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의 시종과 시녀들은 청소를 위해 그릇과 식기를 들고 모두 나가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평대할 수 있었다.
"무, 무슨 일이야, 이사벨라?"
왠지 사악해 보이는 미소에 테레지아 황녀가 물어본다.
"내가 오늘 좋은 아이디어를 듣고 왔거든. 지금이 혹시 몇 시인 줄 알아?"
그 말에 프리드리히가 회중시계를 보고 대답했다.
"음, 어디보자, 딱 오후 1시네! 근데 그건 왜?"
"후후후. 마침 딱 1시지? 앞으로 1시를 정규 섹스타임으로 정할게."
"에에?"
프리드리히가 처음 들어보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테레지아의 안색이 하얘졌다. 한박자 늦게 이해한 프리드리히도 당황한 표정이다.
"혹시 프리드리히는 테레지아 황녀님과 섹스하는 게 두려운 거니?"
벨라가 힘주어 묻자, 프리드리히는 우물쭈물하다가 대답한다.
"으, 응, 솔직히, 좀, 그, 그렇긴 한데."
옆에 있는 테레지아의 얼굴이 팍 찌푸려진다. 벨라는 호호 거리며 웃는다.
"그래? 오, 이런. 아직도 둘이 친해지지 않은 거구나. 지금 당장 긴급한 해결책이 필요하겠네."
-딱!
주위의 기운이 변화하면서, 프리드리히의 육봉이 우뚝 치솟고 성욕이 들끓는다. 당장이라도 사촌누나에게 달려들고 싶지만 간신히 참고 있는 모양새다. 벨라는 당사자의 의견을 중시하므로, 프리드리히의 머리를 한손으로 꽉 잡아 억누른 채, 이번에는 테레지아에게 물어보았다.
"테레지아는 프리드리히랑 조금 친해졌니?"
당장 달려들고 싶어하는 프리드리히를 더럽다는 눈초리로 쳐다보던 테레지아는, 벨라가 한 말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눈알을 굴리다가 잠시 후에 대답한다.
"응! 조금이 아니라 많이 친해졌어. 정말로 친한 동생인걸!"
테레지아는 나름 머리를 굴린 대답을 하며 스스로의 임기응변에 만족해 했다. 조금 친해졌다는 말에 동의하면, 많이 친해져야 한다면서 저속한 행위를 시킬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벨라는 이번에도 호호 웃으며 말해주었다.
"그래? 조금 친하면, 아무래도 섹스까지는 불편할 것 같아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보려고 했는데, 많이 친하다니 다행이네. 얼른 옷 안 벗고 뭐해?"
'아… 역시 부질없었어………'
테레지아 황녀가 입을 딱 벌리며 체념하는데, 그녀의 몸에도 멈출 수 없는 성욕이 가득 차오르기 시작했다. 벨라는 프리드리히의 머리를 놓아주었고, 그는 광폭하게 테레지아에게 달려들어 드레스를 찢듯이 벗기며 조준할 곳을 찾는다. 이미 얼굴에 홍조가 가득 오른 황녀는 재빨리 편한 자세를 잡고, 사촌동생의 성난 물건을 잡아 질 속으로 인도한다. 예쁘게 관리된 보지 속으로 뜨거운 자지가 푸욱 꽂히면서, 남녀 뱀파이어의 눈빛에 쾌락의 열기가 떠오른다.
벨라가 이 둘을 자꾸 붙이려 하는 것은, 그녀의 권속들 간의 사이를 좋게 만들어 내부갈등을 없애려는 의도도 있지만, 더욱 중요하고 근본적인 이유가 있었다. 테레지아와 프리드리히는 각각 현 신성제국의 황위계승순위 제1위, 제2위의 신분이다. 본래 테레지아의 남동생이자 프리드리히의 사촌형이었던 프란츠 황태자가 제1위였고 다른 형제와 사촌, 육촌, 팔촌형제들이 줄줄이 있었으나, 얼마 전의 폭탄 테러로 한꺼번에 폭사당했기 때문이다.
무사한 황족이라고는 외국에 나가있던 테레지아와 프리드리히 뿐이었다. 그 외의 후보를 찾으려면 12촌을 넘어가야 했는데 이 즈음부터는 사실상 황족으로 인정받기가 어려우므로, 대귀족 선제후, 평의회 의원, 내각 각료들 각각이 서로다른 주장을 펼치며 내전으로 돌입할 확률이 컸다.
현재는 황제의 아들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황위계승법에 따라 유일한 딸인 테레지아가 황태녀로 봉해질 것이며, 그 다음 순위인 프리드리히가 그녀의 경쟁자가 될 것이다. 이 둘에게 수많은 권력자들이 몰려들면서 얼떨결에 서로 대립하게 된다면 그 역시 재앙이다. 벨라는 이 둘의 유대관계를 매우 끈끈하게 만듦으로써 사전에 위험을 최소화하려는 것이다.
사실 테레지아가 프리드리히에 대해 가지고 있는 감정은 매우 복잡했다. 우선 어릴 때부터 보아온 가까운 친척으로, 동일한 황족 신분인데다가 같이 뱀파이어까지 되었으므로 꽤나 친근감이 느껴진다. 하지만 30년 넘게 간직해 온 처녀를 그녀의 의사와 상관없이 빼앗아 간 도둑놈이므로 약간의 혐오감도 든다. 잘 아는 사람끼리 민망한 일을 벌이는 것에 따른 부끄러움도 있다. 또한 벨라의 권속이 되기 전에 직접 그를 살해하려 했으므로 미안함도 컸다.
분명한 것은 이처럼 서로의 타액과 체액, 온기를 나누는 성교가 계속될수록, 둘 사이에 생겼던 거리감은 조금씩 줄어들고, 사그라들뻔 했던 유대감이 강화되어 간다는 점이다. 상대적으로 이런 문제에 둔감한 프리드리히는 모르고 있지만, 눈치가 빠르고 정치력과 야심이 강한 테레지아는 이런 사정과 변화를 충분히 느끼고 있었다. 그녀가 30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남자를 만나지 않았던 것은 인생에서 집중할 다른 일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으나, 이제 사정이 변한 것이다.
'차라리 잘 된 거야.'
테레지아는 벨라가 주입한 성욕이 어느 정도 풀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촌동생의 품에 안겨 그를 갈구하면서 생각했다.
벨라는 삐그덕대는 마차의 문을 조용히 닫아주고 나왔다.
"내가 저 둘을 맺어주다니, 뭔가 출세한 느낌이긴 한데…. 근데 정작 내가 외롭잖아?"
벨라는 아직도 욕구불만 상태였다. 시종 역할을 하고 있는 어쌔신들이 있지만, 요즘 부쩍 드높아진 자존감 덕분인지, 너무 난잡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꺼려졌다. 대륙에서 가장 강력한 제국이 자신의 손아귀로 들어올 판인데, 좀더 격이 높은 일들을 하고 싶었다. 결국 그녀는 자신의 마차에 올라타 노트를 펴놓고 서류들을 정리하면서 모처럼 폰-이사벨 그룹의 사업을 분석, 기획하기 시작했다.
이제 자산규모로 보았을 때, 에우로파 대륙의 상인들 중100등 안에는 들지 않을까 싶었다. 너무 순위가 낮은 거 아니냐 할 수도 있겠지만, 초기 자본과 성장 시간을 따진다면 가히 혁명적인 성장이었다. 이 속도라면 몇 년 후에는 50위 안에 들 수도 있을 것 같았다. 1골드 동전 하나에 벌벌 떨던 시절도 있었는데, 이제 적어도 그녀에게 금력이 부족한 경우는 없을 것이다.
부르고뉴 대공와 프로방스 여왕, 신성제국 황족의 삼중적인 지원과 보호가 없었다면 결코 이렇게까지 크지 못했으리라. 그 전에 다른 권력자들, 혹은 그들을 등에 업은 거상들에게 온갖 억울한 일을 당하며 이것저것 뜯어 먹혀 신용불량자로 전락해버렸을 것이다.
그렇게 사업구상을 하는 도중, 마차가 다시 출발했다. 부지런히 간다면 내일은 샹파뉴의 텔레포트 게이트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날 밤. 사절단 일행은 노숙을 선택해 야영장에 짐을 풀었다. 중간에 소도시 하나가 있었지만, 국내의 혼란을 염려한 신성제국 사절단이 한시라도 빨리 귀국하고 싶다는 의사를 피력하는 탓에 최대한 많은 거리를 이동한 결과였다.
새벽 3시 경.
문득 잠이 깬 벨라가 황혼검을 들고 천막 바깥으로 나온다.
귀뚜라미 소리가 사방에 찌르르 찌르르 울리는데, 검푸른 수풀 사이로 수백 마리의 반딧불이 날라다니고 있었다. 자욱한 새벽안개 너머로 푸르스름한 달의 형상이 비친다.
'이 세계는 정말로 생각치도 못한 곳곳에 아름다운 풍경이 가득하구나…. 그 속에 숨겨져 있는 일상은 마냥 아름답지만은 않겠지만.'
곧이어 빅토리아와 테레지아 황녀도 텐트의 지퍼를 열고 간단한 무장을 갖춘 상태로 바깥으로 나왔다.
"다들 당장 깨워!"
벨라는 그녀들에게 아주 낮은 소리로 명령을 전달했다. 보초병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감은 그들이 이미 어딘가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살해당한 상태라고 알려왔다. 지금 그녀들에게는 호각도 없을 뿐 더러, 난리를 피우면서 적의 침입을 알린다면, 일행이 다 깨어나기 전에 적들이 기습할 확률이 높았다. 못 알아 챈 척 어슬렁어슬렁 거리면서 동료를 몰래 깨워 대비하는 게 더 효과적이었다.
그러나 그때, 화려한 폭발음이 울리며 지축이 들썩거렸다. 적들이 이상한 기색을 눈치채고, 바로 기습을 시작한 것이다. 야영장에 세워진 천막들로 십여 개가 넘는 불길이 쏟아진다. 마치 현대의 군대에서 미사일을 발사하는 것과 같은 장면이다.
"홍염의 별똥별[Inferno Falling-Star]?!"
시작부터 5단계 공격주문이었다. 테레지아 황녀는 화염의 상태와 궤적을 보는 즉시, 불 미사일들에 방수처리가 덧대어진 것을 깨달았다. 이런 종류의 마법은 '찰랑이는 여울[Rapids Splash]'과 같이 물을 쏘아내는 마법으로 막을 수 없다. 천막들에는 실드가 걸려 있지만, 5단계 마법을 막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녀는 재빨리 표적과 위치를 계산해 방어마법을 가동했다.
"사이킥 리플렉션[Psychic Reflection]."
테레지아의 손에서 무형의 기운 수십 개가 뻗어나가며 천막 바로 앞까지 도달한 화염들과 부딪힌다. 화염에는 방수처리에다 폭발처리까지 되어있었는지 화려한 폭발이 시작되었다. 다행인 점은 사이킥 리플렉션의 영향을 받아, 화염이 쭈욱 뒤로 밀려나는 와중이었다는 것이다. 불똥이 튀어 불이 붙은 천막이 있긴 했지만, 폭발에 그대로 직격당한 천막은 없었다.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5단계 공격마법과 방어마법이 맞부디친 결과, 밤하늘에 난데없이 화려한 불꽃놀이가 펼쳐지며 사방이 확 밝아진다. 황녀가 의도했는지는 몰라도, 수풀 너머에서 달려 오는 적들의 모습이 환하게 비친다.
"언데드(Undead)!"
서쪽 들판에서는 스켈레톤, 좀비, 구울, 데스나이트와 같은 암흑생물들이 밀려오고 있었고, 동쪽 들판에서는 얼굴을 가린 무인들이 짓쳐들고 있다. 움직임이나 복장이 통일되진 않은 것으로 보아 일반적인 용병들로 보였다.
사절단의 수행원들은 모두 베테랑들이었기 때문에 잠에서 깨자마자 일사불란하게 응전태세를 갖추고 천막 밖으로 달려 나왔다. 곧이어 사방에서 창과 칼이 부딪히고 마법 주문과 폭발음이 울리며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비전투 수행원들이 집결한 주위에도 적들이 침입했는데, 이들은 알 수 없는 어둠의 손길에 의해 즉시 제거되었다. 벨라가 시종으로 위장하고 있는 어쌔신 일부를 남겨둔 덕분이었다.
전장의 축은 크게 두 군데에 형성되었다. 적들 중 가장 강력한 두 존재가 활약하고 있는 곳을 주변으로 사절단의 강자들이 모여든 것이다.
한 곳에서는 백색 철가면을 쓰고 중갑옷을 입어 완전무장을 한 기사가 유백색 검강(劍?)을 줄기줄기 뿜어내고 있다. 엄청난 위력의 검강이 매우 섬세한 기술에 의해 세밀한 부분 한곳한곳까지 조절되는 것이 특징이었는데, 적어도 수년 동안 소드마스터로 검강을 수련해 원숙한 경지에 이른 자로 보였다.
"저런 경지에 다다른 자가 있다니. 역시 세상은 참으로 넓구나."
빅토리아는 짙은 남색빛의 검강을 힘차게 뽑아내면서 놀라움과 호승심이 뒤섞인 탄성을 내지른다. 적어도 그녀보다 반 수 위의 실력자로 보였다. 가면기사의 주변에는 빅토리아, 랑발손, 누레딘, 오셀로가 원형으로 포위진을 구축하여 맞서고 있었다.
소드마스터인 빅토리아를 중심으로 랑발손과 누레딘, 오셀로가 각자의 장점을 이용해 보좌하는 형식이다. 사방의 공간을 유려하게 쓸어담는 유백색 검강을 상대로, 바이킹소드가 자유롭게 교차되며 청람색 검강이 파도처럼 몰아친다. 백색 기운이 파도가 먹어치운 뒤 위협스럽게 넘실댈 때, 랑발손의 거검과 누레딘의 할버드가 양쪽 방향에서 솟아나면서 적의 치명상을 유도하려 한다. 그것을 물흐르듯 자연스럽게 피해낸 기사가 광폭한 기운을 일으키면, 오셀로의 철퇴와 쌍절곤이 그의 뒤통수로 쏟아져 내리고 있다.
네 남녀는 이번에 처음으로 합을 맞춰본 게 아니었고, 서로 수많은 비무와 논무, 합격 경험을 지니고 있었기에 가면기사를 상대로 대등한 승부를 펼칠 수 있었다.
한편, 반대쪽 축에서는 흑마법사(Necromancer)가 검은색 안개를 일으켜 주변의 생물을 모조리 질식사시키고 있었다. 이에 테레지아가 날려 보낸 반투명한 염력마법이 안개의 중심부로 밀려든다. 최초의 것은 소멸되었지만, 물량으로 승부해서 계속 부딪히고 부딪힌 결과 흑색과 백색이 뒤섞인 회색의 균열이 퍼져나가며 안개가 소멸되기 시작한다.
흑마법사는 다시 한번 흑단목 지팡이를 휘저어 암흑에서 소환한 언데드들을 돌격시켰지만, 프리드리히가 뽑아든 푸른 검과 벨라가 들어올린 붉은빛 검에 의해 두부처럼 썰려나간다.
"호호, 이 정도 퀘스트야 C급 용병으로 날릴 때 모조리 깨부셔봤지."
벨라가 그때도 언데드들을 자주 상대했던 건 맞지만, 언데드는 이를 소환하거나 제작한 흑마법사의 실력에 따라 확연한 차이가 난다. 지금 그녀가 맞서 싸우고 있는 언데드들은 그때와 비교도 할 수 없을만큼 강력했는데, 그중 데스나이트들은 익스퍼트 초중급의 검사도 어려워할 수준이었다. 즉 그녀의 말은 일종의 도발에 해당했다. 방금도 벨라의 황혼검 앞에서 데스나이트 두 기와 좀비 세 마리가 조각조각 갈라진 채 추풍낙엽처럼 넘어가는 중이다.
흑마법사는 나이 지긋한 노고수도 아닌 젊은 처녀와 청년에 의해 자신의 소중한 소환물이 소멸되고 모욕당하고 있는 현실에 광분한듯 싶었다. 로브 안의 몸을 부르르 떨며 더욱 강력한 마법들을 난사하며 전황을 뒤바꾸려 시도한다. 하지만 그를 둘러싼 세 명의 남녀는 겉모습과 달리 인간을 초월한 뱀파이어들이었다. 그가 아무리 강력한 마법을 빠른 속도로 캐스팅해내도 어려움없이 피해냈다.
연이은 마나의 소모로 인해 흑마법사의 주의가 분산되었고, 그 틈을 타 테레지아의 광역마법이 펼쳐진다.
"듀얼 인페르노 익스플로전[Dual Inferno Explosion]-"
시동어와 동시에 6단계의 마법이 흑마법사의 상하좌우 20m를 가득 메우며, 그 안의 언데드들을 모조리 재로 만들어 버렸다. 불길이 사라지고 난 곳에는 암갈색 방어막을 펼친 흑마법사만이 남아있었는데, 로브의 일부가 불에 타면서 얼굴을 드러낸 채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어인?!"
흑마법사의 정체는 황색 피부를 지닌 노인이었다. 테레지아의 반문에 그는 거세게 고개를 흔든다.
"나는 무어인 따위가 아니다."
그 말은 동대륙에서 왔다는 뜻이었다. 정체에 대한 힌트를 주는 것을 감수하면서도 얼굴을 붉히는 것을 보니, 동대륙의 아랍인들은 서대륙에 사는 인간들을, 동족이든 이민족이든 상관없이 다소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았다. 이슬람에 의해 널리 교화되지 않은 야만 지역으로 보는 것이다. 동대륙인에 대한 서대륙인들의 입장도 마찬가지였지만.
'이런 면들은 어찌보면 지구랑 비슷하군……..'
"하지만 무어인의 땅을 거쳐서 왔겠지. 예컨대 코르도바 왕국이라던지."
프리드리히가 은근슬쩍 미끼를 던졌지만, 흑마법사는 그의 의도를 파악한듯 코웃음을 치며 무시하고, 테레지아를 쳐다본다.
"마도와 체술의 조화가 훌륭한데다가, 무려 6단계의 마법을 간단한 시동어로 사용하다니…. 과연 마도황녀니 철혈황녀니 할 자격이 있는 년이었군."
그는 난처해 하면서도 상당히 감탄한듯한 목소리였다. 테레지아가 익힌 백마법과 그가 익힌 흑마법은 근본적으로 궤가 달랐지만, 일반적으로 백마법의 클래스를 올리기가 더 어렵다. 효율성 대신 안정성을 선택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 흑마법은 클래스를 올리기는 쉬웠지만, 경지가 높아질수록 주화입마를 당할 위험이 컸다. 결국 테레지아나 아랍인 흑마법사 모두 대단한 인물들인 셈이다.
테레지아는 얼굴 가득 비웃음을 띠며 상대에게 오만한 어조로 말한다.
"아직 놀라기엔 이르다고, 추악한 이교도 늙은이! 아이들 장난 수준의 마법을 보더니 혐오스런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놀라는 꼴하곤, 자신만만하게 해골바가지와 시체더미를 앞세워 오더니 본녀의 솜털조차 간지럽히지 못하는구나."
같은 편이 봐도 진짜 재수없어 보였다. 그것은 단지 도발이 아닌 그녀의 오만한 천성이었다. 흑마법사의 얼굴이 일그러지려는 찰나, 그의 그림자에서부터 새하얀 폭발이 일어났다.
"크어어어어어!"
성스럽고 고귀한 순백의 빛이 그의 하체를 꿰뚫으며 고환까지 반으로 갈라 놓았다. 벨라는 이제껏 황혼검으로만 언데드를 상대하며 흑마법사를 방심시켜 놓은 뒤, 테레지아의 폭발주문이 끝날 무렵에 빛의 속도로 흑마법사의 그림자 속으로 이동해 있었다. 그 후 테레지아의 도발이 먹혀든 틈을 타 성검 잔다르크를 꺼내든 것이다.
벨라의 기술과 전략에는 상식적으로 함께 존재할 수 없는 빛과 어둠이 모두 섞여 있었기에, 이러한 사실을 진즉 알지 못했다면, 아무리 철저히 대비한다고 해도 방어하기 어려웠다. 동대륙에서 손꼽히는 강자였던 그조차도 실력을 본격적으로 발휘하기도 전에 무력하게 당해버리고 말았다.
"일시보존(Temporary Preservation), 상태고정(Condition Fixing)!"
기습 직후, 테레지아의 시동어가 낭랑하게 울려퍼짐과 동시에 흑마법사의 신체는 벨라가 꿰뚫고 지나간 순간에서 굳어 버렸다. 그의 신체 주변을 흐르던 시간은 약30분 정도도 그대로 고정되었다. 테레지아가 무려 6단계 마법을 더블캐스팅한 것인데, 한 등급의 마법을 장황한 시동어나 아티팩트 없이 더블캐스팅하려면 그 이상의 등급이어야 한다. 즉 그녀는 7단계에 도달한 마법사라는 것이다.
8단계 이상의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자를 '마도사'라고 부르는데, 현재 에우로파 대륙에 알려진 마도사가 한명 뿐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테레지아의 성취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놀라웠다. 벨라나 빅토리아가 이룬 성취만큼 무시무시한 진도다.
어렸을 때부터 황실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것, 현자의 탑에 들어가 마도사의 제자가 된 것, 뱀파이어가 되면서 인간의 감정을 잃어버린 대신 미친듯이 수련에 몰두한 것 등이 종합적으로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참고로 대륙의 유일한 마도사는 '현자의 탑'의 탑주인 니콜라스 플라멜 경으로,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현자의 탑에서 은거 중이다. 그는 에우로파 대륙에서 가장 장수하고 있는 인간으로, 나이가 최소 150세를 넘겼다고 하며, 테레지아 황녀 외에도 몇 명의 제자를 더 두고 있다. 수십년 전, 비잔틴 제국의 황궁 마법사로 재직할 당시에, 내전의 진압을 위해 8단계 마법을 시전한 걸로 유명하다. 9단계 마법 사용이 가능한지 여부는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