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대로 똥덩어리를 크게 씹어버린 듯한 표정이었다.
"나에게 비천한 평민 출신 마법사를 제자로 받아들이라고? 그것도 내년이면 20대가 되는데다가, 용병으로 굴러먹다 감히 사절단에 공격을 가했던 놈을? 명령이라면 어쩔 수 없이 하겠지만, 절대로 내키는 일은 아니다."
프리드리히라면 바로 '예'하고 했겠지만, 확실히 테레지아는 특유의 오만하고 자존심 높은 성격 탓에, 윌리엄이 눈앞에 보이기만 해도 끔찍하게 여겨 내쫓았다. 더군다나 그녀는 황도에 도착한다면 바로 황태녀로 책봉받아 후계자 수업을 받고 테러범을 색출해야 하는 등 많은 과제를 떠안고 있었다. 벨라 본인이 테레지아의 입장이었다고 해도 싫을 게 분명했다.
"제자로 삼지 않아도 좋아. 책임을 지고 노력하라는 말도 아니야. 애가 고작 7년 전에 마법에 입문한데다가, 아무런 스승도 없이 수련법도 쌩판 모른 채 독학하는 꼴이 안타깝게 여겨져서. 혼자서 3단계까지 익힌 걸 보면 재능은 괜찮은 것 같은데, 마탑에서도 쫓겨나듯 나와서 전장을 떠돌며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겼다더라고."
"흐음. 천출이 19세에 독학으로 3단계까지 익혔다고? 재능이 아예 없는 건 아니군. 그 정도면 자기 혼자서도 잘 살 테니 걱정할 필요 없다."
테레지아는 벨라의 말을 들으며, 윌리엄이란 녀석이 예상외로 훌륭한 재능을 가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그래도 아닌 것은 아니었다. 자신은 언젠가 여황제가 될 몸이었고, 적어도 마흔은 넘은 뒤에야 재능이 뛰어난 황족이나 왕족 출신의 소녀 중 한명을 골라 제자로 삼으려고 생각 중이었다. 윌리엄을 제자로 삼는 건 둘째치고, 약간의 가르침을 베푸는 것조차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감히 꿈꿀 수 없는 곳을 넘보는 녀석에게 살의까지 느끼고 있었다. 벨라의 시종이 아니었다면, 지금 당장 잿덩이로 만들어 죽여버렸을 것이다. 마도황녀는 그 정도로 잔혹하고 오만한 성격이었다.
그런 심정이 고스란히 퀸에게로 전달된다.
"아이고! 걔가 부탁한 것도 아니고, 그냥 내가 생각한 거라니까. 엄한 애한테 화풀이하지 말고. 그래도 나를 위해 봉사하는 시종인데, 제대로 된 마법 한두 개 정도는 알려주고 싶어서 그랬지. 너도 알듯이 '미천한 평민'이 이제껏 배워온 마법이 그닥 쓸모나 있겠어?
"미천한 녀석에게는 그 정도 수준이 딱 어울린다."
"으으….. 네 말은 충분히 알겠는데. 그냥 걔를 위한 일이 아니라, 나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해 줘라. 솔직히 명령 하나면 끝나는 일인데, 그래도 너의 권위를 존중해서 이렇게 설득을 하잖니. 애새끼가 그렇게 혼자서 계속 수련하다가, 당장 내일이라도 내 옆방에서 주화입마로 피를 토하고 죽어버리면 어떡할거야?"
"……….."
"어휴, 나도 이렇게까지 길게 말할 줄은 몰랐다만. 정 싫으면 내가 비엔나에 가서 아무 마법사나 고용해서 할게. 나도 너의 자존심을 해치거나 바쁜 일정을 방해하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까, 이제는 꼭 가르쳐 달라는 것도 아니야. 다만 비엔나에 도착하기 전까지 여유가 있으니, 대화라도 한번만 해주면 안될까? 그냥 맘에 안들면 서둘러 대화를 끝내서 아무 것도 안 가르쳐줘도 괜찮고, 가르치다가 중간에 때려쳐도 돼. 솔직히 아주 소중한 인연이라고 하기는 어려우니까, 나로서도 이게 최선이네. 기회를 잡고 못 잡고는 애가 알아서 하겠지.
벨라도 이것이 황녀에게까지 신경써서 부탁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다만 이렇게 말이 길어진 것은 은근히 쌓여온 떡정 때문이 아닐까 싶다. 벨라는 애써 부인하겠지만, 일주일 넘게 매일같이 살을 맞대는데 어찌 측은한 마음이 들지 않겠는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대화 정도는 한번 해보지. 하지만 천지가 뒤집히지 않는한 가르침을 내리는 일은 없을거야. 내가 미천한 평민과 말을 섞어야 한다니…. 하아, 대화를 마친 뒤에 팔 한쪽만 잘라내도 괜찮을까?"
"………."
그렇게 어렵사리 두 사람의 만남이 성사되었다.
"지금 본 대공은 몹시 불쾌한 상황이나, 보르도 자작이 간절히 부탁한고로, 성실히 대화를 시작하겠다. 대답이나 질문을 해야 할 경우, 최대한 신속히 내용을 고하도록. 혹시 대화 중 무례를 저지른다면 즉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윌리엄은 상대가 상대인만큼 무척 떨리는 마음이었으나, 그동안 마탑과 전장을 떠돌았던 세월을 떠올리며 다시 의연한 표정으로 되돌아왔다. 어차피 자신은 이 기회를 잡지 못하면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다고 끊임없이 자기암시했다. 벨라는 혹시 윌리엄이 잘못될까 걱정이 됐는지 그냥 약속을 취소하고 비엔나에서 다른 마법사를 만나는 게 어떻겠냐고 물어보았지만, 소년은 결연한 표정으로 만남을 선택했다.
윌리엄 자신도 이 선택이 이성적으로는 과욕을 부린 것으로 느껴졌지만, 본능이 기이하게 황녀를 만나야 한다고 종용하고 있었다. 그때마다 자신을 빈민가에서 데려온 마법사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가 마지막에 남겼던 말도.
'너는 훌륭한 재능을 지녔으나, 나와는 제자의 인연이 아니다.'
무언가 운명같았던 말을 떠올렸다. 테레지아 황녀는 그에게 마법에 관한 여러가지 질문을 던졌고, 때로는 마법의 시전을 요청했다. 그때마다 윌리엄은 나름의 논리에 따라 정연하게 대답했고, 최선을 다해 마법을 펼쳐냈다. 그렇게 이십분 정도가 흐르자, 황녀는 윌리엄의 마법 성취도와 문제점을 파악했다.
'무서운 재능이다. 만학과 독학임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 경지면 노력이나 행운도 뛰어나다. 스코틀랜드 같은 깡촌 왕국의 빈민가 고아 태생이라고는 믿기 어렵구나. 객관적인 조건만 본다면, 현자의 탑에서 만났던 사제나 사형들에 비해 뒤떨어 지지 않는다. 하지만, 역시 내키지는 않는군.'
테레지아는 벨라의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님을 알았다. 그럼에도 자신이 그를 맡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황족이나 왕족들 중에서 찾아 최상의 재능을 지닌 소녀를 선택해도 된다. 운과 시기가 맞아 떨어진다면, 그 소녀의 재능은 윌리엄과 비슷한 정도일 것이다.
다만 벨라의 체면을 봐서, 비엔나에 도착하기 전까지 한두 번 불러 간단한 가르침 정도는 내려줄 생각이었다. 부모가 기억나지 않는 고아라고 하니, 혹시 재능으로 보아 쌩 평민 핏줄이 아닐 가능성도 있었고, 자신의 앞에서 실수하지 않고 예의를 잘 지켰으며, 자기 분수도 잘 아는듯 했다.
황녀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흐음. 나쁘지는 않다만. 금일의 대화는 이 정도면 충분한 것 같군. 어느 마탑에서 수학했는가?"
스승이 아닌 자가 마법적 가르침을 내릴 때, 상대의 마탑을 알고 있다면 보다 정확한 가르침을 내릴 수 있다. 다만 대화를 마무리할 때가 돼서야 질문하는 건, 그녀가 알만한 마탑이 아닐 것 같아서다. 그가 배운 마법의 형태로 보아, 대륙 서부의 중소규모 백마탑일 테다. 거대 마탑의 제자가 이런 식으로 나돌아 다닐리도 없었고, 그런 곳에서는 아예 평민을 받아주지조차 않는다. 분명 처음 들어보는 곳일테니, 쓸데없는 질문이었지만, 마법사 간의 예의상 물어봐 주었다.
"황금나무마탑 출신이옵니다."
그의 대답을 끝으로 대화를 정리하려던 황녀는 살짝 표정을 찡그리며 반문했다.
"황금나무마탑이라면 로테르담에 있는 마탑 말인가?"
윌리엄은 테레지아 황녀가 자신이 있었던 아주 작은 마탑의 이름을 아는 게 신기하게 여겨졌지만, 최대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채 공손히 대답했다.
"예. 로트링겐연합의 로테르담 자유시에 위치해 있사옵니다."
황금나무마탑은 대륙의 구석에 위치한 군소 마탑들 중 하나였다. 황녀가 모르는 게 정상이었으나, 그녀는 그 마탑에 대해 적어도 보통 마법사들 이상으로 자세히 알고 있었다.
"그럼 스승은…….. 아, 스승이 없다고 했었군."
"예. 그곳 출신의 한 마법사님이 소인의 고향을 방문하셨다가 소인을 발견하신 뒤, 재능은 뛰어나나 자신의 제자가 될 운명은 아니시라며 마탑에 맡기고 가셨습니다. 방랑벽이 있으셨던 것 같습니다."
"압존법에 주의하도록 하라."
"큭!"
갑작스럽게 발생한 푸른색 광선에 의해 윌리엄의 왼쪽 넷째 손가락의 한마디가 날아가 버렸다. 소년은 비명을 간신히 참아내고 공손히 고개를 조아리며 사죄한다.
"참을성이 좋군. 자작의 시종이 아니었다면, 팔을 잘라냈을 것이다."
"황공하옵니다. 마마."
"그 정도 예절도 배우지 못했는가? 어여삐 여겨 가르침을 주려 했건만, 과연 격이 부족한 무뢰한이도다."
테레지아는 흥미가 완전히 떨어진듯 일어나려 했다. 윌리엄은 손가락의 통증을 참으며, 즉시 엎드린 채 백배 사죄하며 부르짖었다. 이럴 때 변명을 늘어놓는 것은 더욱 무례한 행동이었으나, 자신의 과욕으로 인해 이사벨라 또한 어떻게 되는 게 아닌지 염려한 탓에 어떻게든 황녀의 분노를 풀기 위해 애썼다.
"미천한 소인이 대죄를 지었사옵니다, 마마. 망극한 일이오나, 부디 무례를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옵소서. 그저 소인을 수렁에서 구해준 이고 또한 마탑의 전대탑주라 들었던지라 공경하는 마음에서………."
윌리엄은 자신이 황족의 앞에서 감히 변명을 늘어놓았다는 것을 깨닫고 얼굴이 새하얘졌다. 일어나서 뒤로 돌아 나가려던 테레지아가 걸음을 멈춰섰다. 윌리엄이 곧이어 떨어질 불호령과 공포스러운 마법을 예상하며 바짝 엎드려 있는데, 황녀가 천천히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라."
"마, 망극하옵니다. 마마."
테레지아는 윌리엄의 더듬거림에 눈쌀을 살짝 찌푸렸지만, 웬일인지 관대하게 넘어가며 한 가지를 질문했다.
"방금 무엇이라 했느냐?"
"소인이 죽을 죄를 지었………."
"아니, 그 전에. 그대를 데려온 마법사가 황금나무 마탑의 전대 탑주라고?"
"그, 그렇사옵니다. 마마."
윌리엄은 황녀의 뜬금없는 말에 한번 더 말을 더듬어 버리고, 눈을 질끈 감았지만 어떠한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그의 이름은 무엇이었는가?"
아무래도 황녀 전하는 윌리엄을 데려온 마법사에 관심이 있는 모양이었다.
"황공하오나, 그 마법사는 소인에게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고, 마탑에서도 이를 들어보지 못했나이다."
대화 중 처음으로 황녀의 표정에 이상한 느낌이 서리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그는 남자였는가, 여자였는가? 그의 외양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해 보아라."
"예, 마마. 그는 남……"
대답하던 윌리엄은 무언가 이상한 점이 떠오르는지 말을 멈추며 잠시 고민했고, 곧바로 자신이 또다른 죽을 죄를 지었다는 걸 알고 머리를 조아리려 했다. 하지만 황녀의 마법이 먼저였다. 선명히 느낄 수 있는 무형의 기운이 그에게 쏟아져 들어왔고, '이 자리에서 죽는구나' 생각하는데, 아무런 충격도 발생하지 않았다. 오히려 땅에 엎드리려 하던 그의 허리가 꼿꼿이 펴지며 신체가 직립한다.
"괜찮으니 계속 고하거라. 더 이상의 지연은 허하지 않겠노라."
"황공하옵니다, 마마. 소인은 지금껏 그가 남자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만, 마마의 옥음을 듣고 오래 전의 기억을 자세히 떠올려 보니 감히 확신할 수 없겠나이다. 목소리는 차라리 중성에 가까웠습니다."
윌리엄은 긴장감에 침을 꼴깍 삼킨 뒤, 다시 말을 이었다.
"또한 그는 소인의 앞에서 두꺼운 황금빛 로브를 단 한번도 벗지 않았기에 얼굴 또한 알지 못합니다. 체형도 자세히 기억나는 바는 없지만, 키가 매우 컸다는 것 하나는 또렷이 기억하옵니다. 그를 따라다니는 동안 그보다 큰 사람을 한번도 보지 못했던 걸로 보아 2m는 훨씬 넘었을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이쯤에서 황녀의 눈에는 선명한 이채가 떠올라 있었다.
마법사들 중에서는 음침한 성격이 많아 로브를 꽁꽁 싸매고 다니는 자들이 흔했다. 하지만 스코틀랜드부터 로테르담까지 수십일을 데리고 다닌 종자에게까지 얼굴을 보여주지 않은 건 확실히 보기 드문 경우에 속했다.
"호오……. 혹 그가 너와 식사를 같이한 적이 있었는가? 그의 지팡이는 어떤 색깔이었느냐? 천천히 고민하고 대답해도 괜찮노라."
차분히 기억을 떠올리던 윌리엄이 이내 자신없다는 표정으로 대답하기 시작했다.
"우선 떠오르는 기억부터 말씀드리겠나이다. 그의 지팡이가 생각나지 않는 걸로 보아, 소인이 불민하게도 기억을 잊어버렸거나 혹은, 그럴리는 없겠사오나, 만에 하나 지팡이 없이 다녔을 가능성도 있사옵니다."
윌리엄이 알기로 세상에 지팡이 없는 마법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고위 마법사가 지팡이 없이 마법을 시전하는 경우는 있었지만, 고위든 중저위든 평소 마나의 운용과 발현을 위해서라면 지팡이를 필수품으로 가지고 다녀야 했다.
"그와 식사를 같이 한 적이 몇 번 있었사옵니다. 하지만 그는 제가 먹는 음식을 거의 먹지 않았기에, 많은 양의 음식을 혼자서 다 먹을 수 있어서 좋아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 또한 무엇을 먹었던 것 같은데 잘 기억이 나지 않사옵니다. 그는 특이한 물병 하나를 지니고 있었는데, 물을 마시는 모습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물, 물병이라고 했는가?""
윌리엄은 테레지아 황녀가 말을 더듬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그녀가 왜 그를 마탑으로 인도하고 버려둔 마법사에 관심을 가지는지 모르겠다. 문득 그 마법사가 꽤 중요한 인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 시절의 윌리엄은 그를 따라 다니면서 정말 세상에서 가장 비범하고 위대한 인물을 만나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지금까지는 유년기의 환상이라고 생각해왔었지만… 황녀가 아는듯한 눈치를 보이니 그때의 기억이 사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예, 마마. 그가 꺼내드는 걸 딱 한번 본적이 있사온대, 눈이 부실 정도로 주변이 환하게 빛났사옵니다. 다른 많은 것은 잊어버렸으나, 아직도 그 빛이 쏘아지던 장면은 눈만 감으면 환하게 떠올릴 수 있습니다. 생각해보니 기이한 일이옵니다."
테레지아 황녀는 그의 말을 듣고 무언가를 작게 중얼거렸다.
"…….렌딜의 별빛………....현자의…….."
윌리엄은 황녀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반문하였으나, 그녀는 손을 휘휘 내저었다.
"아니다. 아무래도 그대가 만났던 이는 본 황녀의 스승님과 깊은 연관이 있는 분 같군."
테레지아 황녀의 스승이라면 대륙 유일의 마도사인 니콜라스 플라멜 경을 말하는 것일테다. 윌리엄이 경악에 찬 눈초리로 그녀를 올려다 보는데, 이내 황녀가 선언했다.
"그대를 본 황녀의 첫 번째 제자로 삼겠다."
황녀의 갑작스러운 선언에 윌리엄이 눈을 번쩍 뜨고 입을 벌리며 굳어 있는데, 황녀의 지팡이로부터 시작된 하얀색 빛무리가 그의 손가락으로 모여든다.
"포션 리바이벌(Portion Revival)."
부분소생 마법이 발현됨에 따라, 잘려져 있던 넷째 손가락 마디가 감쪽같이 정상으로 되돌아 왔다. 상처는 맺혀있던 핏방울까지 모조리 사라져 버렸고, 단 한줌의 통증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윌리엄은 그가 알지 못하는 고단계의 마법이 시전되었음을 깨달았다.
"그대는 결코 압존법을 틀리지 않았다. 미처 알아듣지 못하고 손가락을 자른 것은 본 황녀가 실수한 일이군."
테레지아 황녀가 스스로 잘못을 인정한 것은 극히 희귀한 일이었다. 일단 그녀는 공식적으로는 단 한번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한 적이 없었으니까. 심지어 검후를 앞세운 프로이센군에게 참패해 무수한 병력을 잃고 영토를 빼앗겼을 때조차, 아무에게도 사과하지 않았었다.
"황공하옵니다, 마마. 하찮은 소인을 제자로 받아들여 주시니, 하해와 같은 성은이 망극하기 그지 없사옵니다."
"되었다. 보르도 자작이 벌이는 일은 참으로 신묘하기 그지없군. 그대가 존귀한 분을 만나 황금나무마탑으로 인도를 받고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마치 하느님의 오묘한 뜻이 길을 비추어 주시는 것과 같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