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9/49)

 애국심이 투철한 어떤 기사가 소리쳤지만, 조슈아는 손을 들어 제지했다.

 "애초에 말이 안 통하는 년이군. 이제 시간이 슬슬 됐을텐데, 혹시 이상한 게 느껴지진 않나?"

 "무슨……?!!!! 이 개썅! 빌어쳐먹을 도적놈의 새끼들을 봤나?"

 벨라는 순간 무슨 소리인지 몰라 주위를 살피다가 그녀의 몸이 이상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수면제다. 아까 먹은 음식에 수면제가 들어있었던 거다. 씨발, 차라리 흥분제라면 참기라도 하지. 조금씩 세상이 흔들리고 있는 느낌이다.

 "속도는 느리지만 효과는 세상에서 가장 강력하다는 수면제, '트롤의 늪'이다. 수면에 저항하려 한다면 무서운 독이 되어 골수까지 파괴하는 걸로 유명하지. 이제 네년이 벗어날 길은 없어. 포기하고 순응해라. 부정한 오러홀을 파괴하고 성노예로 새로운 삶을 부여해주마."

 "닥!! 쳐!!"

 벨라는 이를 악 물고 몸을 일으키며 소리쳤다. 비틀거리는 몸을 부여잡고 허리춤을 뒤진다.

 '나는 자유용병 벨라다. 누구도 나의 자유를 강탈할 수 없어.'

 '알지 못할 힘에 의해 이 세계에 떨어졌지만, 나는 결코 내 자유를 위해 싸우는 걸 포기하지 않겠다.'

 그녀는 몸 깊숙이 들어있는 비상용 요대에서 무언가를 꺼내 왈칵왈칵 마셨다.

 핫식스라고 쓰여있는 캔을 시원하게 비운 뒤 옆으로 던져 버린다. 물론 진짜 핫식스는 아니고, 그녀가 각성효과를 지닌 온갖 약초들을 모아 만들어 놓은 포션이다. 시험용으로 만든 거라 어떤 부작용이 있을지는 장담하지 못한다. 핫식스를 먹은 쥐는 며칠동안 잠을 자지 않다가 피를 토하고 죽었다.

 '자유용병이라면, 죽음이 뒷덜미를 잡았을 때 마땅히 한번쯤은 뿌리칠 능력을 가져야 한다.'

 어딘가의 전쟁터에서 들은 말을 떠올리며, 트와일라잇을 뽑았다. 오러를 끌어올리자 세상이 두 갈래로 흔들리지만 용병의 감각은 남아있다. 몸에서 굉장히 뜨거운 기운들이 충돌하는 것 같다.

 골든 프레데터와 드라큘러스 문을 동시에 운용한다. 한달 전에 한번 했다가 기겁하고 그만둔 일이었다.

 '도박은 내 전문분야라고. 이제 이판사판이다!'

 트와일라잇에서 황금빛과 핏빛이 섞인 오러가 뭉클뭉클 피어 오른다.

 "크으으윽. 다 덤벼! 죄다 고자로 만들어 버리겠어!"

 테이블 위로 뛰어오르며 조슈아의 순백색 검을 튕겨낸다.

 '캉!'

 폭발할 것 같은 몸을 그대로 조슈아의 체인 메일에 '쾅'하고 부딪치고, 왼쪽 방향으로 급선회하여 쏘달린다.

 그녀의 경로에서 당황하고 있는 도적, 아니 기사의 목을 한 칼에 베어버리고 식당 밖으로 달려 나간다. 쫓고 쫓기는 처절한 추격전의 시작이다.

 슈바르츠발트의 외곽 부분에 위치한 한 거대한 자작나무. 그 하얀색 밑동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붉은 색으로 물든 여인이 등을 기대고 있다.

 주변에는 갑주를 입은 기사들이 나무의 주변을 원으로 포위하고 있다.

 "놀라운 재능이군. 익스퍼트도 되지 못한 년이 기사를 열다섯 명이나 죽이다니. 내 눈으로 지켜본 게 아니었다면 결코 믿지 못했을 일이다."

 군데군데 상처를 입은 조슈아가 그녀를 응시하며 말한다.

 "어떤 처치를 하든, 그대의 몸은 더 이상 회생할 수 없을 것이다. 트롤의 늪을 두 병이나 탄 스프를 들이켰으니. 그대는 우리 기사단의 원수지만, 그 기상만은 높이 사 고통없이 죽여주지."

 "후우, 후우, 개자식들. 역시 이 세계는 마음에 안들어. 하아, 하아. 하나같이 자기입장만 생각하잖아. 솔직해지는 건 오직 섹스할 때와 뒈질 때 뿐이야."

 조슈아가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쳐다보자 벨라는 씩 웃었다. 그녀의 몸 안에서 미친듯이 일어나던 충돌이 이제 거의 멈췄다. 수면제와 각성제의 지독한 기운이 두 오러심법의 광폭한 싸움 속에 섞이며 뭔지모를 기운으로 합쳐졌다.

 마무리를 하기 위해 접근하던 조슈아는 순간 드는 기묘한 느낌에 그녀를 쳐다보았다. 아니 쳐다보려 했다.

 "내가 자작나무에 기댄 건 추진력을 얻기 위해서였다!! 개자식들아!!"

 -쩌어어억

 선명한 적황빛 검기(劍氣)가 뿜어져 조슈아의 몸을 세로로 양단했다. 가로로 양단하는 것보다는 좀 어렵지만, 약속대로 고자로 만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무엇보다, 이제는 온몸에 힘이 넘치고 있었으니까.

 순간 뒤로 물러나는 기사들을 향해 벨라의 신형이 빛살처럼 쏘아졌다.

 그날, 황금백합기사단에 소속된 100명의 기사들 중 절반에 가까운 인원이 성기에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베고, 베고, 가르고, 가르고, 베고, 베고, 베고, 또 베고, 처절히 갈라 놓았다.

 그리고 이사벨라 폰 트란실바녜는 두 단계의 경지를 뛰어넘어 소드익스퍼트 중급에 올랐다. 

 소드 익스퍼트가 되었지만, 벨라의 일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대공가의 영빈관에서 지내며, 블라드 공작의 지도를 받거나 그의 기사들과 대련하며 새로운 깨달음을 충실히 소화시키는 중이다.

 피투성이가 된 채 발을 질질 끌며 돌아온 날, 이 일을 보고받은 대공은 즉시 흑림지대에 병사들을 급파했고 산적으로 위장한 기사들의 시체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 몇몇 곳에는 시체를 회수해 간 흔적이 있었지만, 전부 숨길 수는 없었던지 거의 스무 구에 가까운 시신이 흑림 곳곳에 흩뿌려져 있었다.

 며칠 후 벨라가 어느 정도 몸을 회복했을 무렵, 군무관이 그녀를 찾아왔다.

 "오늘은 아침 일찍부터 수련하느라 땀이 좀 났는데, 괜찮아요?"

 벨라가 그의 바지춤을 교묘한 손길로 부여잡자 군무관은 헛기침을 하면서 손을 내저었다.

 "크흠, 이번에는 대공 전하의 옥음을 전하러 온걸세."

 벨라의 손이 그의 하의 속을 파고 들어 말랑말랑한 하물에 닿자, 급격히 팽창하는 기둥이 느겨진다. 이 자는 군대에서 만부장까지 지내고 승진한 케이스라, 튼실한 몸으로 그녀에게 예상치 못한 기쁨을 안겨주곤 했다.

 "전하께서요?"

 그녀는 대공의 저택에 머무르고 있긴 했지만, 개점식 이후 단 한번도 그를 본 적이 없었다. 저택이 관저, 사저, 영빈관 등으로 나뉘어 워낙 넓기도 하고, 원래 윗사람은 바쁜 법이니까. 얼마 전에 숲에서 큰 일을 벌였으니 한번쯤 부름을 받을 것으로 예상했는데, 오늘인가 보다.

 "오후 세시에 관저 집무실에서 영애와 같이 티타임을 가지시겠다고 하셨다. 보고를 드리던 중에 직접 하명받았지."

 군무관의 공알을 이리저리 굴리던 벨라는 손목시계를 보고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쳇, 괜히 몸만 달아올랐잖아. 한 시간 밖에 안 남았네… 샤워하고 제대로 단장한 뒤 의복까지 갖추려면 시간이 빠듯하겠는걸."

 군무관이 기겁해서 주위를 살핀다.

 "어디 가서 그런 소리 하면 안된다. 누가 들으면 큰일날라."

 "네이, 네이, 그럼 영광으로 알고 명을 받잡겠나이다."

 말은 가볍게 했지만 무슨 생각을 하는지 벨라의 푸른 눈빛은 깊어져 가고 있었다.

 잠시 후, 벨라는 대공의 관저에 들어섰다. 시종의 안내를 따라 복도를 걷는데, 화려한 색채의 천장벽화와 생동감 넘치는 대리석 조각상이 그녀를 반긴다.  영빈관이 꽤 화려한 편이라지만, 여기에 비하면 일반 주택집에 불과한 수준이다.

 '그래봤자 프랑스 배낭여행할 때 가본 베르사유 궁전에 비하면 새발의 피네. 관광객이 없다는 점은 좋지만.'

 방에 들어서자, 보라색 테두리를 두른 책을 읽고 있는 중년 남성의 모습이 보인다. 부르고뉴 대공국의 대공이자 로사링거 연합의 맹주인 샤를 대공이다.

 "이사벨라 폰 트란실바녜가 삼가 대공 전하를 뵈옵니다."

 시종의 손짓에 따라 그의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이내 시녀들이 다기와 디저트를 준비해 온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붉은 빛깔의 홍차가 멋스런 청옥색 도자기에 담겨 나오고, 온갖 쿠키와 마카롱, 스콘, 까눌레, 잼과 버터가 담긴 3단 프레이가 놓였다.

 대공은 홍차가 미지근해졌을 때 쯤에야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완독하고 덮었다. 이사벨라는 지루한 기색 없이 당당하게 앉아서 태연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보기 드물게 참을성이 있는 레이디군."

 마침내 대공이 말문을 열며 손수 찻주전자를 들었다. 시종이 주전자를 받아들려 했지만 대공은 손짓으로 그를 물리고, 직접 벨라의 잔에 찻물을 따라주었다. 그녀도 잘 아는 마리아쥬 프레르라는 브랜드의 웨딩 임페리얼 티로, 진한 카라멜 향이 인상적인 홍차다. 대공의 앞에는 이미 보랏빛 와인이 채워진 유리잔이 올려져 있다.

 "황감하옵니다. 전하께옵서는 책을 좋아하십니까?"

 "딱히 좋아하지는 않네. 하지만 이 자리에 앉아있으면, 때로는 내키지 않는 일도 자연스럽게 해야만 하는 경우가 있지. 레이디는 어떠한가?"

 "소녀는 수년 전까지 독서가 취미였습니다만, 해가 지날수록 책을 볼 수 있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비록 때때로 내키지 않은 일을 해야 한다 해도, 결국 자신이 가장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 수 있다면 참으로 축복받은 삶이 아닐까 하옵니다."

 대공은 벨라의 말에서 느끼는 바가 있는지 일이분 정도 눈을 감고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는듯 했다. 그러다 눈을 또렷이 뜬 뒤, 그녀에게 묻는다.

 "재능있는 젊은이를 만나는 건 참으로 즐거운 일이로군. 덕분에 요즘 고민 중이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 같네. 혹시 내게 원하는 바가 있는가?"

 벨라는 지금의 질문이 십수분 동안 그녀가 기다려온 질문임을 알았다.

 "모두 전하의 하해와 같은 은덕에서 비롯된 일이온데, 소녀가 무엇을 바라겠나이까. 여쭘에 감히 답하건대, 소녀는 그저 우연히 간적(奸敵)을 만나 위기에 처한 것에 불과하며, 전하의 크고 넓은 힘이 적도(賊徒)의 위장을 파악해 섬멸한 것이 아닐까 하옵니다."

 대공은 크게 웃었다.

 "하하하, 네 이름은 숨기고 모든 걸 나와 내 군사들의 공으로 돌리라는 것이냐? 그대의 가계는 오래 전부터 빈한하여 어려움을 겪어온 걸로 알고 있다. 사실을 밝힌다면 마땅히 작위와 명예를 얻을 수 있을텐데 어찌하여 꺼리는 것인가?"

 "소녀는 그저 평범한 검사로 세상을 떠도는 용병에 불과하나이다. 모든 것이 전하의 위세에 힘입은 것이거늘, 만에 하나 제가 높은 영예를 독차지한다면 반드시 큰 화를 입게 될 것이옵니다."

 벨라는 결코 이 일이 널리 알려지는 걸 원치 않았다. 흑림에서 그녀를 쫓아온 기사들은 모두 죽었기 때문에, 생존자는 산채에 남아있던 기사들 뿐일 것이다. 그들로서는 진상을 짐작하기 어렵겠지.

 작위를 받는 일은 가문의 숙원이었지만, 프로방스의 공적 되어 평생 암살 위협을 걱정해야 하는 게 싫었고, 이 영지에 코를 꿰어 부림받는 것도 원치 않았다.

 "레이디가 그렇게까지 말하니, 그 일은 그렇게 처리하는 것으로 하지. 하지만 그대도 받을 건 받아야 하지 않는가."

 잠시 턱을 괴고 고민하던 대공은 이내 시종을 불러 무언가를 지시한 뒤, 집무실 한켠의 서랍을 열쇠로 열어 작은 반지 하나를 꺼내들었다. 그 순간 벨라는 무언가 몸속에서 '찌르르'하고 떨리는 느낌을 받았다. 주변을 둘러 보았지만 아무런 변화도 없는 게 단순한 착각이었을까.

 이내 시종이 붉은색 테두리가 둘러진 종이 한 장을 갖다 바쳤다. 대공은 만년필을 꺼내 종이에 무언가를 쓱싹쓱싹 적었다. 마지막까지 고개를 비스듬히 굴리며 무언가를 고민하는듯 하던 대공은 이내 반지와 종이를 벨라에게 내밀었다.

 "그대에게 부르고뉴의 기사직을 수여하겠다. 임명장을 보고 불만인 게 있으면 말하라. 기사의 증표는 이반지로 하지. 정식 수여식도 조금 후에 바로 거행할 테니 시종은 준비하도록."

 "황공하옵니다, 전하."

 물론 불만이 있어도 대공의 앞에서 말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지만, 벨라도 만족스런 기색이었다. 임명장을 보니 '자유기사'임이 명시되어 있었던 것이다. 직속기사와 달리 자유기사는 복종의무에서 자유로운 존재다. 서임권자인 대귀족이 단지 그 기사의 역량을 인정해 서임해준 것일 뿐, 서임자에 대한 충성맹약이나 기타 의무를 부과하지 않는다. 서임자의 국가에서 생활해야할 의무도 없으며, 심지어 그에게 적대행위를 가해도 도덕적인 비난은 받겠지만 법률 상의 문제는 없다.

 벨라의 신경을 끈 건 증표로 받은 반지였다. 기사의 증표는 보통 반지 형태인데, 남성의 경우는 오른손 검지, 여성의 경우는 오른손 약지에 끼는 관습이 있다. 대공이 벨라에게 미리 기사서임을 할 것을 예상하고 반지를 만들어 서랍에 보관해 뒀을 리는 없을 것 같고, 예전부터 가지고 있던 반지를 준 것 같았다.

 그게 이상한 일이라고 할 순 없지만, 벨라는 이 반지가 대공이 하던 고민과 연관된 게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들었다. 큼지막하게 박혀 있는 순백의 보석에 황금빛 문양이 새겨져 있는 게 범상치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준 사람 앞이 바로 앞에 있는 탓에 자세히 관찰할 수는 없었지만, 누군가의 얼굴과 십자가의 모양이 보인다.

 "잘 알겠지만, 벨라 경은 본 대공과 부르고뉴 령에 대한 어떠한 의무도, 권리도 없다. 아마 스승인 블라드 공작이 떠나면 그대도 따라가겠지. 언제 떠날 지는 모르지만 다만 그 전까지 부탁할 일이 있네."

 벨라가 또 무슨 일인가 싶어 정면을 응시하자, 대공이 말을 이었다.

 "어려운 일이 아니니 인상 좀 피게. 나의 딸, 마리(Marie)는 어릴 때 제 어미를 잃고 형제도 없이 외롭게 자랐지. 이제 열일곱이니 경과는 여덟 살 차이군."

 마리 공녀는 대공의 무남독녀로, 전처인 프로방스 공주의 자식이었다.

 "마침 경도 내 저택에 얹어 살고 있으니, 떠나기 전까지만이라도 마리의 친구가 되어줄 수 있겠나? 아비로서의 부탁일세."

 "명을 받들겠사옵니다, 전하."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라는 생각에 벨라가 흔쾌히 대답했다. 이때 시종이 부르고뉴식 기사예복과 장검, 십자가를 가져왔다.

 시종의 안내를 받아 옆쪽의 빈 방에서 기사제복으로 갈아입었다. 롱다리의 미녀가 새옷 느낌이 나는 자줏빛 코트를 걸치고 도도한 표정을 지었다. 은색과 붉은색이 그라데이션처럼 섞인 실크 바지는 다리에 딱 달라 붙어, 엉덩이까지 이어지는 각선미를 제대로 드러낸다.

 코트에 달린 은색 단추를 모두 채우고, 숙녀처럼 단정하게 묶었던 똥머리를 풀어헤치니 진홍색 머리카락이 어깨를 지나 팔꿈치 근처까지 내려오며 자유로운 느낌을 낸다. 코트와도 색이 잘 어울렸다.

 다시 집무실로 들어서자, 시종들은 물론이고 대공도 살짝 감탄한 눈초리다. 저토록 기사 예복이 잘 어울리는 여성이 있다니.

 수여식은 시종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대공이 진홍색 수실이 달린 은장검과 조그만한 철십자가를 내려주고, 명예와 종교에 관련된 문답을 주고 받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다.

 따져보니 벨라의 집안에서 기사가 나온 건 거의 백오십 년 만이었다. 현대인이었지만 이제 이계의 삶을 받아들인 그녀는 무척 감격스러운 심정이었다. 들뜬 기분에 잠시 멍하니 있는 사이, 대공은 시종들을 밖으로 내보냈다.

 "여섯 시까지 오침을 취할 터이니, 아무도 이곳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라. 벨라 경과는 마저 할 말이 남아있으니 좀있다 내보내겠다."

 "예, 전하!"

 벨라는 시종들이 조심스레 문을 닫고 나갈 때 쯤에야 정신을 차렸다.

 '또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대공은 벨라에게 다가와 등을 가볍게 두드려 주며, 옆에 있는 의자에 앉히고 대화를 시작했다.

 "축하하네. 경처럼 이 자줏빛 예복이 잘 어울리는 여기사는 처음이군. 편히 앉아있다 가게."

 "황공하옵니다."

 "듣자 하니, 브뤼헤에서 용병생활을 하고 있다고?"

 "예, 전하."

 "그렇다면 우리 연합이나 게르마니아 태생인가? 성씨로 봐서는 왈라키아나 트란실바니아 쪽 같기도 한데."

 "모두 아니옵니다. 동부의 가문에서는 분가한 지 수백 년이 흘렀고, 소녀는 베네치아에서 태어나 신성아스토리아제국의 국적을 가지고 있사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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