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49)

 "이런 장난꾸러기들, 그녀를 놔둬. 아랫도리에 쉴틈없이 들락날락한 요술봉들 때문에 많이 힘들 거라구."

 "오, 긱스, 와트, 자크리, 타일러, 그리고 베일런과 기타 떨거지들까지. 바짝 쫄아든 요술봉을 어떻게든 충전하려는 노력은 가상하다만 주먹만한 다크서클부터 어떻게 좀 해봐. 어젯밤에 신통찮게들 나가 떨어진 덕분에, 자기위로를 실컷할 수 밖에 없었다고."

 남은 계단을 사뿐사뿐 내려와, 가장 대물인 긱스의 바지 위 볼록 튀어나온 부분을 한대 쳐주자 다른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까지 낄낄 거렸다. 그렇게 음담패설을 주고 받다가, 어제 여관주인에게 부탁해 놓은 행장과 도시락을 챙겨 '모험가의 쉼터'을 나섰다.

 오늘은 로사링거연합의 수도인 버건디에 가는 날이다.

 [2화] 데카당스 호 3등선실 : 긴장한 홍일점

 성력 13세기 현재, 에우로파 대륙에는 무수한 국가들이 난립하고 있다.

 로사링거 연합은 대륙 북서부 로타링기아 평원에 위치한 연합국가로, 다수의 공국과 대공국, 자유도시들이 주권 보존을 위해 연합해 주변 강국을 견제하고 있는 형국이다. 남쪽으로는 프로방스 왕국과 헬베티아 공화국, 동쪽으로는 바이에른 왕국, 헤센 왕국과 접하고 있고, 북쪽과 서쪽은 바다와 접한 해안지대이다. 서쪽 바다를 건너면 브리타니아 연합이 나오고, 북쪽 바다를 건너면 야만족 바이킹과 몬스터들이 우글거리는 동토가 나온다.

 브뤼헤 자유시는 로사링거 연합의 중부인 벨기카 지방에 위치한다. 남방의 베네치아에서 태어나 이곳저곳 떠돌아 다니던 벨라가 브뤼헤에 정착한 건 약 2년 전이었다. 저지대에 세워진 브뤼헤 성은 중세의 아름다운 건축물로 가득 차 있었고, 자유시답게 거리 곳곳에 활기찬 기운이 흘렀다. 성을 관통하는 운하는 그림 같은 풍경을 만들어 내며 브뤼헤의 상업을 발전시켰다.

 벨라가 모처럼 브뤼헤를 떠나 연합 수도 버건디로 향하게 된 건 새로 시작한 백화점 사업 때문이었다. 패션 사업이 성공한 이후, 그녀는 현대에서의 기억을 되살려 이곳에서는 생소한 '백화점'을 설립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혼자만의 자본으로 세우기에는 택도 없는 것이라, 각종 인맥을 통해 로비를 했고, 연합의 상업을 부흥시키기 위한 정책으로 채택되어 지원받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전 아타락시아 세계 최초로 버건디에 백화점 건물이 완공되었다. 그동안 백화점 계획을 주도하고 지분의 상당 수를 얻게 된 벨라 역시 며칠 후 열릴 개점 행사에 초청된 것이다.

 1000골드를 주고 텔레포트 포탈을 이용하면 금방 버건디에 도착할 수 있지만, 공후급의 고위 귀족이나 엄청난 대부호를 제외한 이들은 대부분 운하나 육로를 이용한다. 벨라도 용병생활을 시작하고 나서 모은 돈을 합하면 수만 골드가 넘는다. 하지만 알뜰살뜰히 살아온 습관이 남아, 이런 식의 낭비는 지양하는 편이었다. 무엇보다도 여행 과정에서 겪는 생동감 넘치는 모험을 좋아하기 때문에 운하를 통해 이동하기로 결정했다. 상업에 집중하면 더 큰 돈을 벌 수도 있겠지만, 용병의 삶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는 것도 특유의 천성 때문일지 모른다.

 북쪽에서 강을 거슬러온 여객선, 데카당스 호가 정박해 있다. 벨라는 500실버를 내고 3등실표 한장을 사서 승선했다. 이제1등실표 정도는 살 수 있을만한 돈을 모았지만, 독채인 1등실은 여행 중 여러 사람끼리 모여서 떠들고 부대끼는 낭만이 없다는 생각에서다.

 표를 따라 3등실 G룸에 도착하니 안쪽의 낌새가 심상치 않다. 문을 여니 낮술을 했는지 얼큰하게 취한 사내들이 도박판을 벌이고 있다. 선원인지 웃통을 벗고 아랫도리를 벅벅 긁던 사람도 있었는데 이쁘장한 처녀가 들어오자 난감해 한다. 다들 티 안나게 입맛을 다시는 게 벨라의 눈에는 뻔히 보인다.

 '죄다 사내새끼들 뿐이군. 여자는 아직 안탄 걸까, 아니면 나 혼자려나. 그건 좀 곤란한데. 으으.'

 꼬릿하게 풍겨오는 남자냄새에 아래쪽이 살짝 뜨거워졌지만, 이내 표정을 다잡았다.

 "이곳에 숙박하게 된C급.용병 벨라. 하던 일들 계속 하시길."

 평소에 비해 딱딱한 말투로 힘을 준 채 똑똑 끊어서 말하자, 남자들도 그녀가 만만치 않은 존재라는 걸 느꼈는지 몸을 바로 일으켜 응대했다. C급 용병은 모험가들을 모아 놓았을 때 적어도 중간 이상은 가는 존재였으므로, 클래스에 따른 어느 정도의 격식을 지키는 게 용병들 간의 예의다.

 "허허, 이쁜 아가씨가 들어왔군. 나는 암스테르담에서 온 D급 용병 보리스요."

 "반갑습니다. E급 용병 윌리엄이에요. 브리타니아 출신이지만 로테르담에서 수학하고 있습니다."

 "B급 용병 루카스. 프로이센 서쪽에서는 흑사자라고도 불리지."

 자신을 소개한 남자들은 열 명 정도 됐지만, 특별히 인상에 남는 건 그 셋이다.

 보리스는 50대 초반은 되어 보이는 중년의 아저씨로 불룩하게 튀어나온 뱃살에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와 주름이 특징이었다. 얘기하다 보니 화술도 꽤 되는 게 젊었을 때 여자 좀 꼬셔봤나 보다. 윌리엄은 그녀보다 어려 보이는 나이에 호리호리한 미소년 타입이었다. 마법사나 정령사 계열인듯 로브를 두르고 있었다. 루카스는 선실에서 유일하게 상위 등급을 지닌 용병이었는데, 대륙 최북단에 위치한 프로이센 출신답게 우락부락한 근육을 키우고 수염과 잔털을 길러 강인한 인상을 주었다. 3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데 벨라의 기감으로 봐도 상당한 강자임에 틀림없었다.

 그 외엔 별볼일 없어 보이는 하급용병이나 모험가, 일반 평민들이었다.

 모두와 인사를 나눈 뒤 행장을 풀고 검을 확 꺼내들었다. 도박을 시작하고도 힐끔힐끔 그녀를 엿보던 남자들이 움찔했다. 피식 웃어준 뒤 수련실을 찾아 나왔다.

 '함부로 까불지들은 못하겠지'

 루카스라는 B급 용병이 좀 걸리기는 하지만 의외로 예의범절은 있어 보이는 게 몰락귀족인가 싶다. 오히려 넉살좋아 보이는 보리스가 눈두덩이 붉은 게 경계 대상이다. 그간의 경험에 비추어 봤을 때, 눈두덩이 붉다는 건 어지간히 섹스를 좋아한다는 거다. 윌리엄 역시 어린 소년답지 않게 한줄기 영악함이 엿보이는 눈빛이었다.

 성적으로는 자유로운 벨라지만, 뱃살 나온 아저씨들은 별로 땡기지 않았고, 게다가 그녀 혼자 감당하기에는 너무 많은 인원이 들어찬 선실이라 초장부터 기를 죽여준 것이다.

 배를 탄지 사흘째 아침이 밝았다.

 "하암~"

 벨라는 누군가 소근거리는 말소리에 잠이 깼다. 오랫동안 단련된 그녀의 감각은 꽤 민감한 편이다. 아직까지 감히 자신이 있는 모포로 접근하는 남자는 없었다.

 어제 저녁에 정박했던 룩셈부르크 항에서 G선실로 승선한 E급 용병 두 명이 계속 추파를 던지며 추근덕대길래, 대련을 빙자삼아 시원하게 패줬다. 히스패닉계의 쌍둥이 형제였는데 릭과 글렌이라는 이름이었나, 검을 뽑을 필요도 없는 상대였다. 양주먹으로 나란히 두 얼굴을 가격해 퉁퉁 붓게 해줬다. 밤새 끙끙 앓는 것 같았는데 아침이면 울긋불긋한 색으로 잘 익어 볼만할 것 같았다.

 사흘동안 남자 냄새만 맡고 맛을 못 보니, 마치 삼겹살 집에서 고기를 굽기만 하고 끝내는 그런 느낌이었다. 그래도 어제는 놈들을 시원하게 구타하면서 손맛을 느끼니 좀 시원한 기분이다.

 '누구 한 명 쌰대기 좀 맞아줄 사람 없으려나?'

 기감을 펼친 벨라의 귀로 소근거리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말소리를 들어보건대 어제 자신이 손수 쌰대기를 날려준 쌍둥이의 형 릭, 그리고 암스테르담에서 왔다는 보리스란 아저씨다.

 "이보쇼, 그동안 침 튀겨가면서 떠벌린 얘기들이 죄다 거짓말이구만. 무슨 백작영애를 꼬셨다는둥, 숫처녀 아다만 수십번을 떼줬다는둥, 어휴, 술자리 흰소리를 믿은 내가 잘못이지."

 "어허, 틀림없다니까. 이 나이쯤 되면 여자 얼굴만 봐도 보이는 게 있지. 저 용병 년은 도톰한 입술에 여우처럼 눈꼬리가 슬쩍 올라간 게 딱 봐도 밝히는 년이라니까."

 밸라는 자기 얘기인 걸 알고 집중해서 듣기 시작했다. 물론 계속 자고 있는 척 하면서.

 '훗, 아좆씨가 제법인데?'

 "웃기는 소리 하시네. 당신 말만 믿고 그 썅년 간 좀 볼래다 된통 당했잖소?"

 양쪽 쌰대기에 불이 난 릭의 말에서는 울분이 느껴진다.

 "쉿! 말소리 좀 낮추게. 그건 자네들이 좀 성급했던 거고. 마침 여기서 보면 보이니 자세히 관찰해보게. 콧등이 낮으니 정조가 부족하고, 귓볼이 붉다는 건 유혹에 약하다는 증거네. 자네 남대륙의 파라오 이야기도 못들어 봤나?"

 "아, 그 클라라파타라인가 하는 여왕 말이오?"

 "클레오파트라일세. 남대륙을 제패하던 프톨레미아왕조의 마지막 여왕인데, 이 양반이 글쎄 콧대가 얼마나 높은지, 자기랑 어울리는 사람은 없다면서 아무하고도 결혼하지 않아 왕조가 끊어졌다네. 내가 여태껏 만나 본 콧대가 낮은 여자들은 신분을 막론하고 한나절이면 내 품에 달려와 안겼지. 후후."

 "그게 정말이오? 말만 번지르르한 것 같아 도무지 믿질 못하겠다니까."

 "자, 한번 더 보세. 눈썹도 반달처럼 동글동글하지? 눈썹의 모양은 저년의, 흠흠, 보지 모양이랑 같지. 자네의 성난 물건을 담그면 갓 잡은 영계찜처럼 아주 쫀득쫀득할거야."

 "음….."

 "대륙의 어느 아카데미를 가도 이런 강의를 해주는 덴 없어. 운 좋은 줄 알게."

 릭이란 용병은 방금 전까지 화내던 걸 잊었는지 벌써 아랫도리가 꼴린듯 했다. 다른 사람들 쪽에서도 살살 긁는 소리가 돌리는 게 보리스의 현란한 화술에 넘어간듯 하다.

 문제는 벨라 역시 그 얘기를 고스란히 들었다는 거다. 그녀의 아래쪽은 흡사 홍수가 난듯 했다. T팬티를 입은 덕분에 바지까지 축축한 느낌이다.

 '씨발 어제 빨은 건데! 찝찝하게스리..'  

 중이 고기맛을 보면 못 잊는다는 속담이 생각난다. 새로운 삶을 살면서 남자가 주는 쾌락을 알게 된 3년 동안 거의 매일같이 담그고 다녔더니, 고작 일주일 참기가 힘들다.

 보통 여자가 들었다면 크게 화를 낼만한 이야기들이었지만, 평소에 용병들과 워낙 음담패설을 많이 주고 받다보니 오히려 재밌게 느껴진다. 그래도 셔츠 밖까지 늘어진 뱃살과 벌레같이 음흉한 미소는 싫다. 게다가 쌍둥이들 역시 마음에 드는 남성들은 아니었다.

 '쯧쯧, 몇대 두들겨 맞았다고 구석에 쳐박혀 험담이나 해대다니, 찌질하잖아.'

 그녀는 약 10년 간 남자들 사이에서 단련된 자신의 주먹이 얼마나 매서운지 모르는듯 하다.

 이사벨라는 좀더 자는 척을 하다가 사람들이 일어날 때쯤 검술수련을 하러 밖으로 나갔다.

 '시원하게 휘두르다 보면 잊혀지겠지.'

 아직 이른 아침시간이라 선내 수련실에는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한쪽 구석에 루카스란 B급 용병이 앉아서 명상을 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내가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다고?'

 그녀는 살짝 놀라며 내심 루카스에 대한 평가를 상향했다. 자신이 소드유저 상급인 걸 감안하면, 루카스는 적어도 소드익스퍼트 하급일 것이다.

 이 세계에서 검술사의 클래스는 소드비기너, 소드유저, 소드익스퍼트, 소드마스터, 그랜드소드마스터 등 다섯 단계로 나뉜다. 소드비기너는 검에서 오러를 뽑아내지 못하고 단지 검만 휘두를 줄 아는 단계로, E급 용병들은 대부분 이 단계에 해당한다. 소드유저는 검사(劍絲) 형태의 오러, 소드익스퍼트는 검기(劍氣) 형태의 오러, 소드마스터는 검강(劍綱) 형태의 오러를 다룬다.

 그랜드소드마스터는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상상 속의 경지로 검운(劍雲)을 만들 수 있다고 한다. 전설 속의 몇몇 무인들에 대한 일종의 예우식 표현이 아닐까 싶다. 신성아스토리아제국의 초대 황제로 서대륙을 일시적으로 통일했던 샤를마뉴 1세, 지금은 멸망한 작센의 왕으로 근 백년 내 최고의 검사로 불리는 오토 1세, 고대 마도제국 룬의 대공이자 검술의 창시자로 불렸던 줄리어스 시저 등이 이에 해당한다. 현존하는 소드마스터의 수는 정확히 알려져 있진 않으나, 스물을 넘지 못한다는 게 정설이다.

 이곳 로사링거 연합에도 한 명의 소드마스터가 있다. 바로 부르고뉴의 대공인 용담공(勇膽公) 샤를 1세다. 그는 연합의 맹주로 신성아스토리아제국과 수교하고, 프로방스와 수차례 전쟁을 벌인 걸출한 인물이다. 벨라가 현재 향하는 연합수도 버건디(Burgundy)도 부르고뉴 대공국의 수도이다.

 아무튼 벨라는 수련실 중앙에 서서 심호흡을 한 후 새벽 수련을 시작했다.

 우선 사브르를 뽑아 간단히 로사링거 군용검술을 수련했다. 날카롭고 가늘은 사브르의 날이 허공의 10개 방향을 차례차례 뚫으며 매서운 바람소리를 낸다. 다음으로 사브르를 착검하고, 블러디하울을 뽑는다. 기묘한 붉은 빛이 날에서 반사되며 무언가 반짝거리는 찰나, 붉은 색 기운이 실타래처럼 풀려 나와 가상으로 만든 네 명의 적을 꿰뚫는다.

 제일 처음으로 만난 적의 낭심을 터뜨리고, 다음 적의 배를 갈라 내장을 조각낸 뒤, 그 다음 적의 목을 날려버리고, 마지막 적의 양팔을 쓱싹 베어낸다.

 '에잇!'

 품에 숨긴 숏소드를 꺼내 쓰러진 적들의 영 좋지 않은 곳을 다시 한번 조각조각 터뜨려 주니 그제야 좀 시원한 기분이 든다. 이후 삼십 분 가량 더 검술을 수련하다가, 자세를 바로하고 심호흡을 가다듬었다. 예쁘게 올린 붉은빛 당고머리에 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다.

 "훌륭한 실력이오. 벨라 공."

 구석에서 조용히 명상을 하던 루카스가 언제 눈을 떴는지 말을 걸어온다. 그가 지켜보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그녀 자신이 무슨 상승 비기를 지닌 대가(大家)도 아니니 개의치 않고 수련했다. 엄격하게 비전을 수련하는 왕족이나 대귀족 가문의 경우, 수련을 지켜만 봐도 눈을 뽑는다는 말이 있지만, 전장터에서 구르는 흔한 용병들이 그런 걸 하나하나 의식하다 보면 언제 실력을 쌓겠는가?

 희한한 건 루카스가 호칭에 귀족을 상대하는 예법을 차용했다는 점이다. '공'은 일반적으로 상대를 존중할 때 쓰는 말인데, 검사들 간에서는 동등한 귀족 출신이 만났을 때 상호 예의를 차리는 표현이다.

 벨라 역시 옷매무새를 정돈하고 자세를 똑바로 한 뒤, 정말 오랜만에 격식을 갖춰 인사한다. 두 손을 모아 하는 일종의 포권이다. 전장에서 용병으로 활동하며 이런 식으로 예의를 차릴 일은 거의 없다.

 "과찬이십니다, 루카스 공. 그대도 귀족이십니까?"

 벨라의 경계심 담긴 눈빛에 루카스가 이런 분위기는 어색하다는듯 눈을 옆으로 돌리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무래도 생긴거 답지 않게 여자랑 별로 말을 나눠보지 못한 순둥이 같았다. 귀족 같은 행색을 하지도 않은 사람들이 3등실에서 이렇게 인사를 나누는 것 자체가 사실 웃긴 일이긴 하다.

 '흠, 실력에 비해 사람 상대하는 요령은 부족해 보이는데?'

 "그대의 약지에 낀 반지를 보고 알게 되었소. 본인은 프로이센의 루카스 클라우제비츠 폰 비스마르크요. 샤른호르스트 후작님께 사사받았소."

  귀족계급의 여성은 성인식을 올리면 왼손 약지에 가문을 상징하는 반지를 끼게 된다. 결혼을 하게 되면 남편이 마련해준 커플 결혼반지로 바꿔 끼는데, 아내의 격이 남편보다 더 높은 경우에는 오히려 처가에서 마련한 반지를 남편이 껴야 한다.

 벨라의 부친 요한은 몰락귀족이지만 신분제 사회에서 계급이 지니는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가문이 속한 신성제국의 귀족원에 가서 100골드의 등록금을 내고 방계 가보에 이사벨라의 이름을 올리는 걸 낭비라 생각하지 않았고 반지까지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아무튼 벨라에게 있어 부친이 어릴 때 만들어준 반지는 귀족계급으로서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말투나 행동거지는 평민 중에서도 상평민이 되었지만 말이다.

 아무튼 루카스의 소개를 들어보니 B급 용병 치고는 상당한 거물이었다.

 '아니, 이런 사람이 애당초에 왜 용병을 하고 있는 거야?'

 방계 몰락귀족인 벨라의 정식 성명이 '이사벨라 폰 트란실바녜'라는 걸 떠올려 보자. 중간성 앞에도 하나의 성이 더 있다는 건 직계임을 의미한다. 비스마르크 가문에 대해서 자세히는 모르나 작위귀족의 6촌 안만을 직계 귀족으로 취급하니, 수백 년 전에 방계가 된 벨라의 가문과는 비교할 수 없는 위치인 것이다. 게다가 루카스의 스승이라는 샤른호르스트 후작은 더욱 대단한 인물로, 프로이센 왕국이 보유한 세 명의 공식 소드마스터 중 한 명이었다.

 루카스는 벨라의 의문을 짐작했는지 겸연쩍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물론 프로이센 남자들이 흔히 그렇듯, 웃는 표정이 더욱 무뚝뚝하면서도 기괴해 보인다.

 "훌륭한 스승을 두었음에도 제자가 못난 탓에 실력없이 이곳저곳 떠돌아 다니고 있소."

 진하게 느껴지는 씁쓸함에 벨라가 실례했음을 알고 정중히 답한다.

 "공을 뵙게되어 무한한 영광입니다. 신성제국 국적의 이사벨라 폰 트란실바녜가 인사드립니다. 향족 요한 폰 트란실바녜에게 수학했으며, 벨라라 부르면서 편하게 말씀해주셔도 괜찮습니다."

 열 살 이상은 차이나는 남성으로부터 굳은 표정과 무뚝뚝한 어조의 존댓말을 듣는 게 내심 불편했던 그녀다. 루카스는 기꺼워 하며 말을 받았다.

 "알겠네. 트란실바녜 가문이라면.. 호오, 카르파티아 변경백이신 페렌츠 공이나, 왈라키아의 가시공과는 어떤 관계인가?"

 물론 벨라에게는 먼 세계다.

 "저는 베네치아에서 태어났고, 먼 방계 출신이라 잘 모릅니다."

 그녀의 단호한 말에, 이마를 긁적이며 식은땀 한방울을 닦는 걸 보니 역시 이 남자는 쑥맥이다.

 "흠흠, 남부 출신의 멋진 레이디였군. 그쪽은 항상 가보고 싶은 곳이었지. 프로이센은 여름이 짧고 너무 추운 날이 많아."

 "그렇군요."

 대화가 끊어지자 묘한 어색함이 이어졌다.

 이사벨라도 이러한 침묵을 견디긴 어려웠기에 다시 말을 꺼냈다.

 "그나저나 제 검은 어떻게 보셨습니까?"

 "아, 내가 누굴 평가할만한 입장은 아니지만, 그래도 보이는 부분만 간단히 말해보겠네."

 "네, 기탄없이 말씀해주십시오."

 이런 정중한 말투를 써본 게 얼마만인지, 버터를 크게 한 숟갈 베어문 느낌이라 오글거린다.

 아무튼 주제가 검 얘기로 돌아가자 루카스는 반색하면서 말이 많아졌다..

 "기본기가 제법 탄탄히 잡혀있더군. 어릴 때부터 가친께 가름침을 받았나 보지? 게다가 용병생활을 하며 쌓은 경험 때문인지 젊은 나이에 쉽게 갖출 수 없는 실전감각이 보였네. 나도 몇 년 간 떠돌아 다니면서 많은 사람들을 봐왔지만, 벨라 공 정도의 연배에 기본기와 실전기를 모두 갖춘 이들은 별로 보지 못했네. 열심히 정진한다면 수 년 안에 익스퍼트급이 될 수 있을걸세."

 루카스는 옆에 있던 물 한병을 들이켜 목을 축이고 말을 이었다. 아니, 병에 들어있어서 몰랐는데, 이제 보니 물이 아니라 프로이센산 맥주다. 어쩐지 술냄새가 나더라니. 반 병이상 마셨는데도 불구하고,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은데다가 표정이나 말투도 끄덕없는 게 신기하다.

 '프로이센 사내들은 맥주를 물처럼 쳐마시고 검을 휘둘러 상대를 난도질한다더니, 정말인가? 나보다 술을 잘 마시지는 않겠지?'

 동료 용병들은 술자리에서 종종 그녀를 '베네치아산 암고래'라고 놀렸는데, 웬만큼 주당들이 많은 용병들 사이에서도 술고래라고 불릴 정도니 말은 다했다.

 "그 붉은 자수정빛 검으로 펼친 검술은 혹시 가전 검술이 아닌가? 예전에 헝가리의 바토리 가(家)에서 온 검객들과 비무를 한 적이 있었지. 바토리는 피아스트, 프레미슬, 트란실바녜, 야기에우오 등 동부의 여러 유력 가문과 인척관계로 많은 교류를 해온 가문으로, 동부 검술의 전형을 지녔다 할 수 있는데, 그대의 검술과 어느 정도 유사한 면을 발견할 수 있었네."

 이사벨라의 눈이 살짝 커졌다.

 "정말이십니까? 자세히 말씀해주신다면 반드시 은혜를 갚겠습니다."

 "음, 내가 검술실력은 변변찮지만 훌륭한 검술을 많이 접하다 보니 눈만은 높아졌다네. 몇 군데 확인할 부분이 있는데, 괜찮다면 우선 비무를 한번 해보는 게 어떤가?"

 그날 루카스와 벌인 비무와 토론은 이사벨라는 상당한 성과를 볼 수 있었다. 둘은 아침식사조차 거른 채, 거의 다섯 번에 달하는 비무를 지속했다. 예상대로 루카스는 소드익스퍼트였는데 이사벨라의 예상과 달리 중급이나 되는 실력자였다. 이 정도면 A급 용병으로 거대한 용병단의 단장을 맡아도 충분한 실력인데 왜 추레한 몰골로 3등실에 쳐박혀 있는지 모르겠다. 아니 정상적인 경우라면 애초에 기사단에 들어갔을텐데 말이다.

 벨라는 루카스의 바스타드 소드에서 검기 형태로 뿜어져 나오는 흑갈빛 오러를 보면서 입맛을 다셨다. 이번 비무 역시 아쉽게 패배했다. 이길 수 있을 것 같이 보이면서도 항상 아쉽게 지게 되는 걸 보니, 소드익스퍼트와 소드유저 간의 벽이 장애물인 거다.

 '강자지존의 세계에서 제일로 중요한 건 일신의 강한 무력이다. 돈은 아무리 많아봤자 수단에 불과해. 내 자신이 고위귀족이나 무슨 뒷배가 있지 않은 이상, 결국은 힘이 최고인 거야.'

 완전히 힘을 뺀 벨라는 털썩 주저 앉았다. 격렬한 수련 때문인지 목이 타서 루카스가 마시던 흑맥주를 한모금 마시면서 병 입구를 쪽쪽 빨아먹었다.

 '크아! 북부지방 맥주는 듣던대로 진하고 톡쏘는 맛이 일품이군. 가는동안 심심하진 않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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