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화 (25/49)

 자제심이 약한 가스통은 바로 벨라의 스커트를 마구 찢은 뒤 그녀의 팬티를 벗겨 수풀 너머로 던져 버렸다. 이미 벨라의 아래쪽은 달콤한 액체를 질질 토해내고 있었고, 가스통은 우뚝 솟은 자지를 그녀의 균열 위로 조준하며 비열한 표정을 지었다.

 "흐흐, 좋은 표정이군. 가문의 영광으로 알거라."

 "하으으읏, 싫어….아아악!!.."

 벨라는 충분히 흥분했지만, 프리드리히와 권력자들을 만나며 모처럼 올라온 자존감이 개처럼 무시당하는 현실에 수치심을 느끼고 있었기에, 진심으로 싫은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몸에서 힘이 서서히 빠져간다. 가스통의 자지가 그의 오만한 발언과 함께 그녀의 꽃잎 속을 힘차게 관통하는 순간, 그동안 쌓여온 수치심이 극대화되며 폭발하는 느낌과 함께 저열한 쾌락이 찾아와 전신으로 퍼졌다.

 "하아아아앗! 으흐흐흑! 하으흐흐흥!"

 벨라의 몸과 마음 깊숙한 곳은 그녀를 마음대로 다루는 가스통의 비열한 행위에 찬동하며 격정적인 환희를 표하고 있었다. 사창가 생활을 하면서도 느껴보지 못했던 특유의 배덕적인 쾌락감이 생생하게 몰려왔다.

 '시발… 인정하긴 싫은데, 이런 거였어. 이런 개새끼한테 굴복해서 개처럼 당하는 게 미치도록 좋은 걸 어떡해.. 전신에 쌓인 스트레스가 확 풀리는 느낌이야. 에라이 미친 년아..'

 이중적인 마음에 갈팡질팡하는 사이, 삽입의 강도는 더욱 강해졌다.

 "크으, 이년 보지가 의외로 일품인데?"

 가스통은 그의 남근을 바짝 쪼여대는 질에 힘들다는듯 인상을 찌푸렸지만, 벨라의 몸 이곳저곳을 주무르며 섹스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노력했다. 찢겨진 드레스 사이로 하얗게 드러난 가슴골과 배, 목덜미까지 미친듯이 빨아대는 게 거의 색정광 수준이었다.

 -퍽 퍽 퍽 퍽 퍽 퍽 퍽

 계속 오므리던 여인의 다리도 언젠가부터 슬쩍 벌려져 행위가 더욱 격렬해졌다.

 "흐흐, 잘했다. 네년같이 미천한 종자는 위대한 핏줄에게 공손하게 봉사하는 데 삶의 이유가 있는 법이다."

 "하아, 맞아요. 하아앗, 눈치없이 굴어서, 아흣, 죄송했습니다."

 그는 사정감이 찾아오는지 얼굴을 찌푸리다가, 그녀의 질 속에서 성기를 꺼내 갑자기 자신의 팬티가 널려진 옷가지 위에 사정했다.

 "천한 계집에게는 아까운 씨앗이다. 남김없이 핥아먹어라."

 벨라의 얼굴은 더없는 수치심에 더욱 빨개지고, 가스통의 미소는 한층 더 비열해졌다. 온갖 변태플레이를 다 해봤지만 이런 자존심 상하는 플레이는 처음인지라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그것대로 흥분감이 들어서 결국 옷가지 위에 고개를 파묻고 그의 속옷에 묻은 정액을 낼름낼름 핥아먹는다.

 "크하하하, 천한 계집년이 이제야 제 주제를 파악했군. 그래, 맛은 어떠냐?"

 잠시의 섹스 동안 '천하다', '미천하다'는 말을 몇 번이나 들었는지 셀 수조차 없었다. 자기는 훌륭한 가문에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재상에게 찍소리 못한다는 사실 때문에 적지 않은 자격지심을 쌓아왔나 보다. 그런 그에게 철저히 당하며 피학적인 본능의 지배를 받는 와중에도 벨라의 이성 한켠에서는 영민하게 상대를 분석해 낸다.

 "하아.. 진하고 고소하옵니다."

 "크크크, 수치스럽지는 않더냐?"

 "미천한 소녀에게 저하의 귀한 액체를 마실 기회를 주시어 영광이옵니다."

 "푸흐흐, 이런 썅년이 귀족이라고?"

 가스통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벨라가 옷매무새를 여미며 떠날 준비를 하는 꼴을 바라보다가, 다시 비릿한 표정으로 그녀를 잡아 끌었다.

 "엎드려서 벌려."

 벨라는 눈을 질끈 감았지만, 가스통의 손이 올라오는 것을 보고 재빨리 암캐처럼 엎드린 뒤 은빛 스커트를 걷어올렸다.

 가스통은 살포시 열린 보지를 손으로 쑤시면서 애액이 맺히는 걸 관찰하다가, 다시 발기한 자지로 구멍을 꼼꼼히 덮어준다.

 "크윽, 성깔이 좀 있어 보였는데 다행히 제 주제는 잘 아는군. 내 많은 여인에게 성은을 베풀었지만, 이토록 기쁨을 주는 몸은 처음이구나."

 "으흐응~ 감사하옵니다아앗, 핫, 아앗, 하아아아앙."

 "크읍, 역시 미천한 계집이라 신음소리조차 천박하구나. 창녀처럼 큰 엉덩이를 살랑살랑 흔들어대는 게 본공의 발을 닦을 걸레로 쓰면 딱이겠어. 안 그런가?"

 "하윽! 네, 맞사옵니다. 윽, 부디 이 천한 년을 마음껏 사용하고 유린해 주시옵소서. 아하학흐윽."

 '하아, 이 변태새끼! 쓰레기보다 못한 개자식! 노르망디 이후로 이런 쾌감은 처음이야.. 우우..'

 오랜만에 느끼는 마조히즘적인 쾌락에 벨라는 실제로 훼까닥 돌아 버린 상태였다. 평소라면 상상도 못할 저속한 말들로 가스통의 비위를 맞춰주며, 마치 예전에 힘없이 전장터와 뒷골목을 구르던 때로 다시 전락한듯한 기분을 느꼈다. 정말로 천한 하녀라고 해도 어지간한 변녀가 아닌 이상 이런 느낌으로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상대가 거만함과 편협함에 쩔어있는 어린애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고, 그저 자신의 육신을 더욱 농락해주고 희롱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뿐이었다. 그렇게 이사벨라는 점심 나절동안 가스통에게 사로잡혀 쾌락과 희열의 파도를 타야 했다.

 결국은 정원 내부의 다른 특실로 끌려들어가 철저히 농락당하며 그의 오후 일과를 시중들어야 했다. 기분좋게 마사지와 안마를 해주다가, 그가 꼴렸을 때면 언제든 다시 엎어트려져서 뒤를 내준 채 정신없이 박히곤 했다. 어린 놈의 자식이 완전 색에 미친 게 싹수가 노랬다. 이성은 그녀의 상태가 정상이 아님을 알렸지만, 걸레 게이지가 올라간 본능이 그녀를 계속 붙잡아 두며 한시라도 더 굴종의 쾌락을 맛보게 만들었다.

 해질녘이 되어서 겨우 풀려난 벨라는 찢겨진 옷으로 대충 몸을 가린 채 은밀하게 이동해 궁전의 외곽에 위치한 재상의 관저로 돌아왔다.

 그때쯤 그녀의 눈빛도 평소처럼 다시 초롱초롱하게 돌아왔다. 방금 전까지 한 망나니 녀석과 시원하게 벌여버린 사건을 싫어해야 할지 좋아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오묘한 기분에 머리를 흔들어댄다. 그러다 샤워실로 들어가 결국 이불킥, 아니 욕조킥을 해대며 난리를 피웠다고 한다.

 벨라는 그렇게 한 시간이 넘도록 몸을 씻어내고 난 뒤, 비서실의 소파에 누워 달콤한 초콜릿으로 힐링하며 기분전환을 시도했다. 초콜릿은 몇 년 전부터 돌풍처럼 에우로파 대륙에 유행하기 시작한 새로운 형식의 디저트로, 물론 벨라에 의해 개발된 것이었다.

 남방대륙에 널려있는 카카오 열매를 들여와 열심히 연구한 끝에 기초 단계의 초콜릿을 만들어 냈으며, 명성있는 디저트 파티시에와 요리 연구가를 고용하자 금방 현대의 수준에 가까운 훌륭한 초콜릿들이 탄생하였다.

 이 세계에도 본래 코코아와 비슷한 음료가 존재하고 있었지만, 쓰디쓴 맛으로 인해 그리 큰 인기를 끌지 못하고 있었는데, 벨라가 개발해 낸 새로운 형태의 고체 초콜릿은 남녀노소 모두 좋아하여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다.

 본론으로 돌아와, 벨라는 책상에 널린 서류들에서 필요한 내용을 뽑아내며 문서를 작성하고 있다. 누가 보면 열심히 업무를 처리하는 줄 알겠지만, 실은 괘씸한 오를레앙 공작까지 엮어 프로방스의 내전 혹은 쿠데타를 확대시키기 위한 책략을 구상하는 중이다.

 음모에 가담할 대다수의 귀족들은 적당히 자신들의 이익을 보장받고, 왕을 자신이 원하는 인물로 바꾸는 선에서 전쟁을 끝내려 하겠지만… 리슐리외 공작은 프로방스의 불안한 내부적 균형을 와장창 깨트려 왕실을 뒤집어 놓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의 여비서가 만들고 있는 장기적인 구상은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간 형태였다.

 이사벨라는 이제 역사를 그 정도로 바꿀 수 있는 힘을 지닌 존재가 되었다. 강자들에게 조아리고 휘둘리던 연약한 소녀가, 반대로 그들을 주무르는 흑막으로 변신한 것이다. 더군다나 그녀가 지닌 유무형적 영향력은 결코 프로방스 왕국의 일부에 한정되지 않았다. 로사링거 연합에서도 그녀와 친밀한 샤를 대공 일가가 활약 중이었고, 신성제국에서는 충실한 수하인 프리드리히 후작이 영향력을 확대해 나가는 중이었다.

 언젠가 프리드리히가 보냈던 편지에서 세 번째로 언급되었던 소식도 다소 골치아팠지만 아주 흥미롭게 다룰만한 주제였다. 저 멀리 에우로파 대륙 동부 지방에는 그녀와 머나먼 친척관계로 엮인 무시무시한 혈족(血族)들이 존재하고 있다. 험준한 카르파티아 산맥을 지키는 전사들과 어두운 트란실바니아 삼림지대의 지배자들, 언젠가 그들과도 맞닥뜨릴 준비도 해야 한다. 이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한글을 낙서처럼 써내려가는 벨라의 눈은 불길한 붉은 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녀는 과연 자신이 가는 길의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현실적이면서도 철학적인 고민을 지속해 오고 있었다. 그 점은 단지 좁은 시야 속에 갇혀 야망을 불태우는 이 세계 대다수 야심가들과 차별화되는 지점이었다. 지구에 살 때 간직해 왔던 수많은 가치관 중 많은 부분을 포기하고 오직 가장 소중한 일부만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마저도 과욕이었을까? 처음에는 단지 개인의 자유를 원했을 뿐이었지만, 그 대가는 세상을 뒤엎을 정도로 커져간다.

 교활한 음모와 잔인한 혈투로 점철되었던 겨울이 지나가고, 완연한 봄의 기운이 루테티아 거리 곳곳에 가득 들어차있다. 대로변에 수직으로 늘어선 가로수들에는 연분홍색 벚꽃과 아이보리색 목련이 피어나, 정오의 태양 아래 화려하게 빛나고 있다. 한때 나라가 망하는 게 아닐까 근심에 빠졌던 시민들의 얼굴도 조금은 밝아졌다.

 오늘은 앞으로 프로방스의 대지를 통치하게 될 새로운 국왕의 즉위식이 있는 날이었다.

 성력 1381년 1월 31일, 정월의 마지막 날에 샤를 대공이 이끄는 부르고뉴 대공국의 선봉대 1만여 명이 국경을 넘으면서 제2차대륙대전이 발발했다. 대전의 시초를 잉글랜드에서 장미전쟁이 발발했던 1379년 가을로 잡는 학설도 있지만,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전쟁이 에우로파 대륙 전역으로 들불처럼 확산되기 시작한 이 날을 개전일로 삼는다.

 불과 하루 후인 2월 1일, 신성제국의 기사들을 가득 태운 위장 상선이 프로방스의 서해안 곳곳에 상륙했다. 바이에른이나 헬베티아, 알프스 산맥 중 그 어느 곳도 거치지 않고, 지중해를 멀리 돌아 상상치 못한 방향에서 기습을 가하는 작전이었다.

 그야말로 허를 찔린 프로방스 왕국은 허겁지겁 서부지역으로 정예군을 급파해야 했는데, 동부에서는 숙적인 부르고뉴의 군대가 선전하며 밀려오는 상황이었다. 프랑수아 국왕은 급한대로 국왕과 왕당파가 가용할 수 있는 상비군을 모조리 긁어모아 각지의 전장으로 급파했다. 며칠 후에는 계속 미적거리던 귀족파 군대들도 드디어 출정했는데, 적을 코앞에 두고도 느릿느릿 움직이며 지방의 주요거점을 은밀히 장악하기 시작했다. 전투의 대부분은 프로방스의 왕당파 부대와 신성제국-로트링겐연합의 부대 사이에서만 벌어졌다.

 겨우 한숨을 돌린 프랑수아 1세가 무언가 이상함을 느낄 무렵, 왕궁을 엄호하던 근위대의 막사 앞으로 한 무리의 바이킹족이 찾아왔다. 근위대 기사들이 잔뜩 긴장해 있는데, 덥수룩한 수염의 바이킹 남성이 앞으로 나와, 북쪽의 노르망디 공작이 전쟁에 힘을 보태기 위해 찾아왔다고 선언했다. 대신 자신들의 영지를 좀더 확장해 달라는 요구가 있었기에, 근위대와 국왕 일파는 전혀 의심치 않고 그들을 궁내로 들여 환영했다. 감히 바이킹 족들에게 무기를 풀어 놓고 오라는 사람도 없었다.

 이어진 축하연에서 근위대의 유일한 소드마스터인 트레빌 후작은 바이킹족 사이에 숨어있던 장신의 금발 미녀와 악수를 나누던 중, 그녀가 휘두른 바이킹소드에 의해 단칼에 목이 날아가 버렸다. 소드마스터의 반응속도는 재빨랐지만, 비슷한 속도로 짓쳐 들어오는 거력(巨力)을 피할 수 없었다.

 빅토리아는 후작의 목을 들고 테이블에 뛰어올라 산해진미가 담긴 그릇과 잔을 차버리면서 자신이 바로 진실한 노르망디 공작이라 선언했다. 바이킹 족들은 즉시 들고 있던 술잔을 던져버리면서, 자신들의 군주에게 무례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주변의 근위대원을 차례차례 참살하거나 항거불능의 상태로 만들어 버렸다. 강인한 여군주는 백금발을 휘날리며 테이블 위를 나는듯 쏘아져 순식간에 국왕의 앞으로 달려들었다. 산해진미가 단긴 그릇과 최고급 포도주가 담긴 술잔들이 거친 신법(身法)에 의해 깨지면서 휘날렸다.

 -콰아아앙

 화려하게 빛나던 샹들리에가 누군가의 검기에 잘려 비스듬히 낙하하며 테이블에서 출입문으로 통하는 입구를 봉쇄해 버렸다.

  

 난장판 속에서 뒤늦게 빅토리아를 발견한 아토스와 프로토스, 아라미스는 경악했다. 그 사이에 잔혹한 바이킹 여전사는 이미 프랑수아 국왕의 머리채를 한손에 잡고 마치 던져버릴 것처럼 360도로 빙빙 돌리면서 포식자의 눈으로 굴복을 강요했다.

 갈수록 빨라지는 회전운동은 인간이 낼 수 있는 속도를 넘어 공기를 찢어버리는듯한 소름끼치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저 상태에서 벽으로 던져졌다간 온몸이 깨진 유리잔처럼 산산조각날 게 분명하다. 샹들리에 쪽으로 던져진다면 통통한 살집이 날카로운 보석들에 꿰뚫리며 아주 화려한 최후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국왕은 두려움과 고통 속에서 비명을 지르면서 당장 항복하라고 고래고래 소리쳤고, 결국 남은 근위대원들도 모두 무력하게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드는 수 밖에 없었다.

 이후 리슐리외 재상은 국왕의 명령을 위조해, 부르봉 왕가의 일원들을 수도와 교전지 사이에 위치한 들판으로 불러모았다. 영토를 노략질 중인 적군을 상대로 분위기 반전을 꾀하기 위해, 국왕이 친히 친정할 것이며 전쟁 과정을 통해서 금년 상반기 안에 공식 후계자를 정할 것이라 공포했다. 현재 프랑수아 1세와 카트린느 왕비의 사이에서는 자식이 없었고, 나라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위기 상황인만큼 후계자를 정해야 한다는 논리는 이상할 게 없었다.

 국왕의 조카인 오를레앙 공작 가스통 등 유력한 후보자들 뿐만 아니라, 먼 방계의 떨거지 왕족들까지 한탕을 바라고 모여 들었다. 비록 왕은 될 수 없다고 해도, 이럴 때에 재빨리 얼굴을 보여야지 왕의 눈에 들어 권력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평야에 도착했을 무렵, 먼저 가벼운 정찰전에 나섰던 프랑수아 1세가 적의 화살에 맞아 중상을 입었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카트린느 왕비와 리슐리외 추기경은 다음의 전투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왕족을 직계와 방계를 따지지 않고 왕세제나 왕세자, 혹은 적어도 임시적인 섭정의 위에 올릴 것을 검토하겠다는 어명을 공표했다.

 전쟁터에 막 도착한 왕족들은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헷갈렸지만, 하나같이 의욕에 불타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전장에 나섰다. 반드시 전공을 세워 왕국의 새로운 지배자가 되겠다는 야심을 불태우면서.

 그런데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프로방스의 중앙군은 어딘가로 슬쩍 빠져 사라져 버렸고, 반대쪽에서 기습하기로 한 재상과 대귀족들의 군대도 감감무소식었다. 오직 일신의 병력만으로 아스토리아의 원정군을 상대하던 왕족들은 전투 와중에 대부분 목이 달아났다. 이상하게도 적군은 몸값을 받을 수 있는 고위급 포로조차 인정하지 않았고, 무조건 잡은 즉시 처형해 버렸다.

 유일하게 오를레앙 공작 가스통이 부하들의 희생을 발판 삼아 가까스로 도망치는 데 성공했지만, 퇴각 시의 약속장소로 돌아왔다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어쌔신들에 의해 쥐도 새도 모르게 암살당했다.

 벨라로서는 지난 한달 간 왕궁을 드나들 때마다 빠짐없이 그에게 붙잡혀 추잡스럽게 당해야했던 터라 그에게 미묘한 애증감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도 살겠다고 도망쳐온 꼴을 지켜보면서, 떡정이 들었는지 살려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지만, 계획을 위해서는 제거하는 수 밖에 없었다.

  

 그 사이, 지병과 같은 특수한 사정으로 인해 지방에서 웅크리고 있던 왕족이나, 음모에 가담하지 않고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던 귀족들도 은밀한 방법에 의해 제거당했다. 지방 곳곳을 장악한 귀족파 군대와, 어디선가 나타난 신성제국 혹은 로트링겐연합의 군대 간의 위장 전투 속에 휘말린 것이다.

 또한 내전 음모에 동조했던 대귀족급 인사들도 적이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어쌔신들에 당한 경우가 많았다. 물론 그런 사실에 이상함을 느낀 이들은 드물었다. 왕족들과 왕당파는 이번 일로 거의 궤멸되다시피 해서, 상대적으로 귀족들이 입은 피해 수준은 양호해 보였기 때문이다.

 기세가 올라 왕국의 서부 지방을 들쑤시던 제국군은 카트린느 왕비와 리슐리외 재상이 이끄는 중앙군에 의해 몇 번의 전투에서 격파당하며 잠잠해졌다. 그 와중에 중상을 입었던 프랑수아1세는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한 채 병세가 악화되어 끝내 서거하고 만다.

 약 한달 후인 3월 중순, 왕비 신분이었던 카트린느 드 메디시스가 프로방스 왕국의 새로운 여왕으로 추대되었다. 기껏해야 그녀가 섭정을 맡으리라 예상했던 귀족들은 모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그녀가 프랑수아 1세의 아이를 회임 중이라는 소식을 접하고 다들 어느 정도 납득했다.

 리슐리외 추기경은 성경에서 몇 가지 논리를 끌어와, 지금 뱃속에 원자를 품고 있는 카트린느 왕비는 왕실의 상징이자 정수(精粹) 그 자체이며, 혼란기에 왕통을 보존하기 위해 그녀를 새로운 여왕으로 추대한다고 공표했다.

 물론 왕비 뱃속의 아이는 리슐리외 추기경의 씨앗이었지만, 이 사실은 아는 자는 아이의 부모와 이사벨라를 포함해 단 세 명 밖에 없었다. 귀족이나 시민들은 어차피 카트린느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었고, 설혹 다른 대안이 있다 해도 반대할 힘이 없었다. 다들 새로 태어날 왕자 혹은 왕녀가 왕위를 물려받을 것이라 예상했기에, 즉위식은 무사히 시작되었다.

 이때쯤 왕비와 추기경, 그리고 이사벨라가 부리는 어둠의 세력은 프로방스 왕국을 막후에서 서서히 장악하며 주요한 반대자들을 깨끗이 처단해 놓은 상황이었다.

 여왕의 즉위식은 전쟁의 혼란과 아픔을 잠시나마 씻어낼 수 있도록 매우 화려하게 거행되었다. 카트린느는 적대국 출신이었기 때문에 국민들에게 인기있는 왕비는 아니었다. 하지만 즉위식에서 프랑수아 1세의 시신을 성당에 봉헌하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에 많은 이들이 감화되었다.

 그녀의 눈물은 어린 나이에 왕실로 시집을 온 뒤 무정했던 남편과 왕족들 사이에서 힘들었던 지난 세월을 떠올리며 쏟아낸 것이었지만, 겉으로는 그럴듯하게 포장되어 국민들에게 전달되었다.

 즉위식에는 에우로파 대륙의 주요 국가들에서 파견된 사절들도 참석했다. 이 날을 기점으로, 신성 제국과 로트링겐 연합, 프로방스 왕국은 프랑수아 1세의 서거를 추모하는 뜻에서 보름 간 전투를 멈추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서로 전쟁을 벌이고 있는 국가의 사신들 간에 불편한 기류가 감도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개전 이후 2월과 3월을 거치며, 헤센과 바이에른, 프로이센 왕국, 이베리아 반도나 이탈리아 반도, 그리고 신성제국 본토에까지 전쟁이 확산된 상황이었다.

 잉글랜드의 요크 가문에서는 현재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4세[Edward IV]의 동생인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Richard)가 방문했다. 요크 가문은 흰 장미를 상징으로 삼고 있었으므로, 이를 지지하는 대륙의 국가들은 백군(白軍)이라 불렸다.

 백군에 속한 국가들 중 로사링거 연합에서는 부르고뉴 대공국의 공녀 마리(Marie)를 보내왔다. 헤센 왕국에서는 왕세자인 루트비히(Ludwig)가 참석했는데, 그는 마리 공녀의 약혼자이기도 했다. 신성제국에서는 황제의 장녀인 테레지아(Teresia) 황녀가 방문했다. 연초에 루테티아를 방문했던 프리드리히 후작은 귀국 전에 전쟁이 터져버린 탓에 튈르리 궁에 감금되어 있는 상태였는데, 이때 특사로 풀려나서 자신의 사촌누나와 상봉했다. 그 외에도 이베리아 반도의 군소왕국들, 신성제국의 영향력이 미치는 대륙 동부의 왕국 및 공국들에서도 사신이 도착했다.

 한편, 상대편인 랭거스터 가문의 상징은 붉은 장미였기 때문에, 그들을 지지하는 국가들은 홍군(紅軍)으로 불렸다. 바이에른 왕국, 프로이센 왕국, 나폴리 왕국, 이베리아 반도 남부의 무어인 왕국들, 그리고 브리타니아연합 내부에서 잉글랜드를 제외한 대부분의 국가들이 홍군에 속했다. 랭거스터 가문의 당주인 리치먼드 백작 헨리(Henry)가 잉글랜드 중심의 패권주의보다는 연합 전체를 위한 온건적인 정책을 실행하겠다고 공표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왕의 즉위식에 사신을 파견하지는 않았지만, 동방에서 호시탐탐 서방 진출을 꾀하고 있는 시리아의 술탄 유수프 또한 홍군에 가입하겠다는 의사를 박히며, 에우로파 대륙 동부의 국가들을 공격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고대 마도제국 룬(Rhun)의 후예로, 대륙의 동쪽 끝에서 도시 하나만 남은 채 간신히 버티고 있는 비잔틴 제국이 그의 첫 목표였다.

 각설하고, 즉위식은 사신단간 별다른 갈등이나 충돌 없이, 새로운 여왕의 권위를 훌륭하게 세워주며 종료되었다. 카트린느 여왕은 왕비 시절 때 입었던 여성스러운 드레스 대신, 국왕으로서의 예복과 미망인으로서의 상복 느낌이 중첩된듯한 강렬한 남색의 드레스를 착용하고 있었다. 은색 십자가를 중심으로 물방울 형태의 다이아몬드들이 꿰어진 목걸이를 목에 걸었으며, 흑단처럼 고운 머리가 섬세하게 올려져 인형같은 미모를 완성한다.

 벨라도 즉위식을 마친 여왕을 축하해주고 몇 가지 사항을 보고하기 위해 튈르리 궁전으로 향했는데, 시종이 현재 여왕님께서 공석 상태임을 알려왔다. 외국의 사절들도 궁전 앞까지 방문했다가, 신임 여왕이 피로한 상태임을 짐작하고 다시 약속시간을 잡은 뒤 발걸음을 돌린다.

 하지만 이사벨라는 의뭉스러운 미소를 지은 채, 튈르리 궁전 안쪽에 아담하게 조성된 정원으로 향했다. 시종에게 아래와 같은 말을 하면 바로 프리패스였다.

 "섭정 합하께서 방문하셨지? 관련된 일로 온 것이다."

 이제는 왕실의 시종들 대부분이 이사벨라를 알고 있었기에 순순히 길을 열고 안내해 주었다. 섭정은 리슐리외 추기경을 뜻하는 말이다. 즉위식 직후 반포된 칙서에 의해 왕국의 재상을 연임하면서 섭정 직위를 겸하게 된 것이다.

 정원 안으로 들어서자 시야를 가득채운 푸른 수목과 풀밭 사이에 붉은 장미와 하얀 백합이 향긋한 향기를 뿜어내고 있다. 인기척을 찾아 들어가니, 장미덩쿨이 엉크러진 특실 사이에 두 인영이 보인다.

 "와, 벌써 4단계까지. 참 음탕한 미망인이셔. 하긴 나라도 흥분할 것 같지만."

 특실에 들어가니 카트린느 여왕이 고급스러운 남색 드레스를 걷어 올려 고운 손으로 잡은 채, 테이블 위에 가슴으로 엎드려 한창 리슐리외 섭정의 물건을 받아들이고 있는 중이다. 드레스와 살의 경계선에서 반쯤 드러난 배는 임신으로 인해 살짝 올라와 있는 상태다. 행위 직전까지 간단한 야외용 요리를 만드는 중이었는지 그녀의 앞에는 반쯤 썰리다 만 재료들과 요리 도구들이 놓여있다.

 '즉위식에선 차가운 모습으로 일관하시더니, 은근 자상한 여왕님이시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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