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화 (22/49)

 벨라가 보기에 이 신부는 확실히 다른 성직자들과는 달리 비범한 면이 있었다.

 "음모라면 잉글랜드와 부르고뉴의 계략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신부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그의 주름진 눈가에 벨라도 잘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살짝 흉흉한 기색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 적도들은 단지 음모에서 이용된 수단이었을 뿐이네. 부끄러운 일이지만, 교권을 높이기 위해 무분별한 이단심문이 횡행하던 당시의 교황청과, 성녀의 가장 큰 수혜자였던 아국의 승리왕(샤를 7세)이 오히려 더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지."

 그것은 잔 다르크의 기억과 제법 일치하는 사실이었지만, 철저히 숨겨져 세상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비밀이었다. 프로방스 교회에서 사역 중인 신부 답지 않은 위험한 발언이다.

 "신부님의 말씀은 세간의 의견과는 조금 다른 면이 있군요. 무슨 의도로 제게 그런 진실을 알려주시는 겁니까?"

 노인의 눈길이 잠시간 벨라의 오른손을 훑으며, 성검 잔다르크가 반지 형태로 끼워져 있는 그녀의 약지에 머물다 돌아갔다.

 "본인의 이름은 아르망(Armand)이라고 하네. 그대는 나의 말이 진실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다지 듣기 좋은 말이 아니었다면, 단지 방만한 성직자가 시험삼아 한 희언으로 받아들이게. 성녀에게 관심이 무척 많은 것 같아, 기억을 벗삼아 세월을 흘려보내던 늙은이가 장난을 좀 친거지."

 말을 끝마친 신부가 이내 뒤를 돌아 문 밖으로 나서는데, 벨라가 따라나오며 다시 말을 걸었다.

 "저는 동쪽에서 온 용병 이사벨라에요. 개인이 자신이 속한 집단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만약 신부님의 말씀이 진실이라면 당신께서는 이 시대의 가장 큰 두 개의 집단, 국가와 교회를 상대하고 계시는 거군요."

 대성당의 메인 홀에는 최후를 맞이하는 석양이 오색빛 스테인드글라스를 넘어와, 두 사람의 그림자를 길게 늘여주었다. 붉은 빛이 서북쪽 문에 새겨진 '최후의 심판' 그림까지 쭉 뻗어나가면서 허공을 부유하는 먼지들이 드러난다.

 저녁 시간이 다 되었던 터라, 성당 안에 머물던 신도나 신부들은 모두 어딘가로 빠져나가 홀은 휑한 상태였고, 이제 오직 네 사람만이 남아 있었다. 이사벨라는 아르망 신부와 그의 시종을 따라 긴 회랑으로 걸어갔고, 빅토리아는 그들의 어려운 대화에 별로 관심이 없는듯 조금 뒤에 떨어져서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젊은 여인이 마치 현자와 같은 말을 하는군. 어떠한 수련을 쌓았는지는 모르겠으나, 이 노구가 보기에는 자네에게 적지 않은 신성력이 느껴진다네."

 "과한 말씀이시군요. 소녀는 사제가 아니라 일개 용병에 불과합니다. 오랫동안 수양을 쌓으신 신부님의 말씀을 듣고 감화받은 덕분이 아닐까요."

 벨라의 차분한 응대에 아르망 신부는 슬쩍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그렇다면 그러한 것이겠지. 자네가 한 말처럼, 나는 잘못을 저지른 자들은 언제라도 반드시 그 대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네. 주 그리스도께서는 용서를 말씀하셨지만, 천상세계는 천국과 지옥으로 나뉘어 있지."

 저편에 성당의 출구가 서서히 보였다. 석양빛을 받아 홍백색으로 빛나는 동상들이 회랑을 따라 길게 늘어서 있었다. 그 순간, 벨라는 말로 설명하라 수 없는 기묘한 느낌을 받고 걸음을 멈추었다.

 -슈우우웅

 앞서 걸어가던 아르망 신부가 뒤를 쳐다보는 순간, 왼쪽 전면에 있던 성기사 동상이 돌연 움직이며 백색 석검을 들어 그의 뒤통수를 내리쳤다.

 거검이 신부의 머리통을 두 동강 내기 직전, 이사벨라가 몸을 날려 그를 확 밀쳐냈고, 두 인형은 데굴데구루 구르듯이 앞쪽으로 쭈우욱 미끄러져 나갔다. 그들이 피함과 동시에, 동상이 든 검은 신부의 바로 뒤에서 따라오던 시종의 정면으로 내려쳐졌고, 눈 깜짝할 사이에 그의 머리통과 상반신이 박살나며 선홍빛 뇌수와 장기가 피와 함께 회랑의 복도로 흩뿌려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비정상적인 일에 모두들 놀라있을 때, 주변에 늘어섰던 다른 동상들이 우웅 소리를 냈다. 각종 성자와 성녀, 성왕의 모습을 본딴 동상들은 보통 인간의 두세 배 크기에 달했는데,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빠르게 움직였다.

 "골렘(Golem)! 저 저주받은 기체(機體)들이!"

 비틀대다가 일어선 아르망 신부가 전면의 광경을 보고 경악한 음성으로 외쳤다. 대성당의 동상들은 어느새 무시무시한 위력의 골렘들로 뒤바뀌어 있었다. 아니면 원래부터 골렘으로 만들어졌던 건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그것들이 왜 지금 이 순간 그들의 앞을 가로막고 공격하려 하느냐이다.

 벨라는 황혼검을 검집에서 뽑으며 짧은 순간 고민했지만 떠오르는 게 없었다. 자신이 지닌 잔 다르크의 힘이 어떠한 영향을 미쳤을까 생각을 해보았지만 무리한 추측 같았다. 루테티아에 처음 방문하는 빅토리아가 무슨 연관이 있을 리도 없었다. 자신들에게 이유가 없다면, 저 범상치 않아 보이는 노신부 때문일 확률이 높다.

 고대의 성자 모습을 취한 골렘이 오브 형태의 커다란 막대기를 휘둘러 벨라와 아르망 신부를 두동강내려 했다. 하지만 벨라의 황혼검이 붉은 검기를 일으키며 오브를 관통함과 동시에 골렘의 가슴팍까지 짓쳐 들어갔다.

 황혼검이 골렘의 상반신을 반쯤 부셔놓았는데도 불구하고, 골렘은 계속 팔을 움직여 부셔진 오브로 그들을 공격하려 했다. 벨라는 한손으로 신부를 꼭 끌어안은 채 빛의 속도로 골렘의 팔과 어깨 쪽으로 솟아올라 발을 내딛으며, 박아놓은 검을 헤집었다.

 골렘이 미처 반응하지 못할 정도로 신속한 쾌검술이 전개되며 석상의 가슴팍을 두부처럼 난도질했고, 이내 안쪽에 위치한 붉은빛의 마나 덩어리가 빛을 잃고 갈라져 버렸다. 골렘의 핵을 분쇄한 것이다.

 뒤쪽에서는 어느새 빅토리아가 두 개의 바이킹 소드를 꺼내들고 다른 석상의 팔다리를 우수수 낙엽털듯이 잘라내고 있었다.

 "빅토리아! 심장 부위의 핵을 공격해! 동력을 잃은 골렘은 동상과 다를 게 없어."

 벨라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빅토리아는 일 미터에 가까운 큰 검들을 휘두르며 동상들을 두부 썰듯이 조각조각 썰어버렸다.

 "하여튼 쟤는 천생 전사야. 못 말리겠다니까."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다음 골렘을 상대하는데, 품에 안긴 노신부의 중얼거림이 들려온다.

 "허어…. 행적이 샜나보군. 이 기사(奇事)는 분명히 나를 노린 일일세. 그대들까지 말려들게 해서 미안하이."

 갑작스러운 일에 살짝 놀란듯 하지만, 일반인과 달리 별로 동요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벨라는 다음 골렘의 머리통을 날려 버리고, 그 다음에 양쪽에서 달려오는 두 개의 골렘을 상대로 트와일라잇을 길게 횡으로 휘두르며 특유의 광폭한 기운을 불어넣었다. 강대한 충격파가 검의 옆면으로부터 타원의 형태로 치솟아 폭발하면서 두 골렘의 전신을 동시에 산산조각 내버렸다.

 "대성당의 성상들이 갑자기 왜 골렘이 되어 당신을 공격하는 겁니까?"

 아르망 신부가 무어라 대답하려는 순간, 검은색 신형이 옆쪽의 기둥을 뚫고 튀어나오며 날카로운 흑색 단검으로 그의 옆구리를 찔러왔다.

 하지만 벨라가 어느새 왼손으로 꺼내든 긴 사브르가 활처럼 부드럽게 휘어지며 단검의 끝날을 휘감고 오히려 암살자의 턱끝으로 방향을 전환시켜 안면을 세로로 관통시켜 버렸다.

 "크아아아아악."

 부드러워 보이는 연검의 힘이 꽤나 강했는지, 암살자는 두개골까지 꿰뚫려 피를 토해낸 채 쓰러졌다. 하지만 다른 기둥들에서도 검은색 야행복 복장을 한 어쌔신들이 튀어나오며 골렘 사이사이로 나타나 일행을 습격했다.

 벨라는 살짝 눈쌀을 찌푸렸지만 이내 침착하게 골렘과 어쌔신들을 상대해 나갔다. 어둠과 기습에 특화된 어쌔신들조차 뱀파이어 퀸의 은밀하고 강대한 초능력 앞에서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들이 벨라의 속도가 빠르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녀의 속도는 거기서 두 배 이상으로 빨라졌고, 그들이 경악하면서 눈을 비빌 무렵, 그녀의 속도는 다시 더블로 뛰었다.

 붉은 머리의 여인이 마치 순간이동을 하듯 좌우로 상하로 이곳저곳에서 나타나며 어쌔신들을 두 동강 냈다. 그들을 상대하면서 벨라는 한 가지 특이한 점을 발견했다. 적들은 어쌔신 답지 않게 화려하고 강한 동작들을 펼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암살자의 은밀한 살인 기술이라기 보다는, 기사들의 표준적인 정통 검술에 가까웠다. 이런 웃기지도 않은 경우는 몇 년 전, 대흑림(大黑林) 슈바르츠발트의 골짜기에서 한 차례 경험해본 적이 있었다.

 그때 평범한 어쌔신들 사이에서, 별안간 푸른색 검기의 파도가 솟아올라 그녀를 덮쳐 왔다. 벨라로서도 무시못할 기운이어서, 그녀는 아르망 신부를 상대적으로 여유있던 빅토리아 쪽으로 던져 버림과 동시에, 그 반동을 이용해 트와일라잇에 전력을 불어넣으며 월광참(月光斬, Moonlight Crash)을 전개했다.

 마치 붉은빛 달이 강림한 것과 같이 사방이 진홍색 빛으로 가득 차면서, 주변의 어쌔신들은 눈도 뜨지 못한 채 충격파에 휩쓸려 나갔고, 파동이 향한 중심부에 있던 이도 무사하지 못하고 뒤로 튕겨나갔다.

 그 인형은 성당의 벽에 부딪혀 뒹굴었지만 곧바로 일어나서 발검 자세를 취했다. 검은색 야행복이 찢겨나간 사이로, 프로방스의 기사들이 입는 푸른빛 갑옷이 드러났다.

 "예상대로 기사였네."

 벨라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그를 응시하자, 그는 벨라를 한 차례 쳐다본 뒤, 빅토리아의 부축을 받고 있는 신부를 노려 보았다.

 "교활한 늙은이 같으니라고. 추기경이란 자가 아녀자의 뒤에 숨어서 벌벌 떠는 꼴이 추악하기 그지 없구나."

 '추기경?'

 벨라가 크게 놀라 아르망 신부를 바라보는데, 그는 태연히 기사를 마주보고 대답했다.

 "오, 라 페르(La Fere) 백작이군. 트레빌(Treville)은 어느 못난이 뒤에 숨어있길래 자네가 직접 나왔는가? 역시 단장이 천박한 출신이라 그런지 하나같이 예의들이 없어. 혹시 아녀자라는 게 카트린느 왕비 마마를 뜻하는 뜻하는 말은 아니겠지?"

 라 페르 백작은 처음 듣는 이름이었지만, 트레빌에 대해서는 벨라도 들어본 적이 있었다. 프로방스 왕실 근위대의 단장으로 평민 출신이지만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올라 후작의 작위와 대령의 직위를 받고 왕실에 봉사하고 있었다. 프로방스의 현재 국왕인 프랑수아 1세의 측근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카트린느 드 메디시스 왕비는 신성제국 서부의 대귀족인 토스카나 대공 가문에서 프로방스 왕실로 시집온 여인이다. 당찬 여걸로 알려져 있었지만, 적국 출신이라 왕실과 민간에서 은근히 배척받는 분위기였고, 프랑수아 1세는 그녀를 본체만체하고 디안느(Diane de Poitiers)와 같은 정부(情婦)들에게만 관심을 기울인다는 소문이 있었다.

 국왕은 부국강병을 위해 강력한 중앙집권적 정책을 펼치면서 일종의 근대화를 추진하고 있었는데, 왕비는 기존의 체제를 유지하려는 많은 귀족들과 교류하면서 자신의 영향력을 확장해 나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일들은 민간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고 중소귀족들 중에서도 아는 이들이 적었지만, 벨라는 용케 그 전모를 파악하고 있는 자들 중 하나였다. 그녀의 권속인 프리드리히가 보낸 편지의 두 번째 내용이 바로 프로방스 왕실의 복잡한 속사정에 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신성제국의 황족이 지닌 고급정보는 상당히 구체적이었으며 사교계나 민간에 떠도는 무수한 가담항설들보다 훨씬 진실에 가까웠다.

 라 페르 백작의 옆에 있던 어쌔신 차림의 기사 하나가 열을 내며 대답했다.

 "역겨운 가식은 집어 치워라. 감히 국왕 전하를 못난이로 표현한 걸 모를 줄 아는가? 당신은 본디 전하의 총애를 받아 재상이 되었는데도, 그 요망한 년에게 달라붙어 왕국을 혼란으로 이끌고, 심지어 적국과….."

 하지만 그의 옆에 서 있던 긴 갈색 머리칼의 기사가 그를 제지했다.

 "그만해라 포르토스."

 이쯤 되자 벨라도 추기경이라 불린 노신부의 정체가 무엇인지 그리고 왜 근위대로 보이는 이들로부터 공격받았는지 서서히 알 것 같았다.

 아르망 추기경은 짧은 촌극 한편을 잘 구경했다는 표정으로 라 페르 백작이라 불린 기사에게 말했다.

 "허허, 일개 어쌔신보다 멍청한 순진한 근위대군. 비밀리에 나를 기습하러 온 주제에 정의에 불타오르는 것인가? 조금 더 공개된 자리에서 만났다면, 당장 그대들의 기사서임을 폐하고 멀리 알프스나 이베리아로 추방했을 거네. 그렇지 않은가, 아토스?"

 추기경의 능글맞은 말에 포르토스라 불린 기사가 발광하려는듯 보였지만, 라페르 백작 아토스의 손짓에 제지당했다.

 "저하. 불행한 일이지만 현재 저하의 곁에는 저 여성 용병 두 명 밖에 없습니다. 나름 한 가닥 하는 자들로 보이지만, 근위대가 전력을 다한다면 저하는 절대로 이곳에서 살아서 빠져나갈 수 없을 겁니다. 항복하시고 몸을 의탁하신다면, 목숨만은 제 이름을 걸고 살려드리겠습니다."

 아르망 추기경이 뭐라 말하려는 순간, 이사벨라가 먼저 그에게 귀족식 예법으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소녀가 실례했습니다. 삼가 리슐리외(Richelleu)의 공작, 아르망 장 뒤 플레시(Armand Jean du Plessis) 추기경 저하를 뵙습니다."

 그녀의 앞에 서있는 늙은 신부는 바로 비색(緋色)의 공작으로 불리는, 왕국 제일의 권력자 리슐리외 공작이었다. 그는 시골의 하급 귀족 출신이었지만, 교황청의 서임을 받은 열두 명의 추기경 중 한 명이었으며, 국왕의 초청을 받아 프로방스의 정치를 이끌어나가는 재상이기도 했다. 지금 입고 있는 자색 망토도 추기경들이 흔히 입는 예복이었다.

 리슐리외 공작은 기꺼이 그녀의 인사를 받았다.

 "신세를 지게 됐군. 나머지 소개는 내 저택에서 나누어도 괜찮겠나?"

 이사벨라는 자신이 선택의 기로에 놓였음을 알게 되었다. 프로방스에 오래 머물 생각은 없었고, 연말이 다가오면 전장으로 떠날 생각이었지만, 분명한 후환이 존재하는 일에 휘말려 버린 것이다. 근위대에서는 이미 수 명의 동료를 토막낸 그녀를 공작의 사악한 수하 쯤으로 여기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리고 실제로 벨라는 프로방스 왕실에 대한 감정이 그리 좋지 않았다.

 비록 '용병에겐 국가가 없다'라는 오랜 격언이 있지만, 아무래도 신성제국 태생으로 로사링거 연합에서 활동해온 영향도 있었고, 부르고뉴에는 그녀의 제2의 스승이자 불륜 상대인 샤를 대공과, 여동생이나 다름없는 마리 대공녀가 있었다. 더군다나 현 프로방스 국왕 프랑수아 1세는 잔 다르크를 배신한 샤를 7세의 아들이었다. 선택은 금방 이루어졌다.

 "맡겨만 주십시오. 소녀가 금방 저 떨거지들을 청소하고 사저로 모시겠나이다."

 벨라는 황혼검을 다시 들어올려 발검 자세를 취했고, 빅토리아를 포함해 성당 안의 모든 이들이 경계 태세를 끌어올렸다.

 "어디서 굴러먹다 온 년인지 모르겠지만 만용 하나는 대단하군."

 "굴러먹다 온 년이라니.. 내가 아무리 너의 동료들을 토막살인했기로서니 말이 좀 심하잖아. 부드럽게 밀레디(Milady)라고 불러주지 않을래?"

 밀레디는 대륙공옹어로 '신분이 높은 귀부인에 대한 경칭'이었다. 벨라는 독특한 가명을 내세워 그들을 놀리고 있는 것이다.

 "이익! 발칙한 악녀가 조금의 유리함을 얻었다고 주제도 모르고 기세등등하는군. 우리가 근위기사만 끌고왔다고 생각하는가? 세상 그 누구보다 잔혹한 무어인 암살자들이 이미 근처 수백 미터를 정리하고 들어왔다."

 아토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의 곁에서 연기처럼 어쌔신들이 솟아났다. 야행복을 입은 기사들과는 달리 그들에게선 은밀하면서도 강력해 보이는 살기가 느껴졌다.

 그들의 대장으로 보이는 자는 검은 복면을 쓰고 있었는데 소름 끼치는 목소리로 아토스의 말을 정정해 주었다.

 "근방 1km 이내에 살아있는 자는 없다. 협력자에게도 경고컨대 우리는 이베리아의 무어인 따위가 아니다. 알루 아무트(Alamut)에서 온 하사신 파(派)다.

 그게 그거 아니냐는 표정으로 쳐다보는 근위대들과는 달리 벨라의 얼굴은 살짝 굳어졌다. 블라드 공작의 기억 속에 그들의 정보가 있었다. 아사신 파의 정식 명칭은 니자리 이스마일파로, 동방의 주 종교인 이슬람교의 한 교파이다.

 그들의 본거지는 동대륙 중부 페르시아 지방의 알루 아무트 요새로, 철저한 통제와 비밀 속에서 엄격한 규율과 훈련을 통해 소수 정예의 암살자들을 양성했다. 그렇게 훈련된 암살자들은 상부의 명령에 그 어떠한 의문도 제기하지 않고 무조건 복종한다고 알려져 있었다.

 숙련된 어쌔신들은 자신들의 교파에 적대적인 무수한 지도자들을 매우 잔혹하게 암살해 왔고, 그 대상은 종교나 신분을 가리지 않았다. 그런 탓에 이슬람교 내부에서도 이단으로 경원시되며, 고위 권력자들에 의해 탄압당한 경험도 많았다.

  

 "니자리 이스마일파가 머나먼 서역에는 웬일인가? 7이맘파의 교도들은 결코 이곳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을텐데. 프로방스인들은 그대들과 어떠한 원한도 은혜도 없다."

 벨라의 말에 어쌔신은 그들을 알아본 게 의외라는듯 잠시간 침묵을 지키다가 쇳소리에 가까운 목소리로 답했다.

 "흐흐흐, 머나먼 타향에 온 뒤로 우리를 알아보는 자는 처음이군. 동방의 사정은 요즘들어 많이 바뀌었지. 우리는 그저 하나의 청부를 받아 서쪽으로 왔을 뿐, 이곳에서 이교도 정부를 돕는 건 그저 무사히 안가에 머물며 청부를 수행하게 해준 대가다."

 "청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