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8화 (48/49)

 "뭐, 인생은 스스로의 것이니 알아서들 잘 하겠지."

 아브라함은 몇 마디 더 얼버무리다가 마침내 적군이 성벽 근처까지 다가온 것을 확인했다. 히사랴의 성벽은 그리 높은 편이 아니었다. 뱀파이어들이 초인적인 능력으로 점프해서 조금만 기어오른다면 금방 뚫릴만한 높이였다.

 "드디어 여기까지 왔구나…. 이제 최후의 싸움이 벌어질 것이다. 조금 후면 모두들 후회없이 이 저주받은 삶을 끝낼 수 있도록 철저히 준비하라."

 아브라함은 무거운 눈빛으로 전방을 바라보다 하명하였다. 수하들이 제각기 적절한 위치를 찾아 빠르게 움직인다. 이곳저곳에서 검과 창이 뽑히는 소리들이 들려온다.

 끝이 안 보이도록 펼쳐진 대삼림 위로 둥근 보름달이 환하게 요새를 비춘다.

 그로부터 채 십분도 지나지 않은 자정 12시, 요새에는 아비규환의 참상이 펼쳐져 있었다. 피폐하나 평화로웠던 마을은 흡혈귀들이 벌이는 최후의 전쟁 속에서 피에 물들고 있었다.

 벨라의 일행은 마을의 가장 깊숙한 곳에 숨듯이 머물러 있었는데, 공격하는 쪽이나 방어하는 쪽이나 모두 그녀들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각자 살육을 벌이기에 바빠, 그녀들이 있는 안쪽까지는 전투가 확장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전사들은 새빨간 눈동자를 빛내며, 인간을 초월한 신체능력으로 달리고, 뛰고, 깨물고, 빨아먹고, 깨부수는 행위를 반복했다. 하지만 벨라의 일행에서 이 광경을 보고 놀라는 이들은 한 명도 없었다.

 "아나스타샤. 준비 됐어?"

 "응. 다들 신호만 떨어지면 돌격할 수 있게 준비하고 있어."

 대답하는 늑대 소녀의 얼굴에 흉폭한 기운이 감돌았다.

 전혀흉폭하지않아.jpg (귀만 나오면 생긴 건 비슷합니다)

 벨라는 만족한듯 고개를 끄덕거리며 일행들의 무장을 점검했다. 일단 이 특수용병단의 공식적인 대장은 프리드리히 대공이었기에 그를 통해 모두에게 작전을 지시해놓은 상태였다.

 작전이래봤자 간단했다. 적이 모두들 지쳤을 때쯤, 또는 균형이 한쪽으로 심하게 기울어갈 때쯤, 유리한 쪽에 생각치도 못한 기습공격을 가하는 것이다.

 전투는 치열하게 전개되었지만, 삼십분 정도의 시간이 흐르자 한쪽의 우세가 확연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예상대로 요새를 침략해온 바토리의 군세가 이제 압도적으로 아브라함의 부하들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소드익스퍼트 최상급의 검사인 아브라함이 검기와 검강을 줄기줄기 뽑아내며 분전했지만 그 또한 한계에 달한듯 보였다.

 아브라함조차 점점 밀리며 마을의 안쪽까지 후퇴하였고, 마침내 벨라의 일행이 웅크리고 있는 곳 바로 앞에서 무기가 부딪히는 소리와 비명소리가 들려온다.

 적을 쫓아 안쪽까지 들어온 흡혈귀들은 몰다비아의 깃발을 세우고 전투금지의사를 내비치는 하얀색 손수건을 내걸고 있는 벨라의 일행을 발견했다. 하지만 그들은 잔인한 미소를 드러내며 송곳니를 치켜 세우고 그대로 일행을 향해 돌격해 온다.

 "캬아아아아-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괴성을 지르며 달려 들었던 흡혈귀 하나가 빅토리아가 펼쳐 낸 깔끔한 남색 검강(劍?)에 의해 전신이 가루처럼 흩어지며 재가 되어 버렸다.

 -!!!!!!!!!!!

 "호호, 저하. 쟤네들이 감히 우리를 선제공격한 거 맞죠?"

 벨라의 교소어린 질문에 프리드리히의 고개가 끄덕여지고, 용병들의 눈빛이 매섭게 변한다.

 뒤이어 달려들던 흡혈귀들은 마치 준비한듯 펼쳐지는 고단계 마법과 고위급 신성력의 파도에 차례차례 휩쓸리기 시작했다.

 "글루미 홀 퓨리피케이션(Gloomy Whole Purification)."

 라스푸틴의 오브에서 어두운 박쥐 형상의 기운이 솟아나, 시릴듯 새파란 날개를 두른 채 흡혈귀에게 달려들었고, 이내 그의 신체를 조각조각 물어뜯어 분해시켜 버린다.

 체사레나의 보검에서는 하얀 색 신성력이 우유가 통째로 쏟아지듯 콸콸 새어 나오며 반경 5m를 환하게 밝힌다.

 "어둠을 정화하는 새벽의 수호성이여, 예루살렘에 비친 고결한 빛의 후신이여, 주 알타리엘의 가호가 이 자리에 펼쳐지나니, 브레이킹 던(Breaking Dawn)!"

 체사레나의 성검으로부터 신성한 새벽을 구성하는 얇은 빛줄기가 길게 솟아나며 밤 하늘 위로 쭉 이어진다. 마치 밤구름 너머 하늘 끝까지 닿을듯한 빛줄기는 이내 엄청난 압력으로 들어차 수평으로 투명한 부채꼴을 그리며 내려꽂혔다.

 -콰콰콰과과과과과광!

 달려들던 흡혈귀들은 마치 화염불을 향해 달려든 하루살이들이 녹아버리듯이 회색 재조차 남기지 못한채 소멸했다.

 순식간에 일어난 기사(奇事)에 멀찍이 떨어져 있던 프랑켄슈타인과 아브라함조차 모두 고개를 돌려 경악한 눈으로 이쪽의 전장을 쳐다 보았다.

 "당신들이 누굴 건드렸는지 똑똑히 알려주겠다. 자, 아나스타샤."

 벨라는 붉어진 눈동자를 살짝 뜨고 차가운 눈으로 전장을 응시하며 아나스타샤에게 지시한다. 고개를 끄덕인 웨어울프 소녀는 목을 뒤로 젖힌 채 허공에 강력한 울부짖음을 내뱉었다.

 "아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울!"

 아나스타샤의 몸이 고결한 은빛 털들로 뒤덥혔다. 완전한 늑대의 형상은 아니었지만 이제 그녀의 정체를 깨닫지 못한 이들은 없었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히사랴 요새의 밖에서 똑같은 종류의 울음소리가 더욱 크게 들려온다.

 "아오오오오오오!"

 "우오오오오오오오오오!"

 "꺄우우우우우우울!"

 하나씩 들려오던 울음소리는 순식간에 수십 개의 소리들이 중첩되며 요새를 뒤흔들 정도의 거대한 괴성으로 번져갔다.

 뱀파이어들이 생전 처음 겪는 일에 당황해 하는 순간 닫혀있던 성문이 통째로 뜯겨져 넘어뜨려지는 소리가 들려오며 성안의 지반이 쿵쿵 울리기 시작한다.

 반대쪽을 바라본 흡혈귀들은 감염된 이후 정말 오랜만에 느끼는 공포에 휩싸였다.

 웨어울프, 혹은 라이칸스로프라고도 불리는 거대한 늑대인간들의 무리가 요새를 덮친 것이다.

 밀려오는 늑대군단들은 밤하늘에 뜬 보름달을 머금은듯 황금빛 기운에 휩싸여 있었다. 마나인지 정령인지 혹은 신성력인지 알 수 없는 기묘한 황금빛 기가 그들의 몸에 빨려 흡수되어간다. 그럴수록 웨어울프들의 속도는 더욱 빨라지고 눈빛은 흉폭해졌다.

 약 십분 후, 히사랴 요새의 전세는 완전히 뒤바뀌어 있었다.

 바토리의 군세든 아브라함의 군세든 벨라 일행과 웨어울프 군단의 합격에 의해 너나할 것 없이 피를 튀기며 쓰러지거나 꽁꽁 제압되어 갔다.

 벨라는 전장을 감시하는 마법적 주시나 숨겨진 적들이 없음을 모두 파악하고 난 뒤, 숨겨두었던 능력을 서서히 가동하기 시작했다. 들키지 않고 능력을 사용하기 좋게, 딱 적당한 수의 적들이 남아있었다.

 주변에서 거세게 저항하던 뱀파이어들이 하나둘 묘한 눈빛을 띠더니 무릎을 꿇고 항복 의사를 표시하거나 혹은 검을 거꾸로 들었다. 개중에 진심으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한 이들은 한 명도 없었다. 자신들의 몸과 마음이 역전되어가는 것에 당황에 찬 눈빛을 보낸다. 하지만 시간이 점점 지날수록 그들의 눈빛도 진심으로 변해갔고, 이전의 모든 과거와 단절된 채 새로운 주인을 향한 충성심에 가득 차게 되었다.

 오직 남은 이들은 한쪽에서 사생결단의 결투를 지속하던 아브라함과 프랑켄슈타인, 그리고 그들을 보조하던 부하들 두어 명 뿐이었다.

 이상함을 먼저 느낀 것은 아브라함 쪽이었다.

 언제부턴가 주변의 전장을 가득체웠던 칼소리와 비명소리가 사라지고 고요한 정적만이 흐르기 시작한 것이다.

 눈앞에서 강철로 된 팔로 괴력이 담긴 공격을 해오는 프랑켄슈타인을 피해, 흡혈귀의 능력을 이용해 빠르게 뒤로 물러서 전장을 돌아본다.

 어느덧 혈투는 끝나고 자신들이 있는 곳에만 거친 싸움이 이어지고 있었다.

 혹시 자신의 부하들이 모조리 전멸당한 것인가? 그것은 아니었다. 얼마 전까지 충성스러운 눈빛을 보내던 부하들 수십 명이 무감정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렇다면 배신인가? 무언가 이상했다. 어젯 밤까지만 해도 죽음을 앞두고 같이 뜨거운 눈물을 흘리던 부하들이 한두명도 아니고 동시에 모조리 배신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한번 물린 흡혈귀는 두번 물렸다고 해서 결코 주인을 바꾸지 않았다. 악녀가 무언가 이상한 수단을 개발해 그것을 가능케 한 것일까? 의아한 눈으로 좌중을 둘러보다가, 몰다비아에서 온 노예수송단 일행을 발견했다. 놀랍게도 그들은 방금까지 흡혈귀를 짓이기던 늑대인간들의 엄호를 받고 있었다.

 -??!!!!!!

 그들 중 한 매혹적인 적발의 미녀를 향해 한때 자신의 부하들이었던 자들이 충심어린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그녀의 붉은 눈동자가 또렷이 들어온다.

 에르제베트 바토리만큼 몹시 매혹적인 외모였으나 그녀와는 달랐다. 무언가 알수없는 공포감이 느껴지는 것도 똑같았지만 공포감의 레벨 자체가 달랐다.

 "이건……… 당신은 누구지?"

 프랑켄슈타인도 비로소 주위가 이상한 걸 파악했는지 흉성을 억누르며 사방을 둘러본다.

 "크흐흐흐흐. 이 개떡같은 상황은 뭐냐?"

 이사벨라는 위험한 미소를 지으며 한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녀의 선택은 프랑켄슈타인 쪽이었다. 그는 흡혈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프랑켄슈타인은 의문을 잠시 접고 어찌 됐든 그녀를 상대하기 위해 거대한 몸체를 쿵쿵대며 달려왔다. 괴물의 흉악한 표정이 크게 일그러지면서 강철로 된 팔이 벨라가 있던 자리를 후려친다.

 "쉐도우 이클립스 댄스(Shadow Eclipse Dance)."

 하지만 벨라의 신형은 팔이 스쳐간 약 1cm 옆으로 옮겨가 있었고, 괴물은 곧바로 팔을 뒤로 돌려 그녀를 타격했지만 빠르게 스쳐가는 그녀의 그림자만 쳐버렸을 뿐이다. 벨라의 신형이 번쩍 번쩍 빛나며 괴물의 팔과 다리가 휘둘러지는 중간에서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한다.

 "너 같은 귀여운 덩치를 상대로 싸울 때 아주 유용한 능력이지."

 "크흐흐흐흐흐! 맹랑한 년이군. 죽여서 머리통을 들고가 박제해주마!"

 이토록 괴기스러운 얼굴이 어딜봐서 귀엽다는지 모르겠지만… 프랑켄슈타인의 얼굴이 빨개지며 벨라에게 온 신경을 집중한 채 전력을 다해 팔과 다리를 휘두르기 시작한다.

 벨라는 눈을 찡긋하며 귀여운 미소를 지었다.

 "아잉, 머리통을 박제하는 건 너무 심한 것 같고… 침대 위에서 정신없이 키메라의 대물을 박아주는 플레이라면 환영이라고."

 어이없는 말에 프랑켄슈타인의 얼굴이 멍해지는데, 뒤에서 암갈색으로 휘날리는 토네이도 폭풍이 급작스럽게 생성되어 눈깜짝할 사이에 그의 뒤를 급습했다. 5단계 마법인 '타르타로스 트위스트(Tartaros Twist)'가 시전된 것이다. 벨라의 깜찍한 윙크는 라스푸틴에게 보낸 신호이기도 했다.

 -퍼어어어억

 "크흐아아아아그아아아악!"

 머리부터 발끝까지 뒤쪽으로부터 엄청난 충격이 들어와, 몸을 웅크린 채 밀려나는데, 정면에 서있던 여인의 붉은 색 장검이 달빛을 받아 황색과 적색의 오러를 뿜어내며 빛나는 모습이 들어온다. 한눈에 봐도 강력한 힘이 담긴 오러가 마치 초승달처럼 휘어지며 정면으로 퍼져 나간다.

 "끄웨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엑!"

 얼마나 강력한 일격이었는지 프랑켄슈타인은 끊이지 않고 괴성을 내질렀다. 벨라는 그의 거대한 몸에 취에 올라타 머리부터 발끝까지 이곳저곳을 몽둥이찜질하듯이 검면으로 팼다. 그때마다 엄청난 타격음과 함께 꽥꽥 거리는 비명소리가 울려퍼졌고, 결국 괴물은 30초만에 기절해 버렸다.

 "이른바 퍽치기 완료."

 벨라는 천진난만한 미소로 붉은빛 머리를 쓸어올리며 땀방울을 닦았다.

 뒤쪽에서 강렬하게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돌리자, 아브라함이 놀라움 반 두려움 반이 섞인 표정을 지은채 기묘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프리드리히에게 눈짓을 보내자, 다른 용병들과 새로 얻은 흡혈귀, 늑대인간들을 이끌고 잠시 머물 곳을 정리하자며 사라진다. 뱀파이어인 아나스타샤와 라스푸틴만이 벨라의 곁에 남아있었다.

 벨라가 붉은 눈을 뜬 채 아브라함을 가만히 응시하자, 그가 머뭇거리다 더듬더듬 묻는다.

 "대체 그대는, 그대는 누구인가? 어떻게 그, 그 기술을………."

 벨라가 프랑켄슈타인에게 최초로 먹였던 강력한 일격은 그에게 너무나 익숙한 것이었다. 왈라키아를 수십년간 공포와 영광으로 통치한 그의 아버지, 블라드 체페슈 공작의 비전기술인 '문라이트 크래쉬(Moonlight Crash, 月光斬)'였기 때문이다. 자신은 배우지 못했고, 돌아가신 형님도 단순한 흉내 밖에 낼 수 없었던 기술이다.

 아브라함의 동공은 그것을 목격한 순간부터 거세게 흔들리고 있었다. 죽어있다고 여긴 심장도 이상하게 빠르게 뛰고 있었다.

 "삶을 포기한 것이 아니었나? 왈라키아의 마지막 후계자, 아브라함 반헬싱 폰 트란실바녜여?"

 벨라는 자신이 지체높은 직계의 귀공자에게 이런 발칙한 질문을 던지게 될 날이 올줄이야 상상도 하지 못했다.

 별안간 그녀의 눈빛에서 붉은 안광이 솟아오름과 동시에, 아브라함의 오른쪽 팔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정면을 향해 수평으로 뻗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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