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후는 30분 가까이 이어지는 벨라의 긴 이야기를 들으며, 상대의 얼굴과 성검을 몇번이나 연거푸 쳐다 보았다. 그만큼 벨라의 말은 믿기 어려운 것이었으며, 그 인생 또한 기구하기 그지 없는 것이었다. 이야기가 끝났을 무렵, 검후는 진실로 감화된 표정이었다. 벨라의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진실이자 진심임을 알고서도, 꿈쩍하지 않을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더구나 그녀와 같은 슬픔을 지니고 있는 경우라면 더더욱.
검후는 처음에 비해 훨씬 인간다운 표정을 짓고 있었고, 갈색 눈에는 살짝 눈물까지 고여있었다.
"그대의 이야기는 잘 들었도다. 그대는 충분히 내게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이제 나의 이야기를 해주겠다. 이야기가 끝난 후, 한 가지 약속을 해줄 것을 부탁하려 한다."
벨라는 그 약속이 그녀의 미련에 관련된 것임을 직감했다. 검후는 신성력에 진실을 맹세한 뒤, 살짝 들뜬 어조로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대가 이를 수락하든 거부하든, 나는 오늘 새벽을 기억할 것이고, 앞으로 그대의 말처럼 인생을 살아보려 한다. 예전의 나는 스스로를 강하다고 생각했었지만, 사실 그 누구보다도 연약했었고, 이제야 그것을 깨달음으로써, 진정으로 강해질 수 있는 길을 알게 되었다. 그대는 더 이상 나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검후의 인생 이야기 또한 벨라의 경우처럼 30분 가까이 길게 이어졌다. 기구하고, 또한 기구한 사연이었다.
검후 조피 샤를로테는 프로이센의 공주로 태어났다. 부친인 빌헬름 국왕은 전형적인 무정한 아버지로, 항상 자식보다는 국가를 먼저 생각하는 이였다. 그는 프로이센을 강대국으로 성장시키기 위해 군국주의적 정책을 실시하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조피를 비롯한 왕자와 왕녀들은 검술 또는 마법적 재능을 키우기 위해 태중에서부터 각종 위험한 실험을 당해야만 했다.
개중에는 사산되거나 미치광이, 장애인이 된 형제들도 있었는데, 성장과정에서 쓸모없다며 모두 죽임을 당했다. 조피는 운이 좋은 경우였다. 역사에 길이 남을만한 검의 재능과 강건한 신체를 얻은 채, 정신 또한 정상으로 태어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발걸음을 떼기 시작할 무렵부터 엄청난 강도의 검술 훈련을 소화해야 했다. 남들이 또래들과 놀거나, 유모와 쉬거나, 부모를 따라 여행하거나 혹은 자애로운 사부와 간단한 수련을 시작할 때, 그녀는 그러한 개념 자체를 알지 못한 채, 부친이 정해준 일상을 엄격히 따랐다.
조피의 우수한 신체와 재능은 인간의 한계를 여러 번 뛰어 넘으며 이를 모두 받아들였지만, 정신은 오래 전부터 조금씩 지쳐가고 있었다. 하지만 세뇌에 가까운 교육으로 인해 별다른 문제는 일어나지 않았고, 세간에 알려진대로 젊은 나이에 소드마스터가 되어 프로이센의 부흥을 이끌게 된다.
그것은 마치 기계와 같은 삶이었다. 부왕이 조작한 대로 움직이고 멈추고 움직이고 멈추길 반복했다. 그러한 그녀의 일상에 조그마한 희망이 있었다면, 바로 약혼자인 루카스 폰 비스마르크였다. 루카스는 보통의 프로이센 남자 답지 않게 따뜻하고 순수한 성격이었고, 지친 조피의 마음을 위로해 주는 유일한 존재였다. 하지만 루카스와 조피의 재능은 천지차이였다.
루카스는 프로이센 제일의 검객인 샤른호르스트 후작을 스승으로 두고서도 고작 유저급과 익스퍼트급의 경계에서 허덕였다. 오히려 루카스의 형인 알브레히트가 소드 익스퍼트 상급에 도달하면서 월등한 우수함을 보여주었다. 알브레히트는 북부인답게 강건하고 냉혹한 성격을 지녔으며 정치력 또한 뛰어났다.
빌헬름 국왕과 비스마르크 재상은 며칠 간 상의한 끝에 조피와 루카스의 약혼을 무효화하고, 그녀를 도로 알브레히트와 약혼시켰다. 항상 부친의 명령만 듣고 살아왔던 조피는 결국 반대의 목소리조차 내뱉지 못한 채 알브레히트와 결혼해야만 했다. 무력감과 패배감에 시달리던 루카스는 결국 모든 것을 버린 채 베를린을 떠났고, 보잘 것 없는 용병이 되어 대륙을 떠돌기 시작했다. 그렇게 조피는 인생의 유일한 위안을 잃어버렸다.
알브레히트와의 결혼생활은 마치 지옥과도 같았다. 그가 그저 냉혹한 야심가였을 뿐이었다면, 조피 또한 그런대로 평범하게 그의 부인으로 지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알브레히트는 본부인을 버려둔 채 밥먹듯이 첩질을 하는 바람둥이였을 뿐더러, 굉장히 이상한 성벽을 지니고 있었다.
어느 날, 알브레히트는 술에 잔뜩 취한 채 그의 친구 한명을 데리고와 조피에게 소개시켜주었다. 그녀가 무감정한 눈동자로 인사를 하는데, 남편이 그녀의 옷을 하나둘 벗기기 시작했다. 조피는 당황해서 무슨 짓이냐며 항의했지만 그가 강한 어조로 닥치고 가만히 있으라고 말하자 결코 반항할 수 없었다.
그 날, 조피는 남편이 보는 앞에서 그의 친구에게 몸을 바쳐야 했다. 여자로서의 수치심과 부끄러움, 모멸감이 느껴졌지만, 상대가 누구이든 간에 몸은 쾌락에 따라서 움직이며 신음소리를 냈다. 알브레히트는 조피의 그런 모습을 흥분되는 눈길로 지켜보았다.
그는 이틀 후에 두 명의 친구와 함께 찾아왔고, 일주일 뒤에는 아예 친구로도 보이지 않는 중년인을 데려왔다. 조피는 그들을 상대할 때마다, 가면을 써서 정체를 숨긴 채 창녀처럼 굴어야 했다. 그렇게 일탈의 빈도수는 점점 잦아졌고, 남편이 보는 앞에서 외간남자들에게 범해지는 게 일상이 되어버렸다. 평생 검술만 수련하면서, 만나본 남자라고는 남편과 시동생 뿐이었던 검후는 수없이 많은 남자들의 자지를 받아내야만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비정상은 아닌 것 같았다. 초대된 손님들도 이토록 훌륭한 몸매를 지닌 아내를 돌리는 알브레히트를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이었다. 심한 날은 거의 스무 명이 넘는 인원에게 돌림빵을 당하기도 했고, 심지어 버러지 같은 하층민들을 상대로 야외에서 신체를 훤히 노출한 채 박히기도 했다. 남편은 어딘가에 숨어서 자위를 하고 있다. 소드마스터의 남아도는 체력 덕분에, 갈수록 학대가 심해졌다.
더욱 무서운 것은 자신이 남편의 학대에 적응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수 년간 그렇게 개발당해온 신체 덕분에, 육체적 쾌락이 넘치도록 느껴졌고, 피폐해진 정신은 쾌락에 굴복하여 갔다. 고귀한 공주이자 검사로서 지녀오던 자존심은 밑바닥까지 떨어졌다.
30세 생일에는 가면을 쓴 채 백 명이 넘는 이들에게 갱뱅을 당했다. 한 나절 넘게 쾌락의 늪에 빠졌다가 모든 것이 끝난 후 겨우 정신을 차리자, 알브레히트가 무척 좋아하면서 오랜만에 그녀를 범해 주었다. 그런데 어느새 그녀의 마음 한켠은 남편을 부족하게 여기며 다음 날 있을 윤간을 바라고 있었다. 또다른 마음 한켠에서는 그런 자신을 끔찍하게 여겼지만, 계속되는 챗바퀴를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다가도 전쟁이 벌어지면 전장에 투입되어 미친듯이 싸워서 적을 죽이고 승리를 이끌어 내야만 했다. 반항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이제 아버지가 바라는 것, 남편이 바라는 것, 그리고 자신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을 구분하기 어려워졌다. 전투를 앞두고서도, 외간남자들의 뜨거운 품에 안기고 정신없이 음부를 꿰뚫리고 싶은 욕망에 빠져, 미친듯이 자위를 했다.
그렇게 여자로서 남아있던 약간의 반항심조차 사라지며 서서히 쾌락에 굴복해 갈 무렵, 그녀에게 운명적인 전투가 다가왔다.
조피가 이끌던 부대는 쾨니히그레츠의 깊은 계곡에서 며칠을 굶은 채 10배가 넘는 적군에게 포위당해 있었다. 그녀는 초인적인 능력으로 발휘해 10배가 넘는 적군을 학살했지만, 최후의 최후에는 결국 중상을 입은 채 절벽 너머로 떨어졌다.
일반인이라면 즉사할 높이였지만, 소드마스터의 회복력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하지만 움직일 힘이 없었다. 주변의 동굴과 오지를 기어다니면서 이끼와 구정물을 먹고 끈질기게 생을 이어나갔다. 걸을 수 있을 정도로 회복했을 무렵엔, 이미 베를린으로 귀환해야 할 시간이 지나있었다.
살면서 처음으로 아버지의 명령을 어겨버린 것이다. 처음에 두려움에 벌벌 떨던 그녀는 어떻게든 일어나 걸어가려 했지만 몇십 미터 가지 못한 채 다시 쓰러졌다. 그렇게 무인지대에서 혼자 남아 세 달 가까이를 버티면서, '명령'과 '환경'에 대해 생각하고 의문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더 이상 프로이센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몸이 완전히 나았을 때, 그녀가 향한 곳은 대륙의 남부에 위치한 교황령 바티칸(Vatican)이었다. 이전에는 왕실의 일원으로 그저 피상적으로 받아들였던 종교를 진심으로 믿게 된 것이다. 바이에른 왕국과 헬베티아 공화국을 지나, 그 험준하다는 알프스산맥을 북단에서 남단까지 일자로 주파했다. 인간이 밟을 수 없었던 대지에 존재하던 수만 마리의 몬스터가 위대한 여성 검사에 의해 무차별적으로 썰렸고, 인근 생태계의 거대한 지각변동이 초래되었다.
그렇게 교황령 바티칸에 도착했다. 서방 카톨릭교회의 본산이자, 에우로파 대륙에 남아있는 2대 성지(聖地) 중 한 곳이 그녀의 눈앞에 웅장한 모습을 드러냈다. 바티칸은 단 하나의 거대한 신성도시와 이를 둘러싼 수백 개의 신성요새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조피는 도시 곳곳에서 느껴지는 신성력과 순백색 성상들에 감동하면서 교황이 머무는 곳까지 찾아갔다. 청사 앞을 지키던 성기사에게 그녀의 신분을 말하고 실력을 보여주면서, 신에게 자신을 바치고 봉사하고 싶어서 왔다고 했다.
조피는 즉시 서방교회의 교황 알렉산데르 6세[Alexander VI]에게 안내받았고, 신성에 귀의하는 맹세를 한 뒤 성기사가 될 수 있었다. 교황으로부터 직접 순도 높은 신성력을 부여 받았고, 체사레나(Cesarena)라는 신성 세례명이 주어졌다. 성기사들은 본래의 이름을 잊는 대신 교황이 직접 부여한 신성한 명칭으로 불렸다. 특히 조피의 경우, 본래의 정체는 철저히 숨겨졌고, 교황의 집안인 보르지아(Borgia) 가문의 친척인 것으로 조작되었다. 신성제국의 대영주로 있는 교황의 형이 낳은 딸이 된 것이다. 또한 철저한 위장을 위해, 아예 남장을 시키면서, 공식 문서에는 체사레나의 남성형인 체자레(Cesare)로 등록했다. 즉 체자레 폰 보르지아(Cesare von Borgia)가 그녀의 공식적인 이름이 되었다.
체사레나는 일반적인 성기사들과는 다르게 취급받았다. 겉으로는 교황군의 장교가 되었지만, 그녀의 진실한 직위는 교황의 직속 비밀조직인 성전기사단(聖戰騎士團, Knight Templars)의 수석기사였다.
체사레나는 신의 정의를 수호하는 활동을 성실히 수행하면서 잠시 행복을 맛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임무 중에는 매우 세속적이고 비도덕적인 일들도 많았다. 경쟁 가문의 추기경 제거, 타국의 분란과 갈등 조장, 이교도 정착촌 몰살, 교황청 이익을 위한 부정한 로비 등이 대표적이었다.
알렉산데르 6세 교황은 성격이 교활하고 잔인하였으며, 극비리에 정부와 자식들까지 두고 있는 타락한 성직자였다. 그는 자신의 개인적인 야망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물이었지만, 겉으로는 온화하고 부드러운 성인의 모습을 연기해, 대륙인들의 칭송을 받고 있었다.
마침내 체사레나가 성전기사단에 입단한지 1년째 되던 날, 알렉산데르 6세는 그녀를 범하고 정부로 삼아버렸다. 그동안 묵묵히 업무를 수행해 오던 체사레나로서는 끔찍한 배신감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한동안 교황은 매일같이 체사레나를 끼고 살았는데, 2년 차가 되면서, 약간 질렸는지 한 달에 한번 정도로 찾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그러자 교황이 비밀리에 나은 사생아 아들들이 부친의 이름을 등에 엎고 체사레나를 건드리기 시작했고, 그녀가 감히 저항하지 못하자 밥먹듯이 따먹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윤간의 쾌락에 사로잡힌 체사레나는 자신의 의지로 그들과의 관계를 끊어낼 수 없었다.
삼년 차가 넘어서자, 타락한 추기경이나 대주교들에게까지 성적 봉사를 시작해야 했다. 물론 그녀가 여자임을 아는 이들은 고위 성직자들 중에서도 극소수에 불과했지만, 그 극소수의 대부분이 그녀의 몸을 거쳐갔다.
사오년 차가 되어서는 이제 성전기사단의 동료들에게조차 오픈된 성노리개가 되어 버렸다. 그들 중 열 명 정도가 우연히 체사레나의 성별을 알게 된 것이다. 그들과 함께 임무를 나갈 때면, 그녀는 임무를 위해 힘을 쓰기 보다는, 그저 임무 중인 성기사들이 욕구불만을 해소할 수 있는 창녀와 같은 역할을 해야 했다. 물론 대부분의 동료들은 체사레나의 성별이나 출신을 알지 못했고, 그저 '보르지아'란 성을 바탕으로, 교황이 몰래 낳은 아들 정도로 추측하고 있었다.
그 무렵, 체사레나는 바티칸 생활에서 유일한 희망 하나를 발견했다. 바로 스무 살의 처녀인 루크레치아 폰 보르지아[Lucrezia von Borgia]였다. 루크레치아는 교황의 사생아로 태어난 소녀였다. 체사레나보다 열다섯살 넘게 어렸는데, 족보 상으로는 체사레나의 친여동생, 즉 교황의 조카로 조작되었다.
루크레치아는 바티칸에서 보기드물게 매우 훌륭한 품성을 지닌 소녀였다. 외모도 아주 깜찍하고 귀여웠지만, 따뜻한 마음씨와 자애로운 성격이 그녀의 강점이었다. 주변 사람들로부터 성녀(聖女)라는 별칭으로 불릴 정도였다. 체사레는 루크레치아를 어린 시절부터 돌보면서 매우 가까워졌고, 실제 여동생을 대하듯 그녀를 대했다. 프로이센의 궁정에서는 결코 즐기지 못했던 따뜻한 가족생활이었다.
루크레치아를 만난 뒤, 체사레나는 자신이 교황령으로 온 것을 후회하지 않게 되었다. 그녀로 인해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고 힘을 낼 수 있었고, 바티칸에서 중요한 위치에 오르려는 야망까지 품게 되었다. 교황의 사생아들은 여러가지 사정으로 인해 그닥 인간다운 삶을 살지 못했는데, 자신이 루크레치아의 힘이 되어주고 싶었던 것이다.
체사레나는 다시 열심히 수련을 시작해, 녹슬었던 검술 실력을 끌어올렸고, 몇 번의 인상적인 활약을 보여준 뒤, 교황 알렉산데르 6세를 직접 찾아가 담판을 지어서 교황군 핵심부대의 사령관으로 취임했다.
알렉산데르 교황은 체사레나가 프로이센의 조피 샤를로테였던 시절에 보여준 전설적인 활약을 익히 알고 있었기에, 기꺼이 그녀에게 중직을 맡겼다. 몇 년 전, 그녀를 자신의 정부로 삼아버린 뒤, 다소 열정을 잃어버린 눈빛을 하고 있어 아쉬워 하던 참이었는데, 다시 눈빛이 살아난 것을 보며 몹시 흡족해 했다. 기특한 마음에 한판 땡기고픈 욕구가 치솟아, 그 자리에서 간만에 체사레나의 육신에 성은을 내려주었다.
체사레나는 갑옷을 입은 채로 엎드려, 아래쪽 하의만 벗은 채 박히면서 연신 황홀한 비음을 토해냈다. 교황의 신체는 온갖 성력과 비술을 시전받아 특별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고, 그와 한번 성교를 한 여인들은 영원히 죽을 때까지 그 쾌락을 결코 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체사레나가 1년차에 겁간당한 뒤 바티칸을 떠나지 못했던 이유이기도 했다.
아무튼 체사레 폰 보르지아의 위명(威名)은 그 시점을 기준으로 사방에 널리 알려졌다. 그녀는 교황군의 중요한 전투에 빠짐없이 참전하여 전에 없던 압승을 이끌어냈고, 갈수록 빼어난 검술과 전략을 선보이며 공을 독차지했다. 그녀는 교황의 다크호스로 불리면서, 다시금 대륙에 높은 명성을 지니게 되었다.
우선 교황령을 위협하던 시칠리아 왕국의 대군이 궤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어 향후 몇 년 간 원정이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시칠리아 왕국은 서대륙의 최남단에 위치한 나라로, 바이킹 족이 오래 전에 배를 타고 지중해까지 흘러 들어와서, 이탈리아반도 남부의 황무지에 세웠다고 한다. 그만큼 흉폭한 전사들이 많았고, 역대 교황들은 자신의 성향에 따라 그들과 교린관계 혹은 적대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또한 교황령 인근의 지중해 해역에는 남대륙과 동대륙의 이슬람 국가들에서 보내온 해적선들이 창궐하여 해안가의 마을을 약탈하고 항구나 기지를 습격해 큰 피해를 입히는 일이 잦았는데, 체사레나는 전설적인 열 번의 항해를 통해 그들의 절반 가량을 잔혹하게 참살하며 일소시켰다.
한번은 베르베르, 카르타고 등 남대륙의 이슬람 토후국들이 동대륙의 패자 살라딘의 지원을 받고 연합하여 수백 척에 달하는 대형선단을 보내왔다. 정보를 입수한 체사레나는 교황령의 모든 선단을 동원하고, 신성제국에 지원을 요청했으며, 직접 교황령 북부의 소규모 도시국가, 교황령 남부의 시칠리아 왕국을 설득해 연합해군을 구성했다.
체사레나는 사전에 이 모든 준비를 빠르게 끝마치고, 적이 출항하기도 전에 요소요소 길목을 장악했으며, 그녀가 원하는 시각, 바라던 해역에서 정확히 적의 선단과 맞닥뜨렸다. 이른바 바티칸 역사상에 길이남을 레판토 해전(Battle of Lepanto)이 시작되었다. 전투의 모든 과정동안 천재의 계략은 단 하나의 오차조차 없이 착착 맞물렸고, 일대결전은 적의 선단이 철저하게 불타오르면서 화려한 압승으로 끝났다.
체사레나는 사로잡은 일만 명의 이교도들에게 그들의 경전인 코란을 찢는 방식으로 즉시개종할 것을 요구했고, 거부하는 자들을 모조리 바다 한가운데에 쳐넣어 버렸다. '물 반, 사람 반'이라는 웃지 못할 무서운 농담이 퍼졌다. 또한 그들의 노젓이로 부려지던 동족 노예들을 해방시킨 뒤, 바티칸에 데리고 와 직접 훈련시켜서 정예군으로 만들어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체자레 보르지아는 '우아한 냉혹(Elegant Harsh)'이란 별칭을 얻었으며, 교황청의 비밀결사인 성전기사단의 단장이 되었다. 교황은 그녀를 크게 총애하여 연거푸 순도높은 신성력을 부여하였다. 여성 성기사가 성전기사단의 단장이 된 것은 창단 이후 최초였으며, 바티칸의 다른 성기사단에도 그러한 전례는 없었다.
바티칸에서 처음부터 교육받고 봉사해왔던 많은 이들은 체사레나에게 질투심을 느꼈다. 성전기사단의 동료들 중 예전에 그녀의 성별을 알아낸 뒤 성노리개 취급을 하던 기사들은 여전히 그녀를 범할 때마다 우월감에 찬 쾌락을 느끼는듯 했다. 체사레나는 너무 심한 모욕을 받는 경우가 아니라면 그들의 장단을 적당히 맞춰주었다. 그녀 또한 오래 전부터 쾌락에 중독된 몸으로 인해, 남자들없이 밤을 보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때로는 타락한 고위 성직자들에게 스스로 찾아가 몸을 바치며, 밀월관계를 쌓고 은밀히 그녀만의 세력을 만들기 시작했다. 밀실에 들어가서 남장을 해제한 뒤, 바티칸에서 거의 최고로 풍만한 유방을 눈앞에 들이대어 흔들면, 상대는 그것을 거세게 움켜잡고 세차게 빨아댈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최고위 실력자들이 조금씩 그녀의 편이 되어갔다. 심지어 한 추기경은 오랫동안 동정을 지켜온 고결한 사제였으나, 그녀의 거유에 파묻혀버리면서 타락해버렸다.
그렇게 체사레나는 야망을 하나하나씩 이루어 나가며, 나름 만족스러운 생활을 영위했다. 그러나 불행은 언제나 그렇듯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그녀의 소중한 여동생, 루크레치아의 미모가 나이가 들수록 만개해갔다. 알렉산데르 교황은 애초부터 루크레치아를 자신의 딸이 아닌 정략적인 도구로 생각하고 있었다. 비록 족보를 조작해 형제의 딸로 만들었다고 해도, 그녀가 너무 겉으로 드러나면 위험했기 때문에, 은밀한 방식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경악스럽게도 알렉산데르 자신이 직접 루크레치아의 순결을 가져갔다. 교황의 극악한 부도덕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일이었다. 알렉산데르는 일단 질리기 전까지는 자신이 딸을 가지고 놀면서, 뒷일을 고민하고 있었다. 그녀를 유력자들에게 제공하여 자신의 세력을 확장할지, 혹은 적대가문에 시집보내어 스파이로 활용할지 말이다.
항상 밝고 성스러웠던 루크레치아의 얼굴에 갈수록 그늘이 깃들기 시작했다. 체사레나는 이를 의아하게 여기다, 어느 날 그녀를 미행했다. 그리고 루크레치아의 남자형제들, 즉 교황의 다른 사생아들이 그녀를 범하는 배덕적인 모습을 목격했다.
체사레나는 피가 거꾸로 솟아오르는 느낌을 받으며 그대로 현장에 난입해 남성들을 반 죽여놓고 루크레치아를 구출했다. 울먹이는 그녀로부터 모든 사정을 들은 뒤, 처음으로 알렉산데르 6세에게 직접 찾아가 이 사안을 항의하였다.
하지만 알렉산데르 교황은 뭔 쌩뚱맞은 소리를 하냐는 식으로 대응하고 그녀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체사레나가 분노를 억누르고 한번 더 강하게 탄원하자, 알렉산데르는 불같이 화를 내면서 체사레나를 크게 혼내고 신성력으로 그녀를 속박시긴 채 간만에 은총을 베풀었다. 교황과 성교를 하는 동안, 체사레나는 성스러운 쾌락에 빠져 허우적대며 자신의 목적을 잊고 그의 육체에 매달렸으며, 그날 저녁에야 다시 이성이 되돌아 왔다.
이때 이미 루크레치아는 어딘가로 연금되어 버린 뒤였다. 자신이 쌓아놓은 인맥들을 활용해 그녀를 찾으려 했으나 교황이 무슨 엄포를 내렸는지, 태반이 난색을 표했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일부 소 수는 그녀를 성심성의껏 지원해주려 한 점이었다. 즉 자신의 진정한 세력을 확인하게 된 것이었는데, 이걸 가지고 뭔가 해보기에는 턱도 없이 부족해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참고로 알렉산데르 교황은 체사레나가 자신의 망나니 사생아들을 반 병신으로 만들어 놓은 죄에 대해서는 별다른 처벌을 내리지 않았다. 쓸모없는 아들녀석들보다는 체사레나가 여러모로 훨씬 유용하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어찌 됐든 체사레나는 이제 바티칸과 교황에 완전히 정나미가 떨어졌고, 그저 루크레치아를 구하고 싶을 뿐이었다. 며칠 후, 다시 루크레치아를 볼 수 있었지만 얕볼 수 없는 감시역들이 따라붙어 있었다. 바티칸의 출입은 엄격히 통제되고 있었기에, 루크레치아를 데리고 이곳을 함께 빠져나가는 일은 불가능했다.
체사레나는 그렇게 다시 한번 절망에 빠진 채, 기계처럼 임무를 받고 수행하던 중이었던 것이다. 처음의 야망을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든 바티칸에 세력을 구축하면서 노력하고 있었으나, 현실의 벽이 너무 높았다.
이번에 프로방스 동부에서 부르고뉴와 신성제국 사절단을 기습한 것도 알렉산데르 6세의 밀명에 따른 성전기사단 활동의 일부였는데, 평소였으면 치밀한 전략을 통해 적을 빠짐없이 분석하고 몰살시켰을테지만 반쯤 자포자기한 체사레나는 무의식적으로 위험을 추구했던 것이다.
벨라는 그녀 못지 않게 기구한 조피, 아니 체사레나의 인생에 쉽게 감정이입되었다. 체사레나가 요구할 약속이야 뻔한 것이었다.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정보를 건네주고, 그대에게 의탁할 테니 부디 루크레치아, 그 아이를 최선을 다해 꼭 구해주길 바란다."
벨라는 살짝 맺힌 눈물을 털어낸 뒤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다시 백색 성검을 들어올렸다.
"신성제국에 가서 최선을 다해 그녀를 구출하기 위해 노력할 것을 맹세합니다. 진정한 신의 뜻은 바로 인간이 자기자신을 탐구하고 믿으면서 끝내 살아나가는 것에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救援)에 이르는 길입니다."
체사레나는 벨라에게 손을 내밀었고, 벨라도 그녀의 손을 마주 잡았다. 늦겨울의 새벽 들판에 서서히 동이 터올 무렵, 마침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거대한 만남이 이루어졌다.
이후 이사벨라는 막사에서 오랫동안 기다리던 동료들을 불러 체사레나를 '체사'라는 가명으로 소개시켰다. 그녀의 이중적인 정체는 많은 사람들이 알아서 좋을 것이 없었기에, 최대한 숨기고 믿을만한 이들에게만 일부 알려주었다. 테레지아나 프리드리히의 경우, 검후가 바티칸의 수수께끼 사령관 '체자레 폰 보르지아'라는 말을 듣고 기함할 듯 놀라고, 과연 대단하다며 탄성을 토해냈다. '우아한 냉혹'이 벌인 일화들은 벨라 역시 용병생활을 하며 수백번이나 들었을만큼 전대륙적으로 유명했다.
체사레나의 경우, 약 일년 전부터 교황군의 총사령관직을 사임한 뒤, 알렉산데르 6세의 최고 심복급인 성전기사단장으로서 극비급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바티칸에 머물기보다는 일년 내내 대륙을 떠돌아다니면서, 수령되는 임무들을 자신의 편의에 따라 수행하는 중이었다.
교황이 직접 건 신성저주로 인해, 6개월에 한번씩은 반드시 바티칸에 돌아가 교황의 성은을 받아야 해서 함부로 이탈할 수는 없었다. 다만 현재 임무의 대부분을 해결한 상황이었고, 바티칸으로 되돌아 가기 전 남은 4개월 동안은 어느 정도 자유롭게 이사벨라 일행을 따라다닐 수 있었다. 얼마 남지 않은 임무들 또한 신성제국과 그 동부지역에 집중되어 있어, 아다리가 잘 맞아떨어졌다.
비록 이번 임무는 실패했지만 큰 추궁은 받지 않을 것이라 했다. 그동안 체사레나가 세운 공들이 워낙 거대했으며, 이번에는 그녀를 시기한 자들이 제대로 지원해 주지 않은 탓도 컸기 때문이다. 오히려 체사레나를 은근슬쩍 방해하던 중간책들이 된통 쓸려 나갈 확률이 높았다.
일행들은 몇 시간 전에 그들을 기습했던 적이 동료가 된다는데도 거부감을 표시하기 보다는 약간의 의아함과 무한한 영광스러움으로 그녀를 맞이했다. 처음에는 다소 어색하거나 어려운 면이 있겠지만 벨라의 동료들은 다들 진솔된 이들이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잘 융합될 것이다.
그렇게 아침이 밝아왔고, 사절단 일행은 두어 시간 정도 잠을 보충하기 위해 다시 각자의 천막으로 들어갔다.
벨라는 이미 진작에 잠이 다 깨버린 상태였다. 자신은 마부나 수행원도 아니니, 더 잔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는 것 같아 야영장 주변에서 아침 산책을 시작했다. 그러나 상쾌한 기분이 들기 보다는 갈수록 전신이 찌푸둥하고 밍숭맹숭해졌다. 그녀는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며칠 째 성욕을 제대로 풀지 못해서였다. 남들이 섹스하는 것만 보고, 섹스했다는 얘기만 듣다보니, 몸에 흥분감이 계속 쌓인 것이다.
마침 포로들을 잡아 놓은 마법감옥이 눈에 띄었다. 포로로 잡힌 용병들 수십 명은 마법감옥에 갇힌 뒤 벌벌 떨면서 잠도 못 이루고 있었는데, 부상이 심한 몇 명은 벌써 죽어나간듯 보였다. 간단한 치료만 이루어져도 불구를 면할 수 있는 이들도 보였으나, 대가 관념이 확실한 벨라는 그닥 구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동정심 반, 냉철함 반을 담은 눈초리로 그들을 지나치려는데 어디서 본듯한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벨라는 잠시 이를 곰곰히 뜯어보다가 기억이 난듯 손바닥을 마주쳤다.
"아! 맞다, 보리스, 그리고 윌리엄이란 이름이었지. 쟤네들 같이 다니고 있었나?"
바로 3, 4년 전쯤, 그녀가 브뤼헤 자유시를 떠나 부르고뉴의 버건디로 향할 때 탔던 데카당스 호의 삼등선실에서 만났던 인연들이었다. 보리스는 그때 50대 초반이었으니 아마 지금은 50대 중반이 되었을 테고, 윌리엄은 그때 10대 중반의 풋내기 마법사였으니, 지금은 10대 후반이나 스무살 가량 되었을 것 같았다.
보리스는 고작 D급, 윌리엄은 E급 용병에 불과했었고 벨라와 같이 전장에서 싸워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흘낏 보는 것으로도 그들을 기억해낸 것은, 그들과 몹시 인상적인 사건들을 경험했기 때문이었다.
보리스는 스트라스부르의 '발정난 암소' 술집 화장실에서 반쯤 필름이 나간 벨라를 강간하듯 박아댔는데, 이제껏 벨라가 해온 무수한 경험들 중에서도 기억에 남을만큼 짜릿했던 정사였다. 무엇보다도 그는 에우로파 대륙에서 손에 꼽힐만한 대물이었다. 그를 만난 이후부터, 벨라가 대물들을 평가할 때 그의 것을 비교기준으로 삼을 정도였다.
윌리엄 또한 보리스만큼은 아니지만 그 나이에 이미 성인의 평균적인 크기를 넘어서는 육봉과, 고향인 스코틀랜드의 사창가에서 단련한 화려한 스킬을 지니고 있었다. 지금에 와서는 어떻게 성장했을지 몹시 기대가 되었다. 그러고 보니 그는 유달리 애널에 집착했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그닥 후장 플레이를 선호하지 않았던 벨라에게 그 기쁨을 알려줬던 소년이다. 애널의 순결이야 언제 뚫렸는지 이제 기억도 나지 않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벨라의 애널 순결을 가져간 것은 윌리엄이었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잠시 마법감옥 앞에서 갈등하던 이사벨라는 테레지아를 불러 보리스와 윌리엄을 따로 빼냈다. 벨라는 둘을 으슥한 곳으로 이끌고 갔다. 그들은 그 자리에서 바로 처형되거나 노예로 팔리는 건 아닌지 두려움에 떨면서 따라왔다.
그 순간까지 벨라는 어떠한 식으로 이들을 활용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포로로 붙잡아 놓은 적들에게 다리를 벌려줄 생각을 하니, 수치심과 함께 기묘한 흥분감이 느껴진다.
'아…. 너무 참았나봐. 미칠 것 같이 꼴리는데.'
벨라는 적당히 으슥한 수풀 근처에 이르러 걸음을 멈춘 뒤 그들을 바라보았다. 보리스는 그저 겁쟁이처럼 공포에 질려 떨고 있었고, 윌리엄도 대략 비슷한 표정이었지만 뭔가 기억나는 것이 있는듯 애매한 시선을 보내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다.
"어이, 버러지 같은 자식들아. 혹시 데카당스 호에서 가장 크게 잃었던 도박판을 기억해?"
보리스는 갑작스러운 질문에 머리가 굳은듯 더듬거리다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대답하며 목숨을 구걸한다. 윌리엄과 쌍둥이 형제 릭과 딕을 만나서 동료가 된 것도 그 배에서였기 때문에 당연히 기억났다. 비록 릭과 딕은 어젯밤의 기습에서 눈먼 칼에 맞아 저 세상으로 가버렸지만.
"예? 아? 예. 그, 그런뎁쇼. 부, 부디 소인의 목숨만 살려 주십시오. 이상한 놈들에게 속아서 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루테티아의 집에 저만 바라보고 사는 부인과 토끼같은 딸내미가…"
"뭐야? 당신 원래 부인과 사별한 지 한참된 걸로 알고 있는데, 3년 사이에 재혼해서 딸까지 낳았다고? 그 나이에?"
벨라의 반문에 보리스는 입을 따악 벌린 채 두 눈을 끔뻑거렸다. 자신의 사정을 정확히 알고 있는 여자였다. 얼굴 형태를 자세히 뜯어보니 무언가 기억이 날 듯 말 듯하다. 어쩌면 살아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 세상에서 자신에게 호감을 품은 여자는 많아도, 자신을 싫어하는 여자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