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7화 (47/49)

 전신을 옥죄이는 기이한 압력에 라스푸틴의 눈동자가 공포로 물들어갔다.

 병사나 건달패, 손님과 창녀들, 심지어 포주와 마담까지 이곳에서 모조리 도망친 지 오래였다. 오직 바이킹 형제와 아나스타샤, 마리아만이 남아 있었다. 벨라는 만프리드와 랑발손에게 두 여인을 부탁한 뒤, 두 팔로도 다 안 둘러질만큼 뚱뚱한 요승의 몸체에 슬쩍 기대었다. 퀴퀴한 로브 속 어깨춤을 살짝 베어물며 흡혈의 견적을 잡는다. 왼손으로 잡았던 아래춤에서는 무언가 튕기듯 솟아오르며 적지 않은 압력이 느껴진다.

 "어머나…..!"

 잠깐의 핸드잡만으로 정직하게 커져가는 양물이 느껴지자, 벨라의 나른한 눈이 슬쩍 떠지며 묘한 열기가 어렸다.

 "호호호, 호호호홋. 조금 후 우리 뱀파이어 추기경께서는 숨겨왔던 모든 진실을 낱낱이 토해내야 할거야."

 '주머니 속에 감추어둔 하얀 씨앗들까지 말이야…'

 홍수처럼 쏘아지던 좆물에 아나스타샤의 얼굴이 푹 절여지던 모습이 떠올랐다.

 벨라는 무슨 상상을 하는지 상기된 얼굴로 라스푸틴을 안아들고, 그 자리에서 땅에 꺼지듯 사라져버렸다.

 트란실바니아(Transylvania)의 대지는 어두움과 우울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몰다비아도 황무지로 둘러쌓인 고독한 개척지대였지만 적어도 그곳엔 거리 곳곳에 활기가 넘쳐 흐르고 사람냄새가 풍겼었다. 하지만 변경령의 경계를 지나 트란실바니아 대공국으로 들어서는 순간 공기 자체가 미묘하게 달라졌다.

 총천연색이었던 자연은 카르파티아 산맥의 지류를 타면서 회색빛 세상으로 변했다. 마치 컬러영화가 흑백영화로 회귀하여 상영되는듯한 느낌이었다. 넓은 들판과 아름다운 풀밭들은 사라져 버리고 어두운 진록색으로 들어찬 침엽수립과 흑갈색 암석지대만이 모습을 드러냈다.  산맥과 고원지대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험난한 지형이었다. 마차가 간신히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작은 소로들이 구불구불 이어졌다.

 며칠 간 계속되는 우울한 날씨는 인간의 이성과 감성을 축 늘어뜨리고 있었다. 보라색과 남색이 뒤섞여 어두워진 천공에서 먹구름떼가 하염없이 비를 뿌려댔다. 산맥을 얼마만큼 올라왔는지 모르겠지만 세 시간 전부터는 눈에 가까운 진눈깨비가 흩뿌리고 있었다.

 "세상에 5월에 진눈깨비라니! 이런 곳이 할아버님께서 그렇게 그리워하셨다는 고향이란 말이야?"

 이사벨라는 라스푸틴에게 무릎베개를 받은 채 나른한 표정으로 오수를 즐기고 있었다.

 "1년 중 300일 정도는 이렇습니다. 체이텐부르크(Cheitenburg)로 처녀들을 공급하러 갈 때마다 비를 안 맞은 적이 없지요."

 라스푸틴은 여주군의 선홍빛 머리칼을 조심히 쓰다듬으며 그녀에게 존대를 사용하고 있었다.

 벨라는 권속들의 자유의지를 존중하는 편이었지만 라스푸틴에게 있어서는 거의 전부세뇌에 가까운 지배방식을 도입하였다. 그가 줄줄 내뱉는 사연들은 매우 중대하고 위험한 내용이었으며, 그 스스로도 자신이 아주 악랄하고 믿을 수 없는 인물임을 고백한 것이다.

요승 그리고리 라스푸틴 

 "다른 거야 그렇다 치고, 조에(Zoe) 황녀를 첩으로 만들어 놓은 이야기를 들으니 도저히 인간으로 보이지 않더군."

 "마땅하신 말씀이십니다. 이미 외도(外道)로 빠진 소인을 통제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이사벨라 님 밖에 없습니다."

 라스푸틴은 본디 황무지의 바바리안 야만족 출신이었으나 어린 시절에 노예가 되어 비잔틴 제국으로 팔려왔다. 그는 제국의 궁정에서 시종으로 키워지며 다른 노예들처럼 평범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황후가 라스푸틴이 일반 성인남성의 세배 가까이 되는 대물을 지닌 것을 알아차리고 그와 은밀히 불륜을 저지르기 시작했다. 얼마 안 되어 황후는 라스푸틴 없이는 살 수 없을 정도로 그에게 푹 빠져 버렸고, 그녀가 유일하게 임신했을 때 낳은 딸도 라스푸틴의 아이였다.

 이후 라스푸틴의 출세가도는 탄탄대로였다. 당시 노예 출신이 높은 신분을 얻을 수 있는 길은 엄청난 무공을 세우거나 위대한 성직자가 되는 길 밖에 없었다. 황후는 자신의 애인에게 후자의 길을 제시해주었다. 라스푸틴은 동방정교회의 사제로 서품받은 뒤 황실의 총애를 등에 업고 고속 승진했다. 마침내 10년 전에는 불가리아(Bulgaria)의 대주교 직위에 올랐으며, 지중해에 위치한 황실령 섬인 에페소스(Ephesos)의 영주위까지 얻게 되었다.

 잘 나가던 라스푸틴에게 위기가 찾아온 것은 든든한 버팀목인 황후가 죽고 난 뒤부터였다. 그는 그 무렵 동방정교회의 최고지도자인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를 위협할 만한 위치에 올라섰고, 종교적, 정치적으로 다양한 활동을 벌이며 자신의 세력을 키워나가고 있었다.

 또한 라스푸틴은 제국의 유일한 적통 후계자인 조에 황녀를 가르치는 스승의 직위도 갖고 있었다. 사실 조에 황녀는 황제가 아닌 라스푸틴의 딸이었고, 그는 어릴 때부터 조에의 교육에 관여하며 아주 서서히 그녀를 자신의 뜻대로 바꾸어 놓았다. 황후가 병사할 무렵 조에 황녀는 사춘기에 막 들어설 연령대였다.

 라스푸틴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조에를 은밀히 범하고, 자신의 대물이 아니면 누구에게도 성적 쾌락을 느낄 수 없도록 조교하였다. 첫 경험의 고통 따위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서로에게 즐겁고 퇴폐적인 시간들이었다. 또한 조에에게 자신이 그녀의 친부임을 은밀히 밝히고, 매일매일 교육시간마다 관계를 나누며 친딸을 자신의 비공식적인 첩으로 만들어 버렸다.

 하지만 그의 적들도 만만한 이들이 아니었다.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를 비롯한 정통 성직자들과 제국의 명문 귀족들은 항상 라스푸틴을 경원시하였으며, 그를 쫓아낼 방법만을 연구했다. 그러던 어느날, 그들의 계략이 통해, 황제가 조에와 라스푸틴이 사랑을 나누는 모습을 직접 목격하게 되었다.

 비잔틴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Constantinus XI]는 불같이 노하며 라스푸틴을 감옥에 가두고 처형을 준비했다. 하지만 라스푸틴은 조에 황녀의 도움으로 무사히 감옥을 탈출했고, 추살령이 내려진 콘스탄티노플을 벗어나 도망쳤다. 그는 황실과 정교회의 영향력이 강한 동부 지방에서 벗어나, 적들이 절대 들어올 수 없는 서방교회의 성지 바티칸(Vatican)으로 향했고, 그대로 알렉산데르 교황에게 귀의한 것이다.

 몇 년 후, 황녀의 도움으로 황제의 분이 어느 정도 가라앉으며 추살령과 파문이 도로 거두어졌고, 라스푸틴은 불가리아의 대주교 직위를 회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정교회에 대한 마음이 떠난 상태였고, 막후에서 바티칸의 은밀한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트란실바니아에서 에르제베트를 만나고 그녀에게 물린 것도 알렉산데르 교황의 지시에 따른 임무였다. 교황은 테러사건을 통해 에르제베트와 접촉하게 된 후, 그녀의 혈족이 가진 비밀이 어느 정도의 위력을 품고 있을지 확인하려 한 것이다.

 라스푸틴은 당시 정교회에 무사히 복직되면서 바티칸의 신뢰를 서서히 잃어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는 바티칸에 대한 충성심을 증명하기 위해 교황이 내린 위험한 임무를 받아들였다. 신성력을 걸고 한달간 바티칸을 배신할 마음을 지니지 않겠다고 다짐한 뒤 트란실바니아로 향했고, 에르제베트에게 의도적으로 약점을 보인 뒤 감염절차를 밟았다.

  

 수상한 힘이 자신의 정신과 신체를 장악하려고 파고들었으나, 최고위급 신성력과 마력의 융합을 기반으로 완전한 잠식을 피해내고 최상의 결과를 얻게 되었다. 뱀파이어의 능력을 지녔지만 에르제베트에게는 복속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라스푸틴은 이를 철저히 숨기고 에르제베트의 충복이 된 척 행세하였고, 그녀의 밀명을 받아 몰다비아를 장악하고 제국의 변경군을 약화시킨 것이다.

 이는 알렉산데르 교황이 에르제베트의 목뒤에 자신의 세력을 숨겨놓은 것이기도 했다. 그는 바티칸으로 되돌아온 라스푸틴이 신성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몹시 흡족해했으며 라스푸틴을 비밀추기경으로 서임하였다.

 벨라는 두 시간 가까이 노력한 끝에 라스푸틴의 정신과 신체를 완전히 잠식하는 데 성공했다. 알렉산데르와 에르제베트가 부여한 지배력을 분쇄하고, 그의 인생에 점철된 사리사욕을 모두 자신에 대한 충성과 경애, 호감으로 돌려놓는 데 성공했다. 다만 그날 하루종일 그의 대물에 흠뻑 빠져 섹스를 해버린 탓일까? 라스푸틴은 벨라를 충실히 섬기면서도, 종종 능글맞은 얼굴로 그녀를 성적으로 지배하고 조종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첫날밤에는 오히려 벨라는 라스푸틴이 제안한 마조 플레이에 흠뻑 빠져 그에게 안긴 채 밤새 울부짖었다. 그가 자신에게 완전히 굴복한 것을 알았기에 허용한 것이었는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영주관을 지키던 병사들이 간이 부었는지 그녀를 탐하고 있었다.

 벨라는 일단 기분좋게 박히면서 오전을 보낸 후, 돌림빵이 완전히 끝난 뒤 라스푸틴을 불러 몇 가지 사항을 지시했다. 일단 아나스타샤 변경백의 귀환을 선포하고 그녀에게 통치권을 도로 위임하도록 했다. 다만 아나스타샤가 벨라를 따라다니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고, 라스푸틴 또한 벨라의 계획에 필요한 존재였기 때문에, 따로 믿을만한 관리를 찾아 영주대리를 수행하게 했다.

 그리고 아나스타샤와 벨라를 범했던 병사들을 모두 불러, 죄질이 악한 놈들 50명 정도는 본보기로 사형시켜 버리고, 남은 200여 명은 모조리 뱀파이어로 만들어 버렸다. 이는 벨라가 그동안 감염능력의 발휘를 극히 제한하던 원칙을 처음으로 깬 것이다. 이미 에르제베트가 감염능력을 여러 곳에 이용하여 세력을 확장시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녀를 상대하기 위해서라면 이전의 인간적 사고를 바꿔야했다. 또한 후에 변경백으로 돌아갈 아나스타샤의 권위를 다시 세우기 위해서라도 꼭 필요한 과정이었다.

 벨라의 어머니인 마리아는 자신이 속해있던 창관의 마담이 되었다. 다만 그건 겉으로 드러난 모습일 뿐이었다. 그녀의 진정한 신분은 몰다비아 전역의 뒷골목을 빈틈없이 장악한 대모(大母)였다. 몰다비아 지역은 딱히 앞골목과 뒷골목의 구분이 없는 무치안지대였기 때문에, 용병단이나 기사단 같은 개척지의 무력집단을 제외한다면 그녀가 각 지역의 비공식적인 지배자나 다름없었다. 위협이 될만한 세력의 장들은 벨라가 뱀파이어로 만들어 마리아에게 충성을 맹세시켰다.

 벨라는 세바스토폴에 머무르는 며칠 간, 마리아와 깊은 대화를 나누며 조금씩 어색함을 풀어갔다. 처음에 자신의 모친을 어디선가 만난다면 아예 말도 안하고 외면하지 않을까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이미 여러 남자들과 같이 살을 맞댄 탓에 서먹서먹함이 많이 사라졌던 것이다.

 마리아는 벨라의 주변인 중 유일하게 무력적인 능력이 없는 존재였다. 벨라는 그녀에게 적어도 자신의 몸을 보호할 수 있는 기술을 가르쳐 주고 싶어했다. 진지하게 뱀파이어로 만들까 고민도 해보았지만, 일단 보류했다. 의외로 라스푸틴이 그가 지닌 흑마법을 통해 주인의 바람을 실현해 주었는데, 백마법과 달리 흑마법에는 여러 외도(外道)의 술법이 많아, 단기간의 수련이나 남의 노력을 활용하여 인간의 능력을 성장시키는 것이 가능했다.

 라스푸틴은 마리아와 며칠간 성교를 나누며 그녀에게 자신의 기운을 아김없이 불어넣어주고, 실전과 실생활에서 활용 가능한 간단한 기술들을 가르쳐 주었다. 마리아는 벨라 일행이 떠날 무렵에는 이론적으로 2단계의 마법을 쓸 수 있는 마나를 지니게 되었고, 늦깍이 마법사로서 수련에 집중하며 조금씩 성장하고 있었다.

 마리아는 그동안 창녀로서 지내왔던 생활을 결코 좋아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처지를 벗어나고 싶어했다. 딸과 대화하면서 그녀는 자신이 원하던 집시족 특유의 '자유와 방랑'이란 생활 방식이 강력한 무력이 전제되어야지 진정으로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유랑극단에서 세월을 보낸 노인들이 자신의 인생을 후회하며 안전한 곳에 정착하고 싶어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그들이 말년에야 비로소 '공허한 회피'의 부질없음을 깨달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리아가 세운 새로운 조직의 이름은 딸의 건의에 따라 마피아(Mafia)로 정해졌다. 벨라는 자신의 어머니를 단지 조그마한 몰다비아에 가둘 생각은 없었고, 그녀의 능력이 성장함에 따라 마피아 조직을 서서히 동부 전역으로 확장시키려고 계획 중이었다. 멀리 프로방스에서 활약하는 하사신 암살조직, 부르고뉴를 기반으로 서부에서 다국적 기업으로 성장 중인 폰이사벨 그룹과 함께 벨라의 활동을 지원하는 중요한 축으로 만들어갈 생각이었다.

 이별 전 마지막으로 모녀가 만난 자리에서는 미래를 위한 건실한 의논과 대화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부턴가 모녀가 나란히 라스푸틴의 성기 밑에 깔려 펠라티오를 경쟁하는 현장으로 변해 버렸다. 라스푸틴의 대물은 창기 출신 모녀의 애무를 버티지 못한 채, 30초에 가깝게 길게 백탁액을 내뿜었고, 두 여인의 얼굴에 고루고루 분배되어 모두가 만족할 수 있었다고 한다.

 라스푸틴은 자신의 주인인 벨라를 직접 심하게 범하는 것을 조금 부담스러워 한 탓에, 벨라의 어머니인 마리아와 자주 농밀한 관계를 가졌다. 벨라를 따라 떠나기 전까지는 거의 애인처럼 매일 붙어지냈다. 어쩌면 그는 본능적으로 벨라에게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부분을 알아차렸는지도 몰랐다.

 아무튼 몰다비아를 떠나 트란실바니아로 향하는 벨라의 일행은 라스푸틴이 보내는 노예마차 행렬로 가장한 상태다. 에르제베트는 미모를 유지하기 위해 수십년 째 처녀들의 피로 목욕을 해오고 있었는데, 그녀의 영지내에서 더 이상 충당하기 어려워지자 라스푸틴을 통해 몰다비아 지방에서도 이를 들여오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 처녀들을 보낼 시기가 가까워진 터라, 벨라 일행은 사로잡힌 처녀 노예들과 그 수행원으로 변장했다. 여기에 라스푸틴이 동행했는데, 그는 몰다비아에서 일어난 폭동과 소요사태, 야만족의 침입으로 인해 기반의 상당수를 상실했으며, 잠시 몸을 피할 겸 에르제베트에게 지원을 요청한다는 핑계를 생각해 두었다. 100명이 넘는 수행인원 또한 라스푸틴의 부하들이 포함된 것으로 생각한다면 납득할 수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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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게 벨라를 주축으로 한 특수용병단은 제국 동부의 암적 존재를 굴복시키기 위해, 은밀한 여정의 마지막 행로를 시작하였다. 비좁은 가도는 왈라키아와 트란실바니아의 접경지대에 길게 걸쳐져 있었다.

 절벽과 절벽 사이에 놓인 위태로운 다리들을 여러 차례 만났고, 회식뱇 안개 속에서 조심스럽게 이를 건넜다. 마지막에 다리의 귀퉁이 부분이 무너지면서 짐이 실린 마차 하나가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떨어졌지만, 다행히 앞에 타있던 아나스타샤가 마지막 순간에 동물적 감각으로 마부를 잡아채 올리는 바람에 인명피해는 없었다. 하지만 곧이어 다리의 다른 부분까지 붕괴가 연속으로 이어지는 바람에, 다리 위에 남아있던 일행들은 황급히 말을 달려 구사일생으로 건너편의 땅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날 저녁, 일행은 히사랴(Hisarya) 요새에 도착했다. 형태는 낮은 성벽으로 둘러쌓인 군사시설에 가까웠으나, 실은 인근의 주민들이 몬스터나 도적들을 피해 거주하는 마을이었다. 벨라의 일행은 몰다비아 변경백의 깃발을 높이 걸고, 체이텐부르크로 향하는 길에 하루 숙박할 것을 요청했다. 주민들은 외부인을 몹시 경계하는 모양새였으나 이런 경험이 많은 보리스가 나서 이러쿵저러쿵 얘기를 하며 금화와 생필품을 건네니 백명이 넘는 일행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벨라는 외부인들을 피해 각자의 집속으로 흩어지는 주민들을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뱀파이어(Vampire)가 한두 마리가 아니었다.

 그들의 생활은 여느 트란실바니아 백성들과 다름없이 몹시 피폐했으며, 여대공의 괴담에 떨며 기이한 두려움을 지닌듯 보였다. 청력을 최고단계로 확장하여, 촌장으로 보이는 자의 집으로 집중하니 은밀한 대화소리가 생생히 들려온다.

 "저들을 받아들인 게 과연 잘한 일이었을까요?"

 촌장으로 생각했던 이의 염려스러운 목소리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이 굳은 기색으로 대답한다.

 "어차피 주사위는 던져졌다. 이제 우리에게 더 이상 갈 곳은 없어. 여기서 모든 것을 끝내야 한다. 몇 년 동안이나 끈질기게 부활하며 삶을 이어왔지만, 처음에 따르던 혈족은 이 세상에 반조차 남아있지 않고, 남은 이들도 태반이 멀리 도망치거나 배신해 버렸다."

 그의 기세는 상당히 강해 검사로서의 능력만 따지면 이사벨라와도 맞먹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이런 산골마을에 그런 강자가 있다는 것은 상당히 의외였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고단한 삶에 지친듯 피로감과 회의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곳에서 재기하느냐 사멸하느냐를 결정하시자는 말씀이십니까?"

 "그대도 솔직히 부족한 나를 따르며 지치지 않았는가? 아버님께서 돌아오실 날만 기다리며 하루하루 버텨왔지만, 저 악녀의 손길이 왈라키아마저 피로 물들이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안 좋은 일을 당하신 게 분명하다. 평생 가문을 위해 노력하신 분께 자식된 도리조차 못 해드린 게 마음에 걸릴 뿐이군."

 "소신은 동방의 이교도들이 벌판에서 까마득하게 밀려올 때든, 악녀의 하수인들이 산맥 전역에서 포위망을 좁혀올 때든, 추호도 약한 마음을 먹어본 적이 없습니다. 공작님께서는 반드시 살아 계실 겁니다."

 "그대들의 충성은 언제나 고맙기 그지 없는 일이나, 본인은 이곳에서 마지막으로 가문의 불꽃을 불태우기로 결정했다. 인정하기 싫지만 재기는 기적에 가까운 일이고, 배덕한 적은 바로 코앞까지 닥쳐왔다. 이쯤 되니 '어느 곳에 개구멍을 파놓아 구차히 살아남을까'보다는 '어떻게 하면 불꽃처럼 화려하게 삶을 끝낼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되더군."

 "주공의 뜻이 그러하다면 따르겠나이다. 허나 결코 미리 앞서 모든 것을 포기하진 마십시오. 오늘 받아들인 몰다비아 촌놈들도 만만치 않은 전사들로 구성되어 있더군요. 밤중에 기습을 받게 된다면 저들도 허겁지겁 일어나서 적을 상대할 것이고, 그 사이에 일족의 권토중래를 도모할 기회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대의 말은 일견 옳아보인다. 허나 남쪽은 이미 마녀가 장악한지 오래되어, 그쪽으로 도망치신 형님은 온몸이 포가 떠져 시체조차 남기지 못하셨고, 서쪽은 마녀의 본가인 헝가리 왕국인데다, 동쪽에서 온 몰다비아인들은 마녀의 수하를 자청하며, 북쪽에는 마녀의 본성이 있도다. 우리의 앞길에는 최후의 결전만이 강제되어버린 것이다."

 여기까지 들으면서 벨라는 대충 마을 사람들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들이 말하는 악녀 혹은 마녀는 트란실바니아의 여대공인 에르제베트 폰 바토리를 말하는 게 분명했다.

 존대를 받는 사내의 아버지는 공작의 직위를 가졌다고 하는데, 이 근방에서 공작이라 불릴 사람은 왈라키아공국의 지배자였던 가시공작 블라드 체페슈 뿐이다. 그는 물론3년 전 벨라에게 잡아먹혀 소멸한지 오래였으므로, 자식에게 돌아갈 수 있을리가 없었다.

 미루어 짐작해 볼 때, 에르제베트는 블라드 공작의 사후 트란실바니아와 왈라키아를 장악하고, 공작의 혈족들을 하나하나 쳐내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리고 몇 년 간 이루어진 그 작업이 마무리되기 직전, 벨라의 일행이 잔존세력의 본거지에 들어온 것이다.

 원래 마을에 거주하던 이들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지만, 이곳에 있는 이들은 블라드의 직계가 이끌고 있는 뱀파이어들이었다.

 '이거, 에르제베트를 기습하기도 전에 그녀의 정예군과 맞닥뜨리게 생겼군.'

 물론 소드마스터가 두 명, 익스퍼트 최상급이 세 명이나 있고, 익스퍼트 상급은 더욱 많은데다가, 7단계 마법사가 두 명이고, 그중 한 명은 대신관이기까지 한 벨라의 일행이 싸움에서 질 리는 없었다. 참고로 이 수치는 특수용병단의 다른 고용인들까지 포함해서 말한 것이다.

 하지만 동쪽으로 돌아서 온 보람도 없이 에르제베트의 가시권에 들어오자마자 그녀의 눈에 포착된다는 것은 좋지 않은 일이었다. 계획의 무사성공을 위해서는 물샐틈없는 대비책이 필요했다.

 '나중을 기약했는데, 지금부터 바로 써먹어야겠군. 달이 뜰 무렵, 적들은 한명도 빠짐없이 지옥을 맛보게 될 것이다.'

 그날 밤, 자정이 가까워질 무렵이었다.

 히사랴 요새를 둘러싼 거대한 삼림지대에서 조금씩 조금씩 수상한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 감춰진 풀들이 들썩거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림자들이 빠른 속도로 나타났다가 다시 사라진다.

 보름달이 가득 떠있는 성벽 위에 한 중년사내가 서있었다.

 왈라키아 공국의 정당한 후계자인 아브라함 반-헬싱 폰 트란실바녜 공자는 삼림 속에서 우글우글 기어나오는 증오스러운 적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적들은 이미 그의 시선을 알아차린듯 공격진형을 갖춘 채 태연히 요새 앞에 늘어선다. 적의 선두에는 번뜩이는 철색 갑옷을 입은 거한이 서있었는데, 구름이 흘러가면서 환한 보름달이 그의 얼굴에 비추었다.

 보통 인간이 그의 모습을 목격했다면 숨이 멎을 정도로 놀라서 도망칠 것이고, 노약자는 심장마비로 죽어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살색보다는 녹색 피부에 가까운 얼굴은 헝겊으로 기운듯 이곳저곳이 삐죽빼죽 튀어나와 있었고, 보통 인간의 세 배 가까이 크고 길었다. 눈알은 마치 인형의 눈처럼 기묘하게 생겨 빙글빙글 돌아가고 세 주먹이나 나온 턱과 이마는 얼굴 형태를 네모낳게 만들고 있었다.

 마치 흑마법을 이용해 시체들을 합성해서 만든 키메라와 같았다.

 "사모기티아(Samogitia)의 백작, 빅터 프랭클 폰 크리처 프랑켄슈타인 경이군."

 "과히 존중하셨습니다. 공자님. 저자는 우리 형제들을 질리도록 참살했던 괴물입니다."

 뒤에서 나타난 수하의 말에 아브라함이 고개를 흔든다.

 "나 또한 프랑켄슈타인을 죽이고 싶을만큼 미워한다네. 다만 그 또한 마녀의 희생물이란 생각이 들었을 뿐이지. 더한 괴물의 구속에 자신의 의지도, 삶도 박탈당한 채 오직 전장만 돌아다녀야 하는 벌레 같은 신세가 아닌가?"

 수하가 그저 말없이 고개를 숙이자, 아브라함이 문득 생각났다는듯 묻는다.

 "그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수하는 잠시 '그들'이 누구를 지칭하는지 생각하다가, 이내 떠올리고 대답한다.

 "그들 또한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는지 우리들을 경계하면서 대부분이 깨어있는 상태입니다. 제가 올때에는 한 군데에 모여서 무언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고개를 끄덕였다.

 "싸움이 시작되면 그들 또한 방관할 수 없을 것이다. 대충 말은 해두었나?"

 엉뚱한 여행객들이 비명횡사하는 일이지만 아브라함이나 그의 수하나 그리 동정하는 모양새는 아니었다. 자신들의 코가 석자인 상황이다.

 "예, 그쪽에서 물어보길래 대충 언질을 주었습니다만, 반응이 신통치는 않더군요. 몰다비아에서 온 사절인만큼 자기들은 무사히 놓아둘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물론 그럴 수도 있었지만, 아브라함이 지금까지 봐온 마녀와 마녀의 수하들은 결코 그렇게 도리를 아는 이들이 아니었다. 적이라고 생각되는 게 발견되면 일고의 망설임도 없이 들이쳐 주변까지 박살을 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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