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던 일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요?
'맙소사!'
테이블 밑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벨라는 놀라서 푸른색 눈을 크게 치떴다. 하던 일이라면 방금 전까지 그녀가 끈질기게 하던 펠라티오를 말하는 게 분명했다.
돼지새끼가 완전히 그녀를 창녀 취급 하고 있었다. 불쾌감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가슴 한켠이 두근거린다.
벨라는 용병생활을 하면서 전쟁에 참여한 경험도 풍부했다. 고위급 여마법사들을 제외하면 이쁘장한 여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전장에서, 벨라는 군용창녀처럼 취급받은 경우도 종종 있었다. 간혹 정도를 넘어서 학대하려는 경우에는 호되게 혼쭐을 내줬지만, 남자들의 폭발적 성욕 속에서 그녀의 몸이 마음대로 다뤄지면서 얻은 쾌락도 상당했다.
물론 그런 남자들은 훌륭한 근육과 거근을 지닌 전사들이었다. 지금의 경우는 앞에 보이는 다리들만 봐도 호드랑 다름없는 놈들임이 분명하지만, 왜 그런 흥분감이 드는지 모르겠다. 스트라스부르의 주점에서 술에 취해 보리스와 찌질이 쌍둥이들에게 반강제로 당했던 일이 그녀에게 큰 영향을 미쳤던 걸까?
'저런 새끼들이 날 마음대로 따먹겠다고? 하아…….젠장할. 근데 왜 기분이 나쁘지가 않은거지.. 내가 진짜 미친걸까? 도착한 뒤에 금욕하지 말고 호빠나 다닐걸 그랬나…'
복잡한 생각이 들면서 유두가 딱딱해지고 아래쪽이 다시 젖는 게, 아무래도 흥분감이 불쾌감을 누르고 있는 같다.
"어서!"
호드의 뜬금없는 재촉에 한 관리가 의아하다는듯 묻는다.
"재무관, 갑자기 웬 반말을… 어어? 이, 이건…? 크흐으음…"
벨라는 마침 그 관리의 앞에 다가가 기습적으로 바지와 팬티를 능숙하게 휙휙 내렸다. 무릎을 꿇고 그의 조그만 하물에, 사과 모양으로 묶은 그녀의 머리를 쳐박았다.
-쩝쩝쩝 츄읍 스읍
곧바로 그녀가 내는 음란한 소리가 좌중에 울려 퍼졌다.
무슨 소리인지 몰라 물음표를 띄우던 관리들은 테이블 밑의 존재를 깨닫고, 처음에는 어이없다는 표정들이었다. 하지만 펠라를 받던 관리가 당황한 표정을 지운 채, 지긋이 눈을 감고 아래쪽에 올라온 붉은 머리를 누르며 느끼는 걸 보자, 다들 성욕이 치밀어 오르는듯 음소를 짓기 시작했다.
첫 타자로 잡은 관리의 사정이 끝난 후, 벨라는 오프숄더 상의로 입가의 정액을 대충 닦고 테이블 아래서 기어나와 일어섰다. 테이블 앞에는 호드를 포함해 여섯 명이나 되는 관리가 앉아 있었는데, 그중에선 사무 차 몇 번 만나본 관리들도 있었다. 버건디의 내무관, 안찰관, 군무관, 법무관, 공무관 등 상급관리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기사집안 출신이거나 준남작의 위를 지닌 이도 더러 있었지만, 대부분 평민 출신에서 승진한 인사들이었다. 그들의 상관은 영지의 재상으로 대공의 측근인 중상급 귀족이며, 그 위에는 오직 대공만 있을 뿐이다. 즉 적어도 평민들에게 있어 이들의 권세는 어마어마하다 할 수 있다.
벨라의 눈에는 물론 하나같이 살이 뒤룩뒤룩찐 돼지들이었다. 주제도 모르는 놈들이지만 그래서 더 꼴려버린…
"안녕하세요, 버건디 영지의 행정관 여러분. 귀 영지의 백화점에서 명품의류매장을 오픈한 이사벨이라고 합니다."
올블랙슈트의 미녀에 정열적인 붉은 머리의 미녀가 모습을 드러내자 관리들은 자연스레 탄성을 내뱉었다.
백옥 같은 어깨를 환히 드러낸 우아한 노블블랙 색채의 티. 군데군데에 정액이 흐르는 자국이 보인다.
"이렇게 만나게 되어 진심으로 반갑네, 이사벨라 양."
"아까 개점식에서 전하께 또박또박 말씀을 올리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는데, 여기서 보여주는 새로운 모습은 더욱 인상적이군. 하하."
"별말씀을 다 하시는군요. 그저 저희 매장을 잘 봐주시고 힘써주시길 부탁드리겠어요."
이 시대의 관리들은 다들 여자를 탐하는 일에 도가 튼 존재들이다. 일반 용병들은 월수입의 반을 쏟아부여 한달에 한번 정도 창녀를 끌어 안고 자는 게 대부분이지만, 이들은 하루가 멀다하고 약자들에게 분탕을 치면서 매우 풍부한 여성 경험을 지닌 종자들인 것이다. 그래서 벨라가 본능적으로 끌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들로서는 저런 암캐를 조련하는 일이라면 얼마의 시간을 투자한다 해도 환영이었다. 벨라는 몇몇 관리와 인사를 더 나누고 대화를 시작했다. 물론 몸과 몸을 비비며 뜨겁게 이루어지는 대화였다.
디종 근처에 위치한 퐁텐블로 사냥터. 작중 대공가의 사저 혹은 영빈관으로 생각하시면 될듯 합니다.
벨라는 두달 넘게 대공가의 영빈관에 있는 블라드 공작의 숙소에 얹혀 살고 있었다. 이곳은 그녀가 이 세계에 와서 머문 곳 중 가장 호화롭게 지어진 저택이었지만, 그 생활이 그렇게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물론 겉으로 보기에는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의 연속이다. 그녀가 배정받은 방은 공작의 방에 비해서는 조금 격이 떨어지지만 일반 귀족의 방보다는 훨씬 훌륭했다. 우연인지 배려인지는 모르지만, 그녀의 머리와 어울리는 진홍색과 와인색, 핑크색이 어울린 인테리어는 여자의 감성을 자극한다. 복도로 나오면 화려한 샹들리에가 걸린 홀까지 있다. 루비와 에메랄드가 곳곳에 장식된 벽 위에는 화가가 혼신의 힘을 다해서 그렸을 스테인드글라스가 오후의 태양빛을 멋지게 흡수하며 빛나고 있다.
별채의 뒤쪽으로 큰 수련장이 있는데, 벨라는 이곳에서 블라드 공작에게 그의 비전 심법인 '드라큘러스 문(Draculus Moon)'을 전수받았다. 이로써 그녀가 익힌 오라심법은 크로아티안 랩소드, 크림슨 로즈, 바바리안 오랑쥬와, 공작에겐 정체를 숨긴 '골든 프레데터'를 합쳐 총 다섯 개가 되었다.
크로아티안 랩소드를 익혔다 해도, 여러 오라 심법을 무분별하게 익히면 분명히 문제점이 발생한다. 과거의 벨라도 이때문에 몇몇 위험한 순간을 넘긴 적이 있었는데, 자신이 벨라가 된 다음부터는 거의 그런 일을 겪지 못했다. 다만 '골든 프레데터'로 인한 문제는 남아있었다. 그것은 벨라가 용병활동을 하면서 전쟁터에서 전사자들의 품을 뒤지다가, 죽은 기사의 품에서 우연히 획득한 심법이었다.
골든 프레데터는100년 전 에우로파 대륙에 돌풍을 일으켰던 그랜드소드마스터 오토 1세가 익혔다고 알려진 심법이었기 때문에 벨라는 얼른 그 책을 품에 숨기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오토 1세는 작센의 군주였는데 무리한 확장전쟁으로 인해 대륙의 공적이 되었다. 작센왕국은 결국 그의 사후에 갈가리 찢겨져 멸망하고, 왕가의 보물들 역시 오래전에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처음에는 단지 이름만 같은 가짜 심법서가 아닐까 의심했지만, 익히면서 특별한 효능들을 경험한 뒤, 동일한 심법임을 확신하고 있다.
실제 역사에서는 작센공작, 독일과 이탈리아의 왕,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지낸 오토 1세입니다.
심법의 이름은 대륙공용어로 '황금 포식자'란 뜻이다. 과연 다른 심법을 기반으로 오라를 전개할 때에 비해 더욱 광폭한 파괴력을 보여준다. 수련을 할 때도, 신체 내에서 다른 성질의 기를 모조리 먹어치우려 하는 습성이 강했다. 이로 인해 벨라는 특이한 유형의 주화입마 위험에 처해 있었다. 이건 다른 오러심법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특성이었다.
여기에 드라큘러스 문이 더해지면서 상황이 굉장히 묘해졌다. 벨라는 새로운 심법 역시 광폭한 특성을 지님을 느껴서 걱정했는데, 염려와 달리 다른 기들 밑으로 기어들어가 매우 은밀하게 기운을 키우고 있었다. 어쩌면'동(動)'과 '정(靜)'의 두 기운이 조화를 이루어 그녀를 상승의 경지로 이끌지도 모르는 일이다.
혈향검 블러디하울 또한 자수정색이 더욱 강해져, 기묘한 붉은 빛을 띠고 있었는데, 그녀의 검을 본 공작이 강화를 시켜주겠다며 들고 갔다가 돌려준 결과물이었다. 가문 특유의 강화마법이나 어떠한 비술을 건듯 했는데, 붉은 빛의 날이 번들번들 거리는 게 상당히 강력한 무기로 바뀐듯 했다.
공작은 그 검에 대륙공용어로 황혼이라는 뜻을 지닌 '트와일라잇(Twilight)'이란 명칭을 붙여 주었다. 이미 그 검은 예전의 이름으로 불리기에는 격이 달라졌다면서 말이다.
공작은 여행을 다니면서 십수 명의 하인들을 데리고 다녔고, 벨라도 대충 그들과 안면을 익힌 상태였다. 그 외에 수행기사 세 명이 항상 공작을 호종하고 있었다. 에리히, 하인리히, 프리드리히라는 비슷비슷한 이름을 지닌 기사들로, '드라곤 기사단'의 단원들이라 한다.
"에휴, 혹 하나 떼려다가 몇 개나 더 붙인거야."
행정청의 관리들과는'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좋은 관계'라는 말이, 일주일에 몇 번씩 그들을 찾아가 암캐처럼 엎드려 헉헉댄다는 뜻이면 말이다. 어떤 관리를 상대할 때는 업무를 보고 있는 책상 밑에 숨어 있으면서, 부하들이 보고하고 나갈 때까지 들키지 않고 펠라를 해주기도 했다. 마치 사장과 불륜관계를 맺은 여비서 같은 느낌으로 말이다.
관리들은 귀족 처녀를 마음대로 한다는 배덕감에 그녀와 할 때마다 큰 쾌락을 맛보고 있었다. 벨라로서도 저택에 머물게 되면서 성욕을 풀기가 어려워진 상황에서 욕구를 배출할 수 있는 통로를 찾은 셈이라 그들의 관계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
그러던 와중에 벨라는 우연한 계기를 통해 소드 익스퍼트(Sword Expert) 하급의 경지에 오르게 되었다. 버건디 시의 서쪽에는 프로방스 왕국에서부터 이어지는 거대한 삼림지대가 있었다. 숲의 이름은 '슈바르츠발트'로, 흑림(黑林)을 의미하는 말인데, 그말 그대로 나무가 빽빽이 들어차 낮에도 상당히 어둡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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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독일 남서부 지방에 위치한 슈바르츠발트(Black Forest)입니다.
그 날, 벨라는 새로운 장소에서 검도 수련하고, 사냥도 해올겸 흑림지대에 들어갔었다. 오랜만에 맛보는 신선한 숲공기에 취했는지 생각보다 깊게 들어간 게 사건의 시작이었다.
조금씩 수상한 기척이 느껴지더니, 백 명에 가까운 도적떼와 마주치게 된 것이다.
'아니, 연합수도에서 얼마 멀지도 않은 곳에 이렇게 많은 도적떼가 있었다니….. 그야말로 헐이네, 헐!'
물론 도적들은 웬 횡재냐는 표정이다.
징그럽게 생긴 도적 두목이 음소를 흘리며 다가왔다. 벨라는 표정을 굳히며, 등에 매어두었던 애검 '트와일라잇'을 빼어들었다.
"흐흐, 용병인 것 같은데 용기는 가상하다만 혼자서 우리를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얌전히 굴복한다면, 노예로 만들지 않고 첩으로 대접해주지."
"닥쳐! 조상대대로 하수구 통로를 기어다니며 빌어쳐먹던 년놈들이 시궁창에서 교접해 쥐새끼가 똥싸듯이 낳은 거지발싸개들아. 니놈들 입에서 소똥 말똥 돼지똥 섞어서 믹서기에 좆나게 간뒤 백일동안 묵힌 냄새가 나잖아."
구수하게 빠른 템포로 던진 욕에 산적들은 잠깐 굳어있다가 얼굴을 붉히고 분노에 떨었다.
"흐흐흐흐, 개 같은 년이 우리를 자극하는군. 네년은 절대 노예시장에 팔지 않고 죽을 때까지 대대손손 우리만의 성노예로 써버리겠다!"
이때 벨라는 상당히 무리를 해서 트와일라잇에서 몇 가닥 선홍빛 검기(劍氣)를 뽑아내었다. 긴박한 와중에 그녀가 생각해낸 최선의 해결책이다.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 같던 도적들이 움찔하고, 도적 두목도 눈을 크게 뜬다.
"아니, 저건 설마 검기?"
"어이어이, 무식한 놈들아. 그러니까 니네가 도적 처지를 못 벗어나는 거야. 여자 혼자 이 숲을 돌아다니는 걸 보면 모르겠냐?"
벨라는 일단 내력의 소모가 커지자 검기를 거두고 착검한뒤 적당히 구라를 치기 시작했다.
"꼬꼬마들아, 보다시피 나는 익스퍼트급 검사다. 내가 너희들이랑 싸운다면 솔직히 이길지 질지 나도 몰라. 너희들이 예상보다 강하다면 내가 질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이긴 너희들은 무사할까? 내가 마음먹고 싸운다면, 한 칠팔십은 내 손에 칼로 무자르듯 목이 날아갈걸? 남은 이삼십도 불구가 태반이겠지. 그리고 난 한계상황에 이르면 반드시 자결할 거다. 즉 너네는 자결할 사람 하나를 두고 산채를 쫄딱 말아먹는 거지."
도적들도 웅성웅성대고 두목도 고민이 되는듯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렇다고 그냥 지나가겠다는 말은 아니야. 숲에 산책온 거라 가져나온 돈은 없고, 너네들 죄다 몸 대주다보면 반도 못 채우고 완전 박살나버리겠고, 그래서 딱 한가지만 하는걸로 합의를 보자 이거지."
"그게 뭐냐?"
도적 두목이 궁금한듯 묻자, 벨라는 싱긋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청소."
잠시 후, 그들이 머물던 곳에는 긴 줄이 형성됐다.
-쯉쯉쯉 챠랍 챠랍
그리고 벨라는 무릎을 땅에 붙인 채 도적 세명의 하체에 둘러쌓여 있다. 입으로 하나를 빨면서, 손으로 두개를 만져준다. 이른바 '트리플펠라'라 불리는 행위다.
'어우, 치즈썩은 냄새.'
숲에는 씻기 좋은 냇가가 곳곳에 널려 있는데, 왜 씻지들을 않을까.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더러운 자지들을 빨고 있는듯한 느낌이다. 점심을 먹은 상태에서 빨았다면 아마 냄새만으로 토했을지도. 그녀는 자신이 상황을 고려해 최선의 결정을 내렸다고 믿고 있지만, 꼬릿한 냄새를 맡을 생각에 흥분한 것도 사실이다.
'나 냄새 페티쉬인가봐. 암튼 니들 운좋은 줄 알아. 나 아니면 누가 이렇게 깔끔히 청소해주겠냐?'
산적들에게까지 현대의 위생관념을 전파하기 위해 애쓰는 벨라 양 되시겠다.
-웨엑, 허음
"혹시 수상한 수작을 부리는 낌새가 느껴지면, 지금 하고 있는 놈들 바로 고자만들고 튄다! 자. 아~"
협박하면서 이빨을 살짝 세우자, 빨리고 있는 산적이 움찔 한다. 기분은 좋은데 표정은 불안에 차있다.
"속일 생각 말고, 한 놈 당 한번이야! 내가 모를 것 같지? 두 번 오는 놈 거시기는 내가 기념으로 들고 간다."
뒤에서 대기하던 산적들도 움찔한다.
"휴우~"
산적들의 수는 정확히99명이었다. 벨라는 33세트의 운동을 끝내고, 산채에 가서 점심까지 얻어먹는 중이다. 불쌍하게 빌어먹는 애들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식사의 질은 훌륭한 편이었다.
'근데 얘네들은 이 근처에서 뭘 털어먹을 게 있다고 이렇게 잘 먹고 잘 사는거야? 인원도 많은데?'
부르고뉴는 로사링거연합에서 손꼽히는 강국이고, 버건디도 부르고뉴 지방에서 손꼽히는 부유한 도시지만.. 샤를 대공의 군세 또한 강력하기 때문에, 감히 주변에 도적이나 빈민이 들끓을 틈이 없었다. 흑림 슈바르츠펠트는 몬스터가 자주 출몰해서 일반인의 출입도 드문 편이다.
한줄기 의문을 느끼며 식사를 마치려 하는데, 그녀를 향한 강렬한 시선이 느껴진다.
'어? 못 보던 새낀데? 플레이트 메일을 입고 있어?'
플레이트 메일 아머는 고리, 쇠사슬, 금속조각을 이어만든 갑옷을 말한다. 도적이라고 해서 갑옷을 입을 수 없다는 건 아니지만, 그 갑옷에 새겨진 문양이 문제였다. 파란 바탕에 황금 백합 문장.
"부르봉(Bourbon)?"
벨라는 몇번이고 눈을 비비면서 문양을 응시하다 한 단어를 내뱉었다. 마치 절대 보이면 안될 것이라도 본듯.
갑옷을 입은 도적이 그녀를 강렬한 눈빛으로 노려보면서 서서히 다가온다. 점심을 먹으며 웃고 떠들던 다른 도적들도 흉흉한 눈빛으로 일어선다.
'이상하다 했어. 식사시간인데도 지나치게 긴장한듯한 도적들의 분위기… 아까부터 느껴지던 특이한 기세. 저택에서 편하게 지내더니 감을 잃었군.'
저들은 산적이 아니라 기사였다. 산적떼가 아니라 기사단이었다. 지금 다가오는 기사는 아마 단장이나 부단장급일 것이다. 아까 도적떼에 저 정도로 강렬한 기세를 내뿜는 고수가 있었다면 자신이 처음부터 못 느꼈을 리 없으니, 아마 계속 산채에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 부하들의 보고를 받고 자신의 처분을 결정한 다음 모습을 드러낸 거다.
"운이 없게 됐군, 용병 아가씨."
그는 그녀의 열 걸음 앞까지 걸어와서 멈췄다.
"당신은 누구지?"
벨라는 어깨 뒤에 맨 검에 손을 올려 놓으며 물었다.
"이미 짐작하는 것 같은데 정식으로 소개하겠네. 나는 황금백합기사단의 부단장 조슈아 데파르망 드 가스코뉴(Joshua Department de Gascogne). 프로방스 왕국에서 왔지."
"프로방스?…..…….크크크큭큭큭킄킄."
벨라는 이제 앞뒤사정을 완벽히 파악했다. 부르고뉴와 로사링거의 숙적인 프로방스 왕국의 기사단이 흑림에 매복하고 있었다. 아마 버건디를 기습할 생각이겠지. 애초에 부르고뉴 방면에서 온 그녀를 무사히 보내줄리가 만무했다.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것도 살려둘 마음이 없다는 반증이다.
"왜 웃는 거지?"
조슈아가 불쾌한듯 물어보자 벨라는 더 크게 웃으며 대답했다.
"하하하하, 우스워서 그래. 꾀죄죄한 산도적놈들이 명예롭게 기사 행세를 하니 이거보다 우스운 일이 어디있겠어?"
"뭐라? 우리는 명예로운 대 프로방스의 기사다!"
아까 산적두목으로 분장했던 기사가 조슈아의 뒤에서 발끈하고 소리친다.
"그래? 그럼 아까 나랑 맺었던 약조는 뭐지?"
"………."
"하하하하, 애초에 도적놈들이랑 한 약속을 믿은 내가 멍청한 년이다."
그 기사가 벨라의 물음에 꿀먹은 벙어리가 되자, 조슈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대로 여기에 머물러 우리를 위해 봉사한다면 기사의 명예를 걸고 목숨은 해치지 않겠다고 약속하지."
"목숨?"
벨라는 코웃음을 쳤다. 애초에 자신은 전장을 쏘다니며 검 하나에 목숨을 걸고 사는 용병이었다.
"그런 협박은 무지렁이 농민들에게나 하지 그래?"
"아직 젊은 나이로 보이는데, 그대의 실력 정도면 언젠가 우리 왕국에서도 좋은 위치에 오를 수 있을 것이다."
'이 자식이 덤비면 나는 몇 분안에 죽을텐데, 왜 자꾸 살살 구스르는 거지?'
벨라는 그의 저의를 알 수 없어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녀는 결코 이런 상황에서 선의가 나올 수 있을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당신 말을 듣다보니 과연 관심이 생기는군."
일단 벨라는 기회를 노리면서 그의 장단에 어울려 주었다.
"호오, 정말인가?"
"무고한 여행객을 추행하고 살인을 일삼는 일개 도적놈조차 작위성을 가지고 있다니 말이야. 과연 프로방스는 도적들도 출세할 수 있는 꿈과 기회의 나라 아닌가!"
"에잇, 단장. 저년 당장 죽여버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