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화 (37/49)

 테레지아 황녀는 진심으로 경탄하고 있었다.

 "내일 새벽에 정식으로 사제의 예를 올릴 테니, 그때부터 스승님으로 호칭하면 된다. 그러나 반드시 명심하거라. 본 황녀는 결코 여항의 마법사들처럼 자애롭거나 친절한 성격이 아니다. 고귀한 의무로 인해 그대에겐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없나니. 상상할 수 없는 광대한 고련(苦練)을 내릴 것이며, 성취가 마음에 차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마나홀을 파괴하고 내쫓을 것이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테레지아는 일어서 자리를 떠났고, 윌리엄은 상상치도 못했던 행운에 그저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진 상태로 엎드려 예를 올리고 있었다.

 며칠 후, 벨라 일행은 무사히 신성제국의 황도 비엔나(Vienna)에 도착했다. 비엔나는 현재 에우로파대륙에서 가장 거대하고 화려한 도시로, 다뉴브 강 중류에 위치해 있었다. 제국이 누리고 있는 영광을 보여주듯 어마어마한 크기의 성벽과 구획별로 질서정연하게 들어찬 고층 건물들, 깨끗하고 넓게 닦인 크리스탈 보도, 끊임없이 지나가는 고귀한 장식의 마차들, 활기에 찬 거리를 자신감 있게 활주하는 시민들의 모습이 눈앞에 드러났다.

 도시의 중심부에 있는 궁전은 타국의 왕궁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빼어난 미관과 크기를 지니고 있었다. 황금이나 다이아몬드 같이 오직 보석으로만 지어진 전각들도 여러 채 있을 정도였다. 벨라 일행은 테레지아 황녀의 손님으로 취급되어 궁전의 한곳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시종들의 무리에 섞여 평범한 복색으로 입궁했기 때문에 황제나 대귀족긓이 크게 주목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다만 궁정의 일부 시종들은 그녀들이 '봄의 궁전'이라 불리는 미라벨 궁의 화려한 객실에 오랫동안 머무르는 것을 알았으므로, 귀빈임을 예상하고 정체를 궁금해 했다.

 테레지아 황녀는 입궁 즉시 부황 카를 6세의 조칙에 의해 황태녀(Princesa Imperial)에 봉해졌고, 후계자 수업을 받게 되었다. 황제는 전신에 중상을 입은 뒤 '가을궁전' 벨베데레 궁에 머무르며 요양 중이었다. 고위급 마법사와 치료사들이 수십 명이나 매달렸음에도 불구하고 갈수록 상태가 악화되고 있는 탓에 적당한 시점에서 황태녀에게 양위할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대륙대전이 발발했고, 테러분자들의 위협이 지속되는 등 내우외환에 처한 상황이 걱정되었으나, 장녀의 뛰어난 자질이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프리드리히는 부친이 지니고 있던 잘츠부르크 대공의 작위를 세습하면서, 제국의 또다른 실력자로 떠올랐다. 그러나 많은 귀족들이 예상한 것과 달리, 테레지아와 대립전선을 구축하지 않고 오히려 그녀에게 전폭적으로 협력하는 모습을 보였따. 또한 그는 평소에도 예술과 문화의 후원자로 이름이 높아, 에스테르하지 후작가에는 요제프 하이든, 볼프강 모차르트, 루트비히 베토벤와 같은 유명한 음악가들과 레오나르도 다빈치, 라파엘로 산치오와 같은 명성높은 미술가들이 드나들었다.

 프리드리히는 황궁을 드나들면서도 정치보다는 문화적인 사업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황제의 안심을 이끌어냈다. 황제가 수 개월 내로 황가의 결속을 위해 두 황족을 결혼시킬 거란 말도 떠돌았다. 그러나 테레지아 황태녀가 프리드리히에게 은밀히 제국의 중앙정보국(Central Intelligence Agency, CIA)을 맡긴 것은 벨라를 제외한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다.

 윌리엄은 현재 이사벨라의 일행들 중 가장 바쁘게 살아가고 있었는데, 벨라가 보기에 '저렇게 고생해도 죽지 않는구나' 하고 생각할 정도로 고된 마법적 수련을 받고 있었다. 테레지아 황태녀는 바쁜 일상 와중에도 틈틈이 자신이 머무르는 '여름궁전' 쉔부른 궁으로 윌리엄을 불러 진도를 확인하고 적절한 가르침을 베풀었다.

 이제껏 제대로 된 스승을 만나지 못했던 윌리엄은 황태녀의 가르침을 솜이 물을 빨아들이듯 흡수하면서 불과 한달 만에 3단계 마법을 마스터한 것은 물론 4단계 마법 일부까지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신체적으로는 힘들었지만, 정신적으로는 너무나 즐거워 했기에 버틸 수 있었다. 하루 중에 마법에 한눈을 파는 경우라고는 오직 보답으로 이사벨라의 애널을 채워주는 시간 밖에 없었다.

 황태녀도 윌리엄을 내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의 노력과 성취에 만족하고 있는듯 보였다. 초창기의 엄격하고 공포스러웠던 수업 분위기는 일수가 쌓이면서 조금씩 완화되었고, 윌리엄이 실수를 했다고 해서 예전처럼 테레지아가 그를 윽박지르거나 죽이려 드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보리스는 이미 용병으로서는 은퇴를 바라보고 있는 50대의 나이였기 때문에 더 이상 실력이 발전할 여지가 없었다. 그는 소드유저 상급으로, 평범한 C급 용병 정도의 실력을 지니고 있어 일행 중에서는 가장 약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수십년 동안 대륙을 떠돌며 얻은 경험과 실전감, 잡지식이 있었고, 말솜씨 또한 얼마나 뛰어난지 좌중의 분위기를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었다. 그런 측면에서는 답답한 사람들로만 가득 차 있던 벨라의 일행은 보다 활기찬 분위기와 끈끈한 유대감을 지니게 되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다른 일행들도 보리스와 윌리엄을 차츰 인정하는 추세였다.

 그 외 이사벨라와 빅토리아, 랑발손, 누레딘, 오셀로, 체사레나 등은 황태녀의 배려에 의해 황궁의 황족 전용 연무장을 이용하며 각자의 기량을 갈고 닦고 있었다. 본디 황궁에 며칠 머무르다가, 의뢰를 받아 서부 국경지대에서 벌어지는 대륙대전에 참전할 생각이었으나, 그보다 더욱 중대하고 은밀한 매력을 지닌 전장을 준비하는 중이었다.

 비엔나를 피로 물들인 마법테러의 배후는 아무런 증거를 남기지 않은 탓에 수사에 난항을 겪고 있었다. 오직 드러난 흔적은 시종으로 위장하고 있었던 세르비아계 청년 뿐이었다. 그는 테러 직후, 놀라서 달려오는 근위병들의 앞에서, 제국의 속번(屬藩)이자 소수민족 집합체인 세르비아 공국의 완전한 독립을 요구한 뒤 즉시 자폭 스크롤로 자결하였다고 한다.

 이사벨라와 프리드리히는 면밀한 조사 끝에 이 테러에 연관된 다양한 세력들을 추론해 냈다. 우선 외세로는 분명히 동대륙의 세력이 연관되어 있었다. 이는 사절단 일행을 습격했다가 자폭한 '고독한 구도자' 이븐 할둔(Ibn Khaldun)과 이베리아반도의 무어인 왕국들이 보이는 수상한 움직임을 근거로 한다.

 이븐 할둔이 마지막으로 내뱉은 '칼리프'란 말은 한때 동대륙을 거의 통일했던 대제국의 정통 지배자에게 붙는 칭호였는데, 제국이 멸망하고 대륙이 사분오열되면서 사라진 호칭이었다. 문맥 상 시리아의 술탄 살라딘(Saladin)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 짐작되었다. 최근 살라딘(Saladin)은 동대륙의 절반 이상을 정복하면서 스스로 칼리프를 칭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살라딘이 이븐 할둔을 파견하고 테러를 지원한 것이 맞다면, 아마도 서대륙 침공의 가장 중대한 장애물인 신성제국을 혼란에 휩싸이게 하려는 의도일 것이다.

 잉글랜드 요크 가문의 버킹엄 공작 리처드(Richard) 또한 어떠한 형태로도 개입한듯 보였다. 잉글랜드는 본디 서대륙의 가장 서쪽 끝에 위치한 변방의 국가여서, 대륙의 중부와 동부를 차지한 신성제국과 별다른 교류가 없었다. 그런데 프리드리히가 제국 중앙정보국을 동원해 조사한 결과, 최근들어 시장에서 잉글랜드로의 자금 유출입이 뜬금없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근 백년 내 가장 높은 거래량이었는데, 거래와 연관된 이들을 은밀히 조사해 보니 글로스터 공작령 출신의 상인들이 많았다. 만약 이사벨라가 리처드 공작을 의심하지 않았다면, 절대 알아내지 못했을 연결고리였다.

 리처드가 만약 테러를 지원하였다면 그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여러 가지가 떠올랐지만, 가장 유력한 것은 다음대 왕위에 대한 욕심이었다. 그의 형인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4세에게는 무남독녀 제인 그레이(Jane Gray)가 있었다. 잉글랜드는 여성의 왕위계승을 허용하므로, 에드워드가 사망한다면 그녀가 여왕으로 즉위하게 된다. 그러나 에드워드 국왕은 현재 왕위를 놓고 전쟁 중인 랭거스터 가문이 자신의 사후 제인을 폐위시킬 것을 염려해, 믿음직한 신랑감을 찾기 시작했다.

 에드워드의 노력은 기대 이상의 성공을 거두었다. 1년 전, 신성제국의 프란츠 황태자와 잉글랜드의 제인 왕세녀 간의 결혼이 성사된 것이다. 제인은 이제 열다섯 살의 소녀에 불과했기 때문에 서른 살에 가까운 신랑을 부담스러워 했지만, 양쪽 집안은 모두 이 결혼을 만족스러워 했다.

 에드워드 국왕의 입장에서는 딸에게 대륙에서 가장 든든한 지원군이 생긴 셈이었다. 신성제국의 입장에서는 프란츠 황태자와 제인 왕세녀의 자식이 제국의 황위 뿐만 아니라 잉글랜드의 왕위 또한 계승하게 되므로, 그야말로 땡잡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신성제국이 대륙대전에서 요크 가문을 지원하는 백군(白軍)이 된 것에는 이러한 배경도 깔려 있었던 것이다.

 에드워드 국왕을 몰아내기 위해 전쟁을 일으킨 랭거스터 가문은 이 결혼을 몹시 우려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았는데, 에드워드의 동생이자 제인의 숙부인 리처드 또한 그 점에서는 적들과 의견이 같았다. 그는 엄청난 야심을 숨기고 있는 인물로, 마치 조선시대에 조카인 단종을 몰아내고 왕이 된 수양대군과 같은 성격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테러로 인해 프란츠 황태자는 폭사당하고, 잉글랜드의 수도 런던(London)에 머물던 제인 그레이 황태자비만 혼자 남게 되었으니 리처드의 계략은 멋지게 성공한 셈이었다. 프란츠 황태자와 제인 그레이는 비엔나에서 열린 결혼식 때 한두 번 만났을 뿐, 곧 제인이 후계수업을 위해 런던으로 돌아가면서 아직 아이도 가지지 못한 상태였다.

 세 번째로, 신성제국의 오랜 숙적인 프로이센왕국이 개입된 것이야 두말하면 잔소리였다. 대륙대전이 개전한 지금, 신성제국의 북부 국경에서는 프로이센군과 연일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

 네 번째 배후는 생각치도 못했던 바티칸(Vatican)의 교황청이었다. 이사벨라는 체사레나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바티칸을 신성제국과 영원한 공동운명체로 생각하고 있었다. 교황 알렉산데르 6세는 신성제국 서부의 대귀족인 보르지아 가문 출신으로, 합스부르크 황실과도 인척관계였다. 교황과 황제 간의 밀월관계는 그 어느 때보다 강화되어, 타국에서 교황청을 못 믿겠다며 비난할 정도였다.

 그러나 비밀리에 성전기사단의 임무를 수행하던 체사레나의 고백은 충격적이었다. 알렉산데르 6세 교황은 역대 그 어느 교황보다 세속적인 모략가였지만, 단 한 가지 면에서는 독실한 전임 교황들과 같은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에우로파 대륙에서 장기적으로 종교의 영향력이 약화되고 세속군주와 국민국가의 영향력이 강화되어 가는 현상은 언젠가 교회의 파멸을 초래할 것이라는 걱정이었다. 예컨대 리슐리외 추기경이 이끄는 프로방스 교구 같은 경우에는 교황청의 영향력에서 사실상 벗어나 국가에 종속되어 있는 상황이었고, 신성제국의 경우에도 황권이 강화되면서 상대적으로 교권이 약화되었다.

 즉 교황은, 지구로 치자면 중세가 소멸하고 근대화가 진행 중인 역사를 거꾸로 되돌리고, 백여 년 전처럼 대륙을 다시 교회의 절대적인 영향력 하에 두고 싶어했다. 그는 신성제국의 황족들이 사라지고 내전이 발생한다면, 다음 두 가지 결과 중 하나가 나타날 것을 예측했다. 대귀족들이 제국을 몇 개의 왕국으로 분할하거나, 혹은 후계자 한명이 가까스로 상대편을 꺾고 황제로 즉위하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 고만고만한 크기의 왕국들은 이전의 제국처럼 바티칸을 대등하게 상대하지 못할 것이다. 후자의 경우, 신임 황제는 경쟁세력을 물리치고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교황청에 지지를 호소함으로써 교황에게 단단히 예속되어버릴 것이다.

 대륙인들로부터 신의 성스러운 대리자로 불리는 자가 생각해낸 것으로는 믿을 수 없을만큼 사악한 계략이었다. 이사벨라는 이제 더 놀랄 것도 없다고 생각했지만, 체사레나의 뒤이은 고백에 경악할 수 밖에 없었다. 알렉산데르 교황은 뒤쪽으로 동대륙과도 은밀한 관계를 만들고 있었다. 교회의 영원한 숙적인 이슬람교의 최고지도자 '칼리프'를 자칭하는 살라딘과 교류하고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서대륙을 침략하려는 살라딘에게 여러 정보와 기반을 제공하며 그를 부추기고 있었다. 대신 교황령에 대한 불가침 밀약까지 맺어놓은 상황이었다.

 살라딘의 대군이 본격적으로 침공한다면, 서대륙의 국가들과 기독교의 입장에서는 어마어마한 재앙이 닥치는 것이었다. 여러 제국과 왕국들은 모든 국력을 동원해 이를 막을 것이고, 이교도에 대항하여 성지를 지키기 위한 십자군(Crusader)이 결성될 것이다. 세속에 물들어 흐트러지던 종교적 관념들은 다시 견고하게 부활할 것이다. 이슬람의 침략으로 인해 기독교 세력이 오히려 중흥한다는 역발상이었다. 종교를 좌지우지하려 하던 제국이나 왕국은 당장 자국의 주권을 지키기 위해 총력을 다할 것이고, 적어도 수십년 동안은 바티칸을 견제할 힘을 갖지 못하게 될 것이다.

 참고로, 동대륙의 침공이 시작된다면, 가장 직접적인 타격을 입는 교회는 바티칸의 서방 카톨릭교회가 아닌 콘스탄티노플의 동방 정교회였다. 정교회의 본산은 궤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을 것이고, 교황은 손하나 안쓰고 기독교 세계의 단일한 지배자가 될 수 있었다.

 체사레나를 파견해, 프로방스의 영토에서 로사링거와 신성제국의 사절단을 몰살시키려 한 것에도 치밀한 계산이 숨어 있었다. 교황은 프로방스의 새로운 여왕과 섭정이 친제국적 성향을 지닌 것을 파악하고, 양국의 관계를 더욱 악화시켜 동맹의 가능성을 일찌감치 봉쇄하려 한 것이다.

 결코 성직자가 하기 어려운 생각들이었으나, 이사벨라는 알렉산데르 교황이라는 인물에 대해 상당한 감탄을 표하고 있었다. 대륙인들에게 그는 역대 어느 교황보다 자애롭고 성스럽기로 유명했기 때문이었다. 벨라는 한 제국과 한 왕국, 한 대공국의 정보부를 직간접적으로 장악하고 있었지만, 체사레나가 아니었다면 결코 그의 계략을 1할도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사벨라가 요즈음 가장 신경을 쓰고 있는 인물은 따로 있었다.

 이슬람의 칼리프, 리처드 공작, 프로이센 왕국, 바티칸의 교황청 등 상관없어 보이는 인물들을 끌어들이고 계략과 음모로 엮어 테러를 실행하게 만든 자. 모든 배후들의 배후.

 바로 헝가리의 왕족이자 트란실바니아의 대공부인인 에르체베트 폰 바토리(Erzsebet von Bathory)였다. 신성제국의 동부와 남부 지방에는 총 십여 개의 왕국과 대공국, 공국들이 존재했다. 이른바 속번(屬藩)이라 불리는 지역들로, 제국의 주류를 이루는 게르만족과는 다른 소수민족들이 살면서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방금 언급된 헝가리 왕국과 트란실바니아 대공국, 그리고 이사벨라의 스승이었던 블라드 공작이 다스렸던 왈라키아 공국, 테러를 설명하며 언급된 세르비아 공국 등이 대표적이었다. 에르체베트 바토리는 동부에서 가장 고귀한 여인으로 불리는 중년의 여귀족이었는데, 헝가리 번왕(藩王)의 조카로 태어났고 트란실바니아의 대공과 결혼했기 때문이었다.

 에르체베트의 남편인 트란실바니아 대공은 '페렌츠(Ferenc)'란 자였는데, 그는 이사벨라가 익히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몇 년 전, 데카당스 호의 3등 선실에서 만났던 흑사자 용병 루카스가 이사벨라의 가문을 듣고, 무슨 사이냐고 물어보았던 인물이 두 명이 있었다.

 한 명은 왈라키아 공국의 지배자로, 나중에 벨라의 스승이 되었던 블라드 공작.

 그리고 또다른 한 명이 바로 페렌츠 대공이었다. 그는 트란실바녜 가문의 직계에서도 적장자에 해당하는 인물이었다. 이른바 장남으로 이어지는 직계 중의 직계로 태어났다는 의미다. 벨라와 같은 방계들이 그토록 선망하던, 가문의 정통 후계자인 것이다. 페렌츠는 왈라키아의 블라드 공작과는 팔촌쯤 되는 친척 사이였는데, 일년 전 쯤에 지병이 악화되어 급사해 버렸다.

 페렌츠와 에르체베트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기에, 사람들은 당연히 페렌츠의 또다른 친척, 즉 트란실바녜 가문의 직계 귀족 중 한명이 트란실바니아 대공의 지위를 계승할 것을 예상했다. 하지만 신성제국 정부에서는 무슨 이유에선지 대공부인이었던 에르체베트를 새로운 대공으로 승인하였다. 페렌츠의 친척들이 격렬히 반대하며 들고 일어났고, 황도 비엔나에서도 중요한 안건으로 논의되었으나, 어느 순간 잠잠해져 버린 상태였다.

 이사벨라는 적어도 3년 전까지의 에르체베트 바토리를 아주 잘 알았다. 직접 본 적은 한번도 없었지만, 블라드 공작을 죽이고 얻은 기억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여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에르체베트는 블라드 공작이 흡혈증에 의해 최초로 전염시킨 뱀파이어였다.

 지금으로부터 20여년 전, 블라드 공작은 친척인 페렌츠의 성에 놀러갔다가 발작을 일으켰고, 주위에 있었던 페렌츠의 부인, 에르체베트를 물어 흡혈귀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한때 정숙했던 레이디였던 에르체베트는 이를 기점으로, 블라드 공작의 비밀스런 정부(情婦)가 되어버렸다. 남편인 페렌츠의 눈을 피해 종종 왈라키아를 오가며 블라드를 만났고, 그의 잔혹한 실험을 바로 옆에서 도우며, 그 못지 않게 잔인하고 음험한 성격으로 변했다.

 블라드 공작이 기억하는 바로는, 에르체베트는 자신의 외모를 유지하기 위해, 악마를 소환하였고, 악마가 알려준 방법을 직접 실현하면서 살고 있었다. 한달에 한번씩, 20명의 산 처녀로부터 피를 뽑아 특이한 힘이 담긴 욕조에 가득 채운 뒤, 매일매일 그곳에서 목욕을 하는 것이었다.

 벨라는 이제껏 용병으로 살면서 잔인한 짓을 많이 해보았지만, 에르체베트의 행위를 떠올리며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세상 그 어느 인간이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 한달마다 20명의 무고한 생명을 저토록 잔인한 방식으로 희생시킬 수 있을까? 악마가 알려준 방식은 효과가 대단했는지, 블라드 공작이 마지막에 본 에르체베트는 쉰이 넘는 나이에 20대 초반의 외모를 유지하고 있었다.

 에르체베트는 심지어 현재의 이사벨라가 지닌 외모를 살짝 능가할 정도로, 아주 살떨리게 예쁜 미모에, 하얀 분이 묻어날듯한 순백의 피부와 육감적인 몸매를 지니고 있었다. 거기에 위험한 미소와 요염한 눈동자까지 얹어진다면, 세상에 안 넘어가는 남자들이 없을 것이다.

 아타락시아 세계에는 꼭 사이한 방식이 아니더라도 외모를 젋게 유지할 수 있는 특별한 방법들이 드물게나마 존재했기 때문에, 누구도 이처럼 고귀한 여인이 그토록 사악한 짓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못했다. 남편인 페렌츠 대공만 하더라도 부인을 높은 경지의 마법사로 알고, 젊음을 유지하는 모습에 감탄하며 그녀를 사랑해 주었다. 물론 에르체베트는 마법을 익힌 적이 없었지만, 뱀파이어가 지닌 무시무시한 능력을 보여주며 주위를 납득시킬 수 있었다.

 테레지아 황녀는 동부의 전장에서 활약하던 몇 년 전, 원군을 이끌고 온 에르체베트를 아무런 의심없이 맞아들였고, 그녀에게 물려 뱀파이어가 되었다고 한다. 이후 에르체베트의 조종을 받아, 제국 정부에서 그녀의 이익을 위해 봉사해 왔다. 마치 프리드리히가 벨라를 위해 봉사했던 것처럼 말이다.

 테레지아는 에르체베트가 트란실바니아 대공국을 공식적으로 장악하고, 헝가리 왕국과 왈라키아 공국을 은밀히 장악하는 과정을 도와 주었다. 또한 황가를 몰살시킨 테러에도 사전적인 도움을 주었으며, 루테티아의 여왕 즉위식에 축하사절로 가서 프리드리히를 살해하고 여왕이 주최한 만찬장에서 은밀히 테러를 벌이라는 명령을 받았다. 비엔나로 귀환한 다음에는 꼭두각시 여황제로 즉위하여 에르체베트의 조종을 받게 될 예정이었다.

 동부의 세 번국에 만족하지 않고, 거대제국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권력을 추구하려는 것이다. 그녀의 최종목표가 무엇인지 짐작할 수는 없었지만,  벨라의 기억 속 뱀파이어들은 하나같이 어딘가 비뚤어진 욕구를 지니고 있었다. 인간을 초월한 힘을 얻은 대가인 것일까? 어쩌면 벨라 자신도 자유로운 삶을 추구한다는 핑계로, 감당할 수 없는 행적을 밟아가는 건지도 몰랐다.

 "우리의 방해로 인해 계획이 크게 엉크러졌으니, 그녀 쪽에서도 누군가 자신을 의도적으로 방해하고 있음을 눈치챘을거야."

 벨라는 오전부터 미라벨 궁을 방문한 프리드리히를 몇 시간째 독대하며 논의를 계속했다.

 "다행히 점은 우리가 '들여다보는' 입장이라는 거야. 중앙정보국에서 파악하고 있는 바에 따르면, 현재 에르체베트는 방해자의 실체를 전혀 알지 못하는 상황이라면서? 반면 나는 테레지아와 블라드의 기억을 통해 그녀의 힘과 약점을 상세히 파악하고 있지."

 "일단 수사결과는 세르비아 민족주의 세력의 테러로 허위발표하기로 했어. 하지만, 에르체베트의 의도대로 끌려갈 수는 없지. 남부의 번국들을 응징해서 자극시키기 보다는, 적당한 추궁으로 끝내고 빚을 지워둘 생각이야."

 "좋아. 그리고 한달 후, 에르체베트를 제국의 공적(公敵)으로 지목해 멋지게 뒤통수를 쳐주는 거고?"

 "응, 맞아. 응징의 방식에 대해서도…. 고민 중이야. 일단 일반적인 방식은 정공법(正攻法)이지. 중앙군을 동원하여 동부의 반란세력을…. 일소하는 것."

 "그럼 특수한 방식은 나와 관련된 것이겠군?"

 "정답! 특수용병을 고용해… 은밀히 적의 윗대가리만 처리하는 방법이지. 너는… 우리들의 절대적인 군주(君主)니까…."

 "음, 좋아 좋아, 프리드리히. 근데 군주를 왜 그런 시선으로 바라보는 거야?"

 벨라가 보기에 프리드리히의 상태는 아까 전부터 뭔가 이상했다. 일목요연히 논점을 정리해야 되는 대화에 방해가 될까봐, 그의 감정을 읽어들이는 스위치를 꺼두고 있는 상태였는데, 심상치 않은 상황에 다시 켰다. 그의 감정은 순도높은 성욕으로 가득차 있었다.

 "크으으으윽……..도저히……."

 잠시 무슨 일인지 고민하던 벨라는 그 이유를 깨달았다. 테레지아와 프리드리히의 정기적인 섹스타임을 위해, 그들의 성욕이 오후 1시 경과 2시 경에 자동으로 분출되도록 설정해 놓았기 때문이었다. 몇 시간째 정신없이 대화를 하다보니 지금이 딱 오후 1시였다.

 왠지 아까부터 말을 계속 천천히 흐리더라니…. 프리드리히의 성욕 따위야 벨라의 입장에서 간단히 게이지 조절이 가능했다. 하지만 몇 시간 동안 골치아픈 대화만 나누다 보니, 몸도 찌뿌둥한 게, 벨라도 하고 싶어져 버렸다.

 벨라가 자신의 자줏빛 스커트를 휙 들어올리니, 검은색 팬티스타킹이 드러난다. 두 군데의 동그란 구멍이 뚫려있는 그 스타킹 말이다.

 "아침부터 수고가 무척 많으셨네요~ 부디 원하시는 곳에 박아주세요!"

 이미 눈이 시뻘개진 프리드리히는 자신의 군주를 향해 달려들었고, 팬티스타킹에 뚫린 구멍도 보이지 않는지 벨라의 옷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그녀를 엎어뜨린 채 정신없이 박아대기 시작했다.

 "아흑…..!! 야성적인 녀석.. 좋아.. 좋아요.. 흑!"

 그렇게 황홀했던 1시간이 지나고 오후 2시. 충분히 충족되어 막 사라지려던 성욕이 다시 한번 설정에 따라 불타올랐고, 두 남녀는 정신없이 쾌락에 빠져들었다. 중간에 벨라를 찾아왔던 빅토리아도 합세하는 바람에,  바깥이 어두컴컴해질 때쯤에야 정사가 끝났다고 한다.

 벨라는 한팔에 빅토리아, 한팔에 프리드리히를 안고 침대에 몸을 뉘었다. 지쳐서 먼저 잠든 둘을 따라 자신도 잠을 청한다.

 '한 두어시간만 자고 일어나서 늦은 저녁을 먹어야지.'

 '잠깐… 누군가를 까먹은 것 같은 기분인데.….'

 무언가 중요한 생각이 스쳐지나간듯 하지만, 너무 피곤했던 탓에 금방 까먹고 잠들어 버린다.

 시간을 되돌려 오후 1시 경, 테레지아 황태녀의 개인 집무실이 위치한 쉔부른 궁전.

 테레지아는 요 며칠 간, 집무실에서 엄청난 양의 격무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전까지 후계자 수업을 받은 적이 없던 자신이, 황태녀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몇 배의 노력을 기울여야 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드높은 자존심만큼 탁월한 능력을 가지기 위해, 끊임없이 열정을 불태우고 노력하는 인물이다.

 식사시간을 제외하면 물 한 모금조차 마시지 않고, 삐죽삐죽 솟은 보랏빛 머리를 벅벅 긁어대며 온갖 서류와 노트, 장서를 뒤적이고 있다. 시종이나 시녀들조차 멀리 물린 채, 자신이 음성마법을 통해 부르기 전까지는 각자의 방에서 대기하라고 명해놓았다. 그들이 근처에서 부스럭거리라는 소리라도 낼 때면, 신경질적으로 유리잔을 집어던지고 마법을 쏘아대며 내쫓았다.

 오늘은 모처럼 짬을 내서, 제자인 윌리엄을 집무실로 불러 마법 지도를 해주는 중이었다. 예상치 못하게 얻은 제자였지만, 자신의 심한 말과 요구에도 불만없이 성실히 따르며 벌써 4단계 마법을 마스터하는 걸 보니, 내심 흡족한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가끔씩 불러서 마법을 지도하면서, 수틀리면 간단한 공격마법으로 제자를 혼내주거나, 가끔씩 체술로도 패면서 괴롭혔다. 이제는 윌리엄을 제자로 보내준 벨라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다. 제자키우기는 업무로 쌓이는 스트레스를 푸는 데 여러모로 도움이 되고 있었다.

 테레지아는 그렇게 오늘도 서류더미에 파묻힌 채, 앞에서 벌서고 있는 제자에게 일분에 한번 꼴로 공격마법을 난사하며 깔깔거리고 있었다. 그때 갑작스럽게 혈관 속의 피가 빠르게 도는게 느껴지면서 이상한 기분이 느껴졌다. 눈은 몽롱하게 풀려가고, 입에서는 뜨거운 입김이 나오며, 온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워 진다.

 "아아………..서, 설마…………."

 허겁지겁 시계를 찾아 바라보니 정확히 오후 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왜……….."

 평소에 이 시간이면 프리드리히가 미리 궁궐에 방문해 있다가 뜨거운 그녀를 달래주는데, 오늘은 웬일인지 정각이 다 되도록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오는 길에 황제 폐하라도 만난 것일까. 테레지아는 잠시 후면 프리드리히가 반드시 올 것을 믿어 의심치 않으며, 간신히 버티기 시작했다. 하지만 벨라가 부여한 설정은, 애초에 테레지아가 도저히 몇 초 이상 참아낼 수 없는 것이었다.

 보라색 눈동자가 흔들리며 눈앞의 소년을 바라보았다. 공손히 벌을 받으면서, 황녀를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녀의 제자라지만 뒷골목에서 자라난 하찮은 평민 계층에 불과한 녀석이었다. 그와 몸을 섞는 것은 황녀에게 있어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꼬, 꼼짝말고 가만히 있, 있어라. 그, 그….."

 그러나 그녀의 몸은 몇 미터 앞에 있는 윌리엄의 아랫춤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생각이 거부하는 데도 몸이 그리로 향한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