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에필로그
식구들의 정신없는 아침 출근을 도와주고 나면 혜영은 언제나 온 몸의 힘이 빠져 버리곤 했다. 마치 규칙적인 혼란의 연속이랄까, 어찌보면 그것은 가정주부라는 굴레를 둘러멘 대부분의 여성들의 운명이었다. 하지만 간간이 자신의 힘으로 사랑하는 남편과 아이들을 돌본다는 숭고한 희생정신을 느낄때면 웬지모를 뿌듯한 미소를 떠올리게 되기도 하였다.
화창한 봄날은 어느새 여름의 초입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오늘 아침도 무사히 넘겼구나...'
늦잠을 자버린 남편 형식에게 겨우 우유 한컵과 토스트를 차려줄 수 있었고, 요사이 부쩍 말이 없어진 아들 강타에게도 도시락을 쥐어줄 수 있었으니 말이다.
베란다 문을 열자 상큼한 강내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집은 강북의 고급 아파트촌인 동부이촌동에 자리잡고 있었기에 한바탕 전쟁을 치르고 난 후의 어지러운 몸과 마음을 새롭게 하는데는 더할 수 없이 효과적인 전망과 내음이었다. 바다를 무척 좋아하는 혜영이었기에 대신 한강이라도 매일 바라볼 수 있게 해달라고 남편을 졸라 이 아파트로 이사온지도 어느새 5년이 다되가고 있었다.
'자 이제 설겆이도 다 했고... 커피 한잔의 여유를 즐겨볼까'
혜영은 Kenney G의 음반을 틀으면서 베란다에 놓여진 티테이블에 앉았다.
어느새 그녀의 나이 39살. 40을 눈앞에 두었다는 사실에 종종 한숨짓곤 한다.
'23살에 대학을 졸업한 것이 어제같은데...'
혜영은 대학졸업과 동시에 남편 형식과 결혼에 성공하였다. 결혼전에는 순결을 지켜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던 그녀를 형식은 집요하게 공략하여 마침내 대학 졸업식날 함락시켰고, 그 한번의 관계로 바로 강타를 임신하게 되었기에 서둘러 결혼식을 올렸던 것이다.
문득 그날의 일이 새삼스레 떠올랐다.
혜영보다 5살위었던 형식은 군대대신 경영연구소에서 병역특례로 근무하였고, 마침 혜영의 졸업식 즈음에 그도 병역특례를 마쳤던 것이다. 2가지의 축하를 동시에 해야 한다며 평소 잘 먹지 않던 술을 그날따라 형식은 과음하였고, 술기운을 빌어 혜영을 호텔에 데려갔던 것이다.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 혜영에게도 책임은 있었다. 혜영도 그날은 부모님의 허락을 받은터라 형식이 건넨 술잔을 사양않고 받았으니 말이다.
더구나 졸업식 뒷풀이에 참석했던 단짝 숙희와 민정, 경숙은 그날 형식의 친구들과 죽이 맞아 혜영과 형식을 머리올려줘야 한다면서 거들었다.
'후후.. 술김이었으니 호텔에 들어갔지 만약 아니었다면 친구들과 형식씨 친구들까지 공개적으로 알고 있는 마당에 그렇게는 못했겠지...'
그런 역사적 사건에 동참해서일까, 형식 친구들인 태민, 영수, 기호는 현재까지도 가장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친구들이었다. 게다가 태민은 숙희와 결혼까지 했기에 더욱 그랬다.
'아참, 이번 토요일에 숙희네집에서 모임이 있었지..'
한달에 한번씩 각 집을 돌아가며 모임을 갖는것이 어느덧 관행으로 자리잡은지도 꽤 오랜 세월이 흘렀다.
혜영은 생각난김에 숙희네집으로 다이얼을 돌렸다.
"따르릉, 따르릉"
한참만에 수화기가 들리고 익숙한 숙희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여보세요. "
"숙희니? 나야, 혜영."
"기집애, 웬일이니?"
"응, 이번 토요일날 몇시에 가면되는 거니?"
"한 다섯시쯤 와. 나좀 거들어줘야지."
"그래. 그러면 다섯시쯤 갈께. 이번에도 4쌍 모두 모이는 거니?"
"그럼. 안왔다간 그 봉변을 어떻게 감당할려고."
그랬다. 간혹 불참하는 쌍이 있곤 했는데 그때는 엄청난 벌금에다 이후 3번 연속해서 그 집에서 모임을 갖기로 되어 있었다. 따라서 부득이 못올 사정이 생겼을 때는 남편과 부인 중 어느 한쪽이라도 반드시 참석하려 애쓰는 것이 당연했다.
"그래, 그러면 그날 보자."
"그래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