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화 (33/49)

 아무튼 벨라와 테레지아는 프리드리히에게 굳어진 흑마법사를 지키게 한 뒤, 빅토리아 일행이 분전하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팽팽하게 유지되던 균형은 그녀들의 가세로 깨지기 시작했다.

 벨라는 가면기사가 사용하는 유백색 검강이 신성력에 근거한 것임을 알아챘다. 무언가 불순한 기운이 섞여있긴 하지만, 그 근원은 잔 다르크에 흐르는 그녀의 성화력과 동일한 것이었다. 더구나 가면기사는 벨라가 가세하면서 힘이 부치는 상황이 되자,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아주 작게 읊조렸다.

 벨라는 예리한 청력을 동원해, 그것이 고대의 룬어로 구성된 일종의 노래 형태임을 포착해냈고, 신성찬트(Divine Chant)임을 확신했다. 신성찬트는 교황청이나 동방정교회가 지닌 오래된 비술로, 극히 드물게 선택된 소수의 성기사들만 사용할 수 있는 비기이다. 노래가 한소절씩 끝날 때마다, 기사가 뿜어내는 검강이 한층 짙어지고 길어지며 분위기를 일변시킨다.

 "후후, 이거 해볼만 한데! 과연 너의 신성력이 강할까, 나의 신성력이 강할까?"

 벨라는 반지로부터 성검 잔다르크를 꺼내든 채 포위전에 끼어들었다. 상대방 역시 새로 합류한 적이 지닌 신성력을 느꼈는지 살짝 놀라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곧바로 엄청난 순도의 신성력이 밀어닥치자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변한다.

 벨라의 성화력은 오랫동안 혈마력과 뒤엉켜 생존하면서, 보통의 신성력을 능가하는 강력한 특성들을 얻게 되었다. 가면기사는 자신의 근원적인 힘에서조차 밀리기 시작한 이후로, 조금씩 수세에 몰렸고, 결국 벨라와 빅토리아의 연수합격을 얻어맞고 뒤로 날라가면서 기절해 버렸다.

 "복합 속박(Complex Restriction)!"

 깨어난다고 해도 어찌할 수 없도록, 테레지아의 주문이 상대를 단단히 묶는다.

 최강자 두 명이 제압되자, 남아있는 적들은 잘 씹도록 까놓아진 하나의 풍선껌에 불과했다. 복면 무인들은 그저 사절단의 잡다한 수행원들을 처리하기 위한 일반 용병들에 불과했다. 결국 그들은 하나씩 죽임을 당하거나 포로로 사로잡혀, 테레지아가 만들어낸 마법감옥 안에 갇혀 버렸다.

 새벽의 기습은 그렇게 사절단의 완승으로 끝났다.

 심문은 30분의 시간제한이 걸린 흑마법사부터 시작되었다.

 "듀얼 디프로스트(Dual Defrost)!"

 복합해동 주문이 작동되자, 흑마법사 주변을 휘감았던 시간정지가 풀린다.

 "크으으으으으으으…"

 흑마법사는 하체가 반으로 갈라지고 마나도 전부 신체 밖으로 흘러나가 무력화된 상태였다. 그는 해동 즉시 자신의 상황을 파악했는지, 벨라의 일행을 강렬하게 노려보았다.

 "크크크, 본사(本師)가 미개한 야만인들의 땅에서 이런 모습으로 죽게 될 줄이야."

 하체 대부분이 절단된 탓에 많이 고통스러워 보였는데도 그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별안간 누구를 보았는지 눈을 동그랗게 뜬다. 그의 시선은 누레딘과 오셀로를 향하고 있었다.

 "누르 앗 딘(Nur ad-din)!"

 흑마법사는 상대의 정체를 파악한 뒤 깜짝 놀란 모양새였다. '누르 앗 딘'은 누레딘을 동대륙 식으로 정확하게 발음한 것이다. 누레딘은 자신을 아는듯한 상대의 말에 놀라서 그를 쳐다 보았지만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옆에 있던 오셀로는 그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 보다가 기억나는 게 있는 지 소리쳤다.

 "설마 이븐 할둔(Ibn Khaldun)님?!"

 누레딘 또한 시리아에 살던 시절 그 이름을 질리도록 들어보았었다. 이븐 할둔은 동대륙에서 명성높은 학자이자 마법사였다. 동대륙에는 누구나 인정할만한 이름높은 대현자 두 명이 있는데 '위대한 여행자' 이븐 바투타(Ibn Battuta)와 '고독한 구도자' 이븐 할둔(Ibn Khaldun)이었다. 이븐 할둔은 그의 별칭처럼 세상사를 비관적으로 생각하고 구도에 힘쓰는 인물로 알려져 있었는데, 지금의 모습은 몹시 의외라 할 수 있었다.

 "흐흐흐흐.. 반도(叛徒)들이 이곳에 모두 모여있었군."

 "어찌 당신과 같은 위대한 현자가 먼 이방(異邦)에 숨어들어와 비열한 암습을 자행한단 말이오?"

 누레딘은 떨리는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방금 전까지 맞서 싸우던 적이었지만, 존대의 목소리를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오래 전에 부왕(父王)의 궁정에서 지내던 시절, 그를 몇 번 보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이븐 할둔의 눈빛이 기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아아! 역시 세계는 역시 슬픔과 퇴락, 어둠으로 가득한 곳이구나. 위대함을 이루려 해도 그 끝은 항상 고난과 실패로 귀결될지어니. 칼리프에게 미안할 뿐이도다."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마력 파동에 테레지아가 기겁하며 그녀의 오브를 들어올렸다. 분명히 그에게 남아있는 마나가 없었거늘 강력한 폭발의 징조가 그의 몸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의 피부에 어두운 불길이 흐르면서, 남아있는 상체가 마치 태양빛에 아이스크림이 녹아내리듯 흘러내린다. 그의 피부와 장기는 어느새 검은색과 붉은색이 뒤섞인 뱀 형상의 액체들로 변하여, 바닥을 타고 번져왔다.

 "이런, 피해라! 자기희생(Self-Sacrifice) 주문이다!"

 테레지아는 짧은 시간동안 무언 캐스팅을 셀 수 없을만큼 반복해서, 견고한 7중 방어막을 연이어 펼쳐내어 폭발의 속도를 늦추었다. 그 사이에 일행은 각자의 신형을 날려 그 자리를 벗어났고, 곧이어 거대한 폭발이 반경 스무 미터를 뒤엎었다.

 이븐 할둔의 신체는 완전히 사방으로 찢겨나가 허공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다행히 희생자는 없었으나, 테레지아는 가볍지 않은 내상을 입은듯 피를 왈칵 토해냈다. 벨라가 몰래 피를 전달해주어, 울혈(鬱血)이 생긴 부위는 치유되었지만, 마나를 집적된 서클 일부가 엉크러져, 며칠 간 세심한 회복과정이 필요했다. 그동안은 이전처럼 고단계의 마법주문을 마음껏 사용하기가 어려워진 것이다.

 덕분에 다음 대상인 가면기사는 일행의 엄청난 경계 속에서 몹시 신중한 심문 절차를 거쳐야 했다. 기절해 있는 그의 가면을 프리드리히가 벗겨내자, 금발 곱슬 머리에 새하얀 피부가 드러났다. 나이는 30대 후반 정도로 보인다. 머리카락은 목덜미 윗부분에 겨우 닿을 정도로 짧았는데, 한눈에 봐서는 여자인지 남자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일행은 처음에 당연히 남자인 줄 알았으나, 자세히 뜯어보니 여자인 것 같기도 했다.

 "이 사람은 남성인가, 여성인가?"

 빅토리아의 질문에 벨라가 간단하게 대답해 주었다.

 "여자다."

 벨라는 딱 보는 순간 상대가 여성임을 느꼈다. 머리길이가 이 대륙의 일반적인 여자들보다는 짧고 남자들보다는 길었지만, 얼굴과 목의 골격으로 볼 때 여자임이 분명했다. 다소 보이쉬하게 보이는 건 현재 머리를 짧게 자르고 남자의 갑주를 입은 채 기절해 있어서 그렇다. 두꺼운 두께의 흉갑옷을 낑낑대며 벗겨내는데, 남자들이 탄성을 감추지 못한다.

 "세상에나!"

 저 정도면 거의 G컵이다. 갑옷의 안쪽에 아예 가슴을 넣을 수 있도록 홈이 파여있었는데, 갑옷의 두께가 워낙 두꺼웠기 때문에 겉으로 보면 남자의 가슴팍처럼 보였던 것이다. 보통 여성기사의 갑옷과는 많이 다른 게 마치 남자처럼 위장하려 한듯한 모양새다.

 갑옷을 다 벗겨내 보니 전체적인 굴곡이 장난 아니었다. 땀에 젖은 옷 사이사이로 비치는 몸매는 벨라나 빅토리아 못지 않게 매우 육감적이다. 가슴만큼은 아니었지만 엉덩이도 나름대로 토실토실했으며, 적당히 날씬한 신체는 검사로서도, 여성으로서도 이상적인 체형이다. 유부녀인지는 모르지만, 애 두셋은 있을 나이에 이 정도로 몸매를 관리하기 쉽지 않은데,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덕분인 것 같았다.

 얼굴은 아주 이쁜 편은 아니었지만, 적당히 괜찮다고 할 수 있는 정도였는데, 기절한 상태인데도 묘한 색기가 흘렀다. 지금도 남자들이 침을 꿀떡 삼키는 게, 왠지 모르게 따먹고 싶은 얼굴을 가졌다고 해야 할까? 가슴 부위는 특히 더했다.

 그때 여기사가 정신을 차렸는지 눈을 살짝 떴다. 진한 갈색 눈동자가 드러나자 얼굴의 농염한 기운이 더욱 짙어졌다. 그런데 벨라가 그녀의 눈빛에서 읽은 건 진한 허무감과 안타까움이었다. 결코 신성력을 사용하는 성기사가 보일 표정이 아니었다. 임무를 실패했다는 그런 아쉬움이 아니었다. 마치 이븐 할둔이 자기희생주문을 쓰기 직전에 보였던 눈빛처럼, 삶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감이 차올라있었다.

 "내가 할말은 없다. 어서 죽여라."

 내뱉은 말 또한 체념이 가득 들어있는 어조다. 이때 테레지아 황녀가 기묘한 표정을 지으며 소리쳤다.

 "그대는, 그대는 혹시 검후(劍后)가 아닌가?"

 황녀의 목소리는 '혹시나'하면서도 믿을 수 없는 듯한 일을 물어보는 어조였다. 벨라는 테레지아가 자신 말고 다른 사람의 앞에서 말을 더듬는 것을 처음 보게 되었다.

 "한때 그렇게 불린 적도 있었지."

 인정하는 말에 일행은 대부분 놀라는 기색이었다. 동대륙에서 온 누레딘과 오셀로만 고개를 갸웃거린다. 아까 전과는 정반대의 상황이다.

 "검후가 신성력을 쓴다는 말은 전혀 들어본 적이 없다. 더구나 당신은 7년 전의 쾨니히그레츠 전투에서 영구히 실종되지 않았는가?"

 "………"

 하지만 여기사는 더 이상 대답할 마음이 없는지 고개를 가로젓고 눈을 감는다.

 검후(劍后)는 에우로파 대륙에서 가장 위대한 여성 검사에게 붙여지는 호칭이다. 마지막으로 그 호칭을 가졌던 이는 바로 프로이센 왕국의 공주였던 조피 샤를로테(Sophie Charlotte)였다. 그녀는 유년기부터 검에 재능을 보였는데, 그녀를 가르친 검술 선생들은 '수천만 명' 중에 한 명 정도만 지닐 수 있는 무서운 재능이라고 경외심을 담아 표현했다. 세인들은 이를 단지 왕실의 과장으로 여겼지만, 그녀는 무려 20대 중반의 나이에 대륙의 최연소 소드마스터가 되었다. 남녀를 불문하고 역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이었다. 그리고 첫 전투에서 아군의 두 배 이상의 병력을 지닌 신성제국군을 격파하고 3일만에 연속으로 다섯 개의 성을 빼앗는 등 화려한 데뷔전을 치뤘다.

 이후 그녀가 써내린 역사는 대륙인들에게 아직도 전설처럼 내려오고 있었다. 북방의 골칫거리였던 바이킹족을 유틀란트 반도로 밀어냈고, 신성제국의 속번(屬藩)이었던 폴란드의 상당 지역을 정복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냈으며, 헤센, 바이에른 등 주변국들과의 무수한 전투에서 단 한 차례도 패배하지 않았다. 이는 검술실력을 떠나서 전략과 전술 또한 신장(神將)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의미다. 그녀가 존재할 당시, 프로이센 왕국은 신성제국과 비견될만한 절대강국으로 일컬어지며, 군사적 황금기를 구가했다.

 조피 공주의 남편은 프로이센의 재상 비스마르크의 장남인 알브레히트였다. 알브레히트는 바로 이사벨라가 루테티아의 만찬장에서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봤던 프로이센의 사절단장, 메클렌부르크 백작이었다. 본래 그녀의 약혼자는 알브레히트의 동생인 루카스였는데, 결혼 전에 무슨 사정 때문인지 루카스의 형인 알브레히트로 교체되었다. 이는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었지만, 개인적으로 루카스와 인연이 있었던 이사벨라가 프로방스의 정보부를 이용해 알아낸 상태였다.

 아무튼 검후 조피 샤를로테는 7년 전, 신성제국군과 벌인 쾨니히그레츠전투를 마지막으로 실종되었다. 그때 그녀는 골짜기에서 단 2천의 병력으로 2만이 넘는 제국군에게 포위되어 매우 불리한 상황에 처했있었다. 끝까지 항전한 결과, 프로이센 군은 몰살당했지만, 제국군도 1만이 넘는 사상자를 내어 사실상 제국의 패배라 불리는 전투였다. 검후의 시체는 발견되지 않아 실종처리되었지만, 사실상 사망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그런데 검후가 수상한 신성력을 사용하는 가면기사의 모습으로 나타나 벨라 일행을 공격하다가, 사로잡힌 채 눈앞에 속박되어 있다. 일행은 마치 한편의 황당한 소설을 읽는 기분이었다. 실종 당시에 31세였으니 이제38세의 아줌마일테다.

 빅토리아 역시 프로이센의 검후 조피 샤를로테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일족은 부친의 대부터 노르망디에 정착했지만, 고향을 잊지 않고 스칸디나비아의 동족들과 종종 교류하고 있었다. 그런데 검후가 실종되기 전까지, 많은 바이킹 족들은 남쪽으로 내려오는 것을 매우 조심스럽게 여겼다. 어린 빅토리아에게 있어, 여성의 몸으로 위대한 바이킹 전사들을 두려움에 떨게 한 검후는 매우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것이다.

 '과연! 그녀 정도가 아니라면, 감히 어떤 여인이 나에게 일방적 우세를 점할 수 있겠는가?'

 테레지아 황녀는 영지인 슐레지엔(Silesia)이 프로이센과의 국경지대였던 탓에, 더욱 검후에 대한 감정이 각별했다. 7년 전까지 그녀는 검후를 상대로 싸워, 열 번이 넘는 패배와 두세 번의 무승부를 기록했을 뿐, 단 한번도 승리하지 못했던 것이다. 심지어 마지막으로 붙었던 전투에서는 크게 패하여 영지의 대부분을 점령당했었는데, 검후가 실종된 뒤 테레지아의 고군분투 끝에 전세가 역전되었다. 이후 영지를 되찾고 프로이센 군에 우세한 구도를 확립했지만, 황녀의 마음 속에는 검후를 한번도 이기지 못했다는 자격지심이 존재하고 있었다. 덕분에 7년의 세월이 지난 후에도 그녀의 변한 모습을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이다.

 "나를 기억하는가? 그대와 폴란드의 전장에서 맞붙었던 슐레지엔의 대공작 테레지아다."

 떨리는 듯한 황녀의 목소리에, 검후의 눈이 다시 뜨여졌다.

 "그때의 그 애송이 황녀군. 마지막엔 제법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줘서 기억한다."

 애송이라는 호칭으로 불렸지만 테레지아는 얼굴이 새빨개질뿐 뭐라 반박하지 못했다. 그녀의 자존심은 하늘을 찌를만큼이나 강했지만, 상대가 감히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마지막 전투는 검후의 기상천외한 전술로 인해 황녀의 참패로 끝났었다.

 "도대체 그대가 왜 이러한 복장을 하고 우리를 기습한 것인가? 혹시 알브레히트 백작과 관련이 있나?"

 테레지아의 추궁에 검후는 눈쌀을 찌푸렸다. 특히 남편인 알브레히트 얘기를 들으면서는 혐오가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내 앞에서 그런 쓰레기 얘기는 꺼내지 말았으면 좋겠군. 더 이상 할말이 없으니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로 해라."

 테레지아가 몇 번이나 말을 더 걸어보았지만, 그녀는 눈을 감고 묵묵부답으로 응대했다. 이때 벨라가 황녀를 제지하고 앞으로 나섰다.

 "이 세계에서 여성검사로 살면서 참으로 존경해오던 분인데, 이런 자리에서 뵙게 되니 개인적으로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호칭이나 작위같이 복잡한 건 모두 생략하고, 검사 대 검사로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현재 익스퍼트 최상급의 용병인 이사벨라라고 합니다."

 이사벨라는 눈앞의 상대가 프로이센의 공주라는 생각을 버렸다. 검후에게 현재 그런 잡다한 지위나 예전의 업적은 모두 무의미해 보였기 때문이다. 대신 벨라는 검후의 다른 모습에 집중했다. 막상 빨리 죽이라면서, 스스로는 혀를 깨물지 않고 가끔씩 상대의 말을 받아주는 모습 말이다. 스스로는 아무런 미련이 없다는듯 말하지만, 분명히 무언가 미련이 있었기에 무의식적으로 살려 하는 것이다. 그것을 알아내야 심문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다.

 "혹시 비스마르크 가문의 루카스(Lucas) 공을 기억하십니까?"

 몇 분째 묵묵부답인 검후의 눈이 살짝 뜨여졌다. 예상했던 것보다는 미약했던 반응이다. 벨라는 몇 년 전, 데카당스 호의3등 선실에서 그를 만났던 이야기를 상세히 해주었다. 검후는 몇몇 부분에서 감정을 드러냈는데, 과거에 대한 약간의 그리움과 배신감, 혐오감이 살짝살짝 나타났다가 결국은 허무감으로 귀결되었다.

 "너는 그와 나의 관계를 대충 알고 있는 것 같군. 잘 살고 있다는 걸 알았으니 되었다."

 검후가 그 말을 마치고 다시 눈을 감으려는데, 이사벨라가 한발 더 성큼 앞으로 다가와 그녀의 눈앞에 얼굴을 들이민다.

 "위대한 검의 여왕님! 부디 자기 스스로를 속이지 마십시오. 자신을 농락하는 것은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큰 잘못입니다. 당신은 지금 이 순간, 분명히 살고 싶어하지 않습니까? 반드시 지켜야 할 소중한 가치 혹은 존재가 있기에, 삶이 지옥과 같을지라도 남아있는 것 아니었습니까?"

 벨라가 강하게 쏟아내는 말들에 검후의 눈이 처음으로 한 차례 흔들렸다.

 "인간은 모름지기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살아야 하며, 비록 온 세상이 이를 속박할 지라도, 스스로 모든 노력을 기울여 실날만한 기회라도 잡아야 합니다. 국가, 정치, 사회, 문화, 종교, 그 어떤 시스템도 결국은 모두 하나의 진리로 연결됩니다. 억센 환경에 대항하여 최선의 수단을 동원해 인생에 뜻을 관철시켜야 한다는 진리 말입니다."

 검후의 무표정이 조금씩 무너진다. 분기에 차오른듯한 표정이다.

 "그대가…. 그대가, 무엇을 안다고 내게 그러한 말을 하고 있는가?"

 "모릅니다. 하지만 압니다! 당신이 겪었던 구체적인 일들이라면, 그저 남들이 아는 부분만큼만 알 뿐이지요. 그러나 당신이 방금 전까지 짓고 있었던 그 표정,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절망 속에서 꺼져가는 초 하나만을 바라보는 그 표정은 이 세계의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어. 불과 몇 년 전까지 거울 속의 내가 매일같이 지었던 표정이었거든."

 벨라는 아예 막 나가기로 작정한 것 같았다. 그녀는 다시 마음을 가라앉힌 채, 나머지 일행을 향해 돌아섰다. 그리고 자신이 검후에게 긴밀히 할 얘기가 있으니 잠시만 자리를 비켜달라고 요청했다. 일행은 벨라가 왜 저렇게까지 열을 내는지 의아해 하는 표정이었지만, 순순히 몸을 일으켜 주변의 천막으로 들어간다.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테레지아가 두 여인을 힐끗힐끗 쳐다보다가, 음파를 완전히 차단시키는 마법 장막을 쳐주고 갔다.

 "지금의 무례에 대해서는 나중에 충분히 사과할게. 내 추측이 그저 일부의 근거를 오도하여 당신의 복잡한 마음 속을 무례하게 헤집은 것일지도 몰라.  하지만 이 대륙의 쓸데없는 예절 과정을 지키면서 결코 나의 진심을 전달할 수는 없었어."

 다시 입을 뗀 벨라는 오른손의 반지에서 우윳빛 성검을 쭈욱 뽑아냈다.

 "내가 지닌 신성력은 수십년 전 불행하게 희생된 성처녀 잔 다르크에서 비롯되었어. 이 신성력에 맹세하고 말하건대, 내가 지금부터 당신에게 들려주는 말은 진실이야. 그 누구에게도 고백한 적이 없는 얘기고, 한 번만, 딱 한 번만 들려줄 테니까 잡생각하지 말고 잘 들어봐. 부탁할게."

 신성력에 진실만을 말하겠다고 맹세한 뒤, 거짓된 내용을 말하는 자는 그순간 그 힘을 잃어버리게 된다. 즉 성검이 유지되는 한, 벨라의 말은 진실이라는 뜻이다.

 벨라는 지구에 편안하게 삶을 영위하다가 이 세계에 오게 된 일, 그리고 용병이 되어 전장을 구르며 겪었던 절망스러웠던 나날을 검후에게 말해주었다.

 벨라 스스로도, 자신이 왜 이렇게까지 오지랖을 떠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검후는 비록 그녀가 동경하던 자지만, 따지고 보면 오늘 처음 보는 남에 불과했으며, 더군다나 그녀의 일행을 기습한 적이었다. 하지만 끊임없이 말을 쏟아내던 중, 약간은 자신의 행위를 이해할 수 있었다.

 벨라의 이야기 속에는 스스로의 정체성, 인생, 목표가 오롯이 담겨있었고, 그것들은 거대한 불안감과 혼란감, 절망감의 뿌리 위에 세워져 있었다. 그녀가 한치라도 삐끗하는 순간, 언제라도 뿌리 속에 녹아있는 마이너스 감정들이 솟아올라 그녀의 인생을 덮쳐올 것이다.

 벨라는 남들이 아무런 생각없이 인생을 흘려보낼 때, 끊임없이 자신의 삶과 의지를 증명하고 확신하며 살아야 했다. 벨라에게 있어 검후는 이 세계에 존재하는 또다른 자신처럼 느껴졌고, 그녀의 우울과 절망이 자신에게 전염되는 꼴을 도저히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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