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화 (40/49)

 우선 체사레나는 이사벨라 일행의 절대적인 최강자였다. 그녀의 실력은 과거 검후(劍后)라는 별칭으로 대륙에 이름을 날릴 때보다 훨씬 진일보해 있었다. 그동안 온갖 고난과 역경을 겪어온만큼 실전감과 응용력도 뛰어났고, 전략 전술 분야에서도 비인간적인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일행 대부분은 오래 전부터 존경해왔던 체사레나에 경외감을 표하며 알아서 기었다. 검후의 전설을 잘 모르는 누레딘과 오셀로 또한 처음의 전투에서 그녀가 자신들과 빅토리아, 랑발손 네 명을 상대하던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아 그녀를 공경하였다.

 실력차가 너무 많이 나는 보리스나 윌리엄을 제외한 다른 일행들은 체사레나에게 가끔씩 공손하게 대련을 부탁하였고, 체사레나는 벨라의 얼굴을 보아 기꺼이 그들을 상대하며 솜씨를 뽐냈다. 같은 소드마스터인 빅토리아의 경우, 특히 한 수 위의 체사레나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체사레나 역시 자신과 검술 스타일이 정반대인 빅토리아와 대련을 하면서, 배우는 것이 적지 않았다. 물론 신성력을 이용한 벨라와의 대련 또한 서로에게 큰 도움이 되고 있었다.

 보리스나 윌리엄의 경우, 약간 다른 방식으로 체사레나와 안면을 쌓았다.

 체사레나는, 그녀의 고백을 들은 이사벨라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의외로 여길만한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주기적으로 발정했던 것이다. 30대 후반의 여성이 지니는 성욕은 아직 20대 후반인 벨라나, 30대 초반인 빅토리아에 비해 조금 더 절실하게 발산되는듯한 느낌이 있었다.

 이미 체사레나는 프로이센에서 남편에게 쓰레기같은 짓을 당할 때부터, 밤이 되면 몸이 뜨거워지는 여자였다. 바티칸에 오게 된 후부터는 간신히 마음을 다잡았었으나, 교황에게 당한 뒤로, 그간의 절제가 물거품이 되어버린 상황이었다.

 다만 벨라나 빅토리아와 다른 점이라면 남자를 믿지 않았기에, 결코 남자에게 몸과 마음을 동시에 바치는 경우가 없었다.

 예컨대 바티칸의 고위 성직자를 유혹해서 자신의 편으로 회유하려 할 때는, 갖은 아양을 다 떨며 그의 환심을 사려 한다. 속으로는 차가운 비수를 품고 있으면서, 겉으로는 사랑에 빠진 고혹적 여인을 연기한다.

 그리고, 단지 급한 성욕을 해결하기 위해 성전기사단의 일부 동료들과 몸을 맞출 때면, 매우 차가운 눈빛으로 신음소리 하나없이 육신만 움직이고 서로의 성욕이 해소되는 즉시 아무 말 없이 빠져나온다. 마치 자위도구를 대하는듯한 행동이었다.

 이는 벨라의 일행으로 일시편입된 후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었다. 그녀가 가장 먼저 살을 섞은 이는 의외로 50대 아저씨에다 무력도 약한 보리스였다. 이는 체사레나가 오랜 남자경험을 통해, 보리스가 대물인데다가 성적인 스킬도 좋다는 것을 파악했기 때문이었다. 소위 옹녀가 변강쇠를 알아본 것과 비슷한 이치였다. 물론 옹녀의 시선은 매우 효율적이고 계산적이었다.

 그렇게 거사를 치른 다음날, 대충 상황을 짐작한 일행들은 호기심어린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체사레나가 새벽부터 일어나 냉막한 눈초리로 아침수련을 계속하는 것에 비해, 보리스는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오후 세 시가 넘어서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 문지방을 나섰다. 등을 굽힌 채 어기적거리며 걸음걸이도 제대로 못 걷는 게, 하룻밤 사이에 일 년을 더 늙은 것 같았다.

 소감을 물어보는 윌리엄에게, 보리스는 매우 기묘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벨라나 빅토리아 못지 않게 맛있는 육체임은 분명하고, 무엇보다 그 비정상적으로 풍만한 젖무덤에 얼굴을 파묻는 건 보리스의 카사노바 인생 중에서도 손에 꼽힐만큼 황홀한 일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시종일관 냉정한 얼굴로 대화 한마디 없이, 억지로 내는듯한 작은 신음소리만 내니 능글능글한 보리스조차 기가 질렸다. 한 나라의 왕녀 출신이자, 대륙적인 명성을 지닌 소드마스터인 여자와 떡을 친다는 흥분감이 아니었다면, 여러 번 발기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성욕 또한 세 여자 중 제일 강한 것 같다며, 마지막에는 자신조차 감당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체사 님과는 혼자서는 안돼….'

 이 방면에서 고수로 유명하던 보리스가 두려움이 서린 얼굴로 말하는 걸 들으며, 윌리엄은 왠지모를 한기를 느꼈다.

 언젠가 체사레나가 벨라에게 했던 말처럼, 교황 알렉산데르 6세 정도는 되어야지 혼자서 그녀를 황홀경에 빠트릴 수 있을 것이다.

 이후 체사레나는 보리스에게 간만에 몸을 풀 수 있었다며, 두어번 그의 무공 잡기를 지켜보며 지도편달해주었다. 그 덕분인지 보리스도 얼마 뒤, 늦은 나이로 소드유저 최상급의 경지에 올랐다. 본인의 말에 따르면 14년 만에 경지가 상승한 것이라는데, 꽤나 감격했는지 익스퍼트를 목표로 수련에 박차를 가하는 중이다.

 이틀 후, 윌리엄은 누레딘의 부탁을 받아 오셀로를 찾다가, 대낮인데도 그가 방에서 늦잠을 자고 있는 걸 발견했다. 거구의 흑인이 알몸으로 등과 허리에 파스를 붙인 채 큰대자로 엎드려서 뻗어있다. 악몽을 꾸는 중인지 눈꺼풀을 덜덜 떨며 뭐라뭐라 알 수 없는 언어로 씨부린다. 잠시 굳어있다가, 어깨를 흔들며 깨우는데 "그, 그만!" 하는 게, 간밤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것 같았다.

 다음 날에는 바이킹족 전사 랑발손이 윌리엄에게 전신의 근육통을 줄여주는 마법이 없냐며 부탁을 해왔다. 타고난 전사인 그는 이제껏 수련하면서 한번도 윌리엄에게 그런 걸 요청한 일이 없었다.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 보는데 다크써클이 보이자, 아무 말 없이 그에게 적당한 3단계 마법을 시전해 주었다.

 며칠이 더 지났을까, 윌리엄은 마법수련에 열중하다가 점심시간을 못 맞춘 탓에 혼자서 식사하는 중이었다. 누군가 뒤를 톡톡 건드리길래 돌아보니, 뱅헤어 형태의 짧은 금발 곱슬머리를 지닌 거유의 여인이 바로 뒤에 서있었다.

 "허억! 체, 체사 님!"

 -쨍그랑

 윌리엄은 눈을 크게 뜬 채, 그만 양손에 들고 있던 포크와 나이프를 놓쳐버렸다. 식기가 대리석 바닥에 떨어지며 청량한 소리가 울린다. 그런데 한번더 튕기려던 식기들이 무형의 기운에 의해 끌려올라오면서, 식탁 위로 무사히 돌아온다.

 "푸훗. 너무 겁먹지는 마라. 내게 해를 가하지 않는 이를 먼저 해치지는 않으니."

 그 말은 자신에게 성욕을 품지 않은 이를 먼저 따먹지는 않는다는 말이기도 했다.

 체사레나가 모처럼 미소를 지으니, 농염한 기운이 몸에서 줄줄 흐르는 것 같다.

 "본인도 시간을 놓쳐버린 탓에… 같이 식사를 들자는 뜻이다."

 윌리엄은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녀의 식사를 신속하게 준비해 주었다. 식탁에서는 별다른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다. 체사레나는 기본적으로 이사벨라를 제외한 다른 이들에게 무정했다. 소년은 살짝 자존심이 상하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며칠 후, 윌리엄은 테레지아 황녀의 지도를 받으며 4단계 마법을 모두 마스터하게 되었다. 경이적인 성취였다. 이제 마지막 깨달음만 얻으면 5단계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마지막으로 배운 4단계 마법에는 '에너자틱 비아그라(Energatic Viagra)'라는 마법이 있었다. 테레지아 황녀와 최초로 광란의 섹스를 벌일 때, 그녀가 그에게 걸어주었던 마법이기도 하다. 일시적으로 정력을 증진시키면서 성기의 크기와 지속력, 단단함에 모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아주 좋은 마법이었다.

 단, 7단계 마법사인 테레지아 황녀가 시전하는 것에 비해서는 다소 손색이 있었다.

 이틀 후의 어스름한 저녁, 체사레나가 윌리엄을 자신의 방으로 불렀다. 며칠 전부터 소년의 눈빛이 뜨거워진 것을 느꼈던 것이다. 마침 그녀도 발정기를 맞이한 터라 불타오르는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한 명 더 부를까 하는데, 남자들이 기피하는 모습이 보인 탓에, 결국 윌리엄만 데리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침상에 올라간다. 그녀로서는 윌리엄이 발기를 하지 못하거나 후유증이 클 경우를 대비한 것이었지만, 소년은 그 과정에서 충분히 자존심을 다쳐 복수를 다짐했다.

 다음날 아침.

 윌리엄은 일행 중 최초로 체사레나의 가슴골에 얼굴을 파묻은 채 기상할 수 있었다. 체사레나는 윌리엄과 거의 동시에 잠에서 깨어났는데, 제법이라는 표정을 짓더니 그에게 모닝 펠라를 헤주었다.

 새벽에 수십 발은 싼 것 같은데도, 체사레나의 실력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30초도 되지 않아 사정감이 느껴졌다. 체사레나는 물컹물컹 쏟아져 나오는 윌리엄의 씨앗을 입안으로 받아들여 깨끗이 삼킨 뒤, 땀과 체액이 절어다 말려졌다 한 옷을 챙겨입고 평소와 같은 기색으로 그대로 나가버렸다.

 '샤워하러 가시는 건가?'

 엄청난 마나가 소모되었지만 왠지 뿌듯한 기색이었다. 체사레나에게 모닝 펠라를 받은 남자는 실제로 몇 년 만에 그가 처음이기도 했다.

 다른 남자들과는 달리, 윌리엄은 체사레나의 냉막한 표정을 볼수록 더욱 불타올랐다.

 하지만 체사레나는 그 한번의 섹스로 상당한 성욕을 해소했던터라, 일주일 가까이 남자를 찾지 않았다. 사흘쯤 지나 윌리엄이 다시 체사레나에게 접촉했지만, 그녀는 냉정한 표정으로 그를 내쫓았다. 다만 두 번째 접촉했을 시에는 키가 작은 윌리엄을 대롱대롱 들어올려, 그의 머리를 티셔츠 안쪽의 가슴 속에 푹 파묻었다가 도로 꺼내어 보내주었다.

 윌리엄은 향긋하고 음란한 냄새를 맡으며 아주 잠시간 끝내주는 황홀함을 느꼈다. 하지만 그건 그의 질척거림에 대한 일종의 질책이기도 했다. 머릿속에서 하루종일 그 풍요로운 두 언덕에 대한 생각이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그는 잔뜩 흥분한 채로 오후까지 힘겹게 버티다가, 수업을 마치고 스승인 테레지아 황녀의 몸에 올라타 가까스로 성욕을 해소할 수 있었다.

 윌리엄은 그 한번의 끔찍하고 황홀했던 경험 이후, 체사레나의 의지에 반하는 모든 것을 포기했다. 여드레가 지났을 즈음에야 발정한 체사레나가 찾아와 짝짓기를 재개할 수 있었다. 체사레나는 윌리엄을 섹파로서 상당히 마음에 들어하는 편이었는데, 그것은 소년이 마법을 사용하여 다양하고 질높은 쾌락을 선사했기 때문이다.

 윌리엄의 방식은 그녀가 교황의 정부로 지낼 때의 기억을 상기시켰다. 알렉산데르 6세는 신성력을 이용해 상대방에게 독특한 쾌락을 선사했다. 한번 그것을 맛본 여인들은 결코 그를 벗어날 수 없었다. 이는 체사레나 또한 마찬가지였는데, 비록 교황을 증오하면서도 그의 육체를 그리워해 교황청을 완전히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아마 삼개월 후에 바티칸에 귀환한 뒤에도, 루크레치아의 안전을 확인하고 나면, 당장 교황의 집무실부터 찾아가서 암캐처럼 헉헉거리며 배덕한 유린에 굴종할 것이다.

 아무튼 이런 방식을 통해, 체사레나 폰 보르지아 경도 조금씩 벨라의 일행에 융화될 수 있었다.

 그렇게 한달이 흐르자, 마침내 신성제국 정부와 벨라의 일행들 모두에게 중요한 날이 다가왔다.

 황실에서 특수용병을 고용하여 '피의 여대공' 에르체페트 폰 바토리와 그녀의 핵심 세력을 멸살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제국 중앙정보국에 따르면, 에르체페트의 세력은 계획이 실패한 이후 외부적인 움직임을 보이기보단, 조용히 숨을 고르며 내부의 혼란을 정리하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한달 간 편하게 궁에서 머물던 벨라 일행은 이른 새벽에 조용히 황궁을 빠져나왔다. 체사레나는 다시 가벼운 남장을 한 상태였다. 일행에는 잘츠부르크 대공작 프리드리히도 포함되어 있었다. 궁궐의 후문에서 은밀히 대기하면서, 제국 황실에서 선발한 다른 강자들과 합류했다.

 비엔나 황성 동곽의 쪽문이 조심스레 열렸고, 밖에서는 흉흉한 눈빛의 바이킹 전사들이 새벽안개가 자욱히 깔린 초지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빅토리아의 큰오빠, 만프리드가 노르망디에서 정예병을 이끌고 도착한 것이다.

 그들은 새벽 5시 정각, 외성의 문이 열리자 마자, 위장용 망토를 뒤집어 쓰고, 회색 갈기의 말 위에 올라타 제국의 동부 지방을 향해 바람같이 내달렸다. 알프스산맥에서 야생마처럼 키워진 말이라, 험준한 산지나 골짜기도 무시무시한 속력으로 내달리는 제국 최고의 명마였다.

 그렇게 30분이 흐르자, 비로소 동쪽 하늘에서 해가 떠오르며 4월의 황량한 들판이 불그스름한 빛으로 물들어 간다. 백여 명에 달하는 대륙 최고의 소수정예가 백색 망토를 휘날리며 트란실바니아의 어두운 삼림지대를 향해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제국의 중앙부 테두리에 위치한 부다페스트(Budapest)까지 간 뒤, 황실전용 텔레포트 게이트를 이용할 예정이다. 그렇게 동쪽 변경의 끝인 몰다비아(Moldavia) 게이트에 상륙하여, 황무지 경계지대의 개척용병단으로 위장할 것이다. 즉 트란실바니아의 서쪽이 아니라, 반대편인 동쪽에서 뒤로 돌아 나타남으로써, 적의 감시탑들을 회피하고 은밀한 기습을 가한다는 계획이었다.

 부다페스트(Budapest)는 제국의 중앙부인 황제직할령과 제국의 번국인 헝가리왕국이 접경하는 지역이었다. 헝가리를 구성하는 마자르 민족은 물론이고, 트란실바니아와 왈라키아,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불가리아, 알바니아 등 제국에 귀속된 속주의 이민족들이 바글바글거렸다.

 이사벨라의 가문 또한 트란실바니아 지방에서 비롯되었으므로 제국의 주류인 게르만족은 아닌 셈이었는데, 서부에서는 거의 보지 못했던 붉은 머리의 사람들과 종종 마주치게 되는 걸 보니 선조들의 고향이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다.

 일백 명에 달하는 일행은 각자의 그룹 별로 흩어져 휴식 후, 내일 오전에 텔레포트 게이트를 탑승할 예정이다. 알프스산 명마가 힘을 낸 탓에 원래 일정보다 하루 일찍 도착한 것이다.

 제국의 공적인 '피의 여대공' 에르제베트 바토리는 현재 헝가리 국왕의 조카이기도 했다. 헝가리가 얼만큼 그녀의 영향력에 놓여있는지는 불명확했지만, 적어도 앞마당인 건 분명했기 때문에 행적에 극히 유의해야 했다.

 흐린 하늘에서 줄기줄기 내리는 비는 시내 곳곳에 음울한 느낌을 더해주었다.

 벨라는 숙소에 난 좁은 창문으로 바깥을 관찰하다가, 문득 깊은 로브를 둘러쓰고 여관 앞의 골목을 걸어가는 인형에 시선이 멎었다. 사람들이 멀찍이 피해가는 진흙탕을 망설임없이 걸러가는데, 놀랍게도 발에서 흙탕물이 전혀 튀지 않았다.

 그는 주변 사람들보다 적어도 20cm 이상은 큰 장신의 거한이었는데, 번뜩이는 은색로브로 몸을 꽁꽁 싸매고 있어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다. 건물 8층에 머물던 벨라는 그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그 순간 몸 속의 어떠한 힘이 강하게 끓어오르는 느낌을 받았다.

 "으으으윽!"

 혹시 그의 정체가 뱀파이어라서 퀸의 능력으로 무언가를 느낀 걸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지금 느껴지는 힘은 잔 다르크로부터 비롯된 성화력이었다. 성화력이 악한 존재를 만났을 때 전해지던 느낌도 아니었고, 추기경이나 대주교 같은 높은 성직자를 만났을 때 전해지던 느낌도 아니었다. 마치 신성력이 무언가 세상의 근원(根源)을 만나 귀의하려는듯한, 매우 기이한 실체의 느낌이었다.

 벨라는 잠시 운공을 통해 힘을 진정시키고는 다시 창문을 내다 보았다. 그 인형은 어딘가로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체사, 방금 혹시 너도 느꼈어?"

  

 벨라는 혼자서 꿈을 꾼듯한 느낌이었다. 마침 옆에서 태연한 표정으로 창밖을 응시하던 체사레나에게 물어보았다. 성기사인 그녀도 비슷한 느낌을 받지 않았을까?

 "아, 느꼈다. 그 로브를 뒤집어쓴 이 말인가?

 "그래. 신성력이 이렇게 예민하게 반응한 적은 처음이었는데. 뭔가 수상해. 혹시 유대인(Jews)이나 집시족(Gypsy)인걸까? 신의 버림을 받은 자들 말이야."

 "아니야. 그들에겐 아예 신성력이 통하지도, 반응하지도 않지. 내 예상대로라면 그는 요정(Elf)임이 틀림없다."

 "에? 요정??!!!"

 벨라는 깜짝 놀라며 그녀에게 반문했다. 이 세상에는 인간 외에도 다양한 유사인류가 존재했는데, 난쟁이(Dwarf), 요정(Elf), 인어(Mermaid), 수인족(Beastian), 설인(Yeti), 하프종(반인반괴) 등이 대표적이었다. 그들은 인간이 드문 험난한 산지나 늪지, 바다 같은 곳을 주 서식지로 삼기 때문에 잘 눈에 띄지 않았는데, 특히 요정족은 13세기 이후 공식적인 목격사례가 한 차례도 없었을 정도로 출현이 드물었다. 일부 진보적인 생물학자들은, 원래부터 희귀했던 그들이 멸종되었을 가능성까지 제기한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체사레나가 확신에 찬듯 말하는 것을 보고, 이사벨라는 살짝 의아해했다.

 "어떻게 그렇게 단정할 수 있는 거야? 그보다, 요정을 볼 때 왜 이러한 느낌을 받은 거지?"

 "그 두 개는 똑같은 질문이다. 바로 내가 실제로 요정을 본 적이 있기 때문이지."

 체사레나는 잠시 붉은빛이 감도는 와인 한 모금을 머금고 약올리듯이 음미하다가 말을 이어갔다. 벨라는 옛날이야기를 듣듯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현재의 교황 알렉산데르 6세는 초대 교황을 제외한다면 가장 강력한 신성력과 신앙심을 지니고 있다고 일컬어지지. 뭐, 신앙심은 모르겠다만 신성력은 확실히 그러하다."

 "흠, 나도 그렇다고 들은 것 같아."

 "그것은 바로 교황이 요정으로부터 신성력을 뽑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뭐?!"

 그 말에 벨라는 멍청한 표정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교황 곁에 요정이 있다는 건 둘째치고, 어떻게 요정이 뜬금없이 신성력을 지니고 있는지, 교황이 이를 알고 어떻게 신성력을 뽑아내고 있는지 궁금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이건 바티칸의 중대한 비밀이기도 하니, 다른 일행들에게는 되도록이면 얘기하지 말아줬으면 좋겠다."

 "하아, 알겠어. 대답을 들을수록 의문이 증식하는 대화는 처음이라, 신선하긴 하다. 절대 발설하지 않을테니, 대신 아는 걸 최대한 많이 말해줘! 난 궁금한 건 못 참는 성격이라고."

 체사레나는 벨라의 맹세를 받은 뒤 자세한 얘기를 시작했다.

 "요정들이 정령(Spirit)이라는 특별한 힘을 사용하는 건 알지?"

 "거야, 물론 알고 있지!"

 "정령은 신령(Numen)이 자연과 결합되어 나타나는 형태야. 쉽게 말하자면, 신의 힘이 물질계에 흘러다니면서 자연스럽게 정령이 생성되는 거지. 이것은 기도나 성물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내려받는 신성력(Divine Power)과 비슷하면서도, 더욱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어. 보다 신의 근원에 더 가깝기 때문이지."

 "호오… 요정들이 부리는 위대한 정력이 사실 신성력의 상위 버전이었다니. 몹시 흥미로운 진실인데. 그러면 혹시 요정들도 기독교를 믿고 교회를 다니거나 하는거 아냐?"

 벨라의 지레짐작에 체사레나는 살짝 놀란듯한 눈빛을 보였다.

 "황당한 농이 묘하게 핵심을 찌르는군. 14세기 현재, 요정들이 종교를 얼마만큼 믿는지는 알 수 없지만, 초대 교황으로 기독교를 창시하신 성(聖) 니뮤에(Nimue)께서는 요정이셨다."

 "뭐, 뭐라고?"

 밖에 나가서 말하고 다니면, 이단 중의 이단으로 몰려 즉시 화형당할 주장이었다. 교황청의 성전기사단장이 직접 하는 말이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기독교 신화의 주인공이시자, 멸망할뻔한 세상을 한 차례 구원하신 주(主) 알타리엘(Altariel) 또한 요정이셨을 확률이 높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