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3/49)

 루카스는 떠났지만, 벨라는 하루 종일 수련실에 들어앉아 그날 대련을 복기하다가 때로는 정신없이 검을 휘둘렀다. 루카스가 보여준 검로를 떠올리면서, 가전검술을 조금씩 새로운 방식으로 바꾸어 전개하길 계속했다.

 그날 저녁, 벨라는 자신이 소드유저 최상급에 도달한 걸 느낄 수 있었다.

 검술에서 각 경지의 최상급은 다음 경지로 승급할 수 있는 마지막 계기만을 남겨둔 상태를 말한다. 그렇기에 유저 최상급도 무리를 한다면 익스퍼트의 상징인 검기(劍氣)를 잠시 사용할 수 있다. 다만 그 대가로 엄청난 체력과 정신력을 소모해야 한다.

 또한 최상급이라 해서 금방 다음 경지로 오를 수 있다는 건 아니다. 마지막 계기를 얻지 못해 수십년동안 벽에 가로막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재능이나 노력, 운이 특출난 소수만이 계기를 통해 상승의 경지를 밟게 되는 것이다.

 -우웅-

 미약한 공명음과 함께, 블러디 하울에서 갓딴 석류처럼 선홍빛 색채의 검기가 흘러나온다. 알갱이가 터지듯이 주변을 물들이던 검기는 이내 빛을 잃고 사그라 든다.

 벨라는 서있을 힘도 없다는듯 수련실 바닥에 철푸덕 엎어져 누웠다. 그녀의 붉은빛 머리카락은 먼지와 땀으로 뒤범벅대 적회빛이 되어버렸지만, 입가에 맺힌 미소 한 줄기는 숨길 수 없었다.

 "하아, 하아. 30초가 한계네. 더 했다가는 뒈져 버릴 것 같아."

 대한민국의 풍족한 가정에 태어나 학점과 취업을 걱정하던 평범한 여대생,

 또는 혈혈단신으로 용병이 되어 당장 시체가 되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소녀.

 이제 누가 진짜 자신인지도 모르겠지만.. 검기를 사용할 수 있는 고수가 되다니 정말 감개무량한 일이다.

 마음의 여유를 찾았기 때문일까, 벨라는 선실의 동행객들과도 종종 세상 사는 얘기를 나누며 좀더 친밀해질 수 있었다.

 윌리엄의 경우는 E급 용병이지만 다음 달에 D급 승급시험을 치를 예정이라고 한다. 고작 17살에 D급이라니, 아무리 마법사라지만 꽤나 실력이 좋은 아이 같다.

 브리타니아 연합에 속하는 스코틀랜드의 고아 출신인데, 수행을 다니던 고위 마법사의 눈에 운좋게 띄어 로테르담에 위치한 백색마탑의 제자로 들어갔다는 사연이다. 고아 출신이 마탑의 제자가 될 정도면 정말 재능이 좋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 과정이 순탄치는 않았는지, 꽤나 인정에 메마른듯 보였다. 누나라고 부르라며 친절하게 대해주는 벨라에게 모성애라도 느끼는듯 하다.

 벨라의 경우, 사실 마법사를 그리 좋아하진 않는다. 마법이 워낙 심오한 분야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벨라가 만난 마법사들은 어딘가 한 군데 고장나 있는 경우가 많았다. 전장에서는 꼭 필요한 존재들이만 개인적으로 사귀고 싶지는 않달까. 몸은 비쩍 마른 놈들이 하나같이 변태여서 그녀에게 온갖 이상한 짓은 다 시켰다고 보면 된다.

 '으으으, 떠올리고 싶지 않아.'

 윌리엄도 벌써 소질이 있는지, 벨라가 뒤돌아 서있을 때 그녀의 엉덩이를 따갑게 쳐다보는 경우가 많았다. 자기 딴에는 조심스레 힐끔거리는 눈치지만, 벨라는 몸을 훑는 시선에는 도가 튼 여자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소드마스터가 기척을 감춘 채 음흉한 눈빛을 보내도 눈치채지 않을까 싶다.

 윌리엄의 눈길 정도는 중년의 배불뚝이 용병 보리스나 다른 모험가들에 비하면 약과다. 지금도 그렇다. G선실의 승객 전원이 참여한 꽤나 큰 판인데, 패는 안 보고 벨라의 몸매만 열심히 스캔하는 중이다.

  

 '저거 혹시 고도의 전략인거 아냐? 내 신경을 분산시키려는.'

 벨라는 자기가 생각해도 말이 안 된다는듯 피식 웃는다. 그녀 역시 아침부터 도박판에 참가해 꽤 선전 중이다. 지구에서부터 보드게임을 좋아하고 과거의 벨라도 감이 있었는지, 동료 사이에서 도박 고수로 취급받았다. 심지어 그녀가 전파해서 한동안 유행을 탄 게임도 있을 정도였다.

 돈이 계속 벨라 쪽으로 몰리는 걸 보니, 이 선실에 그녀 수준의 고수는 없는 듯 싶다. 하지만 돈을 잃어서 안타깝다는 표정을 짓는 사람들은 거의 없으니 희한한 일이다.

 "흐응…….. 자식들 귀엽네. 나한테 검은색 카드가 한장도 없을 것 같아?"

 콧소리만으로도 참기 힘든데, 아예 테이블 위에 올라 롱다리를 길게 뻗고 있다. 발목 위까지 오는 바지를 입고 있어 뽀얀 허벅지는 보이지 않지만, 대신 바지 뒤편이 슬쩍 내려가 있다. 검은색 카드는 안 보이지만 검은색 티팬티는 보이는 상황이다.

 '젠장! 분명히 블랙이 하나도 없어야 할 타이밍인데, 무슨 자신감이야?'

 '근데 아까도 저년이 없는 줄 알고 올인했다가 독박 썼단 말이야.'

 '젠장할 팬티는 왜 자꾸 보여! 미치겠네 이 음탕한 년!!'

 남자들은 다 똑같은 마음이다. 벨라는 기다리기 지루한지 시가를 한대 피우며 다리를 베베 꼬는 게 물이 오를대로 올랐다. 사내무리 속에서 며칠 밤이나 홀로 지새우려니 자제력이 점점 약화된 상황이다. 옷차림도 살짝살짝 노출되는 스타일로 바뀌었고, 가끔씩 어깨동무도 하는 등 신체적인 접촉도 잦아졌다. 얼핏 싸구려 유혹처럼 느껴지지만, 얼굴에 깃든 당당한 우월함 때문에 남자들은 침만 삼키고 있다.

 -후우~

 벨라가 길게 숨을 내뿜자, 시가의 연기가 링 모양으로 도박판 위를 비행한다. 완전 타짜다.

 "쫄리면 빠지시든가~"

 -으득

 -바드득

 어디서 이가는 소리들이 들린 것 같다.

 잠시 후 선실에서는 판돈을 몽땅 잃어버린 남자들의 절규가 울려 퍼졌다.

 "쓰파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알!"

 결국 그날의 도박판은 벨라의 압승으로 끝났다. 용병들이 재산을 모으기 힘든 건 다 이유가 있다. 생사를 넘나들며 번 돈을 이런 식으로 소모하기 때문이다. 마지막 남은 1실버로 독한 럼주 한병을 비우고 빈털터리 신세가 되어 다시 전장을 찾는 게 그네들 삶이다.

 벨라도 양심은 있는지 그날 저녁에 크게 한턱 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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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3화의 배경이 되는 프랑스의 도시 스트라스부르입니다. 

 [3화] 스트라스부르의 술집 화장실 : 뼈와 살이 불타는 밤

 그날 오후 5시 경, 데카당스 호는 스트라스부르(Strasbourg)의 미항에 다다랐다. 드디어 연합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부르고뉴대공국의 영토로 들어선 것이다. 도시의 주권을 지닌 알자스백작이 자치를 인정하고 있어 자유도시와 다름없이 상업이 발전한 곳이다.

 도시의 서쪽을 감싼 론 강은 붉게 타는 노을에 한껏 물들어 있다. 양쪽으로 들어선 목조 가옥들이 강물에 비쳐 넘실거리자 갑판에 나와있는 모험가들은 탄성을 내질렀다. 노트르담 대성당이 위치해 종교적으로도 중요한 곳이지만, 그들에겐 아무래도 상관없다.

 마지막 정박지였던 룩셈부르크에서 출발한 지 이틀이 넘은 탓에, 승객들은 어서 새로운 땅에 발을 디디고 볼거리든 놀거리든 먹을거리든 즐기고 싶은 심정이다. 돈은 잃었지만 간만에 저녁 파티를 하게 된 어느 3등실 손님들도 똑같은 마음이었다.

 스트라스부르 시내에 위치한 '발정난 암말' 주점.

 '풋! 센스있는데?'

 벨라가 용병생활을 하며 가본 주점이나 여관이 수백 개는 넘지만, 이런 직설적인 이름은 오랜만에 본다. 주점에 들어서는 것만으로도 슬쩍 젖어버린 느낌이다. 딱히 이름때문이 아니더라도, 이런 곳은 그녀에겐 항상 남자들이랑 살을 비비던 곳이었으니까.

 이 근방에선 어떤 풍의 의류가 유행하는지 둘러보다가 시간을 좀 지체했더니, 안에서는 이미 술판이 시작된 모양이다.

 주점의 문이 열리며 마지막으로 남았던 노을빛이 퀴퀴한 실내를 환하게 비춰준다. 선명한 진홍빛 머리칼에 짙은 보라색 상의, 군청색의 롱치마를 입고 사브르를 찬 매력적인 처녀가 들어왔다.

 롱치마긴 하지만 벨라가 처음으로 치마 복장을 한 걸 본 남정네들은 환호하는 눈치다. 다만 보리스는 그녀를 꼼꼼히 살펴보다가 짙은 청색 치마 속으로 남색의 긴 바지를 입었음을 깨닫고 실망했다.

 '요년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단 말이야.'

 그가 삼십년 가까운 용병생활동안 만난 여인들 중 그녀보다 미모가 우월한 아가씨들은 꽤 있었다. 사창가에만 가도 이쁘장한 얼굴은 많다. 하지만 여자로서의 매력 자체만 따지자면 벨라는 순위권에 들 정도다. 귀족가의 여인이랑 사랑을 나눈 적도 있지만, 처음에만 신분 금기를 범한다는 생각에 흥분됐을 뿐, 그녀들 또한 똑같은 여자임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 여자용병은 남자의 그곳을 살살 흥분시키면서 견딜 듯 못 견딜 듯 애태우는 그런 매력이 있다. 그러다 그것을 확 폭발시켜 엄청난 쾌락을 가져다 주는 개쌍년임이 분명하다.

 '오늘 못 따먹으면 진짜 강제로라도 뚫는다.'

 저런!  다소 위험한 생각도 하면서 그녀를 환영하는 중이다.

 "어이, 벨라! 진도 맞춰야지?"

 루카스가 자기 옆에 놓인 맥주 한병을 따서 쥐어 준다.

 -꿀꺽꿀꺽꿀꺽꿀꺽

 그리고 벨라는 받은 즉시 고개를 뒤로 꺾어 2L 짜리 맥주를 시원하게 원샷해 버렸다.

 -휘익~

 -와우~~

 "캬으! 프로이센산 흑맥주는 빈속에 제대로잖아?"

 그녀의 붉은 입술과 맥주병 사이로 몇 방울의 맥주가 새어나왔지만, 원샷을 끝내고 병을 거꾸로 잡아 머리 위에 털어대자 남자들은 모두 탄성을 내지르며 박수를 쳤다. 루카스도 그녀가 설마 원샷할 줄은 몰랐는지 머리를 긁적인다.

 "자, 진도를 맞췄으면 이제 늦게 도착한 죄로 한잔 더!!"

 보리스가 자기 앞에 놓인 바타비아산 럼주를 벨라 앞에 한잔 따라주며 윌리엄에게 눈짓을 보낸다.

 윌리엄은 특이하게 스코틀랜드산 위스키를 홀짝이고 있다가, 옆에 있는 빈 잔에 어두운 호박색의 위스키를 졸졸 따라 벨라에게 건낸다.

 "누나, 이건 오늘 도박판을 쓸어간 데카당스 호의 도신(賭神)에게 드리는 축하주에요!"

 자리에 앉자마자 두 잔을 동시에 받아든 벨라는 일행의 잔이 모두 차있는 걸 보고 눈을 빛냈다.

 "좋아. 오늘 끝까지 가자! 나에게 돈 따먹힌 놈들 모두 한잔씩 들어!"

 결국 모든 일행이 잔을 들고 '짠' 소리를 내며 건배했다.

 "방랑자들의 수호성인 성 라브르(St.Labre)를 위하여!"

 그리고 벨라는 럼주와 위스키를 양손에 들고 동시에 입에 들어붓는 걸로 이들의 기대에 보답해 주었다.

 병샷을 하자마자 럼주와 위스키를 쏟아붓자 '약간' 알딸딸한 느낌이 든다. 때마침 머리가 희끗희끗한 장년의 주인장이 두손 위에 요리가 가득 담긴 쟁반을 올려 갖다 놓는다.

양배추와 소시지, 감자를 화이트 와인으로 쪄낸 슈크루트 요리부터 시작해, 선홍빛 소고기를 다져 양념을 올린 비프 타르타르, 브리오슈 반죽에 연어와 달걀을 넣어 만든 쿨리비악 파이, 돼지고기를 통째로 바비큐해 꿀에 절인 안주까지 알자스 지방의 진미들이 나왔다.

 "우리 '발정난 암소' 주점을 방문한 걸 환영하네. 딱봐도 오늘 북부에서 갓 내려온 모험가 분들이구만. 나도 몇 년 전까지 라인강을 수영하다가 심심하면 알프스 산맥까지 가서 눈청소를 하곤 했다네."

 알프스 산맥은 에우로파 대륙에서 가장 험준한 산맥으로 근처에만 가도 위험한 몬스터들이 득시글 거리는 곳이다. 한번 빠지면 미노타우르스조차 쓸려갈 정도로 물길이 거센 라인강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뜨끈뜨근한 김이 올라오는 요리를 본 용병들은 주인장의 별거아닌 농담에도 푸하하하 웃어댔다. 아마 헬베티아나 바이에른 쪽에서 활동하던 퇴역용병이 고향에 돌아와 주점을 연 모양이다.

 "우리 주점에 여성 분이 오는 건 오랜만이군. 레이디의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지?"

 "발정난 암소가 되시겠소."

 벨라가 주인장의 말투를 흉내내며 한 농담에 좌중은 다시 한번 웃음바다가 되었다. 보리스가 재빨리 말을 이어주었다.

 "벨라(Bella). 우리 선실의 홍일점이지. 그녀가 우리의 물주요."

 "오, 그녀가 물주라니, 이거 잘보여야겠군. 안 그래도 특별 서비스로 명주를 내왔다네."

 주인장은 호들갑을 떨며 허리춤에 매어둔 술병 두 개를 꺼낸다. 블랙드래곤과 레드드래곤이 멋스럽게 새겨진 술병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와우, 지금 내가 뭘본거야? 드래곤 키스(Dragon Kiss)에, 헬 파이어(Hell Fire)까지! 주인장 통이 아주 대서양급인데?"

 "오, 이 아가씨는 뭘 좀 아는군. 이래서 명주는 무식한 남자놈들만 있을 땐 꺼내면 안 된다니까."

 드래곤 키스는 알프스 산맥의 고산지대에서만 자라는 다섯 가지 베리의 향이 담긴 보드카고, 헬 파이어는 빼갈보다 더 세다는 주정(酒精) 수준의 발효주다. 원산지인 신성제국 아스토리아에서나 종종 맛볼 수 있는 유명한 명주들인데, 주인장이 용병으로 쌓았던 인맥 덕분인지 그쪽에 거래처가 있나보다.

 로트링겐 토박이나 프로이센 출신의 용병들은 잘 모르는 눈치지만, 본래 신성제국에서 용병활동을 시작했던 벨라는 환장하면서 술병을 받아든다.

 "이거 둘을 섞으면 최고의 폭탄주가 된다고."

 "폭탄주?"

 생소한 단어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용병들을 향해 싱그러운 미소를 날린다.

 "안주나 어서 먹어두렴, 얘들아. 무엇을 상상하든 기대 이상일 테니."

 어느새 밖의 거리는 어둑어둑해졌지만 '발정난 암소' 주점의 열기는 더욱 뜨거워진다.

 가게 이름을 걸고 한다는 '발정난 암소 앞다리살 스테이크' 요리가 나왔고, 벨라가 직접 혀 꼬부라진 소리로 몇 가지 술을 추가 주문했다.

 "어으 주인장! 혹시 요기 프로방쓰산 키르 깍테일 있지? 제값 낼 테니까 헬 빠이어 한병도 더죠."

 주인장은 간만에 술을 잘 아는 애주가를 만나서 흐뭇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주문을 받는다.

 "키르랑 헬 파이어랑 섞으면 직빵이야! 완전 뿅! 뿅 가버린다고~"

 벌써 몇 명은 테이블 위에 고개를 박고 엎드려 있거나, 의자에 몸을 푹 기댄 채 눈을 뜰락말락 하고 있다. 하지만 붉은 머리의 폭탄주 장인은 빈잔을 사람 수대로 열맞춰 놓고 신들리게 새로운 폭탄주를 제조하는 중이다.

 보리스는 그동안 자신이 꽤나 술을 잘 마신다고 생각해온 걸 자책했다. 저년은 자기보다 두세 배는 더 마신 것 같은데 아직 필름이 나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오늘 반드시 복수하겠다며 벼르고 나온 쌍둥이 형제, 릭과 글렌도 아직 살아는 있지만 말그대로 죽을 것 같은 표정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벨라는 이미 필름이 나간 용병의 앞에도 폭탄주를 만들어 놓고 대신 마셔주기까지 하는 중이다. 미디엄으로 익힌 암소스테이크를 베어 무는데, 입술에서 핏물이 똑똑 떨어지는 게 무섭게 매력적이다.

 삼십분이 더 지나자 벨라의 동공도 슬슬 풀리는 듯 싶다. 그야말로 뇌쇄미의 정점이랄까. 알코올 때문에 새하얗게 질린 얼굴에 붉은 홍조가 깃들고 붉은 머리칼이 어깨 아래 가슴골까지 치렁댄다. 덥다는듯 셔츠를 계속 펄럭이는데 새하얀 속살이 비친다.

 그러다 문득 오줌이 마려운듯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한다. 일어서서 살짝 비틀거리다 어기적어기적 걸어가면서 눈꺼풀을 연신 깜빡거리는 게 꽤 취한 것 같았다.

 '으.. 이렇게 뒤도 안 돌아보고 대판 쳐마신 건 정말 오랜만이네. 물빼고 세수 한번 하고오면 정신이 좀 들겠다.'

 벨라가 화장실에 들어가자, 그동안 취한 척 추가 음주를 자제하던 보리스도 슬쩍 눈을 뜨고 일어선다. 다른 용병들을 보니 반은 이미 갔고, 나머지 반도 경계에서 헤매는 중이다. 프로이센에서 왔다는 루카스란 놈은 그래도 덜 취한 것 같았는데, 한창 흥이 오를 때쯤 검을 휘두른다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무시해서 미안했다, 벨라. 넌 대단한 년이었어.'

 보리스는 조심스레 주변을 살핀 뒤 화장실로 향했다.

 '그러니까 사과의 의미에서 잊지 못할 쾌락을 새겨줄게. 흐.'

 화장실은 남녀공용이었는데 바깥문을 열고 들어서면 세면대가 있고 안쪽 공간에 다시 작은 문이 달린 좌변기들이 있는 식이었다. 보리스가 들어서자, 화장실 특유의 냄새가 체리향 방향제와 섞여 코를 찌른다.

 벨라는 좌변기 문도 닫지 않은 채, 시원하게 일을 보고 휴지로 뒷처리를 하는 중이었다. 몽롱한 눈으로 계속 앉아있는 걸 보니 보리스가 들어온지도 모르는듯 했다.

 이때 보리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벨라가 군청색 치마를 내리자, 남색 바지를 벗지도 않은 것 같은데 새하얀 허벅지가 드러난 것이다.

자세히 보니 허벅지 상단 즈음에서 바지의 윗부분이 잘려 있었다. 즉 허벅지부터 발목까지는 노블한 스타일의 네이비색 천이 바지와 비슷한 형태로 입혀져 있지만, 허벅지 맨 위와 엉덩이 부분은 탱탱한 맨살을 드러낸 채 오직 빨간 티팬티 하나만 올려져 있었다.

 '이런 씨발년이!'

 보리스의 바지 앞섬이 순식간에 불룩 튀어나온다.

 잠시 정신을 가다듬던 벨라는 뒤돌아서 변기물을 내리고 뚜껑을 닫았다.

 '아으, 이대로면 테이블까지 가다가 엎어져서 기어갈 듯 싶은데. 시원하게 세수 한번 하고 명상 좀 하다 가야겠다.'

 그때 뒤에서 남성의 거친 손길이 벨라의 남색 치마 뒤쪽을 확 들어올렸다. 품이 넓은 레이스 치마가 순식간에 허리 위로 들리자 뽀얀 엉덩이가 수줍게 모습을 드러낸다.

 "윽! 머야? 읍!?"

 부지불식간에 당한 일에 벨라가 비명을 내질렀지만, 곧 두툼한 손이 그녀의 입을 막았다.

 경황 중에 그녀는 두 손으로 변기통 맨위를 짚고, 상체는 뚜겅닫힌 변기 위에 뉘였으며, 엉덩이를 활짝 오픈한 채, 바지스타킹을 입은 하체를 뒤로 쏙 뺀 자세가 되었다. 그야말로 남자의 씨를 받아들이기 위한 최고의 자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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