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화 (27/49)

 "언니도 마리랑 정말 연락하고 싶었는데, 중요한 사정이 있었어. 떠나기 전까지 상상도 못했던 특별한 일들을 겪었거든. 조금 있다가 둘만 있을 때 아주 자세히 얘기해줄게. 근데 나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벨라의 질문에 마리는 무슨 기억을 떠올리는지 얼굴을 붉혔고, 외무관이 헛기침을 하며 대신 말한다.

 "크흠. 오랜만이군, 레이디 이사벨라. 대공녀님께서 곤란해 하시니, 본관이 솔직하게 설명해주도록 하지."

 외무관이 말해준 것은 은밀하면서도 황당한 내용의 스토리였다. 3년 전, 이사벨라가 버건디에 머물던 시절, 마리는 그녀의 숙소에 매일같이 찾아와 놀다가곤 했다. 그렇게 벨라 언니가 머물던 방에 찾아간 어느 날, 방문을 열려다 이상한 소리가 들려 틈 사이로 엿보니 언니가 관리들이랑 끙끙대며 재밌는 놀이를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옷을 다 벗은 채 알몸을 비비고 있는 모습에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서 그곳을 떠나려고 했는데, 다시 한번 엿보니 벨라의 표정이 너무나도 기뻐보여서 그 놀이가 궁금해졌던 것이다.

 그 날 처소로 돌아간 마리는 이상한 기분에 휩싸여 테이블의 모서리에 첫 자위행위를 시도했다. 이후에도 벨라의 숙소를 찾아왔을 때 그녀가 똑같은 놀이를 하고 있길래 그때마다 몰래몰래 구경한 적이 몇 번 있었다. 벨라가 블라드 공작 일행과 훌쩍 떠나버린 뒤에도 가끔씩 이상한 기분이 들 때마다 자위행위를 했고, 이런 걸 아버지에게 물어보기에는 왠지 모르게 창피하고 죄스러웠다.

 때마침 샤를 대공이 전쟁 준비를 위해 연합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한창 바쁘던 시기, 마리는 벨라와 같이 놀던 관리 한명을 불러 자신과도 같이 놀자고 제안하며 자위행위를 보여주었다.

 관리는 대공녀의 순진하기 그지 없는 모습을 보고 그만 이성을 잃은 채 마리 공녀를 범해버렸다. 순식간에 처녀막이 파열되면서 느껴지는 아픔에 고통스러워 하며 울자, 그제서야 관리는 정신을 차리고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자신의 인생을 걸고 최선의 계획을 수립했다. 벨라와 함께 관계를 가지던 다른 관리들을 불러, 울다가 지쳐 잠들어 버린 마리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일을 저지른 건 한명 뿐이지만, 시찰에서 돌아온 샤를 대공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이성을 잃고 길길이 날뛸 게 뻔했다. 그저 대공녀를 지켜봤던 관리들까지 모조리 처형에 처해지고 말 것이다. 이미 전과가 있던 이들이라서 그런지, 거사를 치른 관리의 협박은 생각보다 잘 먹혔다.  그들은 머리를 모아 의견을 나눈 끝에, 조교에 능숙한 기술자들을 성으로 불러 공녀를 조교하기 시작했다.

 마리는 성인 남성의 성기가 자신의 하복부를 관통할 때마다 아파하면서 울부짖었지만, 기술자들은 나이를 가리지 않고 수많은 처녀들을 닳고 닳은 창녀로 변화시키는 데 통달한 자들이었다. 조교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었는데, 부드러운 조교는 적어도 반년, 길면 일년 이상 걸려야지 효과가 나온다. 대공이 자리를 비운 시간은 한두달 남짓이었기에, 결국 상당히 강압적인 조교방식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남성에 의해 완전히 찍어눌러져 정신 깊숙이 복종하게 만드는 조교 말이다.

 우선 부작용이 적은 약물과 도구를 투입해서 마리의 신체가 성적 쾌락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그녀가 정신이 들때마다 카사노바급 섹스 실력을 지닌 남성들을 투입해 꾹꾹 눌러주면서 쾌락의 효과를 확인했다.

 대공녀가 깨어있든 자고있든, 남자의 성기를 받아들이는 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일이라고, 그녀에게 그런 행복을 전해주기 위해 땀흘리며 노력하는 이들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그들이 그녀의 몸을 다뤄줄 때는 항상 공손하게 복종해야 하고, 이러한 섹스는 고통이 아니라 쾌락이라 싫어할 필요가 없으며, 그녀의 스승인 이사벨라 언니도 즐겁게 즐기던 놀아리고 말이다.

 관리들은 마리 대공녀가 학업 및 취미생활을 위해 특정한 교육방식을 요구했다는 것을 명목으로, 일반 시종과 시녀들의 눈에서 대공녀를 일정기간동안 철저히 격리시켰다. 그동안 그들만의 성교육이 철저히 이루어졌다. 교육 레벨이 올라감에 따라, 언젠가부터 고통이 쾌락으로 치환되었고, 마리가 짓는 표정도 그때 벨라가 짓던 표정과 비슷해졌다.

 처음에 느꼈던 수치심과 부끄러움, 분노는 어느새 그를 뛰어넘은 쾌락 속에 파묻혀 사라져가는 중이었다. 남자들이 말하는대로 겸손하게 그들의 말을 따르고 봉사하다 보면 너무나도 즐거운 쾌락이 찾아왔다. 이젠 하루라도 남자의 자지를 받지 못하면 그녀의 몸 자체가 불안해하는 섹스 중독 증상까지 나타났다. 평소의 영민한 사고력과 지혜도, 남자와 격렬한 성교 끝에 성욕을 다 해소시킨 뒤에야 본래대로 작동되었다.

 조교가 시작되고 한 달이 지날 무렵, 마리는 결국 신체와 의식이 자유로운 상황에서도 반항하는 것을 포기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아버님이 돌아오면 도움을 요청해 다 쓸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번 쾌락을 인정하자,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이 이 쾌락을 포기할 수 있을지 자신감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사정은 고귀한 귀족 영애로서 도저히 가족이나 가신에게 말할 수 없는 부끄러운 일이기도 했다. 이제 강제적 격리 상태에서도 풀려나 자유롭게 영주관을 돌아다닐 수 있었지만, 누구에게도 비밀을 밝히거나 들키지 않았다.

 아침 7시 경, 관리가 침실로 찾아와 잠든 대공녀를 깨운다. 마리는 잠이 덜깬 채 부스스한 머리를 헤집으며 일어나서, 화장실도 가기 전에 모닝 펠라부터 해주어야 했다. 약간의 흥분제와 체력증진제가 함유된 아침식사를 하고 난 뒤, 조교 기술자들이 머무는 방으로 가서 그들에게 몸을 맡긴다. 성교육과 음담패설을 들으며 신체는 흥분하고, 정신은 세뇌당한다.

 조교용 약물의 투여는 더 이상 하다가는 부작용이 심해질 것 같아 멈춘 상태였으나, 이미 충분한 효과를 본 상태였다. 소녀의 작은 가슴을 한번 주물럭거리면 비음과 애액이 새어나오고, 코앞에서 남성기의 향기를 맡으면 자동적으로 흥분상태에 빠져 츄르릅 츄르릅 성기를 빨아댄다. 정액은 조금 과장해서 물처럼 자연스럽게 마시는 수준이다.

 적당히 애무를 받다가, 남자가 요구하면 언제든 서툴게나마 남자의 몸 곳곳을 애무할 줄도 알게 되었다. 한달의 시간동안 창녀들이 배우는 여러가지 전문적인 기술을 배우게 되어, 처음과는 달리 숙련자의 티가 나기 시작했다.

 이후 옷을 모두 벗어 아담한 나신을 드러낸 뒤, 부끄럽지만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말을 한다.  애무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그것을 남자들이 요구하는 게 아니라, 그녀가 요구한다는 것 자체다. 이제 마리에게 섹스라는 보상은 안 해주면 섭섭하고 화나는 일이 되었다.

 기술자들의 성기는 단단하든, 대물이든, 구슬을 박아 해바라기든 다들 한가닥씩 하는 특징들을 지니고 있어서, 마리의 여린 보지가 도저히 다 받아낼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남자들은 그 일을 직업으로 삼아 갈고 닦아온 숙련공들이었다. 조교의 효과는 마리와 그들을 완벽한 궁합 관계로 만들어 놓았다.

 그렇게 오전동안 쾌락을 받아들이면, 고용된 마법사가 와서 신체와 정신의 컨디션을 청결하게 만드는 마법을 걸어준다. 마리는 가뿐해진 몸으로 런치와 티타임을 가지며 독서를 하고, 영지의 정치, 주변국과의 외교, 언니의 그룹이 벌이고 있는 사업을 분석하는 등 지적인 활동을 수행한다. 그녀는 샤를 대공의 외동딸이어서 다음대 부르고뉴의 군주가 될 확률이 높았으므로, 후계자 수업을 충실히 받아야 했다.

 오후를 그렇게 보내다가 해질녘이 되면, 하늘의 변화럼 마리의 얼굴도 슬슬 붉어지기 시작한다. 초창기에는 이 시간을 가장 싫어했지만, 이제는 제일 기다려지는 시간이 되었다. 벌써부터 공부에 집중이 잘 되지 않아, 식당으로 향한다. 조교기술자들과 관리들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함께 맛있는 저녁식사를 먹으면서 온갖 음란한 얘기를 나눈다. 식사의 마지막은 언제나 처절한 돌림빵이다.

 한 남성이 싸고 나면, 다른 남성이 올라타고, 다른 구멍이 뚫리고 나면 또다른 구멍이 뚫리고, 만찬장에는 그저 음란한 열기를 내뿜는 짐승들로만 가득하다. 정신없이 그녀의 몸을 들락날락거리는 남자들에 의해 정신이 반쯤 나가버린 채 쾌락의 파도에 빠져 시간가는 줄 모르고 당한다. 언제부터 들었던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저 그녀의 몸은 남자를 받아들이기 위해 태어난 고깃덩어리일 뿐이라는 말이 귀에 맴돌며 마음 깊숙한 곳까지 동의받는다. 마지막에 정액범벅으로 절여진 채 큰 대자로 누워 있으면 피로함과 동시에 완벽한 충족감이 느껴진다. 그렇게 저녁시간만큼은 마리는 남자들이 꼴릴 때면 언제나 올라탈 수 있는 소녀로 훈련받았다.

 광란의 저녁을 보내고 나면, 루이보스티를 기반으로 한 티타임을 가진다. 책상에 앉아 따뜻한 차를 호호 불면서 마시면서, 시나 수필, 간단한 논설문을 쓰며 하루를 정리한다. 벨라 언니로부터 배웠던 검술 수련도 빼놓지 않고 하고 있으며, 때로는 좋아하는 악기를 연주할 때도 있다. 그러다 야외정원이 암흑으로 휩싸일 즈음, 작은 호롱불을 켜놓고 큼지막한 원형 침대에 누워 굴러다니면서 재밌는 상상을 하다가 어느새 잠이 든다.

 조교 초반에는, 남자를 받아들이는 일을 마치 일상에서 숨을 쉬는 행위처럼 익숙하게 여기도록 하기 위해, 하루종일 섹스만 반복시키는 때도 있었다. 하지만 조교를 모범적으로 받아들이면서, 마리의 하루 일과는 대충 위와 같이 정립되었다.

 관리나 기술자는 결코 정해진 시간대가 아니면 그녀를 건드리지 않았을뿐더러, 충실히 그녀의 활동을 지원했다. 마리의 방에 드나드는 하인이나 시녀도 절대 사정을 짐작하지 못할 정도로 그들은 철저했다. 마리가 변했다는 걸 느끼는 사용인도 있었지만, 그 나이대에 흔히 있을 수 있는 변화라 여길 뿐이었다. 섹스 시간에는 마리가 남자들에게 아랫계급의 창녀처럼 봉사를 해야 했지만, 평소에는 반대로 그들이 마리를 매우 깎듯이 섬겼다.

 그렇게 두 달이 흘러, 마리가 이중적인 일상에 완전히 적응했을 무렵, 샤를 대공 부부가 영지로 귀환했다.

 첫날은 관리들도, 마리도 무척 긴장하면서 보냈지만 샤를 대공은 평소처럼 그녀를 귀여운 딸로 대해주었다. 계모인 마거릿 대공비는 딸이 여성의 향기를 풍기는 걸 알아챘다. 하지만 그저 안본 사이에 애가 다소 성장하고, 또래 소녀들처럼 치장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생각할 뿐 이상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설마 그 사이에 딸이 수하들과 외간 남자들에게 철저히 조교당했다는 걸 어찌 알아챌 수 있겠는가?

 대공은 소드마스터 수준의 무인이었기 때문에, 그가 있을 때는 아무리 은밀한 장소를 빌려도 공녀가 남자들과 관계를 맺기 쉽지 않았다.

 마리는 의도치 않게 인내의 시간을 가져야 했고, 그러는 동안 검술 수련을 비롯해 다른 취미활동에 무척이나 열중해 대공 부부를 흐뭇하게 했다. 그러다 대공이 다른 곳으로 출타를 하거나 원행을 나가면, 그동안 참았던 성욕을 폭발시켜 섹스에 골몰하고는 했다. 인내의 결과는 항상 달콤하다고 했던가? 더욱 고프고 애달픈 만큼 만족스러운 성적 쾌락을 얻을 수 있었다. 이렇게 섹스는 공녀의 비밀스러운 취미생활로 정착하게 된 것이다.

 설명을 들은 이사벨라는 거짓말 같은 내용에 황당하고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헐………"

 옆을 돌아보니, 마리는 잔뜩 얼굴을 붉힌 채 혼자서 이상한 상상에 빠져든 것 같았다. 벨라는 기가 차다는듯 그녀의 뺨을 톡톡 건드리면서 물어본다.

 "마리야, 혹시 지금이라도 언니가 죄다 죽여줄까? 아무 말도 안 나오게 깔끔히 정리해줄 수 있는데. 아니면 아래쪽만 잘라주는 서비스도 가능해. 지금까지 내 손으로 중성화 수술을 시켜준 남정네들이 한두 명이 아니거든."

 두 관리의 얼굴이 헉 하고 하얘진다.

 하지만 소녀는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호호, 괜찮아요, 언니. 이제 저도 좋아하는 취미가 되어버린걸요."

 "우리 마리가 정말 고생이 많았나 보네. 언니는 네 생각보다 훨씬 강하니까, 네가 원치 않는 일이 있으면 언제든 내게 말해도 돼."

 "고마워요, 언니. 저는 진짜로 괜찮아요. 어차피 조교에 참여했던 기술자들도 나중에 무례하게 구는 자들이 나와서 관리들이 싹다 몰살시켜 버렸어요. 비록 과거의 내가 현재의 이 모습을 원하진 않았을 것 같지만, 이런저런 걱정과 외로움으로 가득했던 과거보다는 확실히 지금이 더 좋은걸요."

 기술자들의 운명이야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그런 하층 계급까지 비밀이 흘러들어가면 절대 좋을 게 없으니까 말이다. 달콤한 과실은 일부 관리들의 손에만 주어졌고, 그들은 언젠가 충성을 맹세하게 될 여군주를 일찍부터 세뇌시켜 마음껏 범하고 있는 셈이다.

 "사춘기에 하게 된다는 고민이나 방황도 할 필요가 없고, 그… 음, 섹스를 할 때마다 잡념이 사라지면서 다른 학문이나 취미에도 집중하게 되어 지혜를 쌓는 데도 도움이 된다고요."

 계속 그럴듯한 변명을 해주는 걸 보니 진짜 마음 속까지 섹스에 중독된 상태로 보였다.

 "이런 비열하고 추악한 놈들을 봤나!"

 벨라는 천진난만하게 음란한 말을 내뱉는 소녀의 모습에 진심으로 분노한듯 외무관에게 다가갔다. 그는 벨라의 기세에 눌려 억 소리도 내지 못하고 잠시 움찔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벨라는 그의 바로 앞에서 마리가 그러했듯이 무릎앉아 자세를 한채 외무관의 성기를 쪽쪽 빨기 시작했다. 바짝 쪼그라든 자지가 순식간에 살아난다.

 튈르리의 정원에서부터 쭉 눌러왔던 성욕이 한편의 배덕한 이야기를 들으며 폭발 직전의 상태에 놓였다. 내친 김에 더블하트도 운용하기 시작하자 온몸에서 뜨끈한 열기가 치솟는다. 지금 당장 풀어내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다. 다소 황당해하는 이들을 향해 남은 말을 내뱉었다.

 "갑자기 난입해서 죄송합니다. 제 몸도 마음껏, 추잡스럽게 유린해 주세요!"

 결국 벨라는 마리가 보는 앞에서 예상치 못하게 시원한 섹스 한판을 벌여야 했다. 벨라가 잠깐의 불장난을 마무리 할 무렵, 마리는 그녀의 약혼자인 루트비히 왕자를 만나기 위해 화려한 자줏빛 드레스로 갈아입고 화장을 하는 중이었다.

 "양치는 안 하니? 아까 정액을 그대로 삼키던데."

 "아차!"

 여전히 손 볼 게 많은 아가씨였다. 화장이 다 지워지는지도 모르고 치카푸카 양치를 하면서 벨라에게 투정을 부린다.

 "루투비히는 너므 숭진하고 바루기만 해서 재뮈없어.. 우웅.."

 "응? 3년 전에는 꽤 좋아했지 않았니? 우리 귀공녀 씨가 그가 방문하던 전날밤에 한숨도 못자고 아침식사에 부스스한 얼굴로 나타나는 바람에 저하께 꾸중을 듣는 모습이 생생한데."

 -퉤에~ 가글가글 가글가글

 "휴~ 상쾌하다. 그치만 이제는 너무 지루하기만 한걸. 한 나라의 왕세자라는 자가 아는 것도 별로 없고. 오늘도 그 약속만 아니었다면 차라리 언니 따라서 응큼한 놀이나 맘껏 할 수 있었을텐데."

 저래 놓고서 막상 만나면 감쪽 같은 얼굴로 도도하고 새침한 표정을 짓고 있을 게 뻔했다. 너무 어린 나이에 발랑 까져 버린 것 같다. 벨라를 만나기 전까지 우울하고 수줍어 보였던 소녀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어휴, 니가 순진남의 매력을 모르는구나. 요즘 세상에 그게 얼마나 희소한 건데? 얼마 전부터 내가 키우는 아이도 비슷한 과라서 아주 재미가 쏠쏠해. 평소에는 아주 활달하고 대범한 척을 하다가도, 별 것도 아닌 일에 얼굴을 홍시로 만들면서 아주 기겁을 하더라고. 호호."

 "피~ 난 어려서 그런지, 언니가 말하던 나쁜 남자들이 더 좋은걸. 그러고 보니 언니가 새로 가르치는 애라면 나에겐 사제가 되는 건가? 한번 만나보고 싶네. 히히. 그럼 갔다 올 테니 여기서 마음껏 뒹굴다 가! 금방 돌아올거니까 그때까지 있으면 더 좋고~"

 룰루랄라 거리며 뛰어나가는 모습은 영락없는 사춘기 소녀였다. 그녀의 빠른 걸음을 관리가 허겁지겁 뒤따라 가는 꼴이 우스웠다.

 아까 즉위식에서 언뜻 본 헤센의 왕자 녀석은 진심으로 마리를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던데 왠지 불쌍하게 느껴졌다. 즉위식이 끝난 뒤 잠깐 소년 소녀가 조우했을 때, 왕자가 조심스레 말을 거는데, 하도 떨림이 심해서, 초인적인 청력을 지닌 벨라조차 무슨 의미인지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내가 고귀한 태생의 왕족 녀석을 불쌍하게 생각하게 될 줄이야. 끙! 모르겠다. 나도 루테티아를 뜨기 전에 제대로 개조시켜야 할 녀석이 있어서 바쁘다고."

 동경하는 약혼녀가… 평소에는 다양한 재능을 유감없이 드러내며 지혜롭게 처신하여 한 나라를 감당할만한 재녀라 불리지만, 밤만 되면 수하들과 몰래 몸을 맞추며 저열하고 음습한 쾌락에 빠져 산다는 걸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그래도 마리의 총명함은 벨라가 깨우쳐준 그대로 살아있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뒷정리를 마친 채, 부르고뉴 사절단의 처소를 나와 섭정의 관저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시종 한 명이 관저 앞에서 숨가쁜 모양새로 주위를 두리번 거리다가 그녀를 발견하고 급히 다가온다.

 "이사벨 경! 어디 계셨습니까? 프리드리히 후작 각하께서 급한 전갈을 보내셨습니다."

 순간 알 수 없는 기묘한 느낌이 뇌리를 스쳐간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면서 혈관 속을 돌고 있는 혈액의 흐름이 갑자기 빨라지며 부글부글 끓는다. 시종이 총총걸음으로 다가와 두어 번 접힌 쪽지 한 장을 전해주고 사라졌다. 심장 위에 잠시 오른손을 얹어 진정시킨 뒤, 의아한 얼굴로 종이를 펴보는데 다급히 휘갈겨 쓴듯한 문장 하나가 보였다.

 -이 편지를 보시는 즉시, 최대한 빨리 테레지아 황녀의처소로 와주십시오.-

 신성 아스토리아 제국에서 방문한 사절단의 숙소는 섭정공의 관저와 정반대편 쪽 외곽에 위치하고 있었다. 벨라는 속보로 발을 떼어 나는듯이 궁궐 이곳저곳을 통과하며 이동했다. 마치 먹이를 찾는 새가 공중을 낮게 비행하듯이, 발을 수 미터에 한번씩 살짝살짝 땅바닥에 내딛으며 전각과 기둥 사이를 활보했다.

 정문에 서있는 호위병이 한눈을 파는 사이 그의 옆에 쓱 착지했다.

 "본인은 섭정 각하의 비서관인 이사벨 드 플레시스라고 한다. 급한 사안으로 인해 프리드리히 후작 각하를 뵈러 왔지."

 위병은 바로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흠칫 놀랐다가, 이내 그녀를 확인하고 잠시 이곳에서 기다리라고 요청한 뒤 안으로 들어갔다.

 조금 후, 근위병 대신 시녀 한 명이 총총걸음으로 나와 벨라에게 인사했다. 살짐이 푸짐하고 후덕한 게 50대쯤 되어 보였다.

 "저는 황녀 저하의 시녀장인 에이세렛(Aiseret)이라고 합니다. 현재 후작 각하께서는 저하와 함께 계시는 자리에서 경을 뵙기로 하셨으니 예의를 갖춰 주십시오."

 무엇을 느꼈는지 벨라의 미소가 살짝 짙어졌다. 시녀의 입은 미소를 짓고 있지만 눈은 무감정해 보였다. 이 안에서 일종의 정치싸움이라도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벨라는 궁 안에서는 황혼검을 집무실 안에 두고 다니고 있었기에, 예장용으로 찼던 사브르만 풀어 보관소 한쪽에 놓았다.

 "알겠네. 그 분들이 계신 곳으로 신속한 안내 부탁하지."

 "예, 따라 오십시오."

 돌아선 시녀를 따라 어두운 복도를 걷는다. 실내 곳곳의 창에는 모두 커튼이 닫혀 있어 오후의 햇빛이 비춰지지 않았다.

 마침내 복도 맨끝의 방에 도착해 시녀가 문을 살짝 열어주며 허리를 숙인다.

 -끼이이익

 경첩이 긁히는 소리가 나며 두꺼운 문이 열리자, 이사벨라는 그 안으로 성큼 한 걸음을 내딛었다.

 안에는 고급 목재로 만들어진 화려한 테이블과 화려한 장식을 갖춘 소파, 침대가 보였다. 가구들의 위치는 대체로 시녀가 미숙하게 정리했는지 조금씩 비틀려 있었다. 전면의 시야에는 황녀도, 후작도 없었다. 무언가 불길한 기운이 점점 강해지며 방안을 맴돌고 있었다. 빅토리아가 그녀의 예민한 후각에 감지되는 냄새에 눈을 찌푸리는데 위쪽에서 차가운 방울 하나가 그녀의 얼굴 쪽으로 떨어졌다.

 이마 쪽으로 떨어져 주르륵 흐르는 방울을 손가락으로 찍어 확인하니 '피'의 방울이다. 그것도 뜨거운 피가 아닌 차가운 피[冷血]. 고개를 들어 천장을 보니, 방안을 밝히는 화려한 등 위에 누군가 끈으로 묶인 채 거꾸로 관통되어 있다. 이미 피를 많이 흘려 기절한 상태로 보였다.

 "프리드리히!"

 놀라서 외치는 순간, 뒤쪽에서 은밀한 기운이 빠르게 그녀의 몸을 관통한다. 문 뒤에 서있던 시녀 에이세렛의 왼쪽 팔이 벨라의 등을 뚫고 앞으로 빠져나온다. 시녀의 손톱은 보통 인간의 열 배 이상으로 날카롭게 자라 있었고 눈동자는 붉게 충혈되었으며 입 안에선 긴 송곳니가 튀어나와 그로테스크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키키키!"

 기이한 미소를 흘리던 시녀는 이내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린다. 적어도 여자의 장기 하나 쯤은 꺼냈으려니 했는데, 자신의 손에는 피 한 방울 묻어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순간 벨라의 모습이 마치 시녀의 뒤쪽으로 복사되듯 찍혀서 나타난다.

 -스으으윽

 -파아아아악

 귀신처럼 나타난 벨라의 오른손 손가락에서 새하얀 검광(劍光)이 솟아올라 시녀의 후방으로 쏘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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