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진 SIDE>
지호의 몸에 구멍이 뚫리고, 서서히 쓰러져가는 것을 목격한 이후로 상황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지호가 쓰러진 순간, 나는 순간 지호의 죽음을 부정했고, 내 소중한 친구를 잃었음을 이해했고, 현실을 인정하며 곧 내 가슴 속은 허탈감, 허무감, 자괴감, 비애와 분노로, 그리고 내 친구를 죽인 원수에 대한 증오심으로 가득차 이성이 마비되었던 그 감정을 아직도 기억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눈물을 흘리며 울면서 제발 그만하라고, 이제 됬다고 외치는 주희의 팔에 강하게 속박되어 있었다. 멍하게 주변을 둘러보니 운석이라도 떨어진 것 같이 땅 곳곳에 심하게 구멍이 파여있었고, 마치 태풍에 의한 것처럼 무언가 강한 힘에 뿌리체 뽑혀진 나무들이 정체불명의 마인들의 시체와 함께 널부러져 있었다.
내 손에는 기억을 잃기 전보다 조금 더 길어진 검날과 세련된 장식이 붙어있는 성검이 들려 있었고, 성검은 예전처럼 신비로운 분위기가 아니라, 싸늘할 정도로 아름답고 예리한 분위기가 풍기며 마치 내 마음을 표현하는 것 같아 내 심장을 조여왔다.
마지막으로, 비참하게 쓰러진 지호의 시체를 보자마자 난 성검을 떨어뜨리고 주저앉아 오열했다.
난…… 결국 친구를 지키지 못했다.
뭐가 정의의 용사냐! 뭐가 나라를 구할 자냐! 친구 1명도 구하지 못한 나 따위가 무슨 용사를 하겠다고…… 내 탓이다. 이따위 성검 하나만 믿고…… 현재에 만족하고, 나태하고, 용사라는 이름 하나에 들떠서…… 친구가 죽는 순간까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나란 녀석은, 정말로, 한심할 정도로, 약했다.
나중에 아저씨가 찾아와서 삼족오 요원들과 함께 사건을 정리했다. 난 아저씨의 배려로 주희와 함께 기절해있는 어머니를 모시고, 친구의 시신을 들고 숙소로 향했다. 이 일은 사고로 둘러대고, 조작된 사고 원인은 내가 알바 아니었다.
우리의 수학여행이 1명의 사망자 외 약 20명 정도의 부상자를 낳고 마을로 돌아왔다. 당연히 사망자는 지호였고, 부상자란 그 마물들에게 습격당한 학생 및 학부모들이었다. 다행히 마물들은 내가 정신을 잃고 날뛰는 사이에 내 성검에서 뿜어낸 성력이 마물들을 모조리 사라지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 엄청난 마물 대군에서 피해가 부상자 20명으로 그친 것은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내 기분은 돌아가는 내내 우울했다.
……지호의 메이드인 규수 누나는 미치도록 슬픈 표정을 지으며 지호의 시체를 곱게 보관해 곁에서 한시라도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아저씨, 말해주세요."
집으로 돌아오고, 나는 무척 피곤해보이는 어머니는 집에 모시고 주희네 집으로 가서 아저씨와 독대를 청했다. 아저씨는 쓴웃음을 지으며 날 방으로 안내했고 아저씨와 난 책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았다.
"지호를 죽인 그 사람들…… 누구죠?"
"알면 어쩔거냐. 복수라고 할거냐?"
아저씨와 자주 만나면서 여지껏 본 적 없던 차가운 표정에 무감정한 어조였다. 지호의 죽음을 아무렇지도 않게 보는 듯해 내 마음은 불꽃처럼 격렬하게 타올랐다.
"당연합니다! 지호를, 지호를 죽인 놈들을…… 절대 용서할 수 없어요!"
"……포기해라."
"못.합.니.다."
퍽!
갑자기 눈이 아저씨의 손이 눈 앞에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 순간, 미간에 둔탁한 통증을 느끼며 손을 이마에 집고 허리를 굽혔다. 그런 나에게 아저씨는 싸늘하게 충고의 말을 내뱉었다.
"내 주먹을 피하지도, 막지도 못하는 약한 놈이 '복수'니 뭐니, 거창한 말을 입에 담지 마라! 주희도 너와 같이 친구를 잃었다. 하지만 참고 있지. 왜 그런지 알고 있느냐? 놈들에게 이길 수 없다는 '현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저씨가 내 머리카락을 잡고 난폭하게 강제적으로 고개를 들어올리고 내 눈에 맞추었다. 아저씨의 표정은 여전히 얼음장처럼 차가웠지만 눈동자만큼은 활화산처럼 뜨겁게 타오르는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세상은 너처럼 허세와 노력하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 사는 애송이에게 너그럽지 않다. 최소한 친구의 복수를 하려면 그에 걸맞는 '강함'이 필요하지. 그런데 너 같은 약자 따위가 복수를 하겠다는 말을 꺼내기에는 10년도 이르다!"
아저씨는 내 머리카락을 놔주더니 한숨을 쉬며 몸을 일으키고 나에게 등을 보여주었다. 그 등이 유난히 오늘따라 초라하고 약하게 보이는 이유는 어째서일까?
"그들은 나도 건드릴 수 없는 정부의 최종병기…… 이 땅의 비일상을 관리하는 제1비밀기관인 '삼족오'라도 비일상의 비일상을 관리하는 제2비밀기관을 상대할 힘이 없다. 우리가 '몸통'이라면 그들은 몸통에게 명령을 내리는 '머리', 우리조차 그들의 지령에 따를 수 밖에 없다……."
"그럼, 복수할 방법은 없는건가요? 지호를 죽인 그 놈들을, 그대로 놔두어야 하는건가요……!"
분함에 피를 흘릴 정도로 강하게 입술을 깨물며 비탄하듯이 외치며 묻는다. 이대로 지호가 죽는 것을 사고로 여겨야할까? 지호를 죽인 그 놈들이 멀쩡하게 살아 숨쉬고 있는데,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것인가!?
"방법은 있다."
"그, 그게 뭐죠?"
"간단해. 현진아, 네 아버지처럼 '진정한 용사'가 되어라!"
굳은 표정으로 아저씨는 내 어깨를 짚어주시며 말했다. 내 아버지처럼…… 용사셨던 내 아버지처럼 되라고?
"넌 모르겠지만, 용사의 힘, 즉 성검은 세상에 단 1명의 용사에게만 주어진다. 용사가 죽으면, 그 다음대 용사에게 주어지지. 네 아버지가 그랬다. 네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죽고 정통적으로 용사의 계승식을 치루고 용사의 훈련을 받아 마계로 가서 마왕을 쓰러뜨렸으며, 진정한 용사로서 비일상의 세계에서 국내 최고의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 힘이라면, 틀림없이 네 친구의 원수도 충분히 갚을 수도 있을거다."
"……정말인가요?"
"그렇다."
나는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눈을 빛냈다. 더 이상 예전처럼 헤이한 정신이나 각오가 아니라, 진심으로 강해지고 싶어졌다.
"가르쳐주세요! 진정한 용사가 되는 방법을, 강해질 수 있는 방법을요!"
"……목숨을 걸 수 있냐? 후회하지 않겠냐?"
"제 목숨은, 오직 강함을 위해서 쓸 겁니다. 결코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가르쳐주마. 선대 용사 파티의 일원이었던, 아이언 드래곤이라 불렸던 나, 최광후가!"
아저씨의 눈동자에서 불꽃이 튀겼다.
<이현진 SIDE>
<33호 SIDE>
"33호야, 2호는 어떻게 되었느냐?"
"네, 현재 비커에 담아 신체 복구 중입니다."
"끌끌끌, 수고했다."
아버님의 칭찬을 들으며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제 이름은 33호, 아버님의 딸이자 제일의 실험체이고 현재 마천군의 리더입니다. 과분한 직위입니다만 아버님을 위해서 열심히 해볼 생각입니다. 그나저나 2호 씨의 일은 참 아쉽게 되었습니다. 2호 씨가 과오를 뉘우치고 아버님의 아들로 다시 돌아왔다면 자비로우신 아버님은 용서를 해주시고 평생을 아버님의 실험체로 행복을 받으며 살았을텐데…… 정말 어리석은 선택을 해버렸습니다.
그런 2호 씨라도 자비로우신 아버님은 받아들이실 요량인 모양입니다. 2호 씨의 시체가 옳기는 도중, 저는 몰래 2호 씨의 시체를 훔쳐서 어서 아버님의 연구소로 가져와 재생액(再生液)을 넣은 비커 안에 집어넣었습니다. 이제 곧 2호 씨의 몸은 완전히 살아있는 형태로 되돌아오고 세뇌를 통해 아버님의 아들이 되겠죠, 그렇다면 구룡천의 힘도 강해지고 제 오른팔로 쓸 생각입니다. 아, 2호 씨가 제 부하가 되다니, 생각만으로도 행복합니다♡
"그런데 아버님, 걱정되는 것이 있습니다. 용사가 힘을 키워서 나중에 저희에게 칼을 들이밀지 걱정입니다."
"끌끌끌, 안심하거라. 용사가 아무리 강해져봤자 내 손바닥 안이지. 여차하면 용사의 가족이나 몸을 복구시킨 2호 녀석을 이용하면 된단다. 끌끌끌, '선대 용사에게도 그랬듯이' 말이다."
아, 과연 아버님은 천재이십니다. 저희같은 경우야 아버님을 제외하면 누가 죽든 상관할 바 아니지만, 용사는 아무리 강해봤자 인간이지요. 가족을 인질로 잡거나, 그렇지 않으면 아버님의 아들이 된 2호 씨를 방패로 삼으면 될 겁니다. 2호 씨와 용사는 상당히 친해보였으니까요.
쿵!
앗, 갑자기 연구소 건물에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자연 현상일까요?
"이건 뭐지…… 33호야, 확인을 해보고 오거라."
"예, 알겠……."
쿵쿵쿵!
"……습니다."
쿵쿵쿵쿵쿵!
진동이 더욱 심해집니다. 이거 큰일입니다. 위험하니 어서 아버님을 대피시키고 소방차…… 가 아니라, 마천군을 데리고 피해야겠습니다.
저는 밖에 있는 마천군들을 불러 연구소 내부의 모든 자료들을 가지고 떠나도록 지시하려 했습니다만…… 진동의 원인을 알고 멈췄습니다.
그 진동의 원인은 알고보니 자연 현상이 아니라 사람이었습니다. 아니, 저건 사람이라고 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저 자는 사람이 아니라 마족이었으니까요.
"허허허, 거기의 마인 아가씨. 우리 도련님이 어디로 가셨는지 혹시 알고 있나?"
"당신이 말하는 도련님이 누구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주거침입죄가 무거운 것은 알고 있습니까?"
"허허, 그건 미안하네만 내가 좀 급하거든."
"그 죄, 목숨으로 받아가지요."
"시간이 없다니까……."
마족이 어떻게 저희 연구소를 알고 침입했는지는 구속하고 천천히 알아내거나, 구속할 수 없으면 죽여야겠죠. 저는 당장 달려가 마족에게서 마기를 흡수해 죽이려 했습니다. 저는 대마족 전용의 병기, 얼마 전에 상급 마족도 제 적수가 되지 못했습니다. 후후, 저렇게 약해보이는 할아버지 마족 따위야…….
겉모습은 보고 매우 얕보았습니다만, 의외로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제 공격을 모조리 손가락 하나로 종이 한장 차이로 빗겨내면서 무척 여유로운 표정이었습니다. 이 할아버지 마족, 겉모습과 다르게 엄청 강합니다!
저는 뒤로 물러서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모습인 할아버지 마족의 의외의 강함 때문도 있었고, 그런 할아버지 마족의 표정이 지나치게 초조해진 표정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마인 아가씨, 좀 비켜주면 안되겠나? 비록 직업을 버렸다고는 하지만 한때나마 마인 학자였던 내가 마인 아가씨인 자네를 공격하기엔 차마 손이 떨어지질 않고, 도련님을 찾으러 가긴 해야겠고, 이대로 마인 아가씨를 상대했다간 실수로라도 마인 아가씨를 '죽일'지도 몰라."
큭, 굴욕입니다! 마족을 상대하기 위해서 태어난 제가 마족에게 얕보이고 있습니다. 아니, 얕보이고 있는 게 아닙니다. 저 할아버지 마족은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분명 강자와 약자를 따지자면 제가 약자고 저 할아버지 마족은 강자입니다. 치욕스럽지만 할 수 없습니다. 침입자에 대한 것을 아버님께 보고해야 합니다.
할 수 없이 자리를 비켜주려고 할 때, 갑자기 쿵!하고 바닥에 금이 가더니 폭발하며 여러 그림자가 튕겨져 나왔습니다. 그 그림자들은 제게 익숙한 얼굴이었습니다.
"46호에 72호, 그리고…… 2호 씨?!"
또 1명, 있을리가 없다고 생각한 그 인영은 바로 복구 작업에 들어갔던 2호 씨였습니다. 말도 안돼! 2호 씨의 몸이 회복되려면 아직 2일은 더 걸리는데…… 게다가 기억은 반드시 지워졌을텐데 어째서 여기에!?
"호오, 33호와…… 이제야 온거야? 집사."
"허허허, 죄송합니다. 일찍 마중하러 온다고 하긴 했지만 여기에 있는 마인 분들이 너무 흥미로워서……."
"쯧쯧, 그 놈의 학구열…… 그럼 이 연구소, 그냥 네가 가지지 그래?"
"괜찮습니다. 이 곳에 있는 자료는 대충 챙겼고, 도련님의 신체가 저에겐 최고의 흥미거리니까요."
"쳇, 그럼 가자고, 집사 할아버지."
"예에, 아스와 시호 아가씨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잠깐만요!"
저는 떠나려는 2호 씨와 그 마족 할아버지를 멈추게 했습니다.
"어째서 멀쩡하게 돌아다니는거죠? 시체를 복구하려면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는데……."
"아아, 이거?"
2호 씨는 피식, 웃으며 가슴이 파괴되기 이전의 형태로 되돌아와있는 신체를 가리키며 물었습니다. 제가 힘껏 고개를 끄덕이니 2호 씨는 친절한 미소를 지어주셨습니다.
"말해주기 싫어. 내가 왜? 정 궁금하면 네 아버지에게나 물어봐라~!"
실수했습니다. 불친절한 장난끼 가득한 미소였습니다. 2호 씨가 손을 흔들며 마족 할아버지와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전 멍하게 둘을 바라보는 것 외에 제가 할 수 있었던 일은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