고 난 무방비한 상태에서 맞은 일이라 멀리 날아가 땅바닥에 처박혔다. 내가 어이없어하며 시호를 보는 데 시호는 양 팔을 꼬고 뺨을 부풀려 자신이 삐졌음을 온 몸으로 표현했다.
"시, 시호야. 갑자기 왜 그래? 나에게 뭐 섭섭한 거 있었어? 아까 놀린 것 때문에 그래?"
"그게 아냐! 오빠가 놀린 것은 오빠 나름대로의 날 향한 애정 표현이었으니까 상관없어! 오빠, 정말로 내가 화가 난 이유를 몰라?"
"어, 그게……."
내가 필사적으로 과거 일을 떠올리며 내가 도대체 시호에게 뭘 잘못했는지 떠올렸다. 떠올리지 않으면 시호의 분노 게이지는 더더욱 높아지고 마침내 날 죽일지도 모른다. 거짓말 아니라 진짜다. 총 11번째 시호에게 살해당할 뻔한 경험이 떠올 몸서리가 처졌다.
"아, 내가 오랫동안 찾아오지 않은 것 때문에 그래?"
"……그건 좀 화났지만, 괜찮아. 오빠의 부탁이니까, 당장 정신세계 밖으로 나가 오빠를 찾아가고 싶었지만 나, 열심히 참았어."
"그럼 그 일을 칭찬해주지 않아서? 지금 해줄까?"
"해줘! 해줘! ……아, 아니. 해주는 건 좋지만 그것 때문이 아냐."
그럼 대체 뭐…… 앗, 설마!
"그…… 네 다른 인격이 이현진을 사랑하게 만든 것 때문에 그래?"
"이제 알았구나? 맞아, 오빠. 난 오빠 말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 오빠를 위해서라면 오빠의 침이나 정액으로 범벅이 된 밥도 매일 맛있게 먹을 수 있어. 오빠가 발을 핡으라고 하면 기꺼이 엎드려서 하루종일 발만 핡아도 돼. 오빠가 죽으라고 하면 오빠가 기뻐할만한 방법으로 어떤 죽음도 기꺼이 맞아들일 수 있어. 오빠를 위해서 난 오빠 전용의 육변기가 되어도 상관없어. 난 오빠의 도구가 되어 오빠를 위해, 오빠에 의한, 오빠만을 위한 삶을 사는 일에 굉장히 만족해. 그것을 위해서라면 지금 즉시 내 또 다른 인격과 친한 사람들을 모조리 베어도 괜찮아. 하지만 오빠, 오빠를 위해서 정말 뭐든지 기쁜 마음으로 목숨을 걸고 할 수 있는 나였지만 도저히 견디기 힘든 일도 있었어. 바로 오빠가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했던 거야! 나 자신이 너무 혐오스러워, 한때 다른 남자를 좋아하고 반응했던 이 몸을 산산조각내고 싶어! 하지만 참고 있어, 이 몸을 없에버리면 다시는 오빠를 만나지 못할 테니까. 그래서 난 그 개자식에게 눈이나 손으로 머리나 몸을 희롱당했을 때, 곧바로 밖으로 나와 그 숫캐의 냄새가 사라질때가지 계속 닦고 닦았어. 계속계속계속계속계속……."
……큰일났다. 한동안 만나지 못했더니 지병인 [병명:얀데레]의 증상이 더 커졌다. 얘 진짜 무서워. 조용한 목소리로 검은 오오라를 풍기며 점점 눈동자에 빛이 사라져가는 시호는 아무리 봐도 제정신이 아니다. 그런데도 차마 얠 버리지 못하는 내가 정말 불쌍하다…….
만약 내가 얠 버리면 곧바로 날 죽이겠다고 달려들 것 같아서 버리지도 못한다. 젠장…….
어쩔 수 없이 나는 격화되는 시호의 광기를 가라앉히기 위해서 치료 행위를 위해 약을 줄었다.
"시호야?"
"왜, 오빠?"
"키스할레?"
"응응!"
재빨리 화사한 표정이 되어 나에게 날아와 내 입술을 그대로 덮치는 시호다. 시호는 내 입술을 자신의 입술과 맞추더니 곧장 강한 흡입력을 발휘하여 쪽쪽 빨았다. 내 혀도, 침도, 입 안의 불순물도 모두 사랑스럽다는 듯이 자신의 혀로 깨끗이 칫솔질을 하는 것처럼 빠르게 닦고 삼켰다.
"우음…… 츄릅…… 쪽, 쩝쩝, 츄르릅…… 으음…… 하웁, 아앙……."
이러다간 몸 안의 피까지 전부 빨아먹을 것 같아서 다급히 시호를 입술에서 빼려고 했지만, 시호의 입술은 접착제라도 붙인 것처럼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읍, 우웁! 흡! ……쮸읍, 쮸읍, 주륵, 츄르릅…… 하웃…… 흐음……."
할 수 없다. 여기선 시호의 흡입력을 줄이기 위해서 특단의 조치를 취하는 수 밖에…….
나는 손을 아래로 내려 시호의 치마 안으로 손을 넣었다.
"아학!"
치마 속의 흥건히 젖은 팬티 위에 드러난 콩을 만져주자 마침내 시호가 등허리를 젖히며 비명을 지른다. 아, 드디어 떨어졌다. 그런데 이번엔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내가 치마 속으로 손을 빼려고 했는데 시호가 양 손으로 내 팔을 꼭 잡고 놓아주지 않는다는 거다.
시호는 물기로 가득한 눈빛으로 달콤한 목소리로 애궐했다.
"……더 해줘."
더 해주지 않으면 죽인다는건가…….
차마 시호의 말을 거절할 용기가 없어 팬티 안에 손을 집어넣고 시호의 갈라진 틈 사이로 질 입구를 찾아 그래도 손가락을 넣자 기다렸다는 듯이 시호의 질벽이 강하게 내 손가락을 조였다. 오오, 여전히 시호의 질 안은 용광로처럼 뜨겁고 쫄깃하고 부드러운 명기다.
"흐읏, 더, 더 손가락 넣어줘……."
시호의 부탁을 듣고 난 검지 옆의 중지까지 전부 넣어주었다. 시호의 자지러질 듯한 목소리가 더 커졌다.
"아흐흑!"
"우리 시호, 참 귀엽구나. 시호는 나에게서 느낄 때가 제일 예뻐."
"으응…… 헤헤, 기뻐. 나도 오랜만에 느끼는 오빠의 손길이 좋아아……."
팬티 속에 들어간 내 손이 붙어있는 내 팔에 미성숙한 가슴을 올리고, 얼굴의 뺨을 비볐다. 달아오른 얼굴로 고양이처럼 달라붙는 시호의 모습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귀여움의 극치였다. 정말 이 아이의 '정신병'만 아니었다면 이현진 따위에게 주지 않는건데…….
"손가락 하나 더 넣어줄까?"
"응!"
기쁨의 외침에 곧바로 무명지까지 넣어주는 친절한 서비스로 쾌락의 선물을 제공해주었다. 그 선물이 너무 기쁜지 시호는 폴짝 뛰어올랐다.
"하아아아앙~!"
쮸욱, 찌걱, 찌걱, 찌걱.
"핫! 웃! 으응! 히잇!"
손가락 3개를 밖으로 빼내고, 집어넣는 것을 반복하자 금세 질 안에 마법의 샘처럼 꿀물이 넘처흘렀고, 손가락을 타고 손바닥 전체를 더럽혔다. 하지만 그것에 그치지 않고 시호의 손이 내 팔을 찢을 듯이 강하게 잡아았다.
"더! 더! 더 해줘! 하윽! ……오랜만의 오빠의 손가락, 더, 더 느끼게 해줘! 하악! 흐윽! 내 보지, 마구 엉망진창으로 만들어줘어어어어!"
"시호는 정말 음란한걸?"
"시호를…… 아흣! 음란하게 만든건…… 히잇! 오빠잖아…… 하윽! 하악, 하악."
"그렇네. 시호를 이렇게 만든 건 나였지? 그럼 이 음란한 여동생을 위해서 이 오빠가 절정의 쾌락을 가르쳐줄까나~!"
"고마워, 오빠! 하윽! 이런 음란한 여동생을 위해…… 히익! 아흣! 오빠가 수고를 해줘서…… 히잇! 으흑…… 우욱!"
나는 시호는 바닥에 눕히고 더더욱 손의 반복을 빨리했다. 그러자 점점 시호의 눈동자가 쾌락으로 인해 까뒤집혀지고 흰자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절정에 가까워졌나?
질척 질척 질척, 찌걱 찌걱 찌걱.
"자아, 이제 가라!"
"가, 가아아, 가아아아아아아아앗─!"
시호의 몸이 진동하며 시호의 눈동자가 흰색이 되어 고개를 떨궜다. 오랜만에 느끼는 내 손가락에 쾌락의 극한을 느낀 것 같다. 겨우 색마기를 10% 사용했을 뿐인데, 이 정도라니…… 100% 사용하면 쾌락사(死) 하겠다.
나는 시호의 팬티에서 손을 빼서 시호의 끈적끈적한 애액으로 잔뜩 젖은 손가락을 시호의 입 위에 올려놓았다. 자신의 애액의 향기를 맡자 정신을 차린 시호가 고개를 들어 내 손가락을 어린아기처럼 쪽쪽 빨았다. 손가락에서 손가락 사이, 손톱 틈새조차 깔끔하게 먹어치우고 새빨게진 얼굴로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미안, 그렇게 싫었구나. 용서해줘."
"우웅…… 알았어. 이번 한 번만 용서해줄게! 하지만 내 인격 중 하나가 오빠를 제외한 다른 돼지새끼를 좋아하는 건 용서 못해! 그러니까 얼른 내 임소이의 인격도 빨리 굴복시켜줘. 아무리 그 숫케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도 오빠에게 개발된 이 몸에 한 번만 오빠의 것을 꿰뚫면 그딴 허망된 거짓 사랑 따윈 잊어버리고 나처럼 오빠가 주는 쾌락만을 위해 살아가는 여자가 될거야."
"흐음…… 미안. 지금은 이현진과 가까운 임소이의 인격이 필요하거든. 하지만 나중에, 나중에 꼭 임소이를 강간시켜서 내 성노예로 만들게, 그러니까 오늘은 그걸로 참아줘. 응? 오빠를 위해서. 할 수 있지?"
"……우우, 비겁해. 오빠가 그런 말을 하면, 허락할 수 밖에 없잖아……."
됬다아…… 역시 손가락으로라도 해준 것이 정답이었다. 시호의 격노가 많이 가라앉아 순순히 내 말을 들어주었다. 정말 다행이다.
"그리고 이번에 너를 찾아온 이유는……."
"이현진에 대한 보고를 듣기 위해서지?"
"그것도 있지만, 이번에 네게 부탁할 게 있어서 그래."
"뭔데? 뭐든지 말해줘! 난 오빠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기쁘게 할거야!"
시호가 벌떡 일어서서 손바닥으로 가슴을 두드리며 당당하게 자신 있는 표정을 짓자 그 순수한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하하, 시호 덕분에 이 오빠는 정말로 기뻐. 시호 같은 여동생을 둔 나는 정말 행복한 놈이야."
"헤헤헤, 나도 정말 기쁘고, 오빠 같은 사람이 내 오빠라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해. 난 오빠보더 훨씬 더 행복한 사람이야. 헤헤헤."
"그래. 그렇구나. 고맙다. 그래서, 시호야. 이 오빠가 네게 부탁할 게 뭐냐면……."
"응응…… 헤에……."
내가 이번에 펼칠 '작전'에 대한 내용을 설명해주고, 시호에게 알맞은 역할을 부탁한 뒤 집으로 돌아와 잠들었다.
내일이 너무 기대된다.
다음 날, 기어코 그 날이 왔다. 2박 3일간의 수학여행, 바로 그 날이!
웅성웅성, 시끌시끌.
학생들과 학부모들은 저마다 편한 복장으로 배낭에 잔뜩 짐을 싸들고 매어 누군가는 부모자녀끼리, 누군가는 학생들끼리, 누군가는 부모들끼리 마음껏 이야기 꽃을 펼치고 있었다. 이번 수학여행이 기대된다느니, 너무 갑작스러워서 미리 준비하지 못해 아쉽다느니, 왜 부모들이랑 같이 가는 지 모르겠다느니, 대체로 수학여행에 대한 즐거움이 10중의 3, 불평이 10중의 3, 나머지 4는 수학여행인지도 잊고 자식 자랑에 바쁜 학부모들이다.
그런데 학생과 학부모들을 생각하면 수가 좀 적은 것 같다.
"다 오지는 못했나본데?"
"갑자기 내일 학부모를 데려오라고 해도, 전업주부나 내일이 휴가인 부모가 아니면 오기 힘들었겠죠. 게다가 내일 바로라니…… 왠만해서는 오지 못하는 게 정상입니다. 오히려 이건 상당히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겠군."
내 옆에서 여전히 메이드복 차림의 규수가 말했다. 머리는 캬츄사를 쓰고 있다. 고양이귀까지 쓰면 학부모들에게 내 변태성을 의심할까봐 하지 말라고 했다. 아, 근데 아쉽다. 난 고양이귀 모에인데…….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아는 사람을 찾고 있던 도중에 멀리서 나의 사랑스러운 주희가 나보다 먼저 날 발견하고 나를 향해 달려오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안녕, 지호야. 결국 왔구나? ……규수 씨를 데리고."
왜 말의 마지막에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는걸까?
"응, 선생님이 학부모를 데려올 수 없으면 메이드라도 데려오라고 해서……."
"진짜?! 그 선생님이 왜…… 혹시 선생님도 현진이처럼 메이드 모에파인가?"
"으음, 정 선생님이 메이드를 보면서 '하악하악, 메이드짱 모에!'라고 말하는 장면은 도저히 상상하기 힘든데……."
"지금 누가 메이드 모에 변태라고?"
"힉!"
"켁, 정 선생님!"
의문에 서로 얼굴을 가까이 대고 은밀하게 소근거리는 우리의 말을 용케도 포착하신 정 선생님이 우리 앞으로 슬그머니 다가와 우리를 놀래키셨다.
"내가 분명 학부모님이 없으면 너네 집 메이드라도 데려오라고 말은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너랑 메이드 씨가 상당히 친해보이고 또, 학부모를 대신하기 때문이지 딱히 메이드복을 입고 오라는 말은 한 적 없다."
"그랬어요? 전 또 정 선생님이 현진이처럼 나잇값 못하고 메이드를 사랑하는 모임(메사모)의 인원인 줄 알았죠."
"어이, 메사모라니 그게 무슨……."
"정 선생님?"
흠짓, 하고 어깨를 떠는 정 선생님. 대체 누가 정 선생님을 불렀길레 저렇게 정 선생님이 떠는 건지 의아해하며 정 선생님의 덩치 너머로 허리를 옆으로 꺽어보자, 누구보다도 화사하게 웃고 계시는 학교 전 남학생들이 동경하는 대상, 나이가 나이인지라 학교 3대 미소녀에 들어서진 못하셨지만 선생님들 중에서는 최고의 미녀라는 평판이 자자한 양호선생님이 계셨다.
"혜…… 흠흠, 강 선생님이 여긴 어쩐 일로……."
"예에, 이번에 같이 가게 된 수학여행의 일정 때문에 말씀드릴게 있어서 왔는데, 재미있는 말을 들었네요?"
"아, 저, 그게……."
우와…… 저 정 선생님이, 이사장님 앞에서도 당당하게 자기 할말을 꺼내는 저 정 선생님이, 양호 선생님 앞에서 꼼짝을 못하고 식은 땀을 뻘뻘 흘린다.
"어떻게 된거지?"
"혹시 정 선생님이 양호 선생님에게 무슨 약점을 잡힌 게 아닐까?"
"아니면…… 혹시 정 선생님과 양호 선생님이 비밀리에 사귀는 사이라던가? 그래서 정 선생님이 자기가 메이드 모에 변태라는 것을 들켜서 쩔쩔 매는건가?"
"주희야…… 어떻게 그렇게 양호 선생님에게 큰 실례가 되는 말을 꺼낼 수가 있어? 그런 말을 하면 양호 선생님이 너무 가엾잖아."
"미안, 내 실수야. 내가 생각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어. 잠시라도 그런 망상을 떠올린 나 자신의 환상을 부수고 싶어."
"절대 무리지, 암, 무리이고 말고. 너네 아버지랑 현진이네 누님이 잘 되는 것 만큼이나 있을 수 없어."
"천지개벽급의 불가능이지. 암암."
"음음."
"이 자식들이이……."
이크, 들었나? 하긴, 정 선생님과 양호 선생님은 미녀와 야수급의 말도 안되는 조합이고 있을리가 없는 일이지만, 자기를 깎아내리는 말을 듣고 기분이 좋을리가 없었다. 그러니 머리에 핏대를 세우고 우리를 노려보는 건 이해할 수 있지만, 우리의 말을 반박할 수는 없을거다. 왜냐하면…….
"그렇게 노려보지 마세요. 저흰 진실을 얘기했을 뿐입니다."
"맞아요, 어설프게 상대를 위로하려는 거짓말은 더욱 큰 상처를 남겨요. 저희뿐 아니라 우리 학교에서 모두가 기본적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 이해해주세요."
"크윽! 으그그그그그그그그그읏!"
미치도록 마구 가슴을 치는 행동이 그냥 야수도 아니고 그냥 고릴라다, 고릴라. 어휴, 잠시라도 저런 사람과 양호 선생님이 함께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해버린 내 상상력을 저주하고 싶다.
"자자, 진정하고. 저 쪽으로 가서 얘기나 좀 해요."
"아, 알았소…… 습니다. 그렇게 하죠."
어라? 방금 정 선생님이 양호 선생님에게 반말을 하려고 했던 것 같은데…… 착각인가? 착각이겠지. 반말은 친한 사람들끼리 하는거잖아? 정 선생님이랑 양호 선생님이 친할리도 없으니까 내 귀의 착각일 것이다.
서서히 멀어져가는 정 선생님과 양호 선생님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와 주희는 동시에 떠오른 생각을 입에 담았다.
""진짜 너무 안 어울린다.""
순간 삐끗하는 정 선생님과 어색하게 웃는 양호 선생님, 저 두 사람이 깊은 관계가 되는 일은 영원히 없을 것이다. 있으면 세상이 파멸한다.
"앗, 지호야!"
"음냐, 더는 못 먹어어……."
나의 절친, 나의 베스트 프랜드(라 쓰고 이용해먹기 좋은 가짜 절친이라 읽음)인 이현진의 목소리가 들리자 나와 주희의 시선이 목소리가 들린 장소로 향했다. 현진이는 나를 향해 손을 흔들며 어린아이처럼 빛나는 표정으로 무척 색다른 광경을 보이며 나에게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현진이와 현진이의 어깨에 팔을 걸고 비틀거리며 걸어오는 누님을 의아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누님은 왜 그러고 있어? 혹시 어디 아프신거냐?"
"하아~!"
현진이가 자기 누님을 보고 크게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의 밝은 표정이 금새 침울해지고, 그야말로 말썽꾸러기 누나를 돌보는 어른스러운 남동생처럼 골치아프다는 듯이 이마를 짚으며 우리에게 누님의 현 상태를 진단해주었다.
"어머니가 수학여행이 너무 기대된다고 잠을 못자서, 이렇게 데려왔다."
""아.""
위험할 정도로 빠르게 현진이의 말에 납득해버리는 우리 둘이었다. 어린아이 같은 누님의 성격이라면 충분히 그럴만 하다. 기대감에 잠을 자지 못하고 침대에서 마구 구르며 수학여행의 로망에 망상을 품으며 잠들지 못하는 누님의 모습이 대충 상상이 간다.
"그런데 주희야, 너네 아빠는?"
"아아, 아줌마를 찾겠다고 이미 떠났어. 아마 저 멀리서 찾고 있을거야."
"그래? 너네 아빠라면 누구보다도 먼저 나와 교문 앞에서 계속 기다리다가 우연을 가장해서 만날거라고 생각했는데?"
"확실히 새벽 5시에 일어났긴 한데, 뭘 입어야 멋있을지 계속 고민하고 머리카락이나 몸치장 같은 걸 정성 가득히 꼼꼼하게 멋부리다가 늦어버린거지."
"여전하구나, 아저씨는."
"변함이 없지."
"""하아~"""
두 사람에 대해서 대충 짐작을 하는 나로서는 두 사람과 같이 한숨을 쉴 수 밖에 없는 입장이다. 주희네 아버지, 딱 한번 밖에 본 적 없었지만 정 선생님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뒤지지 않을 정도로 미녀랑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지…….
"어? 그런데 우리집 메이드 누나는?"
문득 근처에서 서규수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자 두리번거리며 서규수를 찾았다. 서규수는 왠만해서는 내 명령에 충실하게 내 곁에서 떨어지려고 하질 않는데 어디간거지?
"메이드 누님이 왔다고?! 어디, 어디야! 어딨어!"
우리 학교 메이드 모에파 총수장이자 예전에 서규수가 메이드복을 입고 학교에 들른 이후로 생긴 메사모(메이드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의 회장인 이현진이 눈에 불을 켜고 서규수를 찾았다. 쯧쯧, 저렇게 메이드가 좋을까?
"규수 씨라면 저기 학부모들이랑 사이좋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진짜?! 너무 자연스러워 눈치채지 못했어!"
나는 경악의 목소리를 내질렀다. 주희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장소에 자신보다 훨씬 높은 연령대의 어머니들과 함께 수다를 떠는 서규수의 모습이 너무 자연스러워 보였던 것이다. 저 녀석, 그렇게 다른 사람과의 대화가 부족했나?
"자자, 모이신 학부모 여러분들은 1번 차에, 학생 여러분들은 2번 차에 타주시길 바랍니다."
운동장에 모여 저마다 즐겁게 이야기 꽃을 피우고 있던 학부모들과 학생들은 정 선생님의 외침에 짐들을 들고 1번 버스와 2번 버스로 나눠 안으로 들어갔다. 당연히 서규수는 1번 버스행이었고, 나에게 90도로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1번 버스 안으로 들어갔다.
"가자."
"응. 아, 내가 누님 1번 버스로 옳기는 거 도와줄게."
나는 누님의 다른쪽 팔을 내 어깨에 메고 1번 버스를 향해 가…… 려고 했지만 도중에 큰 그림자가 나타나 우리의 앞을 막았다.
"이, 이, 이, 이, 임, 임세, 세, 세영, 세영 씨씨, 씨는 내, 내가, 드, 들고, 가, 가, 가, 가마."
흥분에 얼굴이 붉어지고, 느끼하게 머리에 왁스를 발라 반들반들하고, 신입이 회사가는 것도 아니고 값비싼 정장을 입은 거인, 아니, 주희네 아버지가 덜덜 떨며 두 손을 우리에게 내밀었다. 하지만 우리는 황급히 주희네 아버지를 지나쳐 1번 버스 안으로 들어갔다.
"자, 잠깐! 세, 세, 세영 씨는 내, 내가……."
"아빠, 진정해요. 진정, 자, 릴렉스, 릴렉스."
다행히 주희가 막아줘 우리는 무사히 1번 버스 위에 올라타 규수의 옆자리에 앉힐 수 있었다. 규수에게 누님을 잘 부탁하며, 절대로 곧 올라올 인간에게 접근시키지 말라는 엄명을 내린 후 1번 버스 아래로 내려와 자기 아버지를 힘껏 막고 있던 주희에게 미션을 컴플리트했다는 뜻의 미소를 지어주었다.
"어째서어어어어!"
어째서인지 모릅니까? 당연히 범죄자의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