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2/49)

 "듣다보면 알 것이다, 프리드리히 후작."

 손을 올려 그를 제지한 공작이 말을 이었다.

 "드라큘러스 문은 우리 트란실바녜 일족이 수백 년 간 대륙의 동부를 지키면서 발전시켜 온 오러심법의 총해라 할 수 있다. 대륙의 서쪽에 그저 머나먼 아틀란틱 대해가 펼쳐져 있고, 남쪽으로는 지중해를 건너 광활한 사하라 사막지대 뿐이며, 북쪽으로는 공허로 가득찬 얼음지대만이 존재한다. 하지만 동쪽만은 야만족과 이교도들이 득시글거리는 드넓은 평야와 연결되어 있지."

 공작은 목이 타는듯 허리에 매어둔 물병을 꺼내들어 꿀꺽꿀꺽 시원하게 목을 축였다. 그의 입가에 빨간색 액체가 맺혀있다 사라진다.

 "선조들은 밀려오는 적들과 맞서 싸우기 위해, 끊임없이 가문의 심법과 절기를 개량했으며, 그것은 본 공작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것이 쌓이고 쌓여, 나의 대에 이르렀을 때, 드라큘러스 문은 어쩌면 에우로파 대륙 제일의 심법이 될지도 모를 혁명적 진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프리드리히는 아직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지만, 벨라의 표정은 딱딱히 굳어가기 시작했다.

 "인간의 지각범위를 뛰어넘는 초인의 감각, 빛에 버금가는 속도를 내는 초인의 움직임, 그리고 세상 그 어느 무기들보다 강렬한 초인의 근력. 심법을 수련하게 될수록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힘이 생긴다. 이 정도라면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있지 않겠느냐?"

 프리드리히가 공작의 설명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감탄사를 내뱉는 것과 달리, 벨라는 조용히 고개를 젓는다. 그녀의 눈빛은 공작만큼이나 깊게 침잠되어 있었다. 흑림에서 홀로 황금백합기사단을 박살냈던 일은 그녀가 생각해봐도 상식적으로 의아한 점이 많았었는데, 이제 어떻게 된 건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공작은 불길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나 강력한 힘은 강력한 대가를 동반하는 법, 언젠가부터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어둠에 맞서 싸우는 자는 언젠가 어둠에 빠진다는 말이 생각나더군. 잔인한 적들을 상대하기 위해 만든 심법이지만, 그것을 익힌 우리들은 그 누구보다도 잔인한 포식자가 될 수 밖에 없었지."

 "흡혈증(Hematophagia)."

 벨라가 꺼낸 한 마디에 공작의 미소가 진해졌다.

 "역시 똑똑한 제자로군. 심법의 경지가 높아질수록, 피를 빨고 싶은 충동이 심해진다. 소드 마스터가 되어도 그건 마찬가지야. 그렇게 피를 빨던 어느날, 인간으로서 느끼던 감정도 너무나 자연스럽게 사라졌다네. 내가 연출하는 감정은 인위적으로 만들어낸걸세. 단, 오직 신선한 피를 빨아댈 때, 그때만은 엄청난 쾌락의 감정이 느껴지지."

 공작의 송곳니가 날카롭게 길어지면서 입술 밖으로 튀어나왔다.  프리드리히는 경악에 찬 표정으로 공작과 이사벨라를 번갈아 쳐다본다. 당장이라도 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설까 말까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다.

 '마치 이 세계에 처음 왔을 때의 나를 보는 느낌이군. 마리도, 프리드리히도 신분은 높지만 온실 속의 화초들 같네.'

 그녀도 현대에서 각종 뱀파이어 영화로 단련된 내공이 없었다면 더한 꼴을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동물이나 몬스터의 피는 정말로 맛이 없어. 쓰레기통을 뒤져 며칠동안 상한 음식물을 꺼내먹는 기분이지. 우리에겐 갓 뽑아낸 인간의 피가 최고의 별미라네. 이건, 평생을 바쳐 대륙의 동쪽을 지켜온 우리 가문에 너무나 잔혹한 형벌이었네. 나는 그래서 심법의 부작용을 없애기 위해 오랫동안 피나는 연구를 계속해 왔지."

 "그래서요?"

 이사벨라는 이번에도 단 한 마디로 스승의 말을 받았다. 오래 전에 분가된 직계의 가문이 어떤 일을 해왔든, 공작이 그를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해왔든, 그 구구절절한 사연은 그녀와 상관없는 일이다. 다만 그 일이 결과적으로 그녀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가가 중요했다.

 이를 너무 쌔게 물었는지 잇몸에서 피가 새어나오며, 기묘한 쾌락이 느껴지지만 강철 같은 의지로 침을 모아 뱉어 버렸다.

 '누구도 나의 자유를 빼앗을 순 없어. 그 누구도.'

 그녀의 태연한 기색에 공작의 미소가 더더더욱 진해졌다.

 "역시 비범한 년이야. 족보로 따지면 방계 중에서도 쓰레기 수준의 방계지만, 우리와 같은 혈족이라 신체 조건이 비슷했다. 그리고 그동안 가르치면서 쭉 지켜봐온 결과, 나와 같은 뛰어난 재능을 지닌 것으로 판명되었고 말이지. 벨라, 넌 영광스럽게도, 위대한 가문을 구하기 위한 최종 실험대상으로 선택된 것이다."

 "좆까는 소리 하네."

  

 벨라가 어떤 반응을 보이든 공작은 계속 말을 이었다. 인간의 감정을 느낄 수 없게 되었다지만, 공작에게서 풍기는 저 광기는 무엇이란 말인가. 인간은 사라지고, 밑바닥에 남아있던 악의(惡意)만 남아 그 자리를 채운 것일까?

 "투르크(Turk)와 루스(Rus)에서 밀려온 야만종족과 벌인 전쟁, 주변에 위치한 공국들과의 대규모 영지전, 야심어린 귀족들이 일으킨 반란, 간사한 공화주의자들의 민란, 정체모를 살인마가 저지른집단학살… 수십 년 동안 동부에 벌어진 혈사들에서 수백만 명에 달하는 인간종족의 피가 흘렀다."

 "어이, 늙탱. 질질 끌지 말고 요건만 말해. 한국어도 존나게 미괄식이지만, 난 두괄식 취향이라고."

 처음부터, 사부에 대한 예의는 필요없었던 거였다. 이계로 넘어오면서 신안(神眼)이라도 열린건지 모르겠으나, 그녀의 직감은 제법 정확하게 맞아들어 간다.

 "이제 얼마 안 남았다. 전장터에서 바스러진 수백만 명의 시신을 수거해, 모든 장기와 혈관에서 혈액을 뽑아냈다. 그 죄악의 결과물에 마법사와 연금술사의 연구가 더해진 끝에 바로 이 데모나 하트(Demona Heart)가 탄생했다"

 공작은 눈을 희번덕 거리며 품 안의 유리병을 들어 올렸다. 심장 모양의 구체가 달빛에 반사되어 소름끼치는 빛을 내뿜는다.

 "이게 과연 어떤 효과를 불러일으킬지,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많은 이견이 있었지. 본래의 의도대로 혈족의 피에 대한 통제력을 지닌 초인이 탄생해서, 우리들의 갈증을 멈추게 할 것인가? 아니면 그저 피에 미쳐 날뛰는 최악의 광인이 탄생할 것인가?"

 "그렇게 궁금하면 직접 쳐먹어보지 그랬어."

 "물론 그런 생각도 해봤었다. 하지만 본 공작은 이 모든 연구과정을 머릿속에 담아두고 있는 중요한 자원이다. 만에 하나,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내가 미쳐버린다면 어떤 끔찍한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아마 옆에 있던 나라 하나 쯤은 멸망시킨 뒤에 소멸당하고, 혈족은 영원히 어둠 속을 배회하게 되겠지."

 일견 일리 있어 보이는 말이지만 벨라는 동의하지 않았다. 일은 자신들이 저질러 놓고서, 책임은 남에게 미루겠다는 말을 거창하게 돌려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가 이런 말을 해봤자, 미쳐버린 공작은 또다른 자기합리화를 꺼내들겠지.

 "그래서 대륙을 떠돌면서 실험대상을 찾기 시작했지. 일반인은 이것을 받아들이기에 너무나 취약했고, 다른 가문의 고수들은 우리 혈족과는 맞지 않았다. 이제 그만 포기하고 왈라키아로 돌아가서, 혈족 중에 적당한 놈을 골라볼까 하던 중이었는데, 네년이 떡하니 나타난 거다."

 '시발! 이게 백화점 사업을 벌여 치부(致富)한 대가인가?'

 그때, 주변 수풀에서 바스락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났다. 벨라는 침착하게 앉아 있었지만, 프리드리히는 기겁하며 주위를 둘러 봤다. 그는 도저히 참지 못하겠다는듯 일어서서 어디론가 달려간다.

 "으아악!"

 그러다 외마디 비명과 함께 주저 앉는다. 그가 달려가던 수풀 쪽에서, 그의 두 사형을 비롯해 서른 명에 달하는 하인들이 숲을 해치고 다가오고 있었다. 얼굴은 하나같이 하얗게 떠있었고, 눈동자는 붉었으며, 입가에는 공작처럼 날카로운 송곳니가 나있다. 벨라는 쓴웃음을 지었다.

 "퉤, 괴상하게도 올해는 운수가 좋더니만."

 어딘가의 설렁탕이 떠오르는 밤이었다.

 "흡혈능력은 전염이 가능하다. 그렇게 전염된 이들은 본 공작의 통제에만 따르게 돼지."

 프리드리히는 다시 일어서서 달리기 시작했지만, 벌벌 떨리는 다리 때문에 공터를 벗어나지도 못한 채 혼자 쓰러졌다. 그의 사형 중 한명이 그에게 다가가 상의를 순식간에 벗겨내고 날카로운 송곳니로 가슴팍을 찍는다.

 "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벨라는 그의 비명소리를 뒤로 하고 트와일라잇을 꺼내 들었다. 공작과 시선을 똑바로 맞춘다.

 "헛된 반항은 하지마라, 이사벨라. 모든 건 내가 널 제자로 들이던 순간에 결정되어 있었다."

 "그거 알아? 당신은 그때부터 참 재수없었어."

 죽을 지도 모르는 위기 상황이었지만, 벨라는 웃음이 나오려 했다. 죽어라 고생한 끝에 이토록 확고한 신념을 얻었는데, 만약 세상이 그녀를 버린다면 그건 세상의 잘못이지 그녀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녀는 이 세계 누구보다 당당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다. 

 "이제 내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건 알 것 같아. 하지만 그렇다고 내 삶조차 포기하진 않을거야."

 벨라는 의미모를 말들을 중얼거리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공작에게 선공을 가했다. 그순간 공작의 검에서 검붉은 검강(劍?)이 피어올라 단숨에 그녀의 신체를 속박했다. 마스터급 검사가 마음 먹고 익스퍼트를 제압하는 데는 단 일합이면 충분했다.

 "아악!"

 검을 놓친 채 쓰러진 벨라의 위로 공작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특수한 장갑을 낀 채, 뚜껑을 열고 데몬즈하트를 조심스럽게 꺼내 그녀의 입가에 가져간다. 벨라는 기억해 두겠다는듯, 끝까지 공작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씨발 이 변태늙은이가! 죽어도 안 잊어버릴거야! 으읍, 읍, 으으으으읍읍읍!!?!!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벨라는 어떻게든 벗어나기 위해 발악을 했지만, 공작은 그녀의 입을 강제로 벌리고 구체를 쳐넣었다. 그것은 입술을 통과하자마자 단 1초도 되지 않아 녹아서 목구멍 너머로 사라졌다. 

 그것은 한마디로 지옥의 느낌이었다. 지옥이 그녀의 몸 안에 소환되어 현계하였다. 벨라가 기절해 버리자, 공작은 조심스럽게 그녀를 내려놓고 무심한 눈빛으로 살펴보기 시작한다.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군."

 한 5분 정도 지났을까? 벨라의 전신에서 갑자기 붉은 연기가 뭉개뭉개 피어져 나왔다. 공작이 이상을 확인하기 위해 가까이 다가가 그녀의 몸을 살피는데, 갑자기 벨라의 눈이 확 떠졌다. 눈동자가 뒤집힌 채 새빨간 색깔만이 가득 차있었다. 혈관이 터진 것도 아닌데, 눈에서 광선처럼 붉은 빛이 줄기줄기 새어나온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녀의 팔이 공작의 가슴 정중앙을 푹 하고 관통했다.

 "꺼으윽!"

 공작이 가슴을 움켜쥐고 뒤로 물러나자, 하인들이 다가와서 공작을 부축하며 벨라에게 달려들었다. 결코 일반 하인의 움직임으로 볼 수 없는 초인적인 몸놀림이었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그녀를 움켜쥐려는 손을, 더욱 빠른 속도로 잡아채 팔째로 뽑아 버린다. 엄청나게 강한 힘으로 그녀의 얼굴을 짓누르려던 하체를, 더욱 강한 힘으로 박치기해 산산조각낸다. 뒤쪽에서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달려드는 놈에게는, 더욱 빠른 뒷발질을 가해 아예 그의 배를 꿰뚫고 등쪽으로 몸을 비스듬히 통과시켰다.

 물구나무 서기 자세로 착지하면서 반동을 이용해서, 놈들이 공격해 오기도 전에 먼저 달려들어 선수(先手)를 가져갔다. 일방적인 학살극이 시작되었다.

 "실험은, 크으으, 실패했다. 저년을, 저년을, 폐기해야.. 크윽."

 공작은 학살당하는 수하들을 보며 절망에 찬 얼굴로 울부짖었다. 그를 부축하던 하인들까지 부나방처럼 달려들지만 조각조각 해체된다. 한때 그들의 신체를 구성했던 조각들은 그녀의 입가로 들어가고 있다. 벨라는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그야말로 뱀파이어의 여왕(Vampire Queen)과도 같은 극도의 초인적 능력을 얻게 된 것이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오직 피와 살육을 탐하는 짐승 밖에 없었다. 마지막까지 공작의 곁을 지키던 에리히와 하인리히 역시 그녀의 일수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내렸다.

 이미 공작은 가슴이 뚫리는 중상을 입어 제대로 운신하기도 힘든 상태였다. 대륙에 채 스물도 없다는 소드 마스터가 이렇게 허무하게 죽음만 기다리고 있다는 게 이상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공작은 아마 멀쩡한 상태였더라도 그녀에게 감히 대항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은 그가 뱀파이어였기 때문이다. 그의 신체는 물론이고 정신까지도, 저 미친 여왕의 통제 하에 놓여있다.

 공작을 바라보는 벨라의 눈빛이 증오로 번뜩인다. 그녀를 이용하고 배신한 사부를 알아보는 것일까? 아니다, 그런 감정은 담겨있지 않다. 다만 사자(死者)가 생명체에 대해 본능적으로 지니는 증오와 같았다. 그건 인간이든 뱀파이어든 상관없었다.

 마치 맹수가 초식동물을 사냥하듯 단숨에 달려들어 공작의 전신을 갈라놓는다. 사지를 쭉쭉 찢은 뒤, 공작의 심장과 장기들을 꺼내 흔적도 없이 녹여 먹는다.

 오랜 역사를 지닌 왈라키아 공국의 군주이자, 몰다비아와 루테니아의 변경백, 신성제국 드라곤기사단의 명예단장으로 동방을 지배했던 블라드 체페슈 공작은 그렇게 이 아타락시아 세계에서 소멸했다.

 서른 명에 달했던 뱀파이어 하인들 모두 그녀에게 피와 장기를 빨린 채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고 존재를 상실했다.

 이제 남은 건 저편에서 막 뱀파이어로 변이 중인 프리드리히 뿐이었다. 그의 냄새를 맡은 벨라가 쏜살 같은 속도로 공간을 이동하려는데, 갑자기 온몸이 찌르르 울리는 듯한 격통이 찾아온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그녀의 오른손 약지에 끼어 있던 반지에서 순백색과 황금색이 뒤엉킨 섬광이 밤하늘을 밝힐 정도로 강하게 발산되고 있다.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이사벨라의 몸 속에서, 세상을 뒤집을만큼 강력한 능력을 지닌 두 존재가 맞붙었다. 칠흑빛 창을 들고 붉은 망토를 두른 악마가 그녀의 심장을 맴돌았고, 황금색 검을 들고 순백색 갑옷을 입은 천사가 그녀의 팔에서 솟아나온다.

 크로아티안 랩소드부터, 크림슨 로즈, 바바리안 오랑쥬, 골든 프레데터, 드라큘러스 문까지 그녀가 익힌 모든 오러심법이 그녀의 의지와 상관없이 동시에 운용되며 각자 이끌어낼 수 있는 최대의 잠재능력을 발휘한다. 절반은 악마, 절반은 천사의 통제를 받아 격렬하게 격돌, 또 격돌했다.

 싸움은 한 시간 가까이 계속되었다. 두 번이나 환골탈태(換骨奪胎)가 일어나면서, 뱀처럼 몸의 껍질을 벗겨낸다. 순결한듯한 알몸은 마치 여신의 모습 같다. 우유빛깔처럼 새하얘진 피부, D컵과 E컵의 사이쯤 되어 보이는 풍만한 유방, 전보다 더욱 육감적으로 변한 둔부가 모습을 드러낸다. 머릿결도 새로 자라나는 중인지 더욱 풍성해져 간다. 확인해 볼 수는 없지만 여성기 안도 기막히게 변하지 않았을까? 크게 뜬 두 눈은 붉은색과 검은색, 푸른색, 황금색, 순백색으로 왔다갔다 변하는 중이다.

 보랏빛 하늘 저편에서 희미하게 동이 터올 무렵, 싸움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두 환영(幻影)은 상대를 죽일듯이 노려보지만, 더 이상 싸웠다가는 그들이 터잡은 벨라의 몸이 사라질 지도 모르는 상태였다. 악마는 심장 왼쪽 주변에, 천사는 오른쪽 주변에 똬리를 틀고 들어 앉았다. 엄청난 크기의 오러홀이 두 개나 생긴 셈이다.

 그녀의 파란색 눈에 서서히 초점이 맺혔다. 그녀의 본래 의식은 무의식의 아래에 가라 앉아 있었지만 모든 걸 지켜보고 기억하고 있었다. 잠시 악마가 되었었던 시간의 기억이 떠오른다. 흡혈과 학살로 얼룩진 끔찍한 기억이다. 악마에 대항하던 천사가 지녔던 무언가도 드문드문 떠오른다. 1분 가까이 고개를 파묻고 머리를 휘젓던 그녀는, 별안간 고개를 쳐들고 두 눈을 번뜩인다. 일단 몸의 균형이 맞춰지면서, 뱀파이어의 상태는 벗어난 것 같다.

 "그 흡혈귀 새끼들은 합당한 죄를 받은 거야. 나는 나 스스로를 지켰을 뿐이니까. 내가 악마가 되어 행했던 일들 때문에 속죄하면서 살아야 하나? 아니야. 애초에 멀쩡하게 살고 있던 날 이 세상으로 보내버린 것 자체가 비정상 아니야?"

 벨라는 본디 현대에서 살 때는 종교를 가지고 있었지만, 이계에 오게 된 뒤 이를 버리게 되었다. 무신론자가 된 것은 아니다. 전능한 신이 있다면, 자신을 왜 이렇게 방치하고 괴롭히는 것일까? 따라서 자신의 몸속에 들어있는 것들을 보면서도, 천사에 호감이 들고 악마에 거부감이 드는 전형적인 가치관을 적용하지 않았다.

 "나는 앞으로의 삶에서 내가 소중히 여기는 가치를 잊지 않고 실현할 것이다. 그 길을 걸으며 친구를 지키고, 적을 베어야 한다. 이를 위해 내 몸 속에 들어온 두 개의 힘을 내 의지가 원하는 대로 통제할 수 있어야 해."

 벨라는 뒤죽박죽이 된 머릿속을 하나둘 급히 정리했다. 마지막에 내뱉은 말이 가장 시급한 과제였다. 망설일 시간은 없었다.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릴 지도 알 수 없었다.

 그 전에 처리해야 할 일도 있었다. 몇 분 전까지 프리드리히가 뒹굴던 자리가 비어있었다. 당황스러울 수도 있는 장면이지만, 벨라의 눈은 고요했다.

 "느낄 수 있어. 모든 피의 혈족은 여전히 나의 통제 하에 있으니까."

 몸은 뱀파이어가 아니지만, 뱀파이어를 통제할 수 있다. 기묘한 모순이다. 어찌 보면, 블라드 공작의 염원이 실현되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완벽한 실현은 아니었다. 누군가 그녀의 도움을 받는다면 드라큘러스 문을 익혀도 흡혈증을 앓지는 않겠지만, 이미 뱀파이어가 된 존재를 인간으로 되돌리는 건 그녀도 불가능했다.

  

 말이 끝나기가 동시에 벨라의 신형이 어느 방향을 향해 쏜살 같은 속도로 튀어나간다.

 한 30초 쯤 지났을까? 헐떡거리며 달리던 프리드리히의 신형이 그녀의 눈에 비친다.

 "헤이~ 스토옵!!"

 -철퍼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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